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교회(1953-1962년)

 

전후의 교회(1953-1962년)


  1951년 11월 말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여 북한 교회의 복구는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한국 전란은 중공군의 개입에 이어 연합군의 서울 재탈환과 북진 등의 과정을 거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3년 동안의 6․25 동란은 한반도에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초래하였고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교회 역시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피살되거나 납북 또는 행방 불명이 되었고 교회의 건물들이 전부 또는 일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복구 작업에 나섰고 급속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매년 영세 입교자가 증가하여 휴전 당시에 16만6천여 명이던 신자가 1962년 자치 교회가 설정되었을 때에는 약53만 명에 이르렀다. 교세의 급속한 성장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열거될 수 있겠다.


  첫째로, 국민들이 전쟁의 시련 속에서 친지와 이웃의 죽음을 체험하면서 인생 무상을 절감하고 내세 구원의 보장과 현세의 정신적 안식처를 종교에서 찾고자 하였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입각하여 전후 복구 사업이나 전재민 구호에 공헌하였다. 특히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 가톨릭 복지 협의회’를 통해서 한국 전재민에게 보여준 구제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거나 감명을 받았다. 셋째로, 많은 수도회가 외국에서 진출하거나 한국에서 창설되어 직접 선교 활동에 나섰고 또는 고아와 무의탁 노인, 나환자들을 돌보고 교육 사업과 출판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넷째로, 천주교의 교리와 제도를 충분히 연구한 지성인들이 입교하거나 개신교 교역자와 신도들이 개종하였다. 그들은 입교 또는 개종의 동기를 설명하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와 교회에 천주교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호교론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섯째로, 캐롤 신부의 건의로 1951년 2월에 한국 정부가 한국군에 군목 제도를 도입하자 교회는 ‘가톨릭 군종 신부단’(군종단)을 설립하였다. 군종 신부들은 전선에 나선 신자 청년들의 영신 사정을 돌보고 군인들의 정신 무장과 선도에 힘쓰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섯째로, ‘제1 공화국’ 시대에 교회가 이 승만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 시도에 투쟁하였고 4․19 학생 의거에 의한 ‘4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의 장 면 정권 등장과 함께 자유당 시대에 천주교 신자가 불이익을 받았던 탄압이 제거되어 입교자의 수효가 감소 현상에서 벗어났다. 장 면의 영향은 ‘5․16 군사 쿠데타’(1961년) 이후에 민주당 정치인들의 영세 입교에서도 나타났다.


  아울러 한국 교회는 교계 체제에 있어서도 발전하였다. 1955년 9월 20일에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하였고 1957년 1월 21일에는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발전하는 동시에 2년 6개월 전에 대구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된 경남대목구가 부산대목구로 신설되었다. 1958년 6월 23일에 대전대목구와 청주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61년 6월 6일에는 인천대목구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6․25 동란으로 인한 80여 명의 성직자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신학생 교육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여기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였다.


  전란 중에도 신학생 교육은 계속되었고 1954년 9월에 대신학교인 ‘성신 대학’은 제주도에 이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끝내고 서울 혜화동의 본교로 귀환하여 정상 교육을 시작하였다. 1959년에는 교명을 ‘가톨릭 대학’으로 바꾸고 사제를 계속 배출하였다. 소신학교인 ‘성신 중고등학교’도 1954년 11월에 경남 밀양에서 서울로 옮겨 교황청과 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 혜화동에 교사와 기숙사를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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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전후의 교회(1953-1962년)

      1951년 11월 말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여 북한 교회의 복구는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한국 전란은 중공군의 개입에 이어 연합군의 서울 재탈환과 북진 등의 과정을 거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3년 동안의 6․25 동란은 한반도에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초래하였고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교회 역시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피살되거나 납북 또는 행방 불명이 되었고 교회의 건물들이 전부 또는 일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복구 작업에 나섰고 급속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매년 영세 입교자가 증가하여 휴전 당시에 16만6천여 명이던 신자가 1962년 자치 교회가 설정되었을 때에는 약53만 명에 이르렀다. 교세의 급속한 성장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열거될 수 있겠다.

      첫째로, 국민들이 전쟁의 시련 속에서 친지와 이웃의 죽음을 체험하면서 인생 무상을 절감하고 내세 구원의 보장과 현세의 정신적 안식처를 종교에서 찾고자 하였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입각하여 전후 복구 사업이나 전재민 구호에 공헌하였다. 특히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 가톨릭 복지 협의회’를 통해서 한국 전재민에게 보여준 구제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거나 감명을 받았다. 셋째로, 많은 수도회가 외국에서 진출하거나 한국에서 창설되어 직접 선교 활동에 나섰고 또는 고아와 무의탁 노인, 나환자들을 돌보고 교육 사업과 출판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넷째로, 천주교의 교리와 제도를 충분히 연구한 지성인들이 입교하거나 개신교 교역자와 신도들이 개종하였다. 그들은 입교 또는 개종의 동기를 설명하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와 교회에 천주교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호교론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섯째로, 캐롤 신부의 건의로 1951년 2월에 한국 정부가 한국군에 군목 제도를 도입하자 교회는 ‘가톨릭 군종 신부단’(군종단)을 설립하였다. 군종 신부들은 전선에 나선 신자 청년들의 영신 사정을 돌보고 군인들의 정신 무장과 선도에 힘쓰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섯째로, ‘제1 공화국’ 시대에 교회가 이 승만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 시도에 투쟁하였고 4․19 학생 의거에 의한 ‘4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의 장 면 정권 등장과 함께 자유당 시대에 천주교 신자가 불이익을 받았던 탄압이 제거되어 입교자의 수효가 감소 현상에서 벗어났다. 장 면의 영향은 ‘5․16 군사 쿠데타’(1961년) 이후에 민주당 정치인들의 영세 입교에서도 나타났다.

      아울러 한국 교회는 교계 체제에 있어서도 발전하였다. 1955년 9월 20일에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하였고 1957년 1월 21일에는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발전하는 동시에 2년 6개월 전에 대구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된 경남대목구가 부산대목구로 신설되었다. 1958년 6월 23일에 대전대목구와 청주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61년 6월 6일에는 인천대목구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6․25 동란으로 인한 80여 명의 성직자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신학생 교육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여기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였다.

      전란 중에도 신학생 교육은 계속되었고 1954년 9월에 대신학교인 ‘성신 대학’은 제주도에 이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끝내고 서울 혜화동의 본교로 귀환하여 정상 교육을 시작하였다. 1959년에는 교명을 ‘가톨릭 대학’으로 바꾸고 사제를 계속 배출하였다. 소신학교인 ‘성신 중고등학교’도 1954년 11월에 경남 밀양에서 서울로 옮겨 교황청과 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 혜화동에 교사와 기숙사를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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