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라틴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계속적인 전개
3,4세기의 교부들은 유일한 하느님께서 세 위격 안에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한 신학적 표상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라틴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요 주교인 아우구스티노(354-430)는 “De Trinitate”라는 저서에서 본격적 의미의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한다. 다른 두 위격들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성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의 신 本性 내지는 신 本質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substantia”(실체)라는 용어를 수용하여서 하느님을 신적인 실체라고 전제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실체는 自立的인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실체에는 보충 개념인 “accidentia”(偶有, 우유적 속성)가 속하는데, 유유란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디에 덧붙어서 존재한다(예를 들어서 인간 일반을 생각할 때 피부색, 체구의 대소 따위).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하나의 신적인 실체로 전제하는데, 세상 사물과는 달리 우유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유란 변화와 관련된 것인데,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에 그분께는 우유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의 세 위는 우유로 파악될 수 없다. 그 대신에 아우구스티노는 세 위를 관계(relatio)로 이해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내적인 관계는 있을 수 있으나 반드시 있을 필요는 없는 우유적인 관계가 아니라 실체적인 관계이다. 즉 유일한 하느님 안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본질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어서 그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는 하느님의 본질과 동일하고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은, 유일한 하느님은 내적인 관계 속에서 생활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유일한 본질에서 대전제로 삼고서, 셋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relatio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관계 그 자체이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을 발출한 신적인 근원외에 다른 분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발출하는 분외에 다른 분이 아니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 분으로서 둘을 결합시키는 영외에는 다른 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하느님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 삼중의 실재적인 관계가 형성됨을 알 수 있다. “내가 무엇인가을 사랑한다면 셋이 있게 된다. 즉 나, 내가 사랑하는 대상 그리고 사랑 자체… 셋은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는 대상 그리고 사랑이다.”(De Trin. IX 2). 이런 사랑의 본질에서 하느님 안의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을 통해서 존립하게 된 것을 사랑하며 감싸고, 하나는 자신의 존립의 근거가 되는 이를 사랑하며 감싸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다”(De Trin. VI 5).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 신비를 해설하는 방법으로 “인간 정신 생활의 단일성 안에서의 삼성(三性)을 유비적으로 적용하였다. 아우구스띠노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은 인간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는 성서에서 취해진 진리이다. 이 모상이 비록 하느님의 원형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불완전하지만, 아우구스띠노는 이 모상으로부터 하느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삶을 일별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일성과 위격들의 삼성(三性)을 해설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 analogia)를 특히 인간의 영혼(anima)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노가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으로 포착한 영혼의 세 가지 속성, 즉 존재함(esse), 앎(nosse), 원함(velle) 등이 정신의 내재적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삶의 내재성을 직관토록 하며 삼위일체를 특정하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유비 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세 개의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들을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에, 인식이 성자에, 사랑이 성령에 유비적으로 해당된다고 설명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이면서 실제로는 구별이 되는 자립적 관계라고 이해된 것이다”. 심상태,「삼위일체론의 어제와 오늘」,『續‧그리스도와 구원』,성바오로출판사, 1984, 156-157.
이렇게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서로 실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신적인 본질을 지니면서 하나로 되는 자립적인 관계(relation)라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방의 삼위일체 신학의 근간이 되는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은 구세사의 세 위격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본질에서 출발하면서, 하나인 신적 본질이 그 자체로 어떻게 세 위격으로 존립하느냐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동방교회의 신학에서는 이와는 달리 신적인 일치를 신적인 본질의 “근원”이며 “정점”인 아버지에 근거를 두고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일치를 상호간의 내재(內在)와 “관통”(貫通)의 모델로 이해하려고 했다. 즉 원천 자체인 유일한 하느님 아버지가 말씀(아들)을 통해서 영 안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별 셋이 나란히 서있는데, 첫째별이 자신의 빛을 둘째 별에게 그리고 셋째 별에게 비추어줌으로써 인간의 눈에서 이 세 별이 오직 하나의 별로 비추어진다. 성령안에서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은 켄터베리의 안셀모(Anselm von Canterbery)가 이어받아서 발전시켰다(“Monologion”, 1076). 안셀모의 견해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미 시간이 있기 이전에 자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의 내재적 생각과 말씀은 최고의 실체인 하느님과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전달 사항이나 정보를 의미하지 않고 신적인 최고의 실체가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무엇을 발출하기를 원하는지가 담겨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신적인 최고의 실체와 동일하게 영원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은 최고의 실체의 아들 자체로 파악될 수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집약되기에 아들은 진리의 기준이 된다. 최고의 실체와 그의 말씀은 서로를 긍정한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그 둘에게서 나오는데, 사랑은 최고의 실체보다 작지 않다.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합치시키기 때문에 “낳음을 받았다”가 아니라 “발출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랑은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과 같다, 즉 하느님이다. 그 사랑을 계시에서는 성령이라고 일컫는다. 외적으로는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 이를 안셀모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느님 안에는 관계들이 상대방에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하나이다(In divinis omnia sunt unum, ubi non obviat relationis oppositio). 이 신학적 진술은 피렌체 공의회에 의해서 수용되었다(DS 13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74)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하나의 하느님 본성으로부터 밝혀지는 세 위격을 인간의 정신생활의 유비를 적용하여 이끌어낸다(Sth I, qq.27-43). 그는 삼위의 관련을 발출(發出, processio)로 설명한다. 성자와 성령의 발출양식의 구별을 규정하는 문제는 교부시대 이래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난제로 머물러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적 발출에 대해서 인간의 정신 작용, 즉 인간 정신의 두 기능인 이해과 의지 양식에서 유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이해의 방식에 따라서 발출되는데, 성부는 이 이해를 통해서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자기 자신의 ‘개념’을 형성한다. 이런 완전한 일치는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出生(generatio)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 혹은 모상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이 출생은 태어난 이에게 낳는 이와의 유사성을 전달해준다. 출생된 말씀은 낳은 이보다 작거나 늦지 않은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모든 시간에 앞서 자신과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말씀을 발설하였고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오직 낳음과 출생이라는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서로 구분될 뿐이다.
성령은 의지와 사랑의 방식에 따라서 발출된다. 그의 발출은 기출(氣出, spiratio)이라는 이름을 지닌다. 왜냐하면 영은 움직임으로 이끄는 어떤 힘으로서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도록 움직이는 충동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amor)은 성령의 고유 이름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모르고는 발출되지 않고, 또 아버지와 아들(말씀)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사랑인 성령은 둘에게서 발출된다.
이상과 같은 사변적인 삼위일체론 연구는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를 신학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전제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토마스가 하느님의 위격과 파견(missio)에 대해서 논한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STh I q.43). 구세사적 파견에서 하느님 내재적 발출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서 시간 안으로 인간을 향해서 계속된다. 파견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이미 일어난 하느님의 본질실현이 인간을 위한 구원 사건이 된다. 아들과 성령이 시간 안으로 파견됨으로서 인간은 하느님 삼위 의 사건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데, 즉 인간은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근원인 참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게 된다. 삼위일체론이 이렇게 구원론적으로 정향되는 것은 토마스에게서처럼 파견과 하느님 안의 내재적 발출이 가능한 밀접한 관련 속에서 고찰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 신학과 신스콜라 신학에서는 파견의 신학이 하느님의 내재적 발출의 가르침에서 유리되면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독립되는 경향이 점점 커져갔고, 그래서 하느님의 내재적 발출은 구원역사적 구체성에서부터 분리되었다. 이는 삼위일체 신비 자체가 우리 인간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인상을 주게 하였다.
안셀모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을 계속 발전시키기를 원했기에 앞질러서 이 자리에서 다루게 되었다. 두 신학자 이전의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해서 언급되야 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바는 서방에서 삼위일체론은 얼마나 철저하게 거듭 하느님의 유일성에서 출발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중의 하나가 이른바 “아타나시오 신경”이다. 이 신경은 중세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수도자들의 성무일도에, 그리고 일부에서는 매주일 미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신경은 사실상 아타나시오와는 관계 없이 5세기경부터 남부 갈리아 지방에서 니체아와 칼체돈 공의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내용적으로는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다. 지적이며 고정된 표현은 그 당시의 서방 교회의 심성에 상응한다고 하겠다. 아타나시오 신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음의 것은 가톨릭 신앙이다: 우리는 한 분의 하느님을 삼위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를 유일함 안에서 위격의 뒤섞임없이, 본질의 분리없이 공경한다. 아버지의 위격이 다르고, 아들의 위격이 다르며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성령은 오직 한 분의 신이고 동일한 영광과 동일한 존엄을 지니신다. 아버지처럼 아들이 그러하고 성령이 그러하다. 아버지는 창조되지 않고 아들도 창조되기 않고 성령도 창조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한하고 아들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한다. 아버지는 영원하고 아들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무한한 분이 셋이 아니라 한 분의 무한한 분이 계신 것처럼 영원한 분이 셋이 아니라 한 분의 영원한 분이 계시고, 또한 창조되지 않은 분이 셋이 아니라 한 분의 창조되지 않은 분이 계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전능하고 아들도 전능하며 성령도 전능한데, 전능한 분이 셋이 아니라 한 분의 전능한 분이 계시다. 이렇게 하느님이신 아버지, 하느님이신 아들, 하느님이신 성령이 계시는데 그러나 세분의 하느님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신다. 주님이신 아버지, 주님이신 아들, 주님이신 성령이 계시는데 그러나 세분의 주님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의 주님이 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따라서 각 위격을 하느님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그러나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을 세 분으로 혹은 주님을 세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낳음을 받지 않으셨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는 않고 낳음을 받았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낳음을 받지는 않고 발출되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한 분이지 세 분이 아니다. 아드님은 한 분이지 세 분이 아니다. 성령은 한 분이지 세 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에서 누가 빠르거나 혹은 늦지도 않고, 누가 더 크거나 혹은 작지도 않고 세 위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고 동일하게 위대해서,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한 분의 하느님을 삼위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를 유일함 안에서 경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락을 누리기를 원하는 자는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사항을 믿어야 한다”.
로마의 라테란에서 649년 교황 마르틴 1세 때 열린 시노드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가르침을 표명하면서 그 시작에 거룩한 교부들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라면서 삼위일체에 관하여서 진술하였다. 신적인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unus Deus in tribus subsistentiis consubstantialibus”. 즉 본질이 동일한 세 자립성(自立性) 안의 한 분이신 하느님. 세 존립이 함께 오직 한 분의 하느님, 하나의 본성, 하나의본질, 하나의 능력과 세력, 하나의 의지, 하나의 활동을 지닌다(DS 501). 여기서“Subsistentia”는 그리스말 “hypostiasis”의 번역이고 “consubstantiales” 는 “homoousiai”의 번역이다. 창조와 섭리는 한 분이신 유일한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서도 서방에서는 삼위일체에 관해서 진술할 때 얼마나 철저히 하느님의 유일성에서 출발하는지가 다시금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방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11차 톨레도 시노드(675)의 신앙고백도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신앙고백은 삼위일체(trinitas)의 하느님 안에서 삼위의 구분을 표현하는 관계와 삼위의 일체를 표현하는 신적이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부가 아버지인 것은 그 자체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성자가 아들인 것은 그 자체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서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그 자체로 성령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 지칭됨으로써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다른 위격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오직 자신에 관계되어 말해지는 것이다”(DS 528).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시작된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공식적 교리도 아니고 성서의 가르침도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단일성 안에서 구별되는 세 위격들이 당연히 내적으로 필연적인 관계성을 지녀야 하는데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이 관계성을 구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위격들을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에 관념적인 순간들로 오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W.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Mainz, 1982, 364.
3.2.8.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삼위일체론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교회 내의 다양한 다툼이 있었다. 12세기의 신학적 논쟁들과 요아킴 피오레(Joachim von Fiore, +1202)가 베드로 롬바르도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공격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요아킴 피오레 스스로는 일종의 삼신론에 가깝운 생각을 드러냈다. 파리의 신학자 아말리치(Amalrich, +1205/1207)에게서 유래한 아말리치파는 일종의 범신론을 대표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본질이며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우주에 퍼져있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세 위격은 동일한 본질이거나 동일하게 영원하지 않고 순차적인 세계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카타리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4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모여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열게되었고 거기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인정하였다. 아마도 이 신앙고백은 11차 톨레도 시노드의 신앙고백에 의존한 것으로서 신학적 논문에 가깝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신앙고백이 베드로 롬바르두스에게 특별한 권위를 인정한 점이다.
우리는 올곧은 마음으로 굳게 믿고 고백하는 바, 오직 한분의 참되고 영원하며 무한하고 변하지않으며 파악할 수 없고 전능하며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다: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계시는데, 세 위격 그러나 하나의 본체, 실체 그리고 아주 단순한 본성이다: 아버지는 발출되지 않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성령은 둘에게서 발출되었다: 시작이 없고 영속하며 끝이없이 아버지는 낳고 아들은 낳음을 받고 성령은 발출한다: 같은 본체와 같은 완전성을 지니고 동일하게 전능하고 영원한다. 모든 사물의 유일한 원천.
우리는 거룩한 공의회의 인준을 받아서 베드로 롬바르두스와 함께,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본체는 유일하고 그 본체는 실제로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것을, 즉 세 위격이고 각자가 위격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오로지 삼위가 일체이지 사위(四位)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유일한 본체, 즉 최고의 유일한 실체, 본질, 신적인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본체 홀로 모든 사물의 원천이다. 그 외에는 다른 원천이 없다. 그 본체는 낳거나 낳음을 받거나 발출되지 않는데, 그 본체는 낳는 아버지, 낳음을 받은 아들, 발출되는 성령이다. 이렇게 해서 위격들의 구분과 본성 안의 일치가 보존된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다르다고 해도 아버지의 본질과 같은 본질을 아들과 성령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통 가톨릭 신앙에 따라서 셋이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아들의 증언이 말해주듯이 아버지는 영원으로부터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에게 자신의 본체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만유보다도 크다”(요한 10,29).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본체의 일부만 주고 일부는 자신에게 유보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본체는 아주 단일하기에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자신의 본체를 (자신에게서 떼어)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마치 아버지가 본체를 아들에게 주고 자신은 본체를 갖고 있는 않은 것처럼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는 자신이 본체이기를 중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출생을 통해서 아버지의 본질을 아무런 제한없이 받았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본체를 지닌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그리고 두 분으로부터 발출하는 성령은 같은 본체이다.
그러나 믿는이들에게 (영원한) 진리이신 분이 아버지께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2)고 기도할 때,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신앙인들에 대해서는 은총을 통한 사랑의 일치라는 의미로, 신적인 위격들에 대해서는 본성상의 일치와 동일성의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서 진리이신 분께서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48). 그분께서 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본성의 완전함을 통해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은 은총의 완전성 안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해서 비슷함에 대해서 얘기할 때 둘 사이에 존재하는 더 큰 차이를 포함하지 않고는 얘기할 수 없다(DS 800-806).
피렌체 공의회(1438-1445)는 1054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동방교회와의 일치협상 때문에 삼위일체에 관해서 언급하게 되었다. 라틴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는 고백을 수용하기를 요구하였다. 야고버인들(451년 칼체돈 공의회 이후에 분리된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대한 결정문은 (켄테베리의 안셀모에 크게 의존하여서) 짧은 문장으로 교부-스콜라 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요약하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철저한 추종자 루스페의 풀젠시우스(Fulgentius von Ruspe, +532)가 인용된다.
우리 주님 구세주의 말씀에 근거해서 거룩한 로마 교회는 한분이신 참되고 전능하며 불변하고 영원한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본체에 있어 하나이고 위격에서 있어 셋임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아버지는 출생되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로 낳음을 받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나 성령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오직 아버지이고 아들은 오직 아들이며 성령은 오직 성령이다. 오직 아버지만 자신의 실체로부터 아들을 낳았고, 오직 아들만 아버지 홀로에게서 낳음을 받았고, 오직 성령만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발출된다.
이 세 위격은 한 하느님이고 세 하느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위격은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질,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성, 하나의 무한함, 하나의 영원성을 지니고 그리고 관계들이 상대방에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그들 안에서) 하나이다.
‘이런 일치 때문에 아버지는 온전히 아들 안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신다. 또 아들은 온전히 아버지 안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신다. 그리고 성령은 온전히 아버지 안에, 온전히 아들 안에 계신다. 영원성에 있어서 누구든 다른 이보다 이르지 않고, 위대함에 있어서 누구도 다른 이를 초월하거나 혹은 힘에 있어서 능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근원을 취한 것은 영원하고 시작이 없으며,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 것이 영원하고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Fulgentius).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원 혹은 아버지가 지닌 것은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는 다른 데에 근원을 두지 않는 근원이다. 아들의 신원 혹은 아들이 지닌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는 근원에서 나온 근원이다. 성령의 신원 혹은 성령이 지닌 것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의 두 근원이 아니라 오직 한 근원이다. 그래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창조의 세 근원이 아니라 오직 한 근원이다(DS 1330-1331).
이 신앙고백으로서 서방교회에서는 교도권 차원의 공식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종결되었다. 스콜라 신학의 시대에 형성된 삼위일체론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즉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유일한 신적인 본체와 두 번의 발출을 통해서 형성된 하느님의 내적인 관계의 삼성(三性), 이 관계들의 고유성 혹은 특징, 이들 상호간의 내재(內在)와 “밖을 향한”(창조와 관련한) 공동의 작용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였다.
3.2.9.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요약
우선 하느님의 삼위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신비로서(DS 3015) 하느님의 계시와 독립해서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시 사건 이후에도 피조물의 제한적인 이성으로 자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 “위격”(persona, subsistentia) 안에 계시는데, 세 위격은 하나의 신적 본질(하나의 신적 본성, 하나의 신적 실체)을 지니고(DS 112, 800), 그래서 같이 영원하고 같이 전능하다(DS 44, 526-528; 1330).
2) 세 “위격”은 (실제로) 서로 구분된다(DS 73, 800, 1330); 아들은 홀로 아버지로부터의 신적인 본질의 영원한 전달(“출생”, “로고스”를 발설함)을 통해서 자존(自存)한다(DS 44, 525-527, 422-424). 성령은 낳음을 받지 않고 (유일한 근원인)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일한 “기출”(氣出, spiratio)을 통해서 발출된다(DS 75, 112, 1331).
3) 그러므로 유일한 하느님 안에는 근원과 갖는 두 가지 관련을 통해서 서로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relatio)(DS 528, 531, 1330) 혹은 특성(proprietas)(DS 531, 800)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본질과는 구별되지는 않는다(DS 1330). 각각의 위격은 유일한 하느님이다; 그들에게 상반되는 관계(relationis oppositio)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DS 1330)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며(DS 1331)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DS 528-529, 790, 851). 세 위격은 “외부”를 향해서(피조물에 대해서) 오직 하나의 역사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DS 800, 1330).
출생, 근원, 발출, 기출이라는 개념은 아들과 성령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와 같는 관계에 대한 성서의 표현에서 추론한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치중하였고, 이와 밀접히 연관된 교리, 성부로부터의 성자와 성령의 구세경륜적 “파견”(missio) 교리는 교도권에 의해서 거의 계발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분리된 데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실생활과는 별관련이 없는 순수 이론적, 추상적 교리로서 소원하게 느끼게 한 큰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3.3. 하느님 이해의 변천과정
3.3.1. 否定신학의 하느님 이해
언어상 부정문의 형태로 표현하는 하느님 인식은 고전적인 형태로는 5세기 말의 그리스도교적 신플라톤 철학자로서 오늘날까지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사도 17,34 참조)라고 불리는 사상가의 작품에서 유래된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설명하는 신 이해, 즉 기존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僞 디오니시오가 골몰하던 문제는 하느님이 어떻게 모든 것의 근원이 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자를 초월하여 도달할 수 없는 먼곳으로 넘어가느냐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다스림과 인식불가능하고, 들을 수 없으며 표현불가능한 하느님의 본질을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한다. 즉 위 디오니시오는 ‘하느님은 무엇이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무엇이 아니다’고 말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onis)로 얘기한다.
하느님은 파악할 수 없이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파악능력에서 계속 벗어나 있다고 말할 때 여기에는 한가지 긍정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즉 하느님은 유한한 것과는 대치되어 있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신학에서는 하느님의 파악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하느님이 아주 다른 분이라는 점은 긍정을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은 두가지 전통의 흐름으로 묶을 수 있다. 부정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를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대표적으로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와 그의 학파가 있는데, 이들은 부정(포기, 단념)의 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다른 하나로는 부정신학의 사변적인 요소가 발전되어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의 類比論(analogia)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존재의 유비”(anlalogia entis)라는 말인데, 이에 다르면 무릇 존재하는 것을 존재 자체와 비교할 때 일치점과 차이점이 동시에 언급되어야 한다. 일치점으로는 모든 존재자에는 “존재”라는 속성이 있는 것이고, 차이점은 존재하는 형태가 다르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서 차이점을 말한다면, 하느님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분이고(ens a se) 피조물은 다른 것을 통해서, 다른 것 안에서(ens in alio et ab alio) 존재한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해서 비슷함(similitudo)에 대해서 얘기할 때 둘 사이에 존재하는 더 큰 차이(major dissimilitudo)를 포함하지 않고는 얘기할 수 없다”(DS 806). 이렇게 창조주의 초월성에 근거해서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더 큰 차이”를 강조한 데에서 부정신학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중세 후기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無知의 知”(docta ignorantia)라는 생각을 근간으로 삼아서 부정신학을 추구하는데, 내용적으로는 고대의 신관념인 “대립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수용한 것이다. 이하 참조: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上),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1992, 666.
이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무한자인 신에 있어서는 경계가 없어지고 일치가 생긴다는 뜻이다. 신은 극대자(極大者, Maximum)이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그 이상 클 수도 적을 수도 없는 충족(充足) 자체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들의 오성이 다양한 것이라고 보아오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을 다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다. 신은 모든 사물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complicatio)이요, 또 이 사물들이 그 안에서는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대립의 일치”이다. “신은 그저 모든 본성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본성이다. 지금 있고, 과거에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모든 본성들이 신 안에, 현실적이고 영원히 포함되어 있다”(『무지의 지』1, p.32). 여기에서 인간이 사자와 다를 바가 없으며, 하늘이 땅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체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이 없다(1.c.49). 쿠사누스는 수학적인 고찰의 도움을 빌어서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예컨대 유한한 것에 있어서는 곡선과 직선이 대립하는것이지만, 무한한 원에 있어서는 굽음(曲)이 무한히 적기 때문에 이 굽음이 제로(0)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에는 곡선과 직선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본성은 세상의 피조물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하느님이 존재론적으로 그 피조물과는 다르기 때문에 부정의 표현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신학에서 중요하고 포기할 수 없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이성을 도구로 하느님께 접근하려는 정당한 신학적 노력이 하느님을 완전히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3.3.2. 켄테베리의 안셀모의 하느님 이해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철학을 신학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철학적 논증을 통해서 하느님 신앙을 이성적으로 근거지우려고 노력했는데, 이 노력의 바탕에는 신앙적 근본 결단이 있었다.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켄터베리의 안셀모는 중세신학의 이러한 신앙적 전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 수 있기 위해 믿는다”(Prosl., cap. 1).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상가로서, “신앙은 지성을 요구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는 표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스콜라 신학은 전래된 신앙 내용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개념으로 표현하고 체계화 시킴으로써 교회 내에서(12세기부터 생겨난 대학에서) 교육받은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대화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신학을 체계화하려는 시도는 이미 교부시대의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교부시대의 유산이 스콜라 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와 함께 플라톤 철학적 요소가 스콜라 신학에 유입되었다.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교부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권위자는 아우구스티노였다. 그외에도 보에시우스(Boethius, +524)와 僞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가 명망을 누렸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은 교부시대의 유산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과 문제제기에 맞추어서 재정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저작은 여러 길을 통해서 서방에로 전해졌다. 보에시우스를 통해서, 콘스탄티노플을 통해서, (스페인의) 아라비아와 유다 전통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아비첸나(Avicenna, +1037)와 아베로스(Averroes, +1198)를 통해서 서방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대 알베르또(Albertus Magnus, +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74)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스콜라 신학의 출발점은 항상 성서의 하느님 말씀이었다. 하느님 말씀은 “lectio”에서 제시되고 해석된다; “quaestio”는 성서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더 깊은 이해와 맥락의 이해를 추구한다; “disputatio”에서는 여러 가지 해결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결정을 시도한다. 여기서 형성된 문학적 종류인 “summa”는 질문과 대답을 완결되지 않은 개방된 체계로 제시해서 계속적인 토론과 해설의 길을 열어놓는다. 매번 내놓은 의견들은 가능한 성서의 인용하고, 교부시대의 “권위자들” 그리고 이방인 철학자들을 끌어대어서 보증한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의 기초에는 항상 성서에 증거된 계시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전제되어 있다. “신앙 개조(箇條)”는 이성적으로 통찰할 수 없고 오직 신앙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원리”(principium)로 간주되는데, 그 원리들에서 사고를 통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신학은 인간 삶의 목표인 지복직관에 이바지 하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콜라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신심의 유산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고 신비주의자들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폐쇄적이지는 않았다. 이 신학은 결국 항상 실천적인 목표설정을 하였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최종 목표만이 아니라 그 목표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언급했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신앙과 성서에 담긴 실질적인 삶에로의 자극보다는 신앙과 성서의 진술 내용을 논증적으로 연구하였다.
안셀모는 자신의 저서 “Proslogion”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그분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숙고하고 말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이하 참조: 같은 책, 476-478.
그는 하느님 신앙의 합리성의 근거를 마련하기에 홀로 그 자체로서 충족한 논거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안셀모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그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엇인가를 반드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즉 그는 신이라는 말로써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id quo maius cogitari non potest: Prosl., cap. 2)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그저 이성의 사고 속에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의 더 위대한 것, 즉 사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하는 그런 것이 생각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존재라는 관념은 이 최고의 것이 이성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신개념 자체로부터 신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2.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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