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으신 예수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의 일생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따른 순종의 생애이고, 둘째는 참인간으로써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위하신 생애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 보고 예수님 생애의 특징을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l.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세상에는 위대한 성현들이 많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공자 같은 분은 훌륭한 가르침을 많이 남긴 분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분들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겨두며 생활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공자님의 말씀이 우리 선조들에게, 아니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훌륭한 생활의 양식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삼강오륜과 군자의 도(君子之道)는 우리 민족을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보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또한 그것은 선조들의 생활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 준 그들 중에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하느님이라 하며 하느님의 권위로써 가르친 사람은 한 분도 없다. 아니 세계 역사상 그런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성현들이라 해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값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추종하지만, 그들 자신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의 스승으로서 어떤 인도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인류 구원이라는 면에서 절대권을 발휘할 권한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이와는 전혀 다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요한 8,24). 인간으로서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말씀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본다. 사실 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해 준다. 요한 복음서는 그 저술 목적을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게”(요한 20,31)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결같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의식하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과 당신과의 관계가 가장 친밀한 부자(夫子) 관계임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이 친자의식(親子意識)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좀더 주의 깊게 복음서를 읽고 성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권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언제나 앞에다 ‘이는 야훼의 말씀입니다’하는 서두를 붙이고 시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언자들은 자기의 말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권위와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서두를 전혀 쓰시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라든가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여가에서 예수님은 예언자와 구별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절대권을 가지시고 언제나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드린 사랑과 그분의 뜻을 따르신 철저한 순명의 생에 관하여 이이야기하겠다,

2.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일생과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을 섬김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는 인간 구원의 과업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요한 7,16)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르심으로써 완전히 일치하여 계셨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철저했다(필립 2,8참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하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는 것을 당신의 음식이라 생각하셨다.(요한 4,31-34)
인간에게 빛과 진리와 생명을 주는 일,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요한 5,30 )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예수님의 일생을 이끌어 간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받은 소명(召命)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야훼의 종’(이사 55)이 되는 소명이었고,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은 앞에서 본 대로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와 주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장 깊은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셨는지 깨달을 수 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명함으로써 인류를 어둠과 죄 속에 몰아 넣고 죽을 운명에 처하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전 인류의 머리로서 하느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고 다시금 하느님과 결합시키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생애는 이제 사람을 사랑하는 생애로도 나타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대 유대 사람들에게는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철저하게 따르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에게 표양을 주시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철저한 순종의 일생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도 같은 순종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신다.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인 자기 의지(意志)를 다른 분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순종의 생활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 한 분뿐이다.
예수님의 이렇듯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생애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희생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천주성과 인성이 기묘히 결합되어 있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순종의 생애는 하느님을 얻고 구원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이의 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성취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신자들의 이 지상 생애는 모두 예수님의 이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생활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겠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으신 예수님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의 일생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따른 순종의 생애이고, 둘째는 참인간으로써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위하신 생애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 보고 예수님 생애의 특징을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l.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세상에는 위대한 성현들이 많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공자 같은 분은 훌륭한 가르침을 많이 남긴 분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분들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겨두며 생활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공자님의 말씀이 우리 선조들에게, 아니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훌륭한 생활의 양식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삼강오륜과 군자의 도(君子之道)는 우리 민족을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보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또한 그것은 선조들의 생활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 준 그들 중에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하느님이라 하며 하느님의 권위로써 가르친 사람은 한 분도 없다. 아니 세계 역사상 그런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성현들이라 해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값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추종하지만, 그들 자신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의 스승으로서 어떤 인도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인류 구원이라는 면에서 절대권을 발휘할 권한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이와는 전혀 다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요한 8,24). 인간으로서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말씀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본다. 사실 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해 준다. 요한 복음서는 그 저술 목적을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게”(요한 20,31)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결같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의식하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과 당신과의 관계가 가장 친밀한 부자(夫子) 관계임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이 친자의식(親子意識)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좀더 주의 깊게 복음서를 읽고 성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권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언제나 앞에다 ‘이는 야훼의 말씀입니다’하는 서두를 붙이고 시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언자들은 자기의 말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권위와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서두를 전혀 쓰시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라든가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여가에서 예수님은 예언자와 구별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절대권을 가지시고 언제나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드린 사랑과 그분의 뜻을 따르신 철저한 순명의 생에 관하여 이이야기하겠다,

    2.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일생과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을 섬김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는 인간 구원의 과업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요한 7,16)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르심으로써 완전히 일치하여 계셨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철저했다(필립 2,8참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하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는 것을 당신의 음식이라 생각하셨다.(요한 4,31-34)
    인간에게 빛과 진리와 생명을 주는 일,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요한 5,30 )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예수님의 일생을 이끌어 간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받은 소명(召命)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야훼의 종’(이사 55)이 되는 소명이었고,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은 앞에서 본 대로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와 주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장 깊은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셨는지 깨달을 수 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명함으로써 인류를 어둠과 죄 속에 몰아 넣고 죽을 운명에 처하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전 인류의 머리로서 하느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고 다시금 하느님과 결합시키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생애는 이제 사람을 사랑하는 생애로도 나타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대 유대 사람들에게는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철저하게 따르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에게 표양을 주시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철저한 순종의 일생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도 같은 순종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신다.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인 자기 의지(意志)를 다른 분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순종의 생활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 한 분뿐이다.
    예수님의 이렇듯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생애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희생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천주성과 인성이 기묘히 결합되어 있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순종의 생애는 하느님을 얻고 구원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이의 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성취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신자들의 이 지상 생애는 모두 예수님의 이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생활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겠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