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10세 교황 Gregor 10.

 216. 그레고리오 10세 교황  Gregor Ⅹ.  1271~1276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서거 후(1268년) 공위 기간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추기경단은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과 독일에 우호적인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황 선출과 관련해서 원만한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다. 끝내는 타협안으로서 리에주(Luttich)의 수석 부제 테오발도(Teobaldo Visconti)를 교황 – 그레고리오 10세 – 으로 선출하였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성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10세는 1271년 9월 1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27일에 이르러서야 착좌식을 가질 수 있었다.


  1273년 4월 13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프랑스 리옹에서 개최될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주요 의안으로 교회 개혁,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 성지를 위한 후원 등을 열거하였다. 그사이 그리스의 황제 미카엘 8세가 교황에게 일치문제를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황제 미카엘 8세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1274년 5월 7일 열네 번째의 공의회가 리옹에서 – 리옹에서는 두 번째 공의회 – 개막되었다. 이 공의회에는 거의 300여 명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이 참석하였다. 6월 이후에는 그리스에서 파견된 특사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리스의 황제 미카엘은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고,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수용할 것을 거듭 천명하였다. 그래서 6월 29일 미사 도중 독서와 복음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봉독되기도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6월 6일 그리스 교회와의 일치를 공표하였다. 이로써 1054년 이후 존속하여 왔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분열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양 교회의 일치는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러한 일치의 결정에 저항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있어서 그리스 교회와의 일치는 성지 예루살렘의 해방이라는 관심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리옹의 공의회는 새로운 십자군의 출정을 결의하였다.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세 번째의 의안인 교회 개혁 문제는 시간의 부족 때문에 자세하게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교령이 반포되었다. 그 가운데 교황 선거와 관련된 교령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교령에 의하면 교황의 서거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들은 외국에서 오는 추기경들을 10일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되고, 교황 선거를 위해서 추기경들은 폐쇄된 공간(봉쇄 구역)에 들어가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은 금지되었고, 선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봉쇄 구역 안에서의 생활 조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수입도 당분간 중단되어야 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추기경들은 이러한 규정에 반대하였으나,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다른 교부들은 이 규정을 수정 없이 원안대로 찬성하였다. 이러한 교황 선거 규정의 근본적인 형태는 현재의 교황 선거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리옹에서의 공의회가 폐막된 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십자군의 출정을 위해 몰두하였다. 서방의 거의 모든 제후들은 물론, 그리스의 황제도 비록 서방 교회와의 화평이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출정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다. 이 당시 독일은 오랫동안 황제 또는 국왕의 공위 기간이라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자군의 출정은 독일의 이러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1273년 여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독일의 제후들에게 황제 또는 국왕을 선출하기 위한 적법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황 자신이 새로운 국왕을 지명하리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교황의 촉구에 따라 마인츠 교구의 대주교는 제후들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러모았고, 그들은 1273년 10월 1일 거의 만장일치로 함스부르크의 루돌프(Rudolf von Hababurg)를 독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루돌프는 아헨에서 독일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9월 26일에 루돌프의 선출을 재가하였다. 그리고 루돌프의 황제 대관식 날짜를 우선 1275년 5월 23일로 잠정저긍로 결저앟였으나, 곧 1275년 11월 1일로 확정하였다.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이해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난 루돌프는 지난날 교황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존중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사이 황제 대관식을 위한 일자가 1276년 2월 2일로 변경되었다. 루돌프와 그의 기사들은 십자군 출정을 위한 다짐으로 십자 표지를 부착하였다. 하지만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기 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6년 1월 10일 아레초(Arezzo)에서 서거하였다.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시성시켰다. 그의 전례 기념일은 그의 사망일인 1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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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6. 그레고리오 10세 교황  Gregor Ⅹ.  1271~1276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서거 후(1268년) 공위 기간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추기경단은 프랑스에 우호적인 진영과 독일에 우호적인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황 선출과 관련해서 원만한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다. 끝내는 타협안으로서 리에주(Luttich)의 수석 부제 테오발도(Teobaldo Visconti)를 교황 – 그레고리오 10세 – 으로 선출하였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성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10세는 1271년 9월 1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27일에 이르러서야 착좌식을 가질 수 있었다.

      1273년 4월 13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프랑스 리옹에서 개최될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주요 의안으로 교회 개혁,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 성지를 위한 후원 등을 열거하였다. 그사이 그리스의 황제 미카엘 8세가 교황에게 일치문제를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황제 미카엘 8세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1274년 5월 7일 열네 번째의 공의회가 리옹에서 – 리옹에서는 두 번째 공의회 – 개막되었다. 이 공의회에는 거의 300여 명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이 참석하였다. 6월 이후에는 그리스에서 파견된 특사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리스의 황제 미카엘은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고,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수용할 것을 거듭 천명하였다. 그래서 6월 29일 미사 도중 독서와 복음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봉독되기도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6월 6일 그리스 교회와의 일치를 공표하였다. 이로써 1054년 이후 존속하여 왔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분열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양 교회의 일치는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러한 일치의 결정에 저항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있어서 그리스 교회와의 일치는 성지 예루살렘의 해방이라는 관심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리옹의 공의회는 새로운 십자군의 출정을 결의하였다.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세 번째의 의안인 교회 개혁 문제는 시간의 부족 때문에 자세하게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교령이 반포되었다. 그 가운데 교황 선거와 관련된 교령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교령에 의하면 교황의 서거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들은 외국에서 오는 추기경들을 10일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되고, 교황 선거를 위해서 추기경들은 폐쇄된 공간(봉쇄 구역)에 들어가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은 금지되었고, 선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봉쇄 구역 안에서의 생활 조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수입도 당분간 중단되어야 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추기경들은 이러한 규정에 반대하였으나,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다른 교부들은 이 규정을 수정 없이 원안대로 찬성하였다. 이러한 교황 선거 규정의 근본적인 형태는 현재의 교황 선거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리옹에서의 공의회가 폐막된 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십자군의 출정을 위해 몰두하였다. 서방의 거의 모든 제후들은 물론, 그리스의 황제도 비록 서방 교회와의 화평이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출정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다. 이 당시 독일은 오랫동안 황제 또는 국왕의 공위 기간이라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자군의 출정은 독일의 이러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1273년 여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독일의 제후들에게 황제 또는 국왕을 선출하기 위한 적법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황 자신이 새로운 국왕을 지명하리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교황의 촉구에 따라 마인츠 교구의 대주교는 제후들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러모았고, 그들은 1273년 10월 1일 거의 만장일치로 함스부르크의 루돌프(Rudolf von Hababurg)를 독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루돌프는 아헨에서 독일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9월 26일에 루돌프의 선출을 재가하였다. 그리고 루돌프의 황제 대관식 날짜를 우선 1275년 5월 23일로 잠정저긍로 결저앟였으나, 곧 1275년 11월 1일로 확정하였다.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이해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난 루돌프는 지난날 교황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존중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사이 황제 대관식을 위한 일자가 1276년 2월 2일로 변경되었다. 루돌프와 그의 기사들은 십자군 출정을 위한 다짐으로 십자 표지를 부착하였다. 하지만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기 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6년 1월 10일 아레초(Arezzo)에서 서거하였다.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시성시켰다. 그의 전례 기념일은 그의 사망일인 1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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