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마쿠스 교황 Symmachus

 56. 심마쿠스 교황  Symmachus  498~514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 서거 후 다수의 비잔틴 적대자들은 심마쿠스 부제를 교황으로 선출했다(498년 11월 22일).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를 지지하였던 소수는 대립 교황으로 라우렌시오를 선출했다. 이 두 교황은 그들의 선출일에 주교로 서품되었는데, 심마쿠스는 라테라노 성당에서 라우렌시오는 성모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서품되었다. 동고트족 테오도리크(Theoderich) 대왕은 심마쿠스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도 506년까지 교황직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496년에 개최된 시노드는 교황 선거에 관한 최초의 교회 교령을 반포했다. 이 교령은 앞으로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는 교황 선거의 경우, 양측 두 후보자 중 어떠한 후보자도 교황으로 선출될 수 없으며, 이런 경우 다수의 득표에 의한 합의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년 후에 사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심마쿠스의 반대자들은 교황 심마쿠스를 상대로 대항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고발을 제기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러한 고발의 이유를 해명하도록 501년 5월부터 10월까지 개최된 시노드에 위임하였다. 대왕이 파견한 조사단이 불참한다면 심마쿠스는 시노드에 출석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 테오도리크 대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결과 로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결이 전개되었다. 이제 심마쿠스는 시노드에 출석하고자 했던 예전의 의사를 철회하였다. 그가 불참한 가운데 시노드는, 교황은 사도좌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법정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심판만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밖에도 시노드는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교황 심마쿠스에게 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분열을 획책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종식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교황 심마쿠스를 지지했고 일부 성직자들은 지지를 거부했다. 이러한 논쟁과 대결은 이전부터 전해져 오는 위조 문서집인 이른바 『심마쿠스의 위조』(Symmacbianiscben Falscbungen)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교황 인명록은 교황 심마쿠스가 마니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 엄청난 혼란과 대결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내적으로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500년 이전에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아울러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부르군트의 국왕인 지기스문트(Sigismund)가 아리우스주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에 이른바 ꡐ실베스테르 전설ꡑ이 시작되었다. 교황 심마쿠스는 514년 7월 19일에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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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심마쿠스 교황  Symmachus  498~514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 서거 후 다수의 비잔틴 적대자들은 심마쿠스 부제를 교황으로 선출했다(498년 11월 22일).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를 지지하였던 소수는 대립 교황으로 라우렌시오를 선출했다. 이 두 교황은 그들의 선출일에 주교로 서품되었는데, 심마쿠스는 라테라노 성당에서 라우렌시오는 성모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서품되었다. 동고트족 테오도리크(Theoderich) 대왕은 심마쿠스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도 506년까지 교황직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496년에 개최된 시노드는 교황 선거에 관한 최초의 교회 교령을 반포했다. 이 교령은 앞으로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는 교황 선거의 경우, 양측 두 후보자 중 어떠한 후보자도 교황으로 선출될 수 없으며, 이런 경우 다수의 득표에 의한 합의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년 후에 사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심마쿠스의 반대자들은 교황 심마쿠스를 상대로 대항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고발을 제기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러한 고발의 이유를 해명하도록 501년 5월부터 10월까지 개최된 시노드에 위임하였다. 대왕이 파견한 조사단이 불참한다면 심마쿠스는 시노드에 출석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 테오도리크 대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결과 로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결이 전개되었다. 이제 심마쿠스는 시노드에 출석하고자 했던 예전의 의사를 철회하였다. 그가 불참한 가운데 시노드는, 교황은 사도좌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법정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심판만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밖에도 시노드는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교황 심마쿠스에게 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분열을 획책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종식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교황 심마쿠스를 지지했고 일부 성직자들은 지지를 거부했다. 이러한 논쟁과 대결은 이전부터 전해져 오는 위조 문서집인 이른바 『심마쿠스의 위조』(Symmacbianiscben Falscbungen)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교황 인명록은 교황 심마쿠스가 마니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 엄청난 혼란과 대결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내적으로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500년 이전에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아울러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부르군트의 국왕인 지기스문트(Sigismund)가 아리우스주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에 이른바 ꡐ실베스테르 전설ꡑ이 시작되었다. 교황 심마쿠스는 514년 7월 19일에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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