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전교구 60여년… 사제 서품 역사는
1948년 12월 첫 사제 강만수 신부 탄생
▲강만수(요셉)신부
매해 열리는 천주교 대전교구의 사제서품식을 보며 드는 궁금증. 대전지역에 첫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누구일까? 또 지금처럼 큰 규모의 사제서품식이 열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천주교 대전교구 60년사에 따르면 천주교 대전교구가 설정된 이후 첫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신부는 강만수(요셉) 신부이다.
총 19명(프랑스 16명, 한국 3명)의 성직자로 출발한 신생 대전교구는 전쟁 전까지 몇 명의 증원이 있었고, 1948년 12월 18일 강만수 부제가 사제품을 받으면서 교구설정 이후 첫 번째 신부가 됐다. 이어 1950년 4월 15일에 박노열, 신종호 신부가 탄생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되돌아온 세 명의 선교사가 합류함으로써 6명이 증가했다. 1949년에 돌아온 를뢰(Leleu, 노베드로)와 생제(Singer, 성재덕 베드로) 신부, 1950년의 뷜토(Bulteau, 오필도 요셉) 신부가 그들이었다. 이로써 천주교 대전교구의 사제는 총 24명이 되었지만, 이중 절반에 가까운 10명이 한국전쟁 중에 사망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매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예비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일꾼이 너무 부족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노령화도 인력부족을 심화시켰다. 여기에 국적의 차이, 소속 교구의 차이, 성직자 연령의 심각한 불균형 등은 전쟁 이후 교우들의 급속한 증가에 교구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이후 대전교구는 1993년 충남 연기군에 대전가톨릭대학을 건립하면서 만성적으로 시달리던 사제부족을 해결한 근본대책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대전신학교 건립은 그 계획이 발표되기 전부터 교구 사제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기존에 해오던 대로 서울신학교에서 사제양성을 하면 되고, 한국에서도 조만간 성소자가 감소할 것이므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새로운 신학교를 건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당시 경갑룡 교구장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제성소(가톨릭-하느님이 사제직으로 부름)의 위기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성소자가 풍부한 지금이 적극적으로 사제를 양성해야 할 때’라는 일념으로 추진했다.
대전가톨릭대학이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91년 8월 6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식이 있었다. 교구가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거행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서품자가 많아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서 거행하기가 어려웠고, 교구 내 청소년들을 대거 초대하여 사제성소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후 교구 서품식은 줄곧 체육관을 빌려 거행해야 할 만큼 사제 서품자가 많아졌다.
1990년대 들어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1980년대에 사제가 대폭 증가하였기 때문. 한국전쟁 이후 늘 사제 부족에 시달리던 대전교구는 사제성소의 증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제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면서 신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와 같은 교구의 노력과 사회현상이 1980년대에 사제성소를 증대시키는데 일차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1985년 적극적인 성소자 발굴체제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되면서 사제가 증가했다. 대전교구는 예비 신학생 모임을 강화해 매월 모임을 갖도록 했고, 신자 1천 명당 1명의 신학생 갖기 운동을 전개했다.
김정한 천주교 대전교구청 신부는 “이때 마련된 성소자 육성 방안은 교구 안에 그대로 정착되어 사제성소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며 “이로 말미암아 교구 설정 이후 늘 고민하던 사제의 부족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틀이 갖춰져 이후 계속된 교구의 외적 성장에 부응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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