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로마 5,8)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철저한 순종의 생애를 살으셨던 예수님은 동시에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낫게 하고’(루가 4,18)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일생은 인간을 위한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생애였다. 예수님이 얼마만큼 인간을 사랑하셨는지 우리는 그분의 행적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신성을 갖고 계신 분이시며,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시어 우리 인간과 더불어 살으신 분이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사랑과 신비에 가득 찬 마음은 언제나 그분의 생애를 남을 위한 생애로 이끌어 갔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만은 존중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의 전인격 즉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면에서 보아야 한다. 이 점을 미리 밝혀 두고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
어느날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게 되었을 때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예수께서 성문에 이르렀을 때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외아들을 잃은 그 여인은 아마 대성통곡을 하며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일어 그 여인을 위로하며, 아들을 살려 주셨다(루가 7,11-17 참조). 인간의 불행을 슬퍼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역력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엿볼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당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한편 그토록 자비와 사랑을 가득히 가지셨던 예수님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마태 14장 13-21절에 나오는 빵의 기적을 읽어보면 인간을 불쌍히 여겼던 예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예수님의 눈에 비친 군중의 모습은 가엾은 인간의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구원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배고픔을 참고 멀리서부터 모여든 군중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정을 잘 아시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제자들은 당황했다.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인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배가 고파 가다 지쳐 쓰러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빵 몇 개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었다.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무조건 고쳐 주셨던 예수님, 인간의 불행을 너무나 잘 알고 위로해 주셨던 예수님,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한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루가 7,16)고 기뻐했다. 이렇듯 예수님은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사랑하셨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요한 8,1-11참조), 착한 목자에 대한 비유(요한 10,11-15참조),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신 일(요한 11,28-37) 등은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풍부하고도 인간적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죄많은 인간, 병고에 시달리며 죽어야 하는 인간 운명에 대한 인간적이고도 신적인 사랑은 그분의 전 생애 안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질정에 달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최후의 만찬 때 드러난 사랑의 극치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이제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요한 13,1) 요한 복음 13장-17장에 이르는 대목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별을 앞두고 가지셨던 최후의 만찬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심란하다. 주어도 주어도 다 못 주는 사랑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에 예수님은 심란한 표정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예수님의 행위 속에는 애틋한 사랑의 향기가 감돌고 있다. 희생과 봉사로 일관된 예수님의 생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요한 13,12-14)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일생은 우리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뒤이어 만찬을 나누실 때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당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변화시켜 생명의 음식으로 내어 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전인류 구원을 위한 진한 자기 희생이다. 이 사랑의 극치를 예수님은 만찬에서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에서 다시 보게 되겠지만,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희생시킴으로써 보여주신 사랑과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당신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변성시켜 음식으로 주시는 사랑은 동일하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불행한 인간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다 내어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내어 주는 자가 어디에 있던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희생과 성체성사에서 보여 주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 절정에 달한 예수님의 사랑을 맛본다. 또한 만찬을 나누시며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요한 13-17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평화와 희망을 주며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당신이 평생토록 보여준 사랑을 실천하도록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계명을 주신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신다(요한 7장).
성서를 읽어보면 이렇듯 구구절절이 예수님의 사랑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눈이 멀거나 아니면 사랑에 무딘 사람이다.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는 세상 모든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 인생에 빛을 주고 길을 밝혀 주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거역한 인간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해 드렸다. 서로 형제지간인 인류는 불목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인간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시어 같은 명제로서 사랑을 보여주시며 그렇게 살아라 명하신 것이다. 아버지께 효도하는 사람은 형제간의 우애도 지킨다. 그것은 형제간의 불목이 아버지의 마음을 상해 드리므로 효도한다는 것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어 그러한 사랑을 생애로써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예수님이 보여준 형제적 사랑, 그것은 바로 인간이 지켜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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