일본을 통한 천주교 접촉

 

일본을 통한 천주교 접촉


2.1.1 유럽의 새로운 대륙 탐험 


  13~14세기에 이딸리아의 도시국가인 제노아와 베네치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럽의 제해권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스페인)에 넘어갔다. 포르투갈은 동양과 무역을 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인들이 동양 무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금과 은 등의 귀금속과 향료를 동양, 특히 인도에서 구하려는 욕구에 있었다. 당시의 유럽은 도시의 성장과 함께 상업의 발달로 금융 거래가 활발해져 화폐의 재료인 금과 은의 유럽 매장량이 줄어들어 밖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냉동시설이 아직 구비되지 않은 시대에 고기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향료는 매우 필요하였다.


  서구인들은 유럽 밖에 있는 세상을 귀금속과 향료가 풍부하고 신비로운 땅으로 상상하여 호기심에서 동양을 탐험하려는 모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회교 국가인 오트만 터어키 제국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두 대륙의 육로를 가로막고 있어 무역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궁리 끝에 그들은 해로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인들은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인도를 향해 해상 여행을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은 1485년에 아프리카 서부 해안 지방을 탐험하였고 1487년에는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까지의 항로를 개척하였다. 10년 후 바스코 다 가마라는 항해사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서부 연안 지방에 도착함으로써 인도의 항로를 개통하였다. 그리고 1519년에 마젤란은 3년 동안에 걸친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1542년에는 포르투갈의 무역선이 일본에 도착하였다.


  유럽인들의 세계 탐험은 물질적 욕구의 압력으로 직접 동양과 통상을 맺으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하였지만, 여기에는 이교도의 개종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사명감에서 나온 종교적 열망도 무시할 수 없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가톨릭 교세는 유럽에서 지역적으로나 숫자적으로 감소되어 내부쇄신 운동의 전환으로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세계 선교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탐험대의 배에 선교 수도자들이 동승하였다.



2.1.2 일본의 천주교 전래 


  포르투갈의 배가 일본에 도착한 지 7년만에 예수회원인 프란치스꼬 사베리오(1662년에 성인품에 오름) 신부가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베리오는 1542년에 선교사, 포르투갈의 대사, 교황사절로서 인도에 도착하여 고아와 남서부 해안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1548년에 야지로(또는 한지로)라는 일본 사람을 만났다. 그는 야지로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 선교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549년에 야지로가 고아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바오로 사도를 주보로 세례를 받은 후에 사베리오는 8월 15일, 2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인도를 떠나 야지로의 안내로 구슈지방의 가고시마(야지로의 고향)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일본은 정치적 지배 체제가 천황, 장군, 대명(다이묘)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처노항은 권한이 없는 이름뿐인 국가 원수였고 2백50여 명의 지방 영주인 대명들이 서로 권력 투쟁을 하는 혼란한 시대였다. 여기서 사베리오는 정치적 배경과 사회적 환경을 잘 파악하고 성공적인 선교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천황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선교의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과 일반 대중에 대한 직접 선교도 일본의 그리스도교화에 있어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베리오는 항구적 성공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 지방의 대명들을 설득하여 선교활동의 보장을 얻어내는 한편,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본에서는 서민적 태도의 선교는 효과를 거둘 수 없고 대명들의 개종이 일본의 복음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하여 그 자신이 대명의 복장을 하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사베리오가 1551년 중국에 선교를 하기 위해 일본을 떠난 후, 그의 적응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다. 예수회원들은 교리가 허용하는 모든 범위 안에서 일본의 관습에 적응하면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결과로 1563년부터 대명들이 세례로 많은 부하들이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제 일본 교회는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1582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1587년에 선교사의 추방령을 내렸다. 교회는 혼란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다행히 예수회원들의 외교적 수완으로 선교사들은 추방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1596년 풍신수길은 제2차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고, 1597년 2월에는 나가사끼에서 26명이 순교를 하였다. 1598년, 풍신수길이 사망한 후에 집권한 덕천가강이 교회를 가혹하게 박해하여 1622년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치명하였고(1867년 7월 7일에 2백5명이 복자가 됨), 일본의 천주교는 1850년경까지 잠복기에 들어갔다.


2.1.3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입국


  풍신수길은 전국 통일을 완수한 후에 일본의 해외 진출의 야망을 품고 전국시대에 크게 성장한 제후, 특히 천주교 대명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국내에서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우선 그는 조선 왕국에 외교 관계를 맺자고 제의하면서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일본군이 한반도를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풍신수길은 우선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1592년 4월 13일, 조선에 침입해 왔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왜군의 선발대인 소서행장이 이끄는 병력이 4월 14일에 부산을 공략하여 점령한 후에 계속 상륙하는 일본군의 후속 부대는 5월 2일에 한성(서울)을 함락하고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명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명의 군대가 평양의 왜군을 격퇴하고 서울 근교까지 추격하였으나 실패하고 1593년 1월에 다시 평양으로 물러간 뒤에 일본군의 요청으로 강화 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담이 결열되어 1597년,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침공을 꾀하였으나(정유왜란) 풍신수길이 다음 해에 사망하여 일본군은 철수하고, 7년간의 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런데 이런 일본 침공군의 장군들과 군인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천주교 신도였다. 특히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소서행장은 천주교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앙양하는 동시에 성사를 집행하면서 풍기문란을 예방 또는 교정하기 위해서 일본 예수회 장상에게 군종신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1593년 12월 말에 예수회 일본관구에서는 1577년에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에 종사하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수사를 파견하였다.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은 대마도를 거쳐 12월 27일 조선에 상륙하여 소서행장의 진영이 있던 곰개성(지금의 진해시 웅천동의 남산성)에 도착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군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제 한 가지 문제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의 토착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점이다. 만약 이 군종신부가 조선인에게 선교를 하였다면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 군인뿐 아니라 조선 백성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입교하였으며, 그리스도교 대명들이 죽기 직전의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인들에게 선교하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인은 전략상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침공군이 점령한 성들의 주위를 완전히 파괴하고 공터화하여 세스페데스 신부는 주민들을 접촉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정복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 군종신부는 주민들에게 말을 건넬 수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4 조선인 피납자들의 입교와 순교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을 통해서 조선의 많은 민간인들이 일본에 납치당하였다. 당시 왜군은 노예 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납치를 자행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의 피납자들은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서 멀리 필리핀, 인도지나에까지 팔려갔다. 그러나 기술자들은 보호와 대우를 받아 후에 일본의 공예와 요업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천주교 신도의 집으로 들어갔거나 예수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영세,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일본의 예수회원들은 조선 민간인에 대한 노예 매매에 종사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을 힐책하는 동시에 직접 조선인 피납자에 대한 구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그들은 나가사끼에 이송되어 온 조선인들을 예수회가 운영하는 건물에 수용하여 포르투갈의 악덕 상인들과 일본인 중매업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인의 천주교 가정에 들어갔거나 예수회원의 구제를 받아 영세한 조선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일본 천주교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그중에서 12명이 1867년 7월 7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복자위에 오른 2백5명의 일본 순교 복자 중에 있다. 일본의 천주교회사가 언급하는 조선인은 12명의 복자 이외에 9명의 순교자들과 3명의 증거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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