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참 묘한 분이셨어요

신학생 시절, 아침 기도 시간이면 변함없이 앞자리에서 졸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 이틀, 그는 언제나 아침기도 시간에는 비몽사몽간이었다. 개학하기 전에 한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학기 시작의 자세가 한 학기를 지배하고, 학기 시작의 자세가 신학교 생활 전체를 좌우하고, 더 나아가 학기 시작의 자세가 사제생활 전체를 좌우하니 학기 시작의 자세를 잘 하도록 하라” 그래서 기도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습니다. 지당하십니다”를 반복했지만…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버티고 있는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졸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보는 내 마음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 사람은 하필 왜 내 앞에 앉아서 졸고 있을까? 왜 나는 이 사람의 뒤에서 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할까? 그런데 한 달에 한번씩 성당 자리를 바꾸었는데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앞자리였고 나는 그의 뒤에 있었다. 기도시간은 언제나 전쟁이었고 성당에서는 죄만 짓고 나왔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와 나와의 전쟁이 아니라 나와 나 사이의 전쟁이었고, 그가 나를 죄짓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죄짓게 한 것이다.



그 날도 변함이 없는 날이었다.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또 처절한 전투를 벌였고, 심각한 상처를 입고서 성당을 나왔다. 그리고는 무작정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의 방에 들렀다. 그 선배는 군대에 있을 때에도 나를 위해서 많이 힘써주었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님의 방에 들어가니 그 선배님은 차를 한잔 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불렀냐? 네가 불렀으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들도 싫증이 나서 모두 내쫓고 결국 너 혼자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네가 부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런데 그 순간 너무도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선배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너무도 놀랍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하느님의 음성을 그 선배님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도 나에게 말씀을 건네시는구나!” 아무 생각 없이 돌린 발길이 결국 그분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앞에서 졸고 있는 그 사람이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 2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나를 근심 걱정에 휘말리게 한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드리고 극복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내 안에는 번뇌의 파도가 밀려오지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잔잔한 평화가 밀려온다. 내 안에도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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