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 교황 Johannes 23.

 300. 요한 23세 교황 Johannes ⅩⅩⅢ.  1958~1963

교황 비오 12세 서거 후 1958년 10월 25일 시작한 교황 선거는 10월 28일 요한 23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미 15세기 초기에 동일한 이름의 교황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15세기 초기의 요한 23세 교황은 그 당시의 서방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선출되었으나,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어떤 교황 인명록에는 15세기의 교황 요한 23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1958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는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1881년 12월 25일 소토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였고 자녀가 많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재능 때문에 계속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끝내 로마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04년 8월 10일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교구의 주교 베르가모(Bergamo)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신학교에서 교회사, 교부학 그리고 호교론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위생병으로 복무하다가 나중에 군종 사제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21년 이후 로마의 포교성성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로마 신학교에서 교부학을 강의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그를 사도좌 순시자로 임명하여 불가리아에 파견하였고, 이때 그는 주교로 서품되었다. 소피아에서 9년간 근무한 후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 사절로 활동하였다. 먼저 이스탄불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는 아테네에서 근무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4년 12월 23일 그를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다. 프랑스는 독일군의 철수로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임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는 페탱(Petain) 원수와 협력하여 왔다. 하지만 페탱 원수는 새로 수립된 프랑스 정부의 신임을 얻지 못한 인물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33명의 프랑스 주교의 퇴임을 요구하였다. 새로 부임한 론칼리(Roncalli) 교황 대사는 프랑스 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저지하면서 프랑스 내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론칼리는 프랑스 정부의 관리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이들을 사르트르(Chartres)에 집합시켜 신학 공부를 계속하도록 조치하였다.


  1951년부터 론칼리는 파리의 유네스코 회의에 교황을 대리하여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53년 1월 12일 그는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대주교)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론칼리 추기경은 베네치아에서 사목자로서의 위상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1958년 10월 28일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그는 별로 알려지지 아니한 인물이었고 단지 과도기의 교황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교황의 나이(77세)를 감안할 때에는 적절한 표현일 수 있으나, 교황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에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 놓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심혈을 기울여야 할 세 가지 과제를 밝혔다. 첫 번째 과제는 로마를 위한 시노드의 개최였다.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 시노드를 통해 사목과 신앙 생활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려고 시도하였다. 로마 시노드는 1960년 1월 24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다. 두 번째 과제는 교회법을 새롭게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좌에 등극하자마자 즉시 이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 작업은 1983년에 완료되었다. 세 번째 과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이었다. 교황 요한 23세가 1959년 1월 25일 추기경들에게 공의회의 소집 계획을 발표하자 세계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성격을 ꡐ보편 공의회ꡑ로 규정하였다. ꡐ보편 공의회ꡑ라는 개념은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보편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교회 일치를 위한 활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명하였다. 즉 교회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며, 교회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1959년 6월 14일 처음으로 ꡐ아조르나멘토ꡑ(Aggiornamento: 개혁과 쇄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만일 교회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때, 갈라져 나간 형제들을 일치에 초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하면서 정확한 구상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개최 기간을 대략 3개월 정도로 예상하였다. 195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첫 번째 공의회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60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공의회 준비를 위한 2단계 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10개의 공의회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중앙 위원회와 그리스도교 일치를 촉진시키기 위한 사무국을 설립하였다. 이 사무국의 책임자로는 독일 추기경의 베아(Bea) 추기경이 임명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주교, 수도회, 가톨릭의 대학, 신학교 등에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주제를 제안할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대단한 제안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12월 25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일을 1962년 10월 11일로 확정하여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제안들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로렌토(Lorentto)와 아시시(Assisi)를 순례하였고, 이 순례 여행은 약 100년간의 이른바 ꡐ바티칸 포로 생활ꡑ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1962년 11월 11일 시작된 개막 회의에는 2,500여 명 이상의 교부들이 참석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보좌 주교들도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18개의 비가톨릭 교회들이 교황의 초청을 수락하여 공식적인 공의회 참관인을 파견하였다.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2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첫 번째 회기의 마지막 기간은 교황의 심각한 와병으로 어두운 그늘에 덮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두 번째 회기를 맞이하지 못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을 사목자로 여겼고, 그래서 로마의 성당, 교도소, 병원 등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성목요일에는 발씻김 예식(洗足禮)을 거행하였고, 성금요일에는 직접 전례를 주재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사람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빠른 친화력을 발휘하였고, 그의 따스한 마음은 평온과 기쁨으로 빛을 발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의 담화문이나 회칙은 자신의 사목적인 관심사를 대변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 6월 29일 자신의 교황좌 등극 회칙으로 Ad Petri Catbedram을 발표하였다. 이 회칙은 공의회의 개최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1959년 8월 1일 교황 요한 23세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비안네의 별세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을 반포하였고, 이 회칙을 통해 사제들을 위한 염려를 표명하였다. 1959년 9월에는 묵주의 기도에 대한 회칙이 발표되었고, 1959년 11월 29일에는 선교 문제를 다룬 회칙이 발표되었다. 이 회칙은 선교 지역의 교계 설정의 필요성과 선교 활동에 있어서 평신도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1년 5월 15일 사회 회칙 Mater et Magistra(어머니와 교사: 그리스도 정신과 사회 진보)를 발표하여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레오 대 교황의 서거 1500주년을 기념하여 교회의 일치를 역설하는 여섯 번째의 회칙을 발표하였다. 1963년 4월 11일 교황 권고인 Pacem in Terris(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여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의 모습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1962년 3월 7일 교황 요한 23세는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의 딸과 사위의 알현을 받았고, 박해받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교황 요한 23세는 침묵하는 교회를 위한 기도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교황요한 23세 자신은 오히려 전통을 고수하였다. 예를 들어 성서 해석에 대한 지침의 제시, 신학 연구에 적합한 라틴어의 고수, 프랑스의 노동사제의 금지 등은 바로 전통의 고수라는 노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의 개인적인 신심과 신앙심 역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황의 ꡐ영혼의 일기ꡑ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이 치유될 수 없는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1963년이 시작되면서 교황 요한 23세의 건강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3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서거하였다. ꡐ착하신 교황 요한ꡑ이라는 별칭은 그의 개성과 활동을 적절하게 묘사해 주고 있으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샀다. 공의의 교황으로서의 교황 요한 23세의 재임은 교회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출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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