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과 천주교
1864년 1월에 철종이 선왕(先王)과 마찬가지로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두고 외척, 즉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안동 김씨 가문과 익종 비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풍양 조씨 일족 사이에 암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 지명권을 갖고 있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흥선군(興宣君) 이 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인 12세의 소년을 국왕으로 간택하였는데 그가 고종(高宗)이었다.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선택한, 방탕한 생활을 가장, 몰락한 왕족으로 행세하던 흥선군을 아무런 정치적 배경과 욕심이 없는 인물로 생각하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섭정자였지만 이 하응을 대원군으로 책봉하고 정치적 실권을 이양하는 동시에 풍양 조씨의 추종 세력을 고위 관직에 등용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신자인 남 종삼(南鍾三)과 토론하면서 조상 제사 금령 이외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수긍하였다. 대원군의 주위 인물들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국왕인 고종의 유모가 신자인 박 마르따였다. 박 마르따를 통해서 대원군의 아내이며 국왕의 모친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매일 기도를 드렸고 베르뇌 주교에게 아들의 국왕 즉위에 대한 감사 미사 봉헌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대부인은 조정에서 러시아의 남침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을 때에 이러한 위험은 베르뇌 주교가 나서서 조선 왕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 체결로 중재해야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로 인하여 천주교가 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하였다. 이러한 부대부인 민씨는 박해가 일어나 베르뇌 주교가 구금되자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의 사위인 조 기진(趙基晉)도 이러한 계획의 실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왕가의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에 대한 위험을 느꼈다. 베르뇌 주교는 기해대박해(1839)를 일으킨 풍양 조씨 가문의 재등장과 득세를 목격하고 교회 장래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도 대원군의 난폭하고 과격한 성격과 학정(虐政)을 지적하면서 교회 장래를 걱정하였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호의와 적의가 혼합된 정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성직자의 입국과 꾸준한 활동을 통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1865년 5월에 4명의 선교사, 즉 도리 김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랑페르 드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 위앵 민 신부 등이 입국하였다. 교회 활동 중에서는 성직자의 양성과 출판 사업이 발전하였다. 1864년경에 교회는 두 곳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교리서, 신심서, 기도서, 전례서 등을 번역, 저술하여 다량으로 출판하였다. 항상 사목자를 만날 수 없는 신자들의 교리 및 윤리 교육과 신앙생활의 향상에 있어서 문서 보급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865년에 이르러 ‘성 요셉 신학교’에는 라틴어를 배우는 학생 외에 신학 과정의 학생이 4명이었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2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28.1.2 천주교의 신교 자유 시도
교회는 국내외의 정세 변동에 관심을 두고 세 가지 면에서 종교 자유 획득에 대한 희망과 그 가능성을 타진 또는 시도하였다.
첫째로,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는 중국에서 일어난 국제적 변동이 조선 정부에 영향을 미쳐 천주교 금압 정책에 변동을 가져올 가능성을 예측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 변동이란 1860년에 북경 함락에 이어 체결된 북경조약에 따라 중국에서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뿌르티에 신부는 중국의 종교 정책의 변화는 조선 교회가 신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왕국이 중국의 종속국이라고 하더라도 북경 황실이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로 서구 세력의 조선 신교 자유 요구를 실천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뿌르티에 신부는 외세의 압력에 의한 종교 자유는 조선인의 반발로 교회 발전에 지장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지난날 식민지 정책에 의한 선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베르뇌 주교는 국내 사정, 즉 새로 즉위한 국왕의 주변에서 종교 자유에 대한 가능성을 기대하였다. 그는 유모 박 마르따가 국왕에게 선교사를 소개하여 개종시키고 천주교의 신교 자유가 성취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국왕이 나이가 어리더라도 유모에게 설득되어 종교 자유를 허용하기를 원하면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박 마르따는 이러한 교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셋째로,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에서 발생한 국내 문제에 교회가 개입하여 해결한 대가로 국가의 신교 자유 허용을 얻고자 시도하였다.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이 원산항에 나타나 조선 정부에게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때에 이미 1년 전에 천주교의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과 프랑스의 국교 체결을 구상했던 홍 봉주(토마스)가 김 면호(토마스)와 이 유일(안또니오)과 함께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안을 방아책(防俄策)으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동맹은 선교사들의 외교적 교섭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책망하였으나 입궐할 용의를 시사하였다. 김 면호는 건의서를 조 기진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교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때에 부대부인이 박 마르따를 통해서 선교사들에게 위기에 처하여 있는 나라를 위해 미사 봉헌을 부탁하는 동시에 국난을 예방할 수 있는 이는 주교뿐이니 천주교측이 다시 건의서를 제출하면 그의 남편과 주교의 면담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보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상경과 입궐 대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홍 봉주는 1월 중순경에 이 사실을 남 종삼에게 알렸다. 이제까지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남 종삼은 즉시 삼국 동맹안 결의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제출하고 주교 면담 요청을 받아냈다. 이 계획은 초창기 교회가 신교 자유 획득을 위해 외세의 무력 시위를 제안한 것 보다는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대원군과 천주교
1864년 1월에 철종이 선왕(先王)과 마찬가지로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두고 외척, 즉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안동 김씨 가문과 익종 비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풍양 조씨 일족 사이에 암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 지명권을 갖고 있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흥선군(興宣君) 이 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인 12세의 소년을 국왕으로 간택하였는데 그가 고종(高宗)이었다.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선택한, 방탕한 생활을 가장, 몰락한 왕족으로 행세하던 흥선군을 아무런 정치적 배경과 욕심이 없는 인물로 생각하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섭정자였지만 이 하응을 대원군으로 책봉하고 정치적 실권을 이양하는 동시에 풍양 조씨의 추종 세력을 고위 관직에 등용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신자인 남 종삼(南鍾三)과 토론하면서 조상 제사 금령 이외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수긍하였다. 대원군의 주위 인물들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국왕인 고종의 유모가 신자인 박 마르따였다. 박 마르따를 통해서 대원군의 아내이며 국왕의 모친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매일 기도를 드렸고 베르뇌 주교에게 아들의 국왕 즉위에 대한 감사 미사 봉헌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대부인은 조정에서 러시아의 남침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을 때에 이러한 위험은 베르뇌 주교가 나서서 조선 왕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 체결로 중재해야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로 인하여 천주교가 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하였다. 이러한 부대부인 민씨는 박해가 일어나 베르뇌 주교가 구금되자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의 사위인 조 기진(趙基晉)도 이러한 계획의 실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왕가의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에 대한 위험을 느꼈다. 베르뇌 주교는 기해대박해(1839)를 일으킨 풍양 조씨 가문의 재등장과 득세를 목격하고 교회 장래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도 대원군의 난폭하고 과격한 성격과 학정(虐政)을 지적하면서 교회 장래를 걱정하였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호의와 적의가 혼합된 정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성직자의 입국과 꾸준한 활동을 통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1865년 5월에 4명의 선교사, 즉 도리 김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랑페르 드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 위앵 민 신부 등이 입국하였다. 교회 활동 중에서는 성직자의 양성과 출판 사업이 발전하였다. 1864년경에 교회는 두 곳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교리서, 신심서, 기도서, 전례서 등을 번역, 저술하여 다량으로 출판하였다. 항상 사목자를 만날 수 없는 신자들의 교리 및 윤리 교육과 신앙생활의 향상에 있어서 문서 보급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865년에 이르러 ‘성 요셉 신학교’에는 라틴어를 배우는 학생 외에 신학 과정의 학생이 4명이었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2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28.1.2 천주교의 신교 자유 시도
교회는 국내외의 정세 변동에 관심을 두고 세 가지 면에서 종교 자유 획득에 대한 희망과 그 가능성을 타진 또는 시도하였다.
첫째로,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는 중국에서 일어난 국제적 변동이 조선 정부에 영향을 미쳐 천주교 금압 정책에 변동을 가져올 가능성을 예측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 변동이란 1860년에 북경 함락에 이어 체결된 북경조약에 따라 중국에서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뿌르티에 신부는 중국의 종교 정책의 변화는 조선 교회가 신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왕국이 중국의 종속국이라고 하더라도 북경 황실이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로 서구 세력의 조선 신교 자유 요구를 실천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뿌르티에 신부는 외세의 압력에 의한 종교 자유는 조선인의 반발로 교회 발전에 지장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지난날 식민지 정책에 의한 선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베르뇌 주교는 국내 사정, 즉 새로 즉위한 국왕의 주변에서 종교 자유에 대한 가능성을 기대하였다. 그는 유모 박 마르따가 국왕에게 선교사를 소개하여 개종시키고 천주교의 신교 자유가 성취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국왕이 나이가 어리더라도 유모에게 설득되어 종교 자유를 허용하기를 원하면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박 마르따는 이러한 교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셋째로,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에서 발생한 국내 문제에 교회가 개입하여 해결한 대가로 국가의 신교 자유 허용을 얻고자 시도하였다.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이 원산항에 나타나 조선 정부에게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때에 이미 1년 전에 천주교의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과 프랑스의 국교 체결을 구상했던 홍 봉주(토마스)가 김 면호(토마스)와 이 유일(안또니오)과 함께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안을 방아책(防俄策)으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동맹은 선교사들의 외교적 교섭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책망하였으나 입궐할 용의를 시사하였다. 김 면호는 건의서를 조 기진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교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때에 부대부인이 박 마르따를 통해서 선교사들에게 위기에 처하여 있는 나라를 위해 미사 봉헌을 부탁하는 동시에 국난을 예방할 수 있는 이는 주교뿐이니 천주교측이 다시 건의서를 제출하면 그의 남편과 주교의 면담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보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상경과 입궐 대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홍 봉주는 1월 중순경에 이 사실을 남 종삼에게 알렸다. 이제까지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남 종삼은 즉시 삼국 동맹안 결의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제출하고 주교 면담 요청을 받아냈다. 이 계획은 초창기 교회가 신교 자유 획득을 위해 외세의 무력 시위를 제안한 것 보다는 긍정적인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