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과 천주교

 

6․25 동란과 천주교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 정권은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 상잔의 비극적 내란인 한국 전쟁 즉 6․25 동란(1950-1953년)을 일으켰다. 전란 중에 교회는 국가, 사회, 교회를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주미 대사였던 장 면(張勉 : 요한, 1899-1966년)은 동란이 발발한 소식을 듣고 기민한 외교 수단으로 미국 정부와 교섭하여 유엔의 참전을 실현케 하였다. 곧이어 1950년 7월 초에 그는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한국 정쟁은 단순한 지역적 분쟁이 아니라 반(反) 그리스도 세력의, 하느님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국 전재민(戰災民)을 위해 영적 기도와 물질적 구제를 호소하였다(「天主敎會報」, 1950. 11. 10). 이러한 호소는 즉시 미국 주교들의 유고(論告)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신자들에게 알려졌고 ‘미국 가톨릭 복지 협의회’ (N.C.W.C.)의 전재 구제부를 통해서 식량, 약품, 의료 등의 구호품이 한국 정부에 전달되어졌다.


  한편 유럽 방문에 나섰던 서울대목구의 노 기남 주교는 프랑스에서, 주불 공사가 공석 중인 공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외국의 원조를 호소하면서 한국 전란의 진상을 밝혔다. 왜냐하면 당시에 프랑스 좌익 세력의모략 선동으로 한국이 먼저 북침을 자행하였다고 일부 언론이 왜곡 보도하였고, 데모 군중들이 유엔의 한국 참전 거부를 요구하면서 한국 공사관 앞에서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다 (「盧基南 大主敎」. 303-313면 참조).    서울의 각 본당은 교회의 건물을 개방하여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에게 침식을 제공하였다. 서울 함락 후에도 본당 신부들과 교회 기관의 책임 신부들은 그들의 임지를 지켰고, 이로써 교회는 많은 성직자들을 잃는불행을 겪게 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이르렀을 때에 10여년 동안 평양대목구에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사목에 종사했던 캐롤(George Carroll, 1906-1981년)이 평양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받고 종군 신부로서 1950년 10월 중순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는 종군 신부로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온 평양대목구 소속 한국인 신부 3명과 메리놀회 신부 4명을 데리고 교구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시내 본당에 배치되거나 주요 본당들을 순회하면서 성무를 수행하였다(「天主敎 平壤敎區史」, 239-240면 참조).


  교회는 국가의 위기와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출판물을 통해, 청년 학도들에게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멸공 구국의 십자군으로 군문에 나서도록 격려하면서 신자로서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제시하였다(「天主敎會報」, 1950.11.10 ; 1951.3.20). 또한 노 기남 주교는 파리에서 외교 활동에 성공하고 귀국한 후에 1950년 10월 신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여 역대 교황들의 반공 사상을 상기시켰다. 즉 무신론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하는 동시에 멸공에 총궐기하자고 호소하였다(「天主敎會報」, 1950. 11. 10). 곧이어 노 주교는 ‘대한 천주교 의료 봉사단’을 인솔하고 11월 12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의료진은 병원 건물을 마련하여 1천6백여 명의 환자들에게 무료로 의료 봉사하고 계속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을 정비하고 11월 3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天主敎會報」,195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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