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인간의 완전한 중개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에페 5,2)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은 앞에서 본 대로이지만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어떻게 구원의 의미를 갖게 되는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이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하느님께 드린 속죄와 회복의 제사로서의 희생이었다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관의 직분을 갖고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해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키는 화해와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히브 7,26-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잇는 화해의 제사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성서 대목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1고린 15,3; 에페 1,7; 1요한 1,7; 골로 1,22 등 참조). 그런데 우리가 성서의 이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구약의 제사와 제관직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구원의 제사로 파악하게 된 것은 구약성서의 전통 안에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에서 알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구약의 완성으로서 신약의 그리스도의 제관직과 제사를 논하고 있다. 참다운 사제, 참다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위에서 드려졌다는 것이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주요점이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은 참사제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왜 참 제사가 되는가?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1. 사제이신 그리스도
첫째로 예수님이 대사제이심은 그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갖는 사제 직분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부수적이고 호칭된 의미의 사제직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제이심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仲介者)로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신비, 그 자체에서부터 예수님의 사제직을 보아야 한다. 제관 또는 사제는 넓은 의미로 불 때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로서 인간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자이다. 일반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와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길로 인도한다. 동양의 천자(天子=임금)는 이런 의미에서 사제였다. 백성에게 하늘의 도(道)를 베풀며 태평성세를 이룩하려고 백성을 위해 하는 천자(天子)는 백성의 잘못으로 하늘이 진노할 때 백성을 대표해서 제사를 드린다. 옛날 임금이 지내던 기우제나 감사제는 모두 이런 의미의 제사였다. 그래서 왕은 임금인 동시에 사제였고, 그 직분은 혈통을 따라 상습되는 것이 상례였다. 하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이것이 곧 사제이다. 예수님은 중개자로서의 직분을 그 어느 사제보다도 완전히 성취하셨다. 왜냐하면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성과 인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중개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그 어느 사제도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사제직분을 갖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보나 그렇다. 구약의 대사제는 백성 가운데서 뽑혔다. 즉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아 선택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부의 부르심을 받는다. “나는 멜키세덱 창세기 14,17-20에 나오는 살렘의 왕이며 제관이었던 사람, 아브라함의 승전을 위해 빵과 포도주로 감사제 를 드렸다. 멜키세덱이란 이름의 뜻은 ‘정의의 왕’이란 뜻이다. 살렘의 왕이란 칭호는 ‘평화의 왕’이란 뜻 이다. 예수님은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로 선택된다. 그 뜻은 레위 가문의 혈통을 따른 사제 가 아니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족보도 없던 멜키세덱의 사제직이 하느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사제직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시편 110,4) 예수님은 혈통을 따라 이어지던 구약의 레위 가문의 사제로서가 아니라 멜키세덱처럼 또는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사제직분을 얻은 것이다(히브 5,4). 둘째로 구약의 사제는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 전한 제사를 드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언제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림은 대속적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다르다. 직접적인 제사를 드렸다. 당신 몸을 헐어서 드린 제사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를 완성한다. 참다운 사제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 7,26-27)
예수님이 구약의 대제관과 다른 점은 바로 희생의 제물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또한 제사의 효과가 전혀 다르다는 데서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는 참사제이시다.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죄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히브 9,25) 사실 구약에 있어서는 희생제물을 드리더라도 그것도 매일 반복해서 드리지만 –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히브 10,11).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완전한 자유의지의 행위로써 끝까지 하느님께 순명하는 행위였기에 사실 인간의 죄가 제거된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인성을 취하여 오신 하느님으로서 전인류를 대표해서 인성을 갖고 하느님의 뜻을 승복했고, 남을 위해 철저히 세상을 살음으로써 – 십자가에 죽기까지 – 죄가 제거된 것이다(히브10,12). 이렇게 예수님은 그 본성상 하느님과 인간의 완전한 중개자로서 참다운 사제였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제사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시킨 분으로서도 참다운 대사제였다.

2. 십자가의 죽음은 화해의 제사
본성상으로 대사제의 직분을 가지셨던 예수님은 히브리서에서 바울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해서 결정적인 구원의 제사를 단 한 번의 완전한 회생으로 십자가 위에서 드리셨다. 구약의 제물은 인간을 대신한 동물의 피였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의의와 속죄를 비는 제사를 짐승을 죽여 바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됨에 따라 마음에 없는 형식의 제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의 제사였다. “나는 너희 집 소를 앗아 가지 않으며 너희 우리에서 염소를 앗아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쇠고기를 먹겠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시편 50,9-14)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드려져야 할 제사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조건없는 승복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참다운 숭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참다운 제물이 되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참다운 제사가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구약의 백성이 드리던 대속적 제물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다. 십자가는 더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크나큰 신비가 들어 있는 제사이다. 십자가가 구원의 참다운 제사였다는 점은 제관이신 동시에 제물이셨던 예수님이 전인류를 위해 희생되셨다는 데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