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요한 22세 교황 Johannes ⅩⅫ. 1316~1334
교황 클레멘스 5세 서거 후 소집되었던 봉쇄 교황 선거는 약 2년 3개월간 계속되었다. 추기경단은 17명의 프랑스 출신과 7명의 이탈리아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 추종자들은 봉쇄 교황 선거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2년 디에 추기경들은 다시금 교황 선거를 위해 리옹에 모였다. 1316년 8월 7일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 자크(Jacques Duese) – 요한 22세 -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요한 22세는 이미 70세의 고령이었다. 1300년 이후부터 교황 요한 22세는 프레유(Frejus) 교구의 교구장으로 재직하였고, 1310년에는 아비뇽 교구의 교구장으로 활동하다가 1310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배 기간 동안 매우 중요한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교황 요한 22세의 삶은 매우 소박하였고, 신학과 교회법에 대해 철저한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교황 요한 22세의 착좌식은 1316년 9월 3일 리옹에서 개최되었다.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교황 요한 22세가 아비뇽에 정주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로마로 귀환하고자 하였던 자신의 의지를 양보하였다.
독일의 경우 국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이중의 선거가 있었다. 즉 오버바이에른(Oberbayern)의 루트비히 4세와 오스트리아의 백작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Schone)가 독일의 국왕으로 동시에 선출되었다. 루트비히 4세가 더 많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결과 독일의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사태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루트비히 4세는 교황의 퇴위를 선언하였고, 대신 니콜라오 5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게 하였다. 하지만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는 2년 뒤에 교황 요한 22세에게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22세는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죽을 때까지 그를 아비뇽에 구금시켰다.
교회 내적인 시각에서 볼 때 1323년에 있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이 교황 요한 22세가 남긴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고, 1329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Eckhart)가 주장한 31개의 명제에 대한 단죄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이 사용하는 삼중관에 띠를 둘러 장식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교황 요한 22세의 재임 기간은 친인척 중용의 관행으로 점철되었고, 성직의 매매 현상도 격심하였다. 아울러 추기경단에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하였고, 로마 귀환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22세는 1334년 12월 4일 서거하였다.

228. 요한 22세 교황 Johannes ⅩⅫ. 1316~1334
교황 클레멘스 5세 서거 후 소집되었던 봉쇄 교황 선거는 약 2년 3개월간 계속되었다. 추기경단은 17명의 프랑스 출신과 7명의 이탈리아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 추종자들은 봉쇄 교황 선거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2년 디에 추기경들은 다시금 교황 선거를 위해 리옹에 모였다. 1316년 8월 7일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 자크(Jacques Duese) – 요한 22세 -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요한 22세는 이미 70세의 고령이었다. 1300년 이후부터 교황 요한 22세는 프레유(Frejus) 교구의 교구장으로 재직하였고, 1310년에는 아비뇽 교구의 교구장으로 활동하다가 1310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배 기간 동안 매우 중요한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교황 요한 22세의 삶은 매우 소박하였고, 신학과 교회법에 대해 철저한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교황 요한 22세의 착좌식은 1316년 9월 3일 리옹에서 개최되었다.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교황 요한 22세가 아비뇽에 정주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로마로 귀환하고자 하였던 자신의 의지를 양보하였다.
독일의 경우 국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이중의 선거가 있었다. 즉 오버바이에른(Oberbayern)의 루트비히 4세와 오스트리아의 백작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Schone)가 독일의 국왕으로 동시에 선출되었다. 루트비히 4세가 더 많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결과 독일의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사태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루트비히 4세는 교황의 퇴위를 선언하였고, 대신 니콜라오 5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게 하였다. 하지만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는 2년 뒤에 교황 요한 22세에게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22세는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죽을 때까지 그를 아비뇽에 구금시켰다.
교회 내적인 시각에서 볼 때 1323년에 있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이 교황 요한 22세가 남긴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고, 1329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Eckhart)가 주장한 31개의 명제에 대한 단죄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이 사용하는 삼중관에 띠를 둘러 장식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교황 요한 22세의 재임 기간은 친인척 중용의 관행으로 점철되었고, 성직의 매매 현상도 격심하였다. 아울러 추기경단에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하였고, 로마 귀환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22세는 1334년 12월 4일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