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시대의 천주교
27.1.1 교회의 평화
1849년에 국왕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김씨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정조 시대에 반역 모의죄로 강화도로 귀양간 몰락한 왕족에서 18세의 소년을 왕위 계승자로 선정하였는데 그가 철종(哲宗 1849-1864)이다. 그런데 철종의 조모(祖母) 송씨와 백모(伯母) 신씨는 강화도로 귀양가지 않고 한양(상제궁)에서 지내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801년에 주 문모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는 죄목으로 강화도에 귀양 중인 은언군(恩彦君, 철종의 할아버지)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이러한 국왕의 가정 배경과 섭정하던 대왕 대비 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온건 정책으로 교회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철종 시대에 천주교에 대한 금압 정책이 철회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 변동과 관리의 개인적 적의(敵意)에서 교회는 박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857년 8월(음력)에 천주교를 묵인하던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반대 세력이 천주교 신자의 탐색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내놓기 시작하였고, 전국을 순찰하는 암행허사들이 받은 명단에서 선교사들이 첫자리에 올라 있었다. 1857년 말경에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외교인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또한 1860년 초에 포도대장이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과 신자들의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박해를 일으켰다(경신박해). 따라서 교우들은 감옥에 갇히고 그들의 재산은 포졸들에게 약탈당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포졸들이 천주교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는 1839년의 국가 정책(죄인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기 전에 그의 재산 압수를 금지한 명령)에 위배된다고 지적하면서 선왕(先王)들의 조서(早逝)를 천주교 박해의 결과로 암시하였다. 따라서 포도대장은 그의 박해 정책이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을 깨닫고 6월(음력)에 사임하고 그 후임자는 서서히 구금된 신자들을 석방하였다.
오히려 186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북경 함락(1860년 10월)에 대한 소식이 조선 왕국에 전해지자 서양인의 침입과 피해를 걱정한 일부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보호를 부탁하였다. 어떤 관리들은 교회 성물(聖物)을 장만하려고 신자들과 교섭하거나 공공연하게 성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 포졸들은 교우들의 모임에 찾아가 지난날 그들이 천주교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체포, 고문한 행위를 변명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교회는 잠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위정 당국의 묵인으로 부분적 평화를 누리면서 보다 많은 성직자들의 입국과 활발한 교회 활동을 통해 교세를 발전시켰다.
27.1.2 성직자의 입국
병오박해의 희생에서 벗어난 페레올(Jean-Joseph 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Marie-Nicholas-Antoine Daveley, 安) 신부가 사목활동을 계속하는동안에 최 양업(토마스) 신부가 1849년 12월에 귀국하여 두 선교사들과 함께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이때에 다블뤼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주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을 맡았다. 1852녀에 매스뜨르(Joseph-Ambroise Maistre, 李) 신부가 입국하여 병중에 있는 주교를 대신하여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1853년 2월 3일에 페레올 주교가 서거하자 3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를 맡아 보았고 이미 교구장으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된 매스뜨르 신부가 교회 책임자가 되었다. 1854년 3월에 쟝수(Francois-stanislas Jansou, 楊) 신부가 입국하였지만 심한 뇌염으로 석달 만에 별세하였다.
그 동안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베르뇌(Simeon-Francois Berneux, 張) 신부가 1854년 12월 24일 제 4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신임 교구장은 쁘띠니꼴라(Michel-Alexandre Petinicolas, 朴)와 뿌르띠에(Charles-Antoine Pourthie, 申) 신부 등과 함께 1856년 3월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857년 3월에 페롱(Stanislas Feron, 權) 신부가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제 조선 교회는 7명의 성직자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특수 사목 신부와 건강상 휴양 중인 신부를 제외하면 신자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는 4명뿐이었다. 더욱이 1859년 12월에 매스뜨르 신부가 병사한 후로 선교사의 보충이 절실하였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다행하게도 이러한 요청의 결과로 조선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된 랑드르(Jean-Marie Landre, 洪) 신부, 죠안노(Pierre-Marie Joanno, 吳) 신부, 리델(Felix-Clair Ridel, 李) 신부, 깔래(Alphonse-Nicolas Calais, 姜) 신부 등 4명의 선교사가 1861년 4월에 한양에 도착하여 조선 교회의 성직자는 1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2개월 후에 최 양업 신부가 사망하였고 1863년에는 죠안노 신부와 랑드르 신부가 병사하였다. 다만 같은 해 6월에 오매뜨르(Pierre Aumaitre, 吳) 신부가 입국하여 부족한 성직자 수를 보충하였다.
27.1.3 교회 생활상
철종 시대의 교회는 네 가지의 대표적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교계 체제의 재정비와 확립, 성모 마리아 신심, 조선인 성직자 양성, 출판과 자선을 통한 사회 활동 등이다.
첫째로, 베르뇌 주교는 앞으로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교구장이 순교하더라도 조선 교회에 사제직을 영속시킬 수 있는 주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다블뤼 신부를 그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주교는 성직자들의 행동 지침과 활동 계획을 수립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향상과 교세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교구회의(敎區會議)를 소집하였다. 따라서 1857년 3월 25일 밤에 성직자들과 소수의 평신도 회장들이 모인 가운에 다블뤼 신부는 교구장으로부터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어서 3일 동안 열린 교구회의에서 성직자들의 업무 담당이 확정되었다. 베르뇌 주교, 최 양업 신부, 페롱 신부는 주로 신자 사목에 종사하고 다블뤼 주교는 교우들을 돌보는 동시에 출판 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뿌르띠에 신부는 신학생 교육을 담당하였고 쁘띠니꼴라 신부는 건강 때문에 다블뤼 주교의 출판 사업을 돕기로 하였다. 그리고 8월 2일에 베르뇌 교구장은 회의 결정 사항을 「장 주교 윤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제목으로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둘째로, 이미 1841년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조선 교회는 성모 신심을 강화하였다. 1849년 11월 2일에 페레올 주교는 충청도 수리치골(지금의 충남 공주군 봉갑리)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성심회’를 설립하였다. 이 신심 조직은 성모 성심 공경과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창설한 단체로서 회원은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매일 성모 성화 앞에서 일정한 기도와 성모송 한 번씩 바치는 의무를 지녔다.
그리고 1861년에 베르뇌 주교는 성직자들의 담당 구역을 다시 확정할 때에 각 지역을 성모 축일과 연결시켜 주었다. 즉 교구장의 한양은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다블뤼 주교의 충청도 홍주(내포 상부) 지방은 ‘성모 성탄’, 페롱 신부의 경상도 서북부 지방은 ‘성모 승천’, 리델 신부의 충청도 동북부 지역은 ‘성모 자헌’, 죠안노 신부의 충청도 공주 지방은 ‘성모 영보’, 랑드르 신부의 충청도 서부(내포 하부) 지역은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깔래 신부의 경상도 서부 지방은 ‘성모 취결례’ (오늘날 ‘예수 봉헌 축일’)로 연결되었다. 다만 뿌르띠에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가 담당한, 신학교는 ‘성 요셉 신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셋째로, 조선 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페레올 주교와 베르뇌 주교는 재정적 곤란 속에서도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모집, 교육하는 일을 맡기는 동시에 피낭 신학교에 조선 소년들을 유학 보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854년에 3명의 학생이 파견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리고 다블뤼 신부는 1855년에 신학교를 하나 더 세워 매스뜨르 신부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그것은 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숨겨놓고 교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학생들은 그들의 학교를 지나치게 되는 외교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소리 내어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박해자를 대비하여 항상 피신할 준비를 하고 지냈다. 아울러 계속 갇힌 상태 속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단 발병의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57년 이후로는 뿌르띠에 신부가 충청도 제천의 배론(지금의 충북 봉양면 구학리)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 성직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859년에 이르러 신학교에는 라틴어 공부하는 학생이 7명이었고 그외에 나이 어린 학생들은 두 곳에서 평신도 교사로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피낭에 유학 갔던 신학생들이 1861년과 1863년 사이에 귀국하여 ‘성 요셉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넷째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교리 및 윤리 교육과 신심 생활의 향상을 위해 책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54년에 다블뤼 신부는 과거의 교회 서적을 재검토하고 5년 후에는 목판 인쇄소를 마련하여 교리서와 기도서를 개정, 번역, 저술하여 대량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출판 사업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다블뤼 신부의 한한불 사전(漢韓佛辭典)의 편찬과 조선사 연포(朝鮮史年表)의 불문(佛文) 번역, 순교자에 대한 사료 수집과 수정 및 보완, 그리고 순교록의 불문 번역 등이다. 여기서 비록 당시에 소실되었지만 사전의 편찬과 조선 역사의 번역은 사회적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교회는 종교적 동기와 사회적 배경에서 고아 구제 사업과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854년 경에 매스뜨르 신부는 ‘유아회’(幼兒會)를 설립하여 회원들이 기아나 고아를 데려다가 세례를 주고 신자 가정에 맡기어 양육하고 기술을 가르쳐 직업을 알선하여 주었다. 또한 베르뇌 주교는 전염병이 자주 유행하던 당시에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병자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특히 임종이 가까운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조처하였다.

철종 시대의 천주교
27.1.1 교회의 평화
1849년에 국왕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김씨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정조 시대에 반역 모의죄로 강화도로 귀양간 몰락한 왕족에서 18세의 소년을 왕위 계승자로 선정하였는데 그가 철종(哲宗 1849-1864)이다. 그런데 철종의 조모(祖母) 송씨와 백모(伯母) 신씨는 강화도로 귀양가지 않고 한양(상제궁)에서 지내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801년에 주 문모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는 죄목으로 강화도에 귀양 중인 은언군(恩彦君, 철종의 할아버지)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이러한 국왕의 가정 배경과 섭정하던 대왕 대비 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온건 정책으로 교회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철종 시대에 천주교에 대한 금압 정책이 철회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 변동과 관리의 개인적 적의(敵意)에서 교회는 박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857년 8월(음력)에 천주교를 묵인하던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반대 세력이 천주교 신자의 탐색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내놓기 시작하였고, 전국을 순찰하는 암행허사들이 받은 명단에서 선교사들이 첫자리에 올라 있었다. 1857년 말경에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외교인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또한 1860년 초에 포도대장이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과 신자들의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박해를 일으켰다(경신박해). 따라서 교우들은 감옥에 갇히고 그들의 재산은 포졸들에게 약탈당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포졸들이 천주교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는 1839년의 국가 정책(죄인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기 전에 그의 재산 압수를 금지한 명령)에 위배된다고 지적하면서 선왕(先王)들의 조서(早逝)를 천주교 박해의 결과로 암시하였다. 따라서 포도대장은 그의 박해 정책이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을 깨닫고 6월(음력)에 사임하고 그 후임자는 서서히 구금된 신자들을 석방하였다.
오히려 186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북경 함락(1860년 10월)에 대한 소식이 조선 왕국에 전해지자 서양인의 침입과 피해를 걱정한 일부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보호를 부탁하였다. 어떤 관리들은 교회 성물(聖物)을 장만하려고 신자들과 교섭하거나 공공연하게 성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 포졸들은 교우들의 모임에 찾아가 지난날 그들이 천주교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체포, 고문한 행위를 변명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교회는 잠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위정 당국의 묵인으로 부분적 평화를 누리면서 보다 많은 성직자들의 입국과 활발한 교회 활동을 통해 교세를 발전시켰다.
27.1.2 성직자의 입국
병오박해의 희생에서 벗어난 페레올(Jean-Joseph 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Marie-Nicholas-Antoine Daveley, 安) 신부가 사목활동을 계속하는동안에 최 양업(토마스) 신부가 1849년 12월에 귀국하여 두 선교사들과 함께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이때에 다블뤼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주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을 맡았다. 1852녀에 매스뜨르(Joseph-Ambroise Maistre, 李) 신부가 입국하여 병중에 있는 주교를 대신하여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1853년 2월 3일에 페레올 주교가 서거하자 3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를 맡아 보았고 이미 교구장으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된 매스뜨르 신부가 교회 책임자가 되었다. 1854년 3월에 쟝수(Francois-stanislas Jansou, 楊) 신부가 입국하였지만 심한 뇌염으로 석달 만에 별세하였다.
그 동안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베르뇌(Simeon-Francois Berneux, 張) 신부가 1854년 12월 24일 제 4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신임 교구장은 쁘띠니꼴라(Michel-Alexandre Petinicolas, 朴)와 뿌르띠에(Charles-Antoine Pourthie, 申) 신부 등과 함께 1856년 3월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857년 3월에 페롱(Stanislas Feron, 權) 신부가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제 조선 교회는 7명의 성직자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특수 사목 신부와 건강상 휴양 중인 신부를 제외하면 신자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는 4명뿐이었다. 더욱이 1859년 12월에 매스뜨르 신부가 병사한 후로 선교사의 보충이 절실하였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다행하게도 이러한 요청의 결과로 조선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된 랑드르(Jean-Marie Landre, 洪) 신부, 죠안노(Pierre-Marie Joanno, 吳) 신부, 리델(Felix-Clair Ridel, 李) 신부, 깔래(Alphonse-Nicolas Calais, 姜) 신부 등 4명의 선교사가 1861년 4월에 한양에 도착하여 조선 교회의 성직자는 1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2개월 후에 최 양업 신부가 사망하였고 1863년에는 죠안노 신부와 랑드르 신부가 병사하였다. 다만 같은 해 6월에 오매뜨르(Pierre Aumaitre, 吳) 신부가 입국하여 부족한 성직자 수를 보충하였다.
27.1.3 교회 생활상
철종 시대의 교회는 네 가지의 대표적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교계 체제의 재정비와 확립, 성모 마리아 신심, 조선인 성직자 양성, 출판과 자선을 통한 사회 활동 등이다.
첫째로, 베르뇌 주교는 앞으로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교구장이 순교하더라도 조선 교회에 사제직을 영속시킬 수 있는 주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다블뤼 신부를 그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주교는 성직자들의 행동 지침과 활동 계획을 수립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향상과 교세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교구회의(敎區會議)를 소집하였다. 따라서 1857년 3월 25일 밤에 성직자들과 소수의 평신도 회장들이 모인 가운에 다블뤼 신부는 교구장으로부터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어서 3일 동안 열린 교구회의에서 성직자들의 업무 담당이 확정되었다. 베르뇌 주교, 최 양업 신부, 페롱 신부는 주로 신자 사목에 종사하고 다블뤼 주교는 교우들을 돌보는 동시에 출판 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뿌르띠에 신부는 신학생 교육을 담당하였고 쁘띠니꼴라 신부는 건강 때문에 다블뤼 주교의 출판 사업을 돕기로 하였다. 그리고 8월 2일에 베르뇌 교구장은 회의 결정 사항을 「장 주교 윤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제목으로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둘째로, 이미 1841년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조선 교회는 성모 신심을 강화하였다. 1849년 11월 2일에 페레올 주교는 충청도 수리치골(지금의 충남 공주군 봉갑리)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성심회’를 설립하였다. 이 신심 조직은 성모 성심 공경과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창설한 단체로서 회원은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매일 성모 성화 앞에서 일정한 기도와 성모송 한 번씩 바치는 의무를 지녔다.
그리고 1861년에 베르뇌 주교는 성직자들의 담당 구역을 다시 확정할 때에 각 지역을 성모 축일과 연결시켜 주었다. 즉 교구장의 한양은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다블뤼 주교의 충청도 홍주(내포 상부) 지방은 ‘성모 성탄’, 페롱 신부의 경상도 서북부 지방은 ‘성모 승천’, 리델 신부의 충청도 동북부 지역은 ‘성모 자헌’, 죠안노 신부의 충청도 공주 지방은 ‘성모 영보’, 랑드르 신부의 충청도 서부(내포 하부) 지역은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깔래 신부의 경상도 서부 지방은 ‘성모 취결례’ (오늘날 ‘예수 봉헌 축일’)로 연결되었다. 다만 뿌르띠에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가 담당한, 신학교는 ‘성 요셉 신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셋째로, 조선 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페레올 주교와 베르뇌 주교는 재정적 곤란 속에서도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모집, 교육하는 일을 맡기는 동시에 피낭 신학교에 조선 소년들을 유학 보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854년에 3명의 학생이 파견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리고 다블뤼 신부는 1855년에 신학교를 하나 더 세워 매스뜨르 신부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그것은 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숨겨놓고 교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학생들은 그들의 학교를 지나치게 되는 외교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소리 내어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박해자를 대비하여 항상 피신할 준비를 하고 지냈다. 아울러 계속 갇힌 상태 속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단 발병의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57년 이후로는 뿌르띠에 신부가 충청도 제천의 배론(지금의 충북 봉양면 구학리)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 성직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859년에 이르러 신학교에는 라틴어 공부하는 학생이 7명이었고 그외에 나이 어린 학생들은 두 곳에서 평신도 교사로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피낭에 유학 갔던 신학생들이 1861년과 1863년 사이에 귀국하여 ‘성 요셉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넷째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교리 및 윤리 교육과 신심 생활의 향상을 위해 책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54년에 다블뤼 신부는 과거의 교회 서적을 재검토하고 5년 후에는 목판 인쇄소를 마련하여 교리서와 기도서를 개정, 번역, 저술하여 대량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출판 사업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다블뤼 신부의 한한불 사전(漢韓佛辭典)의 편찬과 조선사 연포(朝鮮史年表)의 불문(佛文) 번역, 순교자에 대한 사료 수집과 수정 및 보완, 그리고 순교록의 불문 번역 등이다. 여기서 비록 당시에 소실되었지만 사전의 편찬과 조선 역사의 번역은 사회적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교회는 종교적 동기와 사회적 배경에서 고아 구제 사업과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854년 경에 매스뜨르 신부는 ‘유아회’(幼兒會)를 설립하여 회원들이 기아나 고아를 데려다가 세례를 주고 신자 가정에 맡기어 양육하고 기술을 가르쳐 직업을 알선하여 주었다. 또한 베르뇌 주교는 전염병이 자주 유행하던 당시에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병자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특히 임종이 가까운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조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