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약의 하느님-(나)

어떻든 예수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고 우리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다는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나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는 분을 계시 되었기 때문이다(요한 14,6; 마태 6,4.18; 11,27; 루까 10,22). 하느님의 이와같은 모습은 이‘잃었던 아들’의 비유 이야기 – 사실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가 더 어울리는 제목일 수 있다. 아들이 주인공이라기 보다 아버지가 주인공인 것이다. 아버지는 방탕했던 아들을 면박하거나 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 (루까 15,11-32) 가운데 구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의 공적 생활과 설교는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삶과 말씀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임하도록하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육화는 하느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실제의 사건이 되게 한 것이다. 본래 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이야기는 15, 1-2에서 보듯이 예수와 죄인들의 관계를 놓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거론 된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너희는 내가 죄인들과 더불어 행동한다고 비난하지만 , 하느님 역시 나처럼 죄인들을 다루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행동하셨다는 사실이다. 유비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하신 분은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특별히 마태오 11,27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읍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읍니다.” 예수가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귀절들은 예수가 계시의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주는 계시적인 말씀이다. 예수 자신만이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우리를 인도하고 아버지께 개방시키는 분이며, 그러한 권위를 지니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는 스토아 철학이 가르치는 것처럼 자연의 본성을 탐구해서 얻게 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이 진리는 성자와 관련된 계시적이고 역사적인 진리다. 그야말로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이심이 선언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은 모든 이들, 공중의 새들, 들의 풀 한포기까지(마태 6,26-30), 참새 한마리까지(마태 10,29) 돌보시는 분이시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예수 역시 구약성서의 인간이해, 즉 하느님으로보터 창조된 존재라는 점을 전제하고 출발한다.(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읍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제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리라’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마태오19,4이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라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는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마태 5,45),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있을 수 없었다.(마태 19,4이하), 오히려 대접 받지 못한 당시의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셨다(루까7,13-15; 36-50; 8,43-48; 요한 4,7-26). 힘없는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들였다(마대 11,26;18,1-5; 마르10,13-16; 루까 8,42.49-56; 9,37-42).병자나 소외된 이간일수록, 장애자일수록, 병신일수록,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마르 2,17)자신은 그들을 위해 필요한자로 처신하셨다. 따라서 보잘 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도 업신여기는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마태18,10).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의식주는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시는 분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귀한 존재인 까닭이다(마태 10,30). 따라서 어느 인간이든지 악에로 인도하는 잘못은 엄청나다. 그 잘못을 모면할 길이 없다(마태5,19; 18,6-7). 반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베푸는 선행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상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이 베풀어진다. 모든 인간은 그러기에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들이다. 여기서 형제나 자매에 대한 모독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죄가 된다(마태 5,22).
그러므로 예수에게서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어렴풋이 보여준 하느님의 부성을 명료하게 보게된다. 신약의 커다란 특징은 성부의 종말론적인 계시자 예수라는 인격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완성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경향은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하느님을 ‘abba’라고 부르는데 있다. 이 용어는 예수의 입으로부터 발설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ipssisma vox Jesu).희랍어로 쓰여진 신약성서가 아람어인 ’abba’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갈라 4,6; 로마 8,15). 이것은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그 다음 세대를 이어 받고 있는 초기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했고, 그래서 상당히 존중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 단어는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운데 살아가셨다는 독특성을 보여준다. (이미 하느님 나라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되었지만, ‘abba’란 말을 더듬거리는 어린아기의 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남다른 신뢰와 친밀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스캔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속화한 것도 아니요, 하느님의 신성을 실추 시킨 것도 아니다. 예수의 ’abba‘ 하느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또한 다스림의 권한을 지니신 주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거룩해야하고, 그분의 나라는 도래해야 하고, 그분의 뜻은 성취 되어야 하는 것이다(마태 6,9이하).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 이시다.동시에 모든 불의와 죄를 단죄하시는 종말의 심판관이시다(마태 7,21; 18,23-35). 이와같이 아버지에 대한 언명 속에서 극단적으로 인격화된 방식안에서 예수의 메시지 전체가 요약되고 있다. 이것은 한편 인간들이 희망하는 것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이 희망의 성취를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앙이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랑안에서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오로지 선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게시된 하느님께 이제 누구나 온전한 신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로마 8,16). 그리고 하느님은 부성애로써 인간을 감싸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주 자상한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마태 6,25-34; 10,29-31). 이런 점에서 주의 기도 (마태 6,9-13; 루까 11,2-4)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소박한 신뢰성과 경외감을 동시에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아주 좋은 예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주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인 행위로써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을 심화 시켜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만민의 심판관 이시고(로마 14,10-12; 히브 12,3), 동시에 아버지로서 악에 대한 진노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2,8-9; 데살 후 1,6-10). 따라서 아버지로서의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코린 후 1,3; 로마 2,4; 12,1)과 동시에 준엄한 하느님의 모습(로마 11,22)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진노도 자비와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애로써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랑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성이 배제되는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행실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드러내도록 촉구해 주고 있다(마태 5,48; 코린 후 7,1; 히브 12,10; 베드 전 1,15-17).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찿아 나서는 목자, 동전 한잎을 되 찿아 기뻐하는 여인, 비록 한시간 밖에 일을 하지 못했지만 여전 하루 품삯을 지불하시는 포도밭 주인 등의 비유에서처럼 자비로운 분으로서의 인격적인 하느님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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