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광야에서의 생활
(읽어야 할 말씀: 탈출 15,22-18,27)
1. 시작기도: 탈출16,1-8 만나와 메추라기
1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5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6 그리하여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말하였다. “저녁이 되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주님이심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7 그리고 아침이 되면, 너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주님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8 모세가 다시 말하였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주님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냐? 너희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불평한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광야에서의 생활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기쁨과 희망은 광야의 뜨거움과 갈증 속에서 서서히 불평과 불만으로 변해갔습니다. 갈증과 굶주림을 겪게 된 백성들은 계속해서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도 일상 삶 안에서 조금만 불편하거나 내 생각이랑 맞지 않으면 쉽게 감정을 표현하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비판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쏟아부어 주셨듯이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나에게 당신 사랑을 쏟아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보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오늘도 나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2.1. 모세가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다(탈출15,22-27)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떠나 수르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흘 동안을 걸었지만 물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으나 홍해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서인지 그곳 마라의 물도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바닷물이 섞여서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 하였습니다.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하며 모세에게 불평하였습니다. 갈증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부으니 모세는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제 노동을 하기 위해 조장들에 이끌려 가는 노예들이 아니라 영도자 모세를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들입니다. 신분이 바뀐 이들입니다. 신분이 변했다면 마음 자세도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삶,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모세를 따라야 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느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는 모세는 존경과 감사와 섬김의 대상이지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화풀이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불평과 불만은 영도자 모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세를 지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마라의 쓴 물 앞에서 주님께 청했습니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는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은 단 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정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15,26)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 당신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고 계시니, 그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하느님 백성은 따라가면 됩니다. 모세가 앞장서 가니 하느님 백성은 영도자인 모세를 따라가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니, 모세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려고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것이지 광야에서 갈증과 굶주림에 죽게 하려고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며 믿음을 가지고 모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살이하던 노예근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만 있어도 새롭게 태어날 것이지만,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편한 쪽으로 마음을 옮기고, 불편한 일이 생기면 즉시 불만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들은 엘림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 야자나무가 일흔 그루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 물가에 진을 쳤습니다. 샘이 열두 개나 있었으니 그들의 불평은 잠시 멈추게 될 것입니다.
2.2. 만나와 메추라기(탈출16,1-36)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또 불평하였습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16,3)
배고픔은 하느님의 은총을 잊게 만들고, 모세의 봉사와 희생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이 밀려오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의 가치를 굶주림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름대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이들이 그런 불평과 불만을 퍼트렸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굶주림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음식과 잠자리라 할지라도 자유를 누릴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삶은 영원히 지속될 삶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때 이 백성의 원로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향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주님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너희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불평한 것이다.”(탈출16,7.8)
사랑은 사랑으로 갚고, 호의는 호의로 갚아야 합니다. 당연한 권리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계속되는 불평은 모세를 지치게 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들은 모세가 말한 대로 주님께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됩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 홍해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게 해주신 분,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신 분,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분! 그분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 아홉 명의 유다인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7-18)라고 말씀하시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의 모습은 훗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자녀들도 바뀌지 않습니다. 내일의 자녀들의 모습은 오늘의 부모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① 불평
사람인지라 불평할 수 있습니다. 불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없다면 그는 분명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불평은 감사의 기억이 사라질 때 살며시 고개를 들고, 어느 순간 당연함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서운함이 하나 둘 생겨날 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마음은 감사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감사함이 마음을 채우고 있을 때는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도 기쁨과 찬미가 흘러나옵니다. 고난 속에서의 찬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경 속에서의 배려는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이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감사로 나 자신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고,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안에 감사가 채워지지도 않고, 내 입에서도 감사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내 모습을 선명하게 보게 만들고, 내 안에 담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기에 탈출기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눔 17: 이스라엘 백성은 굶주림을 겪게 되자 이집트 종살이 하면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먹던 것을 추억하며,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모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잠시 모세의 마음이 되어서 서운하고 당황스러운 마음들을 표현해 봅시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으니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지치고 힘들수록 하느님께 더욱 의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
인간의 본성은 그러했나 보다.
그 본성을 사랑과 감사로 감싸 안아야 존중과 배려가 나오는데
감싼 것이 없으니 본성이 알몸 그대로 나왔나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이 백성의 모습은
영도자인 모세의 힘을 빠지게 만들고,
공동체를 은총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출애굽이라는 은총은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고,
눈앞에 펼쳐진 굶주림이나 갈증, 두려움은 모두 모세 탓으로 돌려버리고 있다.
이 백성의 자유를 위하여 그렇게 노력했건만
종살이에 길들여진 이 백성은
온갖 악한 말들을 만들어 내어 모세에게 쏟아붓고 있다.
사랑 때문에 “예”하고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죽을 짓을 한 것처럼 몰아붙이며
하지 말아야 될 말들만 골라서 모세에게 쏟아붓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힘들고 지치면 불평하고 원망을 하게 된다.
이 백성은 더 나아가 종살이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참으로 악한 존재들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조금의 인내도 할 줄 모르는 존재,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 또한 이해하려 하신다.
긴 시간 노예 생활은 인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눈치와 순간의 안락함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 적응해 왔으니
삶의 모습을 바꾸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주시고,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치면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나 보다.
그렇게 기회를 주시나 보다.
그러니 기회를 주실 때 이 백성은 받아들여야 한다.
계속되는 노예근성은 결국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도 하는 사람이 계속 한다.
그렇게 불평하고 또 불평하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감사할 줄 모르고,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하느님의 사람을 계속해서 흔드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계속되는 불평이 몸에 달라붙으면
약속의 땅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은총에서 멀어진 인간의 끝은 결코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본성을 사랑과 감사로 감싸 놓아야 한다.
사랑과 감사로…,
②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생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고, 배은망덕하게 불평을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 백성을 이해해 주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이면 만나로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게 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16,4).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습니다. 메추라기는 시나이반도를 지나는 철새중의 하나입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16,15) 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여라. 너희 식구의 머리 수대로 한 오메르씩, 저마다 자기 천막에 사는 이들을 위하여 가져가거라.”(탈출16,16)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에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을 때는 저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이고,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되어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자연현상에 따른 것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자연현상이라면 일정 기간, 일정 장소에서 볼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매일 먹었고, 엿샛날에 거둔 양은 평일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나를 보관하도록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것을 한 오메르 가득 채워 대대로 보관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낼 때, 광야에서 너희를 먹여 살린 이 양식을 자손들이 볼 수 있게 하여라.”(탈출16,32)
모세는 “항아리 하나를 가져다 그 안에 만나 한 오메르를 가득 담아서, 주님 앞에 두어 대대로 보관하십시오.”(탈출16,33) 라고 명령하였고, 아론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언판 앞에 놓아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나눔 17: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은 어떠했을까요? 그것을 모아들이는 것을 바라보는 모세와 아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식사를 하고 있는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모세와 아론의 마음이 되어 봅시다.
하느님 백성은 가난함과 부족함 속에서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굶주림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백성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앞에 있는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시어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③ 하느님의 시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양식을 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엿샛날에는 똑같이 거두어 들여도 음식을 만들면 두 배가 되도록 해 주시어 안식일에는 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믿고 양식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탈출16,5)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더러는 더 많이, 더러는 더 적게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오메르로 되어 보자,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욕심을 부린 이들이 생겼습니다. 욕심을 부린 이들의 남겨진 음식에서는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마다, 제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평등한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종살이하며 주인을 위해 살던 그들이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엿샛날에는 안식일을 위해 미리 음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고약한 냄새를 피우지도 않고 벌레가 꾀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이것을 먹어라. 오늘은 주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오늘만은 들에서 양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엿새 동안 너희는 그것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인 이렛날에는 아무것도 없다.”(탈출16,25-26)
하느님께서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쉼” 속에서도 평화를 못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일에 중독된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렛날에 백성 가운데 몇몇이 그것을 거두어들이려고 나갔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언제까지 내 계명과 내 지시를 지키지 않으려느냐? 보아라, 주님이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래서 엿샛날에는 너희에게 이틀치 양식을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마라.”(탈출16,28-29) 그리하여 백성은 이렛날에는 쉬었습니다.
“숨과 쉼”
숨이 따뜻한 벽에 기댈 수 있으면 쉼이 되고
쉼이 그 따뜻한 벽에서 힘을 얻으면 생기 있는 숨이 됩니다.
숨은 생기 있는 기운이니 생기 있음으로 숨을 쉴 수 있고,
그 생기가 약해지면 삶의 자리에서 숨 막히게 됩니다.
그렇게 숨 막힌 삶은 생명을 숨죽이게 하고
생명의 기운은 그렇게 태양 아래 작은 웅덩이가 말라가듯 그렇게 메말라 버립니다.
숨이 생기 있어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 생기 있는 숨을 위해서는 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숨과 쉼은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생기를 더해갑니다.
주어진 삶에 끌려가며 바쁘게 숨을 쉬다보면
어느덧 연인인 쉼에서 멀어지게 되고,
연인에게서 멀어진 숨은 결국 생기를 잃게 됩니다.
몸도 쉬어야 하고 마음도 쉬어야 합니다.
몸이 쉬어야 생기 있는 숨을 쉴 수 있고,
마음이 쉬어야 기쁜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쉼이라는 벽에 기대어 깊이 있게 쉴 때,
생기 있는 숨을 내쉬며
삶의 자리에서 생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먼 길을 가는 순례자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지나가다
큰 나무를 만나면 그 나무 아래로 들어가 잠시 가던 길을 멈춥니다(休).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서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떠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큰 나무를 그냥 지나치는 순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그 큰 나무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되어 주고,
순례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는 생기 있는 숨을 쉬기 위해
자주 그 큰 나무 아래로 들어가 그 나무에 기대어야 합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생기를 얻고,
“삶의 꽃을 피우는 숨”을 내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은 그 나무를 일컬어 “십자나무”라고 합니다.
“십자나무”
2.3. 마싸와 므리바의 물(탈출17,1-7)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주님의 분부대로 신 광야를 떠나 차츰차츰 자리를 옮겨 갔습니다. 그들은 르피딤에 진을 쳤는데,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은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탈출17,2) 하면서 모세와 시비하였습니다. 물을 달라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째서 나와 시비하려 하느냐? 어째서 주님을 시험하느냐?”(탈출17.1-2) 라고 말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곳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말하였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17,3)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갈증을 겪게 되자 모세를 위협하였습니다. 그들은 갈증 앞에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아마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할 때도 그렇게 위협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탈출17,4)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파라오의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지팡이이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지팡이이며, 갈대 바다를 가른 지팡이입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를 하느님 백성에게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하느님 백성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돌을 던진다 할지라도 모세는 그들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거라. 나일강을 친 너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탈출17,5-6).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탈출17,7)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습니다.
나눔 18: 고통 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의심이 생겨납니다.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의심하기도 합니다. 또 하느님께서 계시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의심하는 행동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점은 무엇입니까?
마싸는 시험하다는 뜻이 있고, 므리바는 싸웠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싸와 므리바를 기억하면서 이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께 불경을 저질렀는지를 기억해보고, 내 삶의 자리를 ‘마싸와 므리바’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조장들의 노래”
발걸음이 무겁다.
이집트에서 벽돌을 만들고
짐을 옮기는 것을 감독할 때는
편안한 잠자리와 기름진 음식이 보장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나에게 보장 되는 것이 없다.
저들과 똑같은 데서 잠자야 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똑같이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저들과 똑같은 권한을 가졌고, 내가 말해도 들을 사람은 없다.
이집트의 삶이 그립다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그립다.
이 모래바람이 싫다.
갈증은 너무도 힘들다.
모래바람이 불어올수록 모세를 향한 미움은 커져만 가고
갈증이 심해질수록 모세를 향한 원망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모세가 더더욱 싫다.
오늘도 동족들의 마음을 선동이나 하여
나의 원망과 미움을 키워보려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모세와 함께 있습니다. 이 백성은 자신들의 입을 절제하며 모세를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세를 만나는 것이니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와 존경 안에서 모세를 만나야 합니다. 모세와 함께 눈앞에 주어진 역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노력하며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들의 입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며, 눈앞의 것만을 찾아 움직이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며 끊임없이 모세를 마음 아프게 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는 누구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조그만 것에도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광야는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향하는 백성들이 그저 잠시 지나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들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백성을 이끌고 계십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누구와 함께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광야는 결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꿔야 하느님 백성의 생활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 속에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모세와 함께 나아가는 이 출애굽의 여정은 얼마나 희망찬 길입니까? 더 이상 내 가족이 이집트인의 노예가 아니고,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며, 평등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감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 면에서 출애굽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여정은 오늘도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있고, 광야의 고통은 지금 우리가 머무는 공동체에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만 생각하면 공동체의 삶은 힘들어지고, 공동체를 생각하면 공동체는 행복해 집니다. “나 하나의 불평과 불만”은 공동체의 불평과 불만이 되고, “나 하나의 배려와 순종”은 공동체의 기쁨과 은총이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고, 옆에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르치려 하지 말고, 함께 알아가려 해야 합니다. 내 분풀이를 만만한 사람에게 쏟아붓지 말고, 내 입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4. 아말렉족과 싸워 이기다(탈출17,8-16)
출애굽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부족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첫 부족은 아말렉족입니다. 아말렉족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강한 이집트 군대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비를 건 아말렉족은 어리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명백히 하느님께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는 아말렉족은 어리석음을 넘어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탈출17,9)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웠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습니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모세의 발 아래 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혔습니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양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 민족과 아말렉족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대열에서 처진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은 절대로 아말렉과는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기록하여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물려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아 그 이름을 “야훼 니씨”라 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손 하나가 주님의 어좌를 거슬러 들리리니, 주님과 아말렉 사이에 대대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탈출17,14-16) “야훼 니씨”라는 것은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 싸움의 승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싸워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주님의 깃발을 높이 언제나 승리의 행군을 해야 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던 것처럼 하느님 백성은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2.5. 이트로가 사위 모세를 찾아오다(탈출18,1-27)
모세에게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로 미디안의 사제이며 모세의 장인인 이트로입니다. 이트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어떻게 이끌어 내셨는지를 듣고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이트로의 방문은 하느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트로의 충고에 따라 재판관들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① 이트로의 제사
모세의 장인 이트로는 친정에 돌아와 있던 모세의 아내 치포라와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제르를 데리고 모세에게로 왔습니다. 모세의 가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찾아온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을 맞으러 나가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천막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에게 하신 모든 일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트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듣고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의 손과 파라오의 손에서 자네들을 구해 주신 주님, 이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 아래에서 빼내어 구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리라! 이집트인들이 이 백성을 방자하게 다루었지만, 그 일에서도 이제 나는 주님께서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았네.”(탈출18,10-11)
모세의 장인 이트로는 하느님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봉헌물을 모두 태워 연기를 피워 올리는 번제는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다는 뜻이며, 그분의 주도권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화제물이라고 합니다. 봉헌물은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나눠 먹었습니다.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공동체는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이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느님 앞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파라오에게 말한 출애굽의 처음 명분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모세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탈출3,18)라고 파라오에게 말하게 하셨고, 모세는 그렇게 파라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 길을 간 마라와 르피딤에서도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라고 한 것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종살이를 하겠습니다.”와 “사흘 길을 걸어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와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한 후에,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규정대로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② 이트로의 충고
모세를 찾아온 장인 이트로는 모세가 출애굽한 백성들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하루는 백성을 위한 하루였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모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일이 생기면 모세에게 왔습니다. 모세는 이웃 간의 문제를 재판해 주었고, 하느님의 규정들과 지시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모세는 아직까지 이 일을 혼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트로가 보기에는 모세가 일하는 방식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모세도 지치고 백성들도 지쳐 버릴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트로는 조심스럽게 모세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자네가 일하는 방식은 좋지 않네.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가 거느린 백성도 아주 지쳐 버리고 말 걸세. 이 일은 자네에게 너무나 힘겨워 자네 혼자서는 할 수가 없네. 이제 내가 자네에게 충고할 터이니 내 말을 듣게. 아무쪼록 하느님께서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비네.”(탈출18,17-19)
이트로는 모세에게 충고를 하면서 모세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가갔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충고를 통해서 이트로와 모세의 관계가 멀어지면 안 됩니다. 또한 이 충고는 모세와 이 백성을 위한 충고이기에 하느님과도 관계가 됩니다. 모세가 이트로의 충고를 하느님께서 이트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하느님 백성에게도 변화가 생기고, 장인과 사위의 관계도 금이 가지 않습니다. 이트로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충고를 하기 전에 “아무쪼록 하느님께서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비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트로는 사랑을 담아서 모세에게 충고하였습니다.
첫째, 자네는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대리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일을 하느님께 가져가게나. 그리고 그들에게 규정들과 지시들을 밝혀 주고, 그들이 걸어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게.(탈출18,19-20)
둘째, 자네는 온 백성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진실하며 부정한 소득을 싫어하는 유능한 사람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 대장, 십인 대장으로 백성 위에 세우게. 이들이 늘 백성을 재판하고, 큰일만 자네에게 가져오도록 하게. 작은 일들은 모두 그들이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과 짐을 나누어 져서, 자네 짐을 덜게나.(탈출18,21-22)
이트로의 충고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짐을 나누어 져서, 자네 짐을 덜게나.”라는 말은 이트로가 모세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이트로는 조심스럽게 모세에게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작은 것에 힘을 쓰지 말고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③ 이트로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모세
모세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했기에 장인의 말이 옳은 것임을 알았고, 하느님께서 장인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장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던 모세는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 충고를 통해서 장인의 사랑을 더 깊이 있게 느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이 말한 대로 다 하였습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 대장, 십인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늘 백성을 재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만 모세에게 가져오고, 작은 일들은 모두 그들이 맡아 재판하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백성들 중에 뽑힌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뽑힌 이들은 모세와 협력하며 하느님 백성을 돌보았습니다.
④ 조언을 받아들이는 삶
이트로는 조심스럽게 충고했고, 모세는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이트로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충고는 상대방과 더 깊이 있는 친교를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상대방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장인 이트로가 일을 나누고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충고하였을 때 모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모세가 “장인어른!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백성들 중에는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이 없고, 그럴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려워도 어쩔 수 없이 제가 다 해야 합니다. 장인어른이 이 상황을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이트로와 모세의 관계는 멀어졌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일 속에 파묻혀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트로가 모세에게 조언을 해 주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깊이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친해도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고를 통해서 오히려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 생각되면 차라리 말을 안 하게 됩니다. 나의 친구가 나에게 아무 말을 안 하는 이유는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충고하며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참으면서 너그럽게 기다려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 안에 머물며 형제자매들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더 크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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