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

 

천주교의 조선 선교 계획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일본과 중국(명, 청)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천주교는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가 선교사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왕국에 전교할 계획을 세우고 입국을 시도하였다.



4.1 일본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


4.1.1 가스파르 빌렐라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인 가스파르 빌렐라 신부는 1556년에 일본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14년 동안 규슈(九州 지방과 교오또(京都)에서 전교하던 중 1567년에 조선 왕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그가 일본에서 포르투갈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나타난다. ꡒ일본에서 배를 타고 3일 동안 가면 ‘코라이’라는 나라가 있읍니다. 나는 4년 전에 이 나라에 가려고 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 길이 막혀 입국하지 못하였읍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이 아직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ꡓ(1571년 2월 4일, 1571년 10월 6일의 편지). 그는 후에 나가사끼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일본을 떠나 인도의 고아로 갔다.



4.1.2 도밍고 환


  에스파니아(스페인)는 마젤란이 1521년에 필리핀 군도를 발견한 이후에 이 군도를 동양의 무역과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 점령하고, 마닐라를 수도로 정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였다.


이러서 신설된 마닐라 교구의 교구장으로 에스파티아계 도미니꼬 수도회의 도밍고 살라자르가 임명되면서 필리핀에 천주교가 진출하였다. 이 수도회는 1602년에 일본에 진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에도 복음을 전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611년에 도미니꼬 수도회는 에스파니아의 카스틸랴 태생인 도밍고 환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환 신부는 1601년 이후로 필리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다가 수도회 장상의 명령을 받고 두 동료 수사와 함께 마닐라를 떠나 한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쇄국 조선의 해금 정책으로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하여 뒤돌아 가야만 했다. 그는 두 수사만을 마닐라로 보내고 자신은 일본의 나가사끼에서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납치된 고스마 다께야(竹谷)라는 조선인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1619년에 고스마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도미니꼬 수도회의 조선 진출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3 권 빈첸시오


권 가피오이에 빈첸시오는 조선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에 13세 소년으로 일본군에게 잡혀 왜장 소서행장(소서행장) 아우구스띠노의 사위인 소 요시도시(宗義智) 쓰시마(對馬島) 도주를 통해서 그의 아내인 고니시(小西) 마리아에게 보내졌다. 이 조선인 소년은 쓰시마에서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 1592년에 세례를 받았다. 후에 예수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예수회원이 된 그는 조선인 피납자는 물론 일본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다.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선교사 추방령이 선포되었을 때에, 일본의 예수회 본부가 다른 선교지역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 전교에 관심을 갖도록 추구하였다. 마침내 1614년에 예수회 일본 관구장은 조선 진출을 계획하고 선교사로서 권 빈첸시오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최초의 조선인 예수회원은 우선 해로를 통해서 그의 고국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두 차례에 걸친 왜란 이후로 조선의 해안 경계가 삼엄하여 되돌아가야 했다.


  이어 그는 육로를 통해서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6년 동안 입국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선 왕국의 국경 감시가 역시 엄중하였고, 더욱이 중국 대륙에서 명(명)과 여진족의 후금(후금)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조선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그는 조선의 복음화 선교 계획이 실현될 가망이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1620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성직자들을 도와 선교활동을수행하던 그는 1625년에 체포되어 다음해 6월 20일에 나가사끼에서 순교하였다(1867년 복자위에 오름).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일본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천주교의 조선 선교 계획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일본과 중국(명, 청)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천주교는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가 선교사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왕국에 전교할 계획을 세우고 입국을 시도하였다.

    4.1 일본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

    4.1.1 가스파르 빌렐라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인 가스파르 빌렐라 신부는 1556년에 일본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14년 동안 규슈(九州 지방과 교오또(京都)에서 전교하던 중 1567년에 조선 왕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그가 일본에서 포르투갈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나타난다. ꡒ일본에서 배를 타고 3일 동안 가면 ‘코라이’라는 나라가 있읍니다. 나는 4년 전에 이 나라에 가려고 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 길이 막혀 입국하지 못하였읍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이 아직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ꡓ(1571년 2월 4일, 1571년 10월 6일의 편지). 그는 후에 나가사끼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일본을 떠나 인도의 고아로 갔다.

    4.1.2 도밍고 환

      에스파니아(스페인)는 마젤란이 1521년에 필리핀 군도를 발견한 이후에 이 군도를 동양의 무역과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 점령하고, 마닐라를 수도로 정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였다.

    이러서 신설된 마닐라 교구의 교구장으로 에스파티아계 도미니꼬 수도회의 도밍고 살라자르가 임명되면서 필리핀에 천주교가 진출하였다. 이 수도회는 1602년에 일본에 진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에도 복음을 전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611년에 도미니꼬 수도회는 에스파니아의 카스틸랴 태생인 도밍고 환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환 신부는 1601년 이후로 필리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다가 수도회 장상의 명령을 받고 두 동료 수사와 함께 마닐라를 떠나 한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쇄국 조선의 해금 정책으로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하여 뒤돌아 가야만 했다. 그는 두 수사만을 마닐라로 보내고 자신은 일본의 나가사끼에서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납치된 고스마 다께야(竹谷)라는 조선인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1619년에 고스마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도미니꼬 수도회의 조선 진출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3 권 빈첸시오

    권 가피오이에 빈첸시오는 조선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에 13세 소년으로 일본군에게 잡혀 왜장 소서행장(소서행장) 아우구스띠노의 사위인 소 요시도시(宗義智) 쓰시마(對馬島) 도주를 통해서 그의 아내인 고니시(小西) 마리아에게 보내졌다. 이 조선인 소년은 쓰시마에서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 1592년에 세례를 받았다. 후에 예수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예수회원이 된 그는 조선인 피납자는 물론 일본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다.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선교사 추방령이 선포되었을 때에, 일본의 예수회 본부가 다른 선교지역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 전교에 관심을 갖도록 추구하였다. 마침내 1614년에 예수회 일본 관구장은 조선 진출을 계획하고 선교사로서 권 빈첸시오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최초의 조선인 예수회원은 우선 해로를 통해서 그의 고국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두 차례에 걸친 왜란 이후로 조선의 해안 경계가 삼엄하여 되돌아가야 했다.

      이어 그는 육로를 통해서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6년 동안 입국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선 왕국의 국경 감시가 역시 엄중하였고, 더욱이 중국 대륙에서 명(명)과 여진족의 후금(후금)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조선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그는 조선의 복음화 선교 계획이 실현될 가망이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1620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성직자들을 도와 선교활동을수행하던 그는 1625년에 체포되어 다음해 6월 20일에 나가사끼에서 순교하였다(1867년 복자위에 오름).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