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레오 1세 교황 Leo 1. der GroBe

50. 대 레오 1세 교황 Leo Ⅰ. der GroBe 440~461


대 레오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였다. 440년 9월 29일 등극한 교황 대 레오 1세는 네스토리우스와 단성론의 이단에 대항하는 싸움을 그의 주요 과제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단자들은 449년 에페소에서(대 레오 교황이 명명한) 도둑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교황의 특사를 참석하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며, 교황의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황 대 레오 1세의 결정에 따라 그리스도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서방에서는 벌써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에서는 거의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마니교에 대해서도 대항하는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마니교는 그사이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단을 극복하기 위해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게다가 국가의 도움까지도 요청하였다. 황제는 449년 6월 19일에 법령은 반포하여 이단에 대항하여 법률을 엄격하게 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의 수위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을 자신의 또 다른 과제로 삼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 대 레오 1세는 베드로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세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인명록은 교황 대 레오 1세가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고유한 권위에 의존해서’결정을 내렸다고 전해 주고 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의 수위권은 성서가 진술하는 두 가지 근거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위임된 것(마태 16, 18)은 단지 베드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베드로좌에 등극하는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서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중에 사용된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교황 칭호가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 칭호는 직전에 사용되었던 ‘그리스도의 후계자’라는 교황 칭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황 대 레오 1세는 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황 역시 전체 교회를 위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자신들의 교구 내에서 행사하는 주교들의 지도권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 내에서 행사하는 수도 대주교와 총대주교들의 지도권은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교황과의 일치로 통합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레오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위해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루가 복음 22장 32절을 인용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형제들을 굳건하게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제는 베드로가 죽은 후 교황에게로 이어졌으며, 주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새겨 주신 사랑과 같은 사랑을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해 실천해야 한다고 교황 대 레오 1세는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교황 대 레오 1세의 긴박한 요청에 의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론을 최종적으로 배척하였고, 교황 대 레오 1세가 작성한 교서가 낭독되었고, 이 교서는 열광적인지지 아래 받아들여졌다. ꡒ이것은 교부들의 믿음이며, 사도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이처럼 가르쳤다.ꡓ바로 이것이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잘못된 교회 정책에 의해 불화로 얼룩졌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원래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한 칼케돈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기를 원하였다. 더구나 황제에 의해서 파견된 관리들이 사실상 공의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단성론을 단죄하는 이 매우 중대한 회의에서 황제 부부는 몸소 명예 의장직을 맡았다. 교황이 파견한 사람들은 현안의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첫 발언의 기회를 가졌고, 공의회의 결정 사항에 제일 먼저 서명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보다 상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사절들은 공의회의 실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절들은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좌를 로마 다음의 제2위의 자리로 부상시키는 결정을 막지 못하였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공의회의 결정들을 마지막에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는-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서열변동-승인했다.


  451년 훈족은 약탈하고 살인하면서 북이탈리아로 침입하였고, 서로마의 황제는 훈족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없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에게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교황 대 레오 1세는 만토바의 회담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아틸라로 하여금 평화를 약속하도록 하는 결과를 얻어냈다.이로써 로마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교황의 위상도 크게 부각되었다. 455년 게이세리쿠스(Geiserich) 왕이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를 위협했을 때, 어떤 황제도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로마 시민들은 다시금 교황에게 기대를 걸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적들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 도시가 약탈당하는 것을 완전하게 막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도시가 폐허가 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부각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교항 대 레오 1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후대의 세상은 그에게 ꡐ위대한ꡑ혹은 ꡐ대ꡑ라는 별호를 부여했다.


  교황 대 레오 1세가 남긴 편지들과 대략 100여 편의 설교들은 교황이 종교적으로 신심이 매우 돈독한 인물임을 보여 주고 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당시 서방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461년 11월 10일 교황 대 레오 1세는 서거하였고, 서거 후에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54년 그를 교회학자로 추앙했다. 그리고 교황 대 레오 1세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전례 기념일은 11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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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대 레오 1세 교황 Leo Ⅰ. der GroBe 440~461

    대 레오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였다. 440년 9월 29일 등극한 교황 대 레오 1세는 네스토리우스와 단성론의 이단에 대항하는 싸움을 그의 주요 과제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단자들은 449년 에페소에서(대 레오 교황이 명명한) 도둑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교황의 특사를 참석하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며, 교황의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황 대 레오 1세의 결정에 따라 그리스도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서방에서는 벌써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에서는 거의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마니교에 대해서도 대항하는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마니교는 그사이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단을 극복하기 위해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게다가 국가의 도움까지도 요청하였다. 황제는 449년 6월 19일에 법령은 반포하여 이단에 대항하여 법률을 엄격하게 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의 수위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을 자신의 또 다른 과제로 삼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 대 레오 1세는 베드로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세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인명록은 교황 대 레오 1세가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고유한 권위에 의존해서’결정을 내렸다고 전해 주고 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의 수위권은 성서가 진술하는 두 가지 근거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위임된 것(마태 16, 18)은 단지 베드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베드로좌에 등극하는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서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중에 사용된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교황 칭호가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 칭호는 직전에 사용되었던 ‘그리스도의 후계자’라는 교황 칭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황 대 레오 1세는 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황 역시 전체 교회를 위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자신들의 교구 내에서 행사하는 주교들의 지도권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 내에서 행사하는 수도 대주교와 총대주교들의 지도권은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교황과의 일치로 통합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레오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위해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루가 복음 22장 32절을 인용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형제들을 굳건하게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제는 베드로가 죽은 후 교황에게로 이어졌으며, 주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새겨 주신 사랑과 같은 사랑을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해 실천해야 한다고 교황 대 레오 1세는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교황 대 레오 1세의 긴박한 요청에 의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론을 최종적으로 배척하였고, 교황 대 레오 1세가 작성한 교서가 낭독되었고, 이 교서는 열광적인지지 아래 받아들여졌다. ꡒ이것은 교부들의 믿음이며, 사도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이처럼 가르쳤다.ꡓ바로 이것이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잘못된 교회 정책에 의해 불화로 얼룩졌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원래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한 칼케돈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기를 원하였다. 더구나 황제에 의해서 파견된 관리들이 사실상 공의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단성론을 단죄하는 이 매우 중대한 회의에서 황제 부부는 몸소 명예 의장직을 맡았다. 교황이 파견한 사람들은 현안의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첫 발언의 기회를 가졌고, 공의회의 결정 사항에 제일 먼저 서명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보다 상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사절들은 공의회의 실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절들은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좌를 로마 다음의 제2위의 자리로 부상시키는 결정을 막지 못하였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공의회의 결정들을 마지막에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는-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서열변동-승인했다.

      451년 훈족은 약탈하고 살인하면서 북이탈리아로 침입하였고, 서로마의 황제는 훈족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없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에게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교황 대 레오 1세는 만토바의 회담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아틸라로 하여금 평화를 약속하도록 하는 결과를 얻어냈다.이로써 로마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교황의 위상도 크게 부각되었다. 455년 게이세리쿠스(Geiserich) 왕이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를 위협했을 때, 어떤 황제도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로마 시민들은 다시금 교황에게 기대를 걸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적들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로마 도시가 약탈당하는 것을 완전하게 막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도시가 폐허가 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부각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교항 대 레오 1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후대의 세상은 그에게 ꡐ위대한ꡑ혹은 ꡐ대ꡑ라는 별호를 부여했다.

      교황 대 레오 1세가 남긴 편지들과 대략 100여 편의 설교들은 교황이 종교적으로 신심이 매우 돈독한 인물임을 보여 주고 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당시 서방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461년 11월 10일 교황 대 레오 1세는 서거하였고, 서거 후에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54년 그를 교회학자로 추앙했다. 그리고 교황 대 레오 1세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전례 기념일은 11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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