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
4.2.1 서 광계
15세기 중엽부터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여진족은 누르하지(1559-1626)가 등장하면서 후금(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명(명)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제적 기반이 약한 후금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서 요동 평야가 필요했다. 1618년에 누르하치는 요동 반도를 침공하였다. 명은 침략자를 격퇴시키기 위해서 10만 대군을 동원하였고 조선 왕국에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두 국가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은 명이 임진왜란 때에 원군을 보내준 것을 생각하여 1만3천여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1619년, 연합군은 후금의 군대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패전한 지 1년이 되는 1620년에 명의 고관이던 서 광계는 조선군의 전사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한 군대 출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대관을 사절로 파견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면서 자신이 사절로 갈 것을 자원하였다.
서 광계가 자원한 이유에는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 신부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경건한 천주교 신자였다. 결국 조정의 승인을 받은 서 광계는 조선 선교에 사용할 교리서를 인쇄하도록 조처를 취하였고, 예수회원인 프란치스꼬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 외교적 임무를 이행하는 동안에, 삼비아시 신부가 국왕을 상대로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여 세례를 주면 모든 백성이 국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 광계의 조선 선교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중대한 난국에 서 광계와 같은 유능한 인물이 국외로 나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조선 파견 전권 대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4.2.2 아담 샬
1623년에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가 국왕에 즉위한 후에 조선 왕국은 명과 후금(1636년에 청으로 개칭)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바꿔 후금을 배척하고 친명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로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청의 침공을 받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승전한 청의 요구 중에는 두 명의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인질로 내놓으라는 사항도 있었다. 청군에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서 지내다가 1644년,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길 때에 이곳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요한네스 아담 샬 폰 벨 예수회 신부를 만나 그가 귀국할 때(1644년 11월 26일)까지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면서 친교를 맺고 지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귀국할 때에 아담 샬 신부는 조선의 왕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보냈다. 세자는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표명하면서 받은 선물 중에서 천주교 성물인 성화상은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못한 조선인에게 의해 모독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며 예의상 사양하였다.
아담 샬 신부는 세자에게 귀국할 때에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가서 조선에서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는 이에게 선교하도록 선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현세자 역시 쾌히 승낙하면서 선교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선교사 요청은 성직자의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다만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1645년 2월에 조선에 귀국하였다. 불행하게도 소현세자는 귀국 2달 만에 사망하였다. 세자의 죽음이 북경에서 갖고 온 천주교에 관계되는 물건 때문이라는 소문이 왕실에 나돌아 성물은 모두 소각되었고 환관과 궁녀들도 청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왕실의 개종을 통해서 조선을 천주교화하려는 계획은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4.2.3 안토니오 데 쌍타 마리아
프란치스교 수도회의 안토니오 수사 신부는 북경에서 선교하다가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1650년에 국경 부근에 있는 항구에까지 왔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북경으로 돌아와 조선을 오가는 상인들에 끼여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는 아담 샬 신부에게 조선 왕국의 쇄국 정책을 듣고 그의 권고로 산뚱 반도 지방의 선교에 헌신하였다.
4.2.4 프랑소아 노엘
예수회의 선교사인 노엘 신부는 1703년에 청 황제의 아들인 친왕이 요동 지방의 심양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확고하게 세운 다음에는 조선 왕국의 그리스도교화가 가능하다고 보아 선교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중국의 천주교를 통한 조선 선교의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조선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 때문에 해금(해금) 정책을 시행하여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정치적 변동(명과 청의 충돌)이 일어나 육로를 통한 교통이 두절되었으며, 조선의 쇄국 정책은 외국인의 입국이나 체류가 불가능하였다. 중국의 사절이 입국하는 경우에도 수행원은 국경에 남겨두고 2-3명의 대표만 한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은 다만 조선의 부연사를 통해 도입된 서구 문물과 학문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연구뿐이었다.

중국을 통한 조선의 복음화 시도
4.2.1 서 광계
15세기 중엽부터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여진족은 누르하지(1559-1626)가 등장하면서 후금(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명(명)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제적 기반이 약한 후금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서 요동 평야가 필요했다. 1618년에 누르하치는 요동 반도를 침공하였다. 명은 침략자를 격퇴시키기 위해서 10만 대군을 동원하였고 조선 왕국에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두 국가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은 명이 임진왜란 때에 원군을 보내준 것을 생각하여 1만3천여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1619년, 연합군은 후금의 군대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패전한 지 1년이 되는 1620년에 명의 고관이던 서 광계는 조선군의 전사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한 군대 출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대관을 사절로 파견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면서 자신이 사절로 갈 것을 자원하였다.
서 광계가 자원한 이유에는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 신부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경건한 천주교 신자였다. 결국 조정의 승인을 받은 서 광계는 조선 선교에 사용할 교리서를 인쇄하도록 조처를 취하였고, 예수회원인 프란치스꼬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 외교적 임무를 이행하는 동안에, 삼비아시 신부가 국왕을 상대로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여 세례를 주면 모든 백성이 국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 광계의 조선 선교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중대한 난국에 서 광계와 같은 유능한 인물이 국외로 나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조선 파견 전권 대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4.2.2 아담 샬
1623년에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가 국왕에 즉위한 후에 조선 왕국은 명과 후금(1636년에 청으로 개칭)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바꿔 후금을 배척하고 친명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로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청의 침공을 받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승전한 청의 요구 중에는 두 명의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인질로 내놓으라는 사항도 있었다. 청군에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서 지내다가 1644년,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길 때에 이곳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요한네스 아담 샬 폰 벨 예수회 신부를 만나 그가 귀국할 때(1644년 11월 26일)까지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면서 친교를 맺고 지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귀국할 때에 아담 샬 신부는 조선의 왕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보냈다. 세자는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표명하면서 받은 선물 중에서 천주교 성물인 성화상은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못한 조선인에게 의해 모독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며 예의상 사양하였다.
아담 샬 신부는 세자에게 귀국할 때에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가서 조선에서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는 이에게 선교하도록 선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현세자 역시 쾌히 승낙하면서 선교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선교사 요청은 성직자의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다만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1645년 2월에 조선에 귀국하였다. 불행하게도 소현세자는 귀국 2달 만에 사망하였다. 세자의 죽음이 북경에서 갖고 온 천주교에 관계되는 물건 때문이라는 소문이 왕실에 나돌아 성물은 모두 소각되었고 환관과 궁녀들도 청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왕실의 개종을 통해서 조선을 천주교화하려는 계획은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4.2.3 안토니오 데 쌍타 마리아
프란치스교 수도회의 안토니오 수사 신부는 북경에서 선교하다가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1650년에 국경 부근에 있는 항구에까지 왔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북경으로 돌아와 조선을 오가는 상인들에 끼여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는 아담 샬 신부에게 조선 왕국의 쇄국 정책을 듣고 그의 권고로 산뚱 반도 지방의 선교에 헌신하였다.
4.2.4 프랑소아 노엘
예수회의 선교사인 노엘 신부는 1703년에 청 황제의 아들인 친왕이 요동 지방의 심양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확고하게 세운 다음에는 조선 왕국의 그리스도교화가 가능하다고 보아 선교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중국의 천주교를 통한 조선 선교의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조선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 때문에 해금(해금) 정책을 시행하여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정치적 변동(명과 청의 충돌)이 일어나 육로를 통한 교통이 두절되었으며, 조선의 쇄국 정책은 외국인의 입국이나 체류가 불가능하였다. 중국의 사절이 입국하는 경우에도 수행원은 국경에 남겨두고 2-3명의 대표만 한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은 다만 조선의 부연사를 통해 도입된 서구 문물과 학문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연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