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으로 죄를 갚아준 사랑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3,14-15)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역사적 상황과 그 동기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효능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예수께서는 온전한 자유의지로써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셨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필연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마르 10,38; 루가 12,50; 요한 18,11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 데 있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요한 12,27-28 참조)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셔서 왔다고 하는 하느님의 친자의식(親子意識)과 소명의식(召命意識)을 뚜렷이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요한 7,28; 8,42; 17,3 참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요한 7,34)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이야말로 인류 구원사업을 성취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임을 굳게 믿고(루가 22,22)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교회 3).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한 상태에서 마지못해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에 죄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 이스가리옷이 당신을 팔아 넘김으로써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를 제지하지 않으셨고(요한 13,27) 당신의 목숨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치는 것임을 역설하셨다(요한 10,18) 즉 그분은 온전한 자유의지로써 죽음을 받아 들이셨다(요한 14,30-31; 루가 22,44 참조)

2.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효능
예수께서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고 해서 전혀 어떤 목적의식 없이 목숨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의 죽음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폭도들의 손에 체포되시던 날 저녁,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흉악한 폭도들의 손에 넘어가서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모두 흘리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실 것을 눈으로 보는 듯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하여 필요한 것’임을 절감하셨다. 사도 바울로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한 속죄의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l고린 15,3). 그렇다. 확실히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죽음이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의 효능에 대한 교부(敎父)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께 범죄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 보상하는 것이라는 안셀모 성인의 이론은 매우 유명하다. 즉 인간의 죄악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요 명예훼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하느님께 보상해 드리든지 아니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유한하고도 죄스런 인간이 무한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 잘못한 것을 보상해 드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보상해 드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것이 유명한 성 안셀모의 보상설(補償說)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완성된 구속(救贖)의 근거와 이유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서 찾는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당신께 범죄한 인간의 죄악을 당신 아들의 수난과 죽음 없이도 용서해 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위대해서 인간의 최악에 대한 보상을 몸소 지불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셨다. 이 보상이야말로 죄스런 인간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회심(回心)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 회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주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려고(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1) 이 세상에 오셨고 마침내는 죽으셨다“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3.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시인 오세영은 ‘문학사상’ 1973년도 3월호(통권 제6권)에서 ‘종교, 시, 현실, 기타’라는 제목의 짧은 시론(詩論)을 E.프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하였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평선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즉 신앙의 대사회적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면 수직선이란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과 신(영원)의 관계, 즉 관념적 세계로의 지향을 뜻한다. “오세영은 E.프롬이 말한 십자가의 의미로부터 시적인 발상법(發想法)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바탕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한 3,14-16 참조).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점이다(마태 16,24). 십자가는 가볍고 달콤한 멍에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도 쓰디쓴 고통의 연속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E.프롬이 말한 십자가는 반드시 수직선과 수평선이 합쳐져야만 형성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어려움이란 바로 천상의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만큼 이웃 사회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을 찬양하시는 등(마태 19,27-29 참조)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셨는가 하면 배고픈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시는 등(마르 6,31-44 참조) 수평적인 면도 등한시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현대인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얼룩진 십자가는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고 예수님 일생일대의 대실패였던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은 영광스러운 부활에 도달하고야 말았으니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최후의 승리인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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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으로 죄를 갚아준 사랑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3,14-15)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역사적 상황과 그 동기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효능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예수께서는 온전한 자유의지로써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셨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필연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마르 10,38; 루가 12,50; 요한 18,11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 데 있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요한 12,27-28 참조)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셔서 왔다고 하는 하느님의 친자의식(親子意識)과 소명의식(召命意識)을 뚜렷이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요한 7,28; 8,42; 17,3 참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요한 7,34)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이야말로 인류 구원사업을 성취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임을 굳게 믿고(루가 22,22)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교회 3).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한 상태에서 마지못해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에 죄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 이스가리옷이 당신을 팔아 넘김으로써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를 제지하지 않으셨고(요한 13,27) 당신의 목숨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치는 것임을 역설하셨다(요한 10,18) 즉 그분은 온전한 자유의지로써 죽음을 받아 들이셨다(요한 14,30-31; 루가 22,44 참조)

    2.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효능
    예수께서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고 해서 전혀 어떤 목적의식 없이 목숨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의 죽음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폭도들의 손에 체포되시던 날 저녁,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흉악한 폭도들의 손에 넘어가서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모두 흘리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실 것을 눈으로 보는 듯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하여 필요한 것’임을 절감하셨다. 사도 바울로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한 속죄의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l고린 15,3). 그렇다. 확실히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죽음이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의 효능에 대한 교부(敎父)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께 범죄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 보상하는 것이라는 안셀모 성인의 이론은 매우 유명하다. 즉 인간의 죄악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요 명예훼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하느님께 보상해 드리든지 아니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유한하고도 죄스런 인간이 무한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 잘못한 것을 보상해 드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보상해 드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것이 유명한 성 안셀모의 보상설(補償說)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완성된 구속(救贖)의 근거와 이유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서 찾는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당신께 범죄한 인간의 죄악을 당신 아들의 수난과 죽음 없이도 용서해 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위대해서 인간의 최악에 대한 보상을 몸소 지불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셨다. 이 보상이야말로 죄스런 인간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회심(回心)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 회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주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려고(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1) 이 세상에 오셨고 마침내는 죽으셨다“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3.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시인 오세영은 ‘문학사상’ 1973년도 3월호(통권 제6권)에서 ‘종교, 시, 현실, 기타’라는 제목의 짧은 시론(詩論)을 E.프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하였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평선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즉 신앙의 대사회적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면 수직선이란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과 신(영원)의 관계, 즉 관념적 세계로의 지향을 뜻한다. “오세영은 E.프롬이 말한 십자가의 의미로부터 시적인 발상법(發想法)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바탕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한 3,14-16 참조).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점이다(마태 16,24). 십자가는 가볍고 달콤한 멍에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도 쓰디쓴 고통의 연속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E.프롬이 말한 십자가는 반드시 수직선과 수평선이 합쳐져야만 형성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어려움이란 바로 천상의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만큼 이웃 사회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을 찬양하시는 등(마태 19,27-29 참조)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셨는가 하면 배고픈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시는 등(마르 6,31-44 참조) 수평적인 면도 등한시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현대인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얼룩진 십자가는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고 예수님 일생일대의 대실패였던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은 영광스러운 부활에 도달하고야 말았으니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최후의 승리인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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