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 18,9-14에 나타나는 바리사이인과 예수

2. 루가18,9-14에 관한 고찰

루가복음의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머리말(1,1-4) : 신약성서 가운데 루가 복음서 1,1-4와 사도행전 1,1-5에만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는 당대 그리이스 작가들의 관례에 따라 집필 대상과 선례, 내력과 동기등을 밝힌다.
2. 전사(前史 1,5-2,52) : 예수와 요한세례자의 수태․탄생․성장과정을 나란히 서술하면서 예수는 요한 세례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3. 활동 준비(3,1-4,13) : 요한세례자의 활약상, 예수의 족보, 유혹사화를 이야기 하면서 루가는 예수시대를 구원의 시대로 저술한다.
4. 갈릴래아 활동기(4,14-9,50) :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5. 예루살렘 상경기 (9,51-19,28) :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신 때까지의 활약상이다. 루가는 주로 어록과 특수사료를 이용하여 긴 상경기를 엮었다.
6. 예루살렘 활동기 (19,29-24,53) : 예루살렘 입성에서 승천까지의 활약상이다. 발현사화와 승천사화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특이하다.
루가 복음서에서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부분은 예루살렘 상경기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다시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와 사마리아인들(9,51-10,37), 둘째, 묵상과 기도의 가치에 대하여(10,38-11,13), 셋째, 예수와 바리사이파들(11,14-54), 넷째,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충고(12,1-53), 다섯째, 여러 가지 말씀과 사건들(12,54-19,28)로 구분된다.
루가 18,9-14은 여러 가지 말씀과 사건들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가 넘치시는 분이시며 겸손된 자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2.1.2. 구조분석

루가 18,9-14의 구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A)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B)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하고 기도하였다.(C)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 하였다.(D)
14a 잘 들어라. 하느님께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14b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E)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 비유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과부의 청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재판관의 비유 다음에 배치되어 있다. 이 비유에서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먼저 비유를 드는 목적을 이야기한다. 재판관과 과부라는 두 사람의 대화와 행위를 배치시키고 마지막에 가서 예수가 결론을 낸다.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비유의 구조도 이와 동일하다. 여기서도 비유를 드는 목적을 이야기한다(A = 18,9). 비유의 목적을 설명하는 서두를 붙이는 것은 루가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10절에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과 그들의 목적을 소개한다(B = 10). 유대사회내에서 그들의 신분은 완전히 대립을 이룬다. 바리사이파는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세리는 죄인취급을 받았다. 바리사이파의 행동과 기도내용(C = 18,11-12)과 세리의 행동과 기도내용도(18,13 = D) 대립를 이룬다. 예수는 극한 대립구조를 이용하여 명백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E = 18,14ab) 이러한 대립구조는 예수가 당시 상식과 대립된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연결된다. 예수의 결론은 앞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바리사이파들의 생각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E = 18,14b).
18,9-14의 비유에서는 대립구조를 이용하여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모습과 참된 기도의 자세의 뜻을 밝혀준다.

2.2. 본문주석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비유의 목적을 설명하는 서두를 붙이는 것은 루가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다(18,1 ; 19,11). 그러나 그가 받은 자료에 그렇게 되었을 수 가 있다. “~에게, ~를 향하여”(πρός)는 비유를 듣는 사람을 가리키거나 비유에 대해서 “반대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20, 19)가리킬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구절들을 미루어 보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의미되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그것이 구태여 언급되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πεποιθότας έ φ ἑαυτοίς를 예레미아스는 “그들이 하느님보다는 자신들을 신뢰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참조 고후 1,9). 그렇다면 ὅτι는 “~때문에”로 그들의 자기확신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지, 그들의 자기 확신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옳은”(δίκαιος : 1,6)은 하느님에게 인정받는 행위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ἐξουθεγέω는 “경멸하다”(23,11 ; 사도 4,11)는 뜻이다. οί λοιποί는 나머지 인간들, 구체적으로 다른 유다인들인 “암하아레츠”이다. I. Howard Marshall, 『국제 성서 주석』, 강요섭(역), 천안 : 한국신학연구소, 1984, P. 418. 참조.

그런데 이 비유는, 앞서의 비유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 같다. 듣는 사람들이 다르다. 그러나 기도의 문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루가가 여기에 수록한 것 같다.34) 페데리꼬 바르바로, 『루가복음서, 신약성서 주해집』, 김창수(역), 서울 : 크리스챤 출판사, 1982, P. 370. 참조.

자기네만 옳은 줄 믿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특징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전통적인 모습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역사에 속해 있지만 이름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신의 능력과 성덕에 대한 바리사이파적인 확신은 인간 자신의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업적을 제시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율법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몰랐다(요한 7,4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덕을,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훈계하고 칭찬하고 멸시하고 배척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죄는 바로 그 자신에 대한 단죄로 이어졌다(6, 37). 알로이스 스퇴거, 『신약성서 영적독서를 위한 루가복음』, 이창훈(역), 서울 : 성요셉출판사 1991, P. 371. 참조.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예루살렘이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올라가다”(ἀγαβαίγω)라는 동사는 성전을 방문하는 데 적절한 표현이 되었다. 아침과 오후에 기도가 드려졌고(1,10 주석)개인들은 어느 때든지 수시로 사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5. 참조.

이야기는 간단하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갔다. 공적기도 시간 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러 성전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두 등장인물은 유다사회내에서 극과 극이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정의와 외적인 엄격한 율법을 지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또 하나는 세리이다. 로마의 지배 아래서 일하며 그들과 사귀어 부정한 자가 되기 쉬웠고, 권리를 남용하기도 쉬워 사람들의 멸시를 받던 자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신부, 앞의 책, P. 371. 참조.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기도할 때는 서서 했다(SBⅠ,401―402 ; Ⅱ,240). 그것은 반드시 거만한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겠으나 여기서는 그런 태도가 의도된 듯 하다(비교 마태 6,5. 그리고 루가 18,13의 대조). “서서”(σταθείς)라는 표현은 루가와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18,40 ; 19,8 ; 사도―6회). “혼자 이렇게(πρὸϚ ἑαυτὸν ταύτα : A W f13 pm ; TR ; UBS)는 난해하다. πρὸϚ ἑαυτὸν은 동사를 강조하는 아람어의 심성(心性)여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의 자리에서 바리시아파 사람이 기도했다. D사본에는 이 표현이 좀 더 부드럽게 καθʾ πρὸϚ έαυτὸν ταύτα로 표현 되었다. 그 순서가 바뀌어진 ταύτα πρὸϚ ἑαυτόν 이 보다 유력한 사본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P75 א L Θ f1 pc eug : synopsis ; Diglot). 이것은 그가 큰 소리로 기도했다기 보다는 조용히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맥상 이것은 타당치 않다. 유다인들은 소리내어 기도했다. 단 한나처럼 조용히 하기도 했다(심상 1, 13).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비판한 랍삐들도 있었다(SB Ⅳ ; 1, 231―232).
“하느님”(ὁ θεός)은 말의 주격이다. . ἃρπαξ는 “강도, 협잡꾼”(마태 7,15 ; 고전 5,10-11;6,10)이다. ἄδικος(16,10)는 여기서 “사기꾼”(고전 6,9 ; 비교 레위 19,13 ; T. Ach 2,5)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μοιχός는 “음행을 행한 자”, “음행자”(고전 6,9 ; 히브 13,4)이다. ἤ καί는 “그 때문에”라는 뜻이다. 즉 세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결코 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단지 부정한 상태에서 기도를 감히 올리려는 천한 사람일 뿐이다. “이”(οὗτος)는 경멸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5. 참조.

이 바리사이파의 기도는 스스로 올바른 사람임을 과시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서서”. 자애심과 자만심 또 자신에 넘치는 교만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하느님께 자기만이 올바른 사람임을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결점과 죄악에 차 있는 자라로 말한다.

【12】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하고 기도하였다.
이 구절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감사들릴 항목을 논리적으로 나열한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여(5,33)율법의 요구 이상을 실천한다. “얻다”는 뜻의 κτάομαι라는 말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그가 구입한 것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을 판 사람이 이미 십일조를 규정에 의해서 드렸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범하는 악을 피할 뿐만 아니라, 명령받지 않은 선까지 실천하고 있다. “율법은 일 년에 한 번 아브의 달 아흐렛 날 단식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매주 두 번 단식을 하였다. 유다인은 율법에 따라서 가축과 땅의 수확에서 거둔 이익의 십분지 일은 바치면 되었으나, 그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 이것이 그의 의(義)의 전부인데, 신심,내적의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페데리꼬 바로바로, 앞의 책, P. 417.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기도는 풍자적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생활이 그랬다. 예수는 바리사이적 종교의 실상을 공격하였지 그 과장된 것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7 참조.

유대인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감사와 찬양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서 기도드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바친 감사는 그 자신의 독선과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느끼는 경멸을 드러내 주었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들이었던 시편 작가들도 자신들의 선행을 나열하면서 기도하였었다(시편 17, 2-5).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이 완전히 간과되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저는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라고 하면서 으뜸가는 역할을 자기 자신에게 유보시켜 놓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 즉 같이 기도하고 있었던 세리는 그 바리사이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려 놓은 빛나는 자화상의 어두운 배경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의 기도는 자기만 의로운 체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알로이스 스퇴거, 앞의 책, P. 376. 참조.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 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의 밖 앞뜰에 서서 있다(SB Ⅱ,246). θέλω는 여기서도 “감히 ~하다”는 뜻이다.(18,4). SB Ⅱ,246-247에 의하면 기도할 때 눈을 쳐드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조차도 아닌”이라는 οὐδέ는 그가 손은 고사하고 눈조차도 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신 그는 그의 가슴을 친다(τὐπτω : 6,29). 가슴은 죄의 자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행동은 비통함과 뉘우침을 상징한다. 이런 행동이 기도할 때 없지는 않았다. 이 사람의 기도말들은 용서와 간구를 표명한다. ὶλάσκομαι는 “달래지다”는 뜻이다. 이 간구는 하느님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라는 힐(Hill)은 “화해”의 사상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호소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둔 것이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7. 참조.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기도는 자기가 죄인이란 의식의 표현인 동시에, 얼마나 크신 하느님의 연민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그에게는 자기를 남과 비교해 볼 여유도 없고, 죄인이라는 자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착한 사람들과 함께 서 자격이 없었다. 그는 감히 하느님께 눈을 들지도 못했다. 불경한 사람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눈길을 결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양심의 자리인 가슴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하는 호칭과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의 몇 마디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참회의 시편인 시편 51편에도 나타나는 것으로써 자신의 죄스러움의 고백이다. 그 세리의 사정은 절망적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는 용서받기를 원하기에 앞서 모든 부정한 수입과 그에 더하여 그 수입의 이십 퍼센트를 반환해야 할 것이었다. 그 세리는 다만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시편 51, 19)의 봉헌을 받으시고 당시의 자비로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희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앞의 책, P. 372. 참조.

【14】잘 들어라. 하느님께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예수는 이 후자의 사람(οὗτος: “전자”라는 뜻의 ἐκείνος와 대조됨 AG 238)이 하느님으로부터 “정당화”되어 성전을 내려갔다고 권위있게 말한다. παρʾ ἐκείνον에서 전치사는 비교적으로 사용된 아람어의 min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자보다는”이 아니라 “전자가 아니라”는 철저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른 표현인 ἤ ἐκείνος(W Θ 61 69 ; 비교 창세 38,26)도 의미는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가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14장 11절 ὁ δἐ가 A al lat; Diglot에는 καὶ ὁ로 바뀌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14장 11절을 따른 때문일 것이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8. 참조.
과 똑같은 마지막의 언급에 진술되었다. 세리가 “회개의 일” 즉 잘못 축척한 재물을 되돌려주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하느님에게 정당시되었다고 말하는 예수의 말씀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은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마음가짐이요 옳다고 인정받는 것은 하느님의 호감을 사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천명한다. 자캐오가 그의 불의한 재물을 돌려주었을 때―그것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님―그것은 예수의 용납을 받은 후의 일이었지 그에 선행된 것이 아니었다. I. Howard Marshall, 앞의 책, P. 418. 참조.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행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다.
18,14b구절은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의 지위가 종말에 뒤바뀐다는 말씀은 본디 앞 뒤 문맥과 상관없이 따로 전해 온 유행어이다(루가 14,11;18,14b ; 마태18,4 ; 23,12). 정양모(역),『200주년 성서 : 루가 복음서』, 왜관 : 분도 출판사, 1983, P. 169. 참조.

예수는 그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의로움을 비교한다. 그리고 예수는 세리에게 의로움이 있다고 결론 짓는다. 첫 번째 해석은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과 그의 온갖 장점과 자신감보다는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만일 예수가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의롭다고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의 선고는 단지 위협을 주는 말씀으로만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16,15)라는 말씀으로 의미하신 바로 그것이다. 알로이스 스퇴거, 앞의 책, P. 418, 참조.

복음서 전반에 걸쳐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한 가지 독립된 말씀이 성전에서의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본보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14,11 ; 마태 23,12). 자신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들어 높인다. 하느님의 최종적 심판에 앞선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를 내리 낮춘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의 판결에 의해 들어 높여진다. 심판이 시작될 때 하느님께서 친히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알로이스 스퇴거, 앞의 책, P. 3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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