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의 확장

 

교세의 확장


  1886년 이후로 많은 성직자들이 입국, 활동하여 박해받던 소수 집단의 천주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주위에서 무시될 수 없는 커다란 공동체로 부상하였다. 1887년에 조선 교회는 1만4천2백47명의 신자와 14명의 성직자 및 14명의 방인 신학생이 있었고 1905년 신교 자유가 공인되었을 때의 신자는 6만1천2백95명에 이르렀다. 1905년 이후로는 급속적 증가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던 1910년에 신자수는 7만3천5백17명이었고 성직자는 외국인이 46명, 한국인이 15명, 그리고 수녀는 59명이었다. 또한 남부 지방의 제주도에서 북부 지역인 함경도와 만주의 간도 지방에 이르기까지 54곳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1882년에 블랑 주교가 종현(명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1892년에 약현(중림동) 본당이 분리, 신설되었다. 그외에 지방에 설립된 대표적 본당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지방의 풍수원(1888년) 그리고 경상도 지방의 대구(1886년)와 부산(1890년), 함경도 지방의 원산(1887년), 경기도 지방의 갓등이(왕림, 1888년)와 제물포(1889년) 및 수원(북수동, 1892년), 전라도 지방의 전주(전동, 1889년), 충청도 지방의 합덕(1890년) 그리고 황해도 지방의 안악(매화동, 1896년), 제주도(1899년), 만주 지방의 용정(1901년) 등이다.


  이러한 교세 확장의 과정 속에서 불랑 주교는 조선 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교구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조선 교회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다가 1887년 초에 입국한 꼬스뜨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는 동시에 출판 및 성당 건축 사업을 맡기었고 뽀아넬 신부에게는 교구 경리 책임을 부여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에 주교는 교회의 규율과 전례를 통일시키기 위해서 조선교구의 법전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조선 교회 지도서」를 공포하였다. 그리고 블랑 주교는 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교회의 자선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수녀회를 조선에 진출케 하였다. 이렇게 교회 성장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은 블랑 주교는 1892년 2월 21일에 선종하고 파리에 있던 뮈뗄 신부가 같은 해 9월 2일에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뮈뗄 주교 역시 전임 교구장과 마찬가지로 본당의 증설, 교육 및 출판 사업을 통해서 교회 발전에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외적 발전 외에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1893년 8월에 신자 가정의 성화를 위해서 ‘성가회’(聖家會)라는 신심 단체를 창립하였다. 이 단체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가장은 성 요셉의 가사 운영의 지혜를 배우고, 주부는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 충실을 익히며, 자녀는 소년 예수의 부모에 대한 순명 정신을 본받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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