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라)

2.2.1.2. 버림받은 이들의 아버지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 “압바”로 불렀다. 물론 그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만이 아니라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였다. 이를테면 야훼는 하느님의 맏아들로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이며(출애 4,22f; 예레 31,9; 이사 63,16), 특별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아버지이다(시편 2,7). 또한 후기 유대교에서 야훼는 개개의 경건한 이들의 아버지(집회 4,10; 지혜 2,16-18)로 약속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생물학적인 의미의 아버지는 아니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구약성서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즉 “성별적인 요소나 종교적 부권주의(父權主義, Paternalismus)와는 상관 없이” “권능과 동시에 현존, 보호, 배려”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같은 책, 217.
예수도 이런 상징적인 의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즉 그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지칭할 때는 항상 하느님의 만물에 대한 능동적인 섭리와 배려를 얘기한다. 하느님은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염려해 주시고(마태 10,29-31), 인간이 청하기도 전에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마태 6,8), 두려움으로 가득찬 인간의 걱정거리를 부질없게 만드시는 분이다(마태 6,32).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은 구약성서적 이해를 넘어선다. 예수는 세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백성 자체와 결코 자동적으로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리나 요한과는 전혀 달리 예수는 이 부성을 악인과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도 결부시키면서 하느님이 완전한 아버지라는 것을 근거로 그에게 전형적인 원수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마태 5,44). 이웃 사랑의 계명은 단편적으로나마 구약성서에도 나타나고, 유대계 문헌과 대부분의 큰 종교에도 긍정문이나 부정문의 형태로 발견된다. 참조: CS, 248f; H.Küng/J.Ching,『중국의 종교와 그리스도교』, 이낙선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42-145)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는 다른 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예수의 독특한 점이다. 예수는 원수 사랑에 대한 동기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자는 데에서 찾고 있다. 마태 5,45에 따르면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에게나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며 적과 친구를 구분하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이다. 이렇게 예수는 하느님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으로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인간들에게 원수 사랑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는 죄인들을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죄인들의 아버지로 선포한다. 예수가 드러나게 불경스러운 자와 부도덕한 자들, 즉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은 잃은 자를 구하기 위해서 왔고(루가 19,10),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2,17 병행)고 명백하게 말한다. 그리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는 반대자들의 비난은 예수가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강조해준다. 예수는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하고(루가 19,1-10),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마태 2,13-17 병행);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 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가 7,36-50),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 수호자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었다(요한 7,53-8,11).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발적일 만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연대를 취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낸다.
예수가 당시에 경건한 이들이 멀리한 죄인들과 연대를 취하였던 것은 단지 사회적, 인도적인 차원의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죄인들과의 공동의 식사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참조: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197-198. “특별히 유대교에서 식탁의 공동체는 하느님 앞에서의 공동체인데, 이 공동체는 가장(家長)이 한 덩이의 빵에 찬미의 기도를 한 다음에, 식사에 참여한 사람 각자가 그 빵의 한조각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 찬미의 기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루어진다” (J. Jeremias, Neutestamentliche Theologie I, Gütersloh, 1971, 117).
그래서 경건한 이들에게 도외시 된 죄인들과의 함께 하는 식사는 단지 보다 자유로운 관용과 보다 인도적인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사명과 복음의 표현이었다. 즉 예수는 예외 없이, 죄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화해를 전하려 하였다.
예수는 죄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에게서 찾는다. 예수의 비유들 안에서 하느님은 거듭해서 단죄하기 보다는 용서하시고, 법보다는 은총을 앞세우시는 관대한 분으로 나타난다. 즉 하느님은 자비로운 왕으로(마태 18,22-27), 빚을 탕감해주는 채권자로(루가 7,41-43), 잃은 양을 찾는 목자로(루가 15,1-7), 잃은 은전을 찾는 여자로(루가 15,8-10), 탕자를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로(루가 15,11-32),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심판자로(루가 18,9-14), 무한한 자비와 능가할 수 없이 큰 호의를 베푸는 포도원 주인으로(마태 20,1-15) 묘사된다. 예수가 행동으로 죄인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용서가 그의 비유에서 말로 표현된다. 즉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서 용서하고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 실제 사건이 되었다. 악인의 처벌이 아니라 죄인의 의화(義化): 여기서 이미 하느님 나라, 다가오는 하느님의 정의가 시작된다. 이렇게 예수는 죄인에게 조건 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우선 행업과 보속 다음에 은총”이라는 순서를 의문시한다. 물론 유대교에서도 하느님의 용서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용서는 선업(율법 준수, 맹세, 희생, 자선)을 통해서 죄를 보속한 사람에게만, 참회 규정을 완수해서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은 심판과 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참회하지 않은 죄인에게 먼저 용서를 베푼다. 예수에게서는 “분명히 사회적, 인종적, 정치적, 종교적 경계가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것도 회개하기 전부터 이미 받아들여져 있다. 먼저 은총이고 다음에 행업! 아무리 벌받아 마땅한 죄인에게라도 은총은 활동한다: 은총의 활동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용서는 거저 주어진다: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은사(恩赦), 무상으로 주어지는 사죄이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여 살아 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 유효한 것은 법에 앞선 은총이다. 아니 더 나은 표현으로 하면: 은총의 법! 오로지 이렇게 해서 보다 나은 새로운 의로움이 가능하다. 그 출발은 한계 없는 용서이다: 그 유일한 전제는 신앙하는 신뢰, 신뢰하는 신앙이다; 그 유일한 결론은 너그러운 용서의 전달이다. 큰 용서를 받아 살아 갈 수 있게 된 사람은 작은 용서를 거절해서는 안된다(마태 18,21-35).”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199-200.
이를 거절하면 이미 받은 용서마저도 거두어질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심판의 주제가 들어선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심판의 주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라는 기쁜 소식에 종속되어 있다.
예수가 이렇게 죄인들을 조건 없이 용서한 것은 경건한 이들에게는 모든 전통적 도덕 규범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명기와 역대기에 분명히 명문화되어 있는 질서, 즉 율법에 충실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확신이 무시된 것이다. 죄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벌이 아니라 용서를 선포하는 것은 예수의 독특함이었지만, 경건한 이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예수의 하느님 이해는 율법을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구약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예수의 신관은 구약성서의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를 능가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죄인들의 아버지라고 선포할 때 이 하느님은 바로 구약성서의 하느님을 얘기하는데, 그 하느님을 다르게, 새롭게 이해한 결과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유일한 하느님을 항상 그가 선택한 백성과 함께 고찰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따로 떨어져 혼자 계신 분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하는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순전히 당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키고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은 시나이 계약이 보여주듯이 상호간의 특별한 의무와 결부된다: 하느님의 계약약속은 백성의 계약의무와 상응한다! 하느님이 충실함을 약속한 것에 이스라엘은 충실함으로 응답해야 한다. 여기서 십계명이 그 요체를 이루는 율법, “토라”(Tora)는 원래 보편적 지시(指示, Weisung), 즉 하느님이 가능케하고 요구하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율법 그 자체는 하느님의 선의와 충실을 드러내고,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그러나 이런 원래의 맥락은 법률 위주의 생각이 우세하게 됨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간다. 그리고 법적, 예식적인 규정들을 십계명을 통해서 드러난 명확한 하느님의 법과 점점 더 동등하게 보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에스라가 이스라엘을 재건하면서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토대가 되고 자립적인 권위를 지니게 된다. 즉 율법은 하느님 백성에 속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이사 56,1-8), 행복하게 되는 데(시편 1; 37)에 기준이 되며 존경과 사랑의 대상(시편 119)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 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율법주의가 형성된다: 모세 오경에 담겨져 있고 율법학자들을 통해서 미세한 부분까지 해석된 모든 율법은 계시된 하느님의 뜻으로써 – 세세한 안식일과 음식, 정결, 기도, 예배 규정까지도 –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무조건 엄수해야만 했다.
원래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는 하느님과 백성과 맺어진 계약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예수는 초기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항하면서 하느님의 계약에로 돌아가서 율법을 은총 안에 자리 잡도록 한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구약의 하느님을 새롭게, 더 깊이 이해한 것이다: “예수의 복음이 선포한 하느님은 새로운 하느님이 아니다. 여전히 옛 계약의 하느님이다. 그러나 이 구약의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빛 속에 나타난다 […] 율법의 하느님이 아닌 은총의 하느님으로! 그리고 이 은총의 하느님에 비추어 되돌아보면 율법의 하느님도 더 잘, 더 깊이, 그야말로 더 은혜롭게 이해된다: 율법도 이미 은총의 표현으로.” 같은 책, 221.

예수가 구약의 하느님을 이렇게 새롭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던 배경에는 예언자의 전통이 있다고 하겠다. 즉 예수는 예언자의 전통을 집약하고, 첨예화하고, 능가하였다: 예수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은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을 원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실천에 옮긴다. 이로써 “그는 예언자들의 선포와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집약하고 구체화한다”. 예수가 절대화된 율법과 예배규정들을 인간을 위해서 사실상 상대화하는데,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의(不義)와 예식주의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첨예화한다”; 예수는 경건한 이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들과 소외된 자들과 연대를 취하는데, 이로써 “그는 대예언자들이 회개와 새로운 삶의 형성을 요구한 모든 것을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능가한다; 이를 넘어서 예수는 율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고 이들 개개인에게 약속함으로써 어떤 예언자도 감히 행하지 못했던 것을 행한다. H.Küng, Ewiges Leben, München-zürich, 1982, 123f.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 즉 하느님이 인간을 회개하도록 이끌면서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죄스러운 과거가 선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 이는 – R. 불트만에 의거한다면 – 사실상 유대의 하느님 사상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는 동일한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극적으로, 극단적으로 행동한다”(H.Merklein, Die Gottesherrschaft als Handlungsprinzip, 204).

이런 예수의 행동은 전체 이스라엘을 모으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의로운 자, 경건한 자, 결백한 자들만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예 집단으로부터 도외시된 버려진 자, 못난 자, 나난한 자, 죄인들을 의도적으로 포함하면서 전체 이스라엘을 모르려는 데에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전체적인 활동의 유일한 의미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것이다”. J.Jeremias, Neutestamentliche Theologie, 167.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의 파견도 바로 이런 종말의 하느님 백성을 상징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여러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음으로서 드러난다고 선포하였다(예레 23,3; 에제 28,25f; 11,17; 20, 34.41; 34,13; 36,24; 37,21). 예수는 자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행동을 통해서 이런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2.2.1.3. 예수의 하느님과 예수와의 독특한 관계(간접적, 묵시적 그리스도론)

예수는 특이하게도 하느님을 아버지의 아람어 표현인 “압바”(Abba)라고 불렀다(마르 14,6). 고대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상당히 많았지만 하느님을 “압바”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분명히 “압바”라는 말마디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리스어를 쓰던 공동체에서 아람어 호칭을 그대로 보존, 사용한 것을 통해서도 입증된다(갈라 4,6; 로마 8,15).
“압바”라는 말은 원래 어린이 말인데, 예수 당시에는 장성한 자녀들도 아버지와 연로한 이들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친근하고 가까운 어감은 남아있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를 하느님을 부르는 말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참조: J. Jeremias, Abba. Göttingen, 1966, 15-67; J.예레미아스,『신약 신학』, 정충하 옮김, 서울: 새순, 1993, 102-111.
그럼에도 예수는 이 당연하지 않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예수가 하느님과 남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그 관계의 중심은 크나큰 친밀함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는 ‘주의 기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다. “어린이가 지상의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똑같은 자세로 천상의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 경외와 순종의 자세로,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의지, 신뢰하는 마음을 가득히 갖고.”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222.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는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나의 아버지’와 ‘여러분의 아버지’를 철저히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이런 특이한 구분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바로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으로서, 예수 사명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드러낸 예수는 “그 하느님과의 특별한 결합 속에서 살고 활동했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신이 특별한 하느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예수의 전대미문의 주장은 그와 하느님과의 매우 독특한 직접적 친분관계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즉 “압바”라는 예수의 독특한 하느님 호칭에서 예수가 독특하고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 속에 살았고, 이 체험을 근원으로 해서 그의 새롭고 독특한 하느님 선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동, 더 나아가서 예수 자신은 그가 “압바”라고 부른 하느님과의 독특한 결합을 떠나서는 얘기될 수 없다고 하겠다. 예수의 “압바” 호칭의 근저를 이루는 “압바 -체험은 명백히 예수 선포와 행동의 독특성의 원천으로서, 이 종교적인 체험을 제외하고서는 예수 선포와 행동의 참되고 고유한 의미와 내용을 상실할 뿐이다”(E.Schillebeeckx, Jesus, 236).

예수는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권한 요구에서도 드러난다. 실상 예수는 생전에 어떤 특정한 칭호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사람의 아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의 활동 전체 안에서 실제로 랍비와 예언자의 권한을 능가하고 메시아의 권한과 충분히 맞먹는 권한을 요구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 권한 요구는 대략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예수는 인간을 위해서 옳다고 생각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율법을 초월함으로써 율법의 무조건적인 유효성을 의문에 처하게 했다. 이는 율법을 준 모세의 권위를 넘어서는 행동이다(마태 5,21-48: 마르 10,5 병행). 둘째, 예수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하느님께 대한 예식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사실상 모든 종교 예식을 상대화하였다. 이는 그가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을 능가한다는 인상을 준다(마태 12,42). 셋째, 예수는 죄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고 개별적으로 사죄를 하였다. 이는 회개를 설교한 요나보다, 예언자보다 더 큰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마태 12,41 병행). 언어적인 실태도 이에 상응한다: 산상 설교에서 사용된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는 표현이나, 아무도 문장 첫머리에는 사용하지 않는 “아멘”은 예수가 랍비나 예언자의 권위를 넘어서는 그 어떤 권위를 주장했음을 암시해준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이런 예수의 자기 권한 요구에 근거를 두고서 부활 이후에 예수에 대한 메시아 고백이 명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2.2.2. 예수 부활과 그리스도론의 시작

하느님과의 유일무이한 독특한 관계 속에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을 새롭게 선포한 예수는 당시 종교지도층과의 마찰과 충돌을 빚었고, 결국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상의 위기를 의미한다.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신명 21,23; 참조: 갈라 3,13)라는 구약성서의 문장이 예수에게 적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적대자들에게나 동지들에게도 예수는 끝장이 났고 참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은 이 모든 판단을 뒤집는다. 부활 사건은 하느님께서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세상이 믿기를 거부한 예수의 편을 든 사건이다. 이를 통해서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선포, 행동, 운명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인정되었다. 또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도 인정되었다.
부활 사건에 관한 증언들 중에서 초기의 것은 하느님께 관한 신앙 고백의 형태를 지녔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참조: 로마 4,24; 8,11; 10,9; 2고린 4,14; 갈라 1,1; 에페 1,20; 골로 2,12; 1베드 1,21). 예수 부활은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전능한 창조주(로마 4,17)의 새로운 창조 행동이다.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부활시킨 사건은 인간이 볼 때 모든 것이 끝장난 곳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창조적 행동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삶을 원하는 분이고 인간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으로서 인간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에서도 그뿐께 전적인 신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창조 신앙이 더 극대화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부활은 신론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가 옳았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사건으로서의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론적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 운명 속 담겨있는 예수의 신원(간접적 그리스도론)이 이제는 부활의 빛을 통해서 명시적인 그리스도 신앙 고백(직접적 그리스도론)으로 발전된다. 구체적으로는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본래적 신원과 그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존칭들을 받아들여서 예수에게 적용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존칭들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서로 합성되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존칭의 적용 기준은 존칭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예수의 독특한 역할과 신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은 ‘메시아’이다. 메시아 개념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과거의 다윗 왕조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고 다윗 왕조의 복구를 갈망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런 갈망과 함께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형성되었는데, 그 구원자는 왕이나 대사제 혹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왕, 대사제 그리고 예언자는 자신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래서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자, ‘maschiach’, 희랍어로는 ‘Christos’라고 지칭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메시아 개념을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적합한 일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지혜서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고 고양된 의인의 모습을 메시아 개념과 합성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지존칭호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다. 참조: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268-270.
물론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에게 적용되었다고 하지만, 실상 이 칭호는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압바”라는 신칭(神稱)에서 드러나듯이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였다. 이렇게 부활 이전에 드러났던 예수와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에게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 칭호를 구약성서적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식 때 “야훼의 아들”로 책봉되고, 아들로 입양된다(시편 2,7; 89,27f.)고 표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아 다윗 시대의 지배권을 영원히 확립할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2사무 7,12-16). 그리고 이 칭호는 부활 이후 예수에게 적용된다: 그는 로마서의 서두에 나오는 바울로 이전의 신앙고백에서처럼 부활과 현양을 통해서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책봉된 분”(로마 1,4)으로, 혹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표현된 것처럼 부활의 날에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분(사도 13,33)으로 일컬어졌다. 이렇게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대목에서 예수에게 붙인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초인간적이고 신격적 존재가 아니라 현양에 의해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책봉된 지배자라는 뜻인 것이다. 본래 이 칭호가 뜻한 것은 육친적(肉親的) 아들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간택과 전권 위임이다: 이 예수가 이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신다. 하느님 아들 칭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칭호보다 인간 나자렛 예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 편이며, 공동체와 세계 앞에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분임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한다. 즉 아버지 하느님과의 구분(복종, 종속),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동일성(하느님과의 일치, 신성)을 포함한다.
신약성서는 예수를 ‘사람의 아들’(참조: 다니 7,13)로 고백한다. 예수가 생전에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브레데(William Wrede)와 불트만(R.Bultmann) 이후로 ‘사람의 아들’ 칭호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1) 미래에 심판자로서 구름과 함께 나타날 사람의 아들, 2) 미구에 수난받을 사람의 아들, 3) 현재 활동중인 사람의 아들. 독특한 점은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한 가지 예외(사도 7,56)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로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신약성서는 묵시문학에서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을 예수에게 적용함으로써 부활한 예수의 미래적 차원을 표현한다. 즉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심판자로 도래할 사람의 아들로서, 그를 믿는 이들은 미래의 심판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하느님의 아들’이나 ‘그리스도’처럼 경신례에서 신앙고백용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2.2.3. 선재(先在)의 그리스도론의 형성

선재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의 신이해가 유다의 신이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기 시작하는 경계점으로서, 여기서부터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된다. 선재의 그리스도론이 기본적으로 말하는 바는 인간 나자렛 예수가 지상에 현존하기 전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존재하고 있다가 역사적인 예수와 합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은 신약성서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진술은 “시작에서 끝으로가 아니라 끝에서 시작을 향해서 고찰되었다. 즉 첫번째의 신앙의 증인들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분에서부터 예수 생애의 시작을 소급해서 바라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아들” 칭호는 점차적으로 예수의 세례(마르 1,9-11), 예수의 탄생(루가1,32, 35), 마침내 탄생 이전의 하느님의 영원성(갈라4,4; 요한 3,16)에로 거슬러 올라가 적용되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저 일시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의 하느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는 진술로 발전되었는가? 신약성서에 나타난 선재에 대한 진술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 있던 말씀에 대해서 언급하는 요한복음의 서문은 그 말씀의 육화와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요한 1,1-14)에서 정점에 이르른다; 필립비서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던 분이 자신을 비워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다고 고백한다(필립 2,6-11);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에 관한 골로사이서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화해와 평화가 이룩되었다고 끝맺는다(골로 1,15-20). 이상과 같이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진술은 십자가 사건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진술은 “하느님과 세상에 대해서 박식하게 숙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의 유일무이한 권리 주장을 명백히 하고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근거지우기 위한” 역할을 한다. H.Küng, Christ sein, 436.

하느님의 아들이 영원으로부터 선재한다는 진술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진술은 예수와 그의 사건은 하느님에게 뿌리를 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서 연역불가능한 고유성과 함께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 외에 영원으로부터 다른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편적인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 예수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예수와 예수 사건의 최종적 근원은 역사 내적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 근거해서” 설명된다. 같은 책, 437f.
“신약성서의 선재에 관한 진술들은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과 그 업적의 종말론적 성격을 좀더 새롭고도 깊이있게 표현해 준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아무런 유보 없이 그리고 그 이상 능가할 수 없을 만큼 몸소 계시하고 건네주었기 때문에 예수는 하느님의 영원한 본질을 정의해 준 분이다. 그리스도 사건의 이와같은 종말론적 성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맺어진다. 예수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역사와 운명은 하느님의 본질에 뿌리박고 있다. 동시에 하느님의 본질이 하나의 사건으로서 실증된다. 이처럼 신약성서의 선재 언사들은 신 개념의 포괄적 재해석에로 이끌어 간다”. 발터 카스퍼,『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옮김, 308 이하.


2.2.4.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신성

신약성서는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서 언급된다. 바오로는 단지 몇몇 구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연관 없이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할 뿐이다(로마 1,19이하; 사도 17,22-31).
이렇게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계시하는 예수는 ‘압바’ 칭호에서 나타나듯이 아버지 하느님과 독특한 관계 속에 있었다.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와 하느님과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강조하여 표현한다. 비가시적이고 모든 이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이 오직 계시자 그 자체인 ‘아들’에게만 알려졌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요한 10,15.38),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기에(요한 10,38; 14,10f. 20; 17,21-23),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에(요한 10,30), 아들을 보는 이는 아버지도 보는 것이다(요한 14,9; 12,45; 5,19). 그리고 요한은 더 아나가서 예수를 영원으로부터 선재하는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말씀(Logos)으로 고백한다(요한복음 서문과 요한 1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느님의 로고스와 하느님의 아들은 신적인 자격 혹은 그 본질이 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를 한 번 하느님이라고 부른다(요한 20,28). 골로사이서에 따르면 세상의 흐름과 정치, 문화를 규정하는 세력과 능력이 결코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고, 진정한 세상의 주인(Kyrios)은 이미 세상 창조 때에 유일한 중개자의 위치에 있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골로 1,15-20). 그분 안에는 “신성의 온갖 충만함이 몸이 되어” 머물고 있다(2,9). 이와 비슷하게 로마의 황제 숭배에 직면해서 어려움을 겪던 2세기의 그리스도 인들은 사목서간에서 그 당시 지배자의 칭호를 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디도 2,1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이런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과 함께 선조들의 유일신 고백이 당연히 고수되었다.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선재에 관한 언급하면서도 예수는 간단히 하느님/야훼와 동일시되지 않았다. ho theos는 신약성서에서 거의 항상 아버지 하느님을 의미하였다.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에서 예수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아버지 하느님과 독특한 관계 속에 있는 인간으로 이해된다. “참 인간인 나자렛 예수는 신앙인들에게 참된 하느님의 실제적 계시이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아들이다”. H.Küng, Existiert Gott?, 749. 한스 큉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고유한 관계를 “계시의 일치”(Offenbarungseinheit) 혹은 프란쯔 무쓰너(F.Mussner)의 표현을 빌어서 “행동의 일치”(Aktionseinheit)로 해석한다.
바오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고린 3,23).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드님께 굴복하게 되면 그 때는 아드님도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 몸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 15,28). 또한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요한 14,28)고 증언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현양된 분으로서 ‘다른 이를 위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중보자의 위치에 있는데, 특히 바오로와 요한은 예수가 일치를 이루는 성령을 선사함으로써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성령은 인간과 예수와의 일치, 인간 서로의 일치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인간과 아버지와의 일치를 형성한다. 실상 신약의 백성은 성령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하게 된다.

2.2.5. 성서에 나타난 성령

이미 구약에서도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세상,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으로 나타났다. 신약의 백성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구약에서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느님의 선하심과 가까우심을 확신하고 하느님이 인간들 안에서 직접적으로 현존하심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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