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 고린토

코린토는 신약 시대 당시 로마제국의 속주(屬州)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코린토는 헬레니즘 시대에 산업과 무역과 상업화된 오락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임금이 죽고 그리스에서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커진 후, 그곳에서는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그 뒤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경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후 코린토는 100여 년 정도 방치되어 있다가 기원전 46년경에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후에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가 되고 로마제국의 지방 총독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코린토는 양옆에 훌륭한 두 항구인 겐크레아와 레기움을 끼고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 사이에 건설된 도시였다. 그래서 로마나 유럽과 아시아 간의 통로 등 동서 해상로와 육상로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또한 로마인들, 그리스인들, 유다인들, 시리아인들, 이집트인들의 상호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상인들과 선원들이 코린토로 몰려 왔으며, 청동 산업, 도기 제조업, 선박 제조업이 특히 발달했다. 코린토는 또 말타기와 운동, 음악을 중심으로 서로 겨루는 코린토 지협 경기 대회각주1) 로도 유명했다.

도시는 주랑과 상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 안에는 회의장과 설교단이 있는 아고라각주2) , 용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커다란 사각형의 공공건물들, 사원들, 공중목욕탕, 음악당, 극장, 원형 경기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유다인들의 회당도 있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인들이었지만 그 밖에도 많은 수의 유다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 이집트인들,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온 자유민들이나 정부 관리들도 있었다. 그리고 노예의 수가 자유민들보다 더 많았다. 이 도시가 상업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쳤을 당시의 인구는 자유민 20만 명 정도, 노예 5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린토는 당시 풍요를 누리는 곳이기도 했지만 사치와 부도덕함으로 악명이 높기도 했다. 코린토 시의 높은 언덕에 있던 이교 신전인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 명의 종교적인 매춘부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코린토의 문화와 윤리가 상당히 오염되고 있었다. 그래서 코린토 사람처럼 산다는 말은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산다는 뜻으로 쓰일 정도였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안에는 성적(性的)인 부도덕함과 맞서 싸웠던 코린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각주3) 코린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적으로는 성적인 문란함이나 타락의 늪에서 빠져나왔지만 주변의 이교도 코린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유혹의 거대한 손길은 늘 코린토의 신자들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코린토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운 것은 사도 바오로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코린토를 방문하여 1년 반 정도 머물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서의 행적은 사도행전 181-18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폴로 역시 바오로가 코린토를 방문하고 떠난 뒤 그곳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각주4) 한편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바오로가 코린토에 머무는 동안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5)

코린토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는 활기찬 공동체였지만 반면에 싸움과 분열, 패륜과 음행 등 공동체의 내적인 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코린토를 떠난 후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에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굳건히 하기 위해 편지를 썼으며 그것이 코린토 1서와 2서이다. 이 서간들에는 기원후 1세기 무렵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와 우상숭배의 환경 속에서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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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코린토는 신약 시대 당시 로마제국의 속주(屬州)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코린토는 헬레니즘 시대에 산업과 무역과 상업화된 오락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임금이 죽고 그리스에서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커진 후, 그곳에서는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그 뒤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경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후 코린토는 100여 년 정도 방치되어 있다가 기원전 46년경에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후에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가 되고 로마제국의 지방 총독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코린토는 양옆에 훌륭한 두 항구인 겐크레아와 레기움을 끼고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 사이에 건설된 도시였다. 그래서 로마나 유럽과 아시아 간의 통로 등 동서 해상로와 육상로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또한 로마인들, 그리스인들, 유다인들, 시리아인들, 이집트인들의 상호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상인들과 선원들이 코린토로 몰려 왔으며, 청동 산업, 도기 제조업, 선박 제조업이 특히 발달했다. 코린토는 또 말타기와 운동, 음악을 중심으로 서로 겨루는 코린토 지협 경기 대회각주1) 로도 유명했다.

    도시는 주랑과 상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 안에는 회의장과 설교단이 있는 아고라각주2) , 용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커다란 사각형의 공공건물들, 사원들, 공중목욕탕, 음악당, 극장, 원형 경기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유다인들의 회당도 있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인들이었지만 그 밖에도 많은 수의 유다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 이집트인들,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온 자유민들이나 정부 관리들도 있었다. 그리고 노예의 수가 자유민들보다 더 많았다. 이 도시가 상업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쳤을 당시의 인구는 자유민 20만 명 정도, 노예 5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린토는 당시 풍요를 누리는 곳이기도 했지만 사치와 부도덕함으로 악명이 높기도 했다. 코린토 시의 높은 언덕에 있던 이교 신전인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 명의 종교적인 매춘부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코린토의 문화와 윤리가 상당히 오염되고 있었다. 그래서 코린토 사람처럼 산다는 말은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산다는 뜻으로 쓰일 정도였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안에는 성적(性的)인 부도덕함과 맞서 싸웠던 코린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각주3) 코린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적으로는 성적인 문란함이나 타락의 늪에서 빠져나왔지만 주변의 이교도 코린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유혹의 거대한 손길은 늘 코린토의 신자들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코린토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운 것은 사도 바오로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코린토를 방문하여 1년 반 정도 머물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서의 행적은 사도행전 181-18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폴로 역시 바오로가 코린토를 방문하고 떠난 뒤 그곳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각주4) 한편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바오로가 코린토에 머무는 동안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5)

    코린토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는 활기찬 공동체였지만 반면에 싸움과 분열, 패륜과 음행 등 공동체의 내적인 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코린토를 떠난 후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에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굳건히 하기 위해 편지를 썼으며 그것이 코린토 1서와 2서이다. 이 서간들에는 기원후 1세기 무렵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와 우상숭배의 환경 속에서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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