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1. 문제제기
하느님에 관해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논증으로 하느님이 증명될 수도 없고, 하느님의 부재가 증명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특별히 한 인간, 한 사건, 또는 신비적인 체험안에서 계시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많은 종교가 “인간은 신을 볼 수 없는 존재”(티모 전 6,16)라는 점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우리는 그러한 체험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절재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성사적인 방법안에서만 자기 계시하시며, 하느님의 통교는 인간과 그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으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과 그 공동체에 자신을 드러낼 수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계시란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말로 수용자의 처지에 따르기 마련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비를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문제는 인간존재의 문제의 또 다른 거대한 신비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유일한 그리스도교적 체험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역시 인간이며,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역사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 해석, 표현 역시 애매모호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왜곡될 수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이 자신을 분명하게, 나자렛의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내셨다는 그리스도교적 신념이 있다. 거기엔 인식하거나 설렴함에 있어서, 또는 하느님의 실재를 이론적 표현 양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오류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왜곡은 신앙의 이차적인 일로서만 가능하다. 애매모호성 은 항상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성격상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언어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신념은 신학을 위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만일 하느님이 한분이시라면, 어떻게 성서와 교히의 신경이 하느님안에 복수형을 인정하고 있는가? 다시말해 성부, 성자, 성신을 이야기 하는가? 예수가 주님이심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적 신앙과 깊이 관련되었다. 구원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위치는 죄로 말미암아 받게된 상처와 간격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고, 화해케하기 위해 그가 성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의미에서, 또 성부와 함께 성령을 파견하셨다는 문맥안에서만 만들어진다. 그리스도교인의 하느님 이해는 다른 한편으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없다. 삼위일체의 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으로부터 떼어 놓고서는 설명되어서는 완전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이러한 면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서 더욱 세밀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2. 성서의 하느님

2.1 구약성서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의 친밀성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을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에 관한 이해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전개는 구약성서로부터 시작된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철학적 사변에서는 흥미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하나의 격언이 되다시피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과 이해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이 그들의 하느님 이해에도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둥세기적인 구별, 즉 본질과 존재의 구별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였다. 이름을 통해서 그들에게 알려진 하느님이였다. 야훼라는 이름이 모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알려졌다(출애 3,13-1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야훼는 그 이름으로 인식되고, 고무되고, 알려진 모든 행위와 현실이었다. 야훼를 부른다는 것은 야훼께 승복한다는 것이었다. 야훼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것(시편 72,19), 위대한 것(열왕 상 8,42), 경이로운 것(신명기 28,58), 찬양 받아야 하는 것(시편 148,13)이었다. 그 이름은 역시 모든 것이 나오는 근거요 원천(시편 54,3), 현양의 원천(시편 33,21; 89,25). 야훼의 이름은 모든 것을 받쳐 주고 지탱하게 해주는 것(시편 124,8), 신뢰할 만 한것(시편 33,21,이사 50,10)이다. 야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야훼를 안다는 것이다(이사 52,6; 64,1). 그리고 모세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의 사명을 성공으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기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읍니까?” 하느님 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셖다.“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낸신 분은 나다- 라고’하시는 그 분이다‘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셖ㅆ다. “너는 이스라엘ㄹ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부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출애 3,13-15).
야훼라는 이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규정하기 어렵다. 학자들간에도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일치를 보이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 이름이 존재한다(to be)는 아람어 동사와 어원적으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것만크은 동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 고고학자 W.F Albright는 사역동사형으로 해석하여 본래의 긴 이름의 첫 단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즉 yahweh- aser- yihweh( 이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분“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이이름은 하느님의 창조적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또 다른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 이름은 ”나는 존재하게 될 그 분이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은 계속 과정안에서 계시될 것이며 우리를 미래를 이루기 위해 동료 협조자로 소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떻든 이 낱말의 정확한 원천은 야훼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다른 신들의 칭호와 구별되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야훼만이 홀로 창조주시다. 야훼만이 홀로 계시자이시다. 야훼만이 홀론 역사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야훼만이 홀로 판단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야훼만이 당신이 창조하신 만큼 넓은 세상을 왕국으로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야훼만이 홀로 살아계신 하느님(여호 3,10;사무 전 17,26; 열왕 하 19,4; 시편 42,3; 84,3; 이사 37,4. 17; 예레 10,10; 호세 2,1)이시다. 사실상 생명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그분이 명령으로 보존되고 있다(시념ㅇ 30,15-20). 그분은 야훼라는 낱말에 숨어계시는 살아계신 유일한 분이시다 (이사 55,3; 에제 20,11.13.21).

2.2 신약성서
유일신 신앙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만이 유일신 신앙을 결정적으로 거머쥐고 있는 것도 아니다.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은 하느님을 나자렛의 예수와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는 구약의 예언안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격안에서 통교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서이 거기에 있다. 요한 복음의 첫장은 이런한 점을 신약성서 어디서보다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 났는데도 세상은 그 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영광을 보았다. 그 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 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하였다.(요한 1, 6-15)

히브리서에 요한의 첫장과 비교되는 글이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마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 주시기고 하셨읍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리 1,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실재는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분, 인격적인 분으로 나타난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이스어로 ο θεοσ, 즉 관사를 붙여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단순히 theos라고만 관사 없이 말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수가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을 여기 저기서 찿아 볼 수 있다. 예컨대 요한 복음은 말씀이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 “나의 하느님,나의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다(요한 20,28). 게다가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의 영광”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영광보다도 더한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티토 2,13). 그리고 예수는 그 자신이 아버지와 동일시 되고 있다(요한 10,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육화하신 말씀 뿐만 아니라 구약서서가 야훼 하느님의 속성으로 보존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하신다(에페 4,23). 하느님은 예수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신다(코린 후 5,19), 하느님은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주신다(요한 15,26; 16,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속한다(코린 전 3,23).
하느님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행동하신다. 성령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다(마태 6,14; 마르11,25; 루까 15,1-32),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다(루까 1,72.78; 6,36; 코린 후 1,3; 에페 2,4; 티모전 1,2; 티토 3,5; 베드 전 1,3), 하느님은 친절하신 분,선하신 분이시다(마태 19,17; 루까11,13; 18,19; 야고 1-5),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요한 3,16; 16,27; 로마 5,5; 8,37.39; 에페 2,4; 테살 후 2,16; 티토 3,4).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다(코린 전 1,9; 테살 후 3,3). 하느님은 참을성 많은 분이시다(로마 15,5). 하느님은 모든 은총의 하느님이시다(사도 20,24; 로마 5,15; 코린 전 1,4; 3,10; 15,10; 코린 후 1,12; 에페 3,2.7). 하느님은 희망의하느님이시다(로마 15,13). 하느님은 평화으이 하느님이시다(로마 15,33; 16,20; 코린 전 1,3; 코린 후 1,2; 갈라 1,3; 에페 1,2; 필립 4,9), 하느님은 위로의 하느님이시다(로마 15,5; 코린 후 1,3-4; 테살 후 2,16).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다(루까 1,47; 티모 전 1,1; 2,3; 4,10; 티토 2,11; 베드 후3,9). 하느님은 구원을 원하는 모든이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마태 18,14; 티모 전 2,3.4; 4,10; 티토 2,11; 베드 후 3,9).

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
5.1 사도 교부

하느님은 한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시다라는 이론은 교회가 시작하면서 부터 근본적인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유다이즘으부터 상속받은 유일신론은 우선 다신론적인 이교인들을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첫번째 것이었다. 마르치오니즘은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다시말해 그들 이단을 따르면 두가지 상반된 동등한 세력을 인정하고 있다. 하느님과 악의 세력이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이단들이 많이 있었다. 이 때까지만해도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역사적인 시기로 보아서도 충분히 발전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들로부터 수집될 수 있었전 것들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제 4대교황이었던 로마의 클레멘스(100년경)은 코린토 교회가 서로 싸우고 이단으로 갈리고,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같이 선언하였다“우리는 한분 하느님, 한분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한분이신 은총의 성령을 지니고 있지 않읍니까? 우리에게서 성령이 다른 곳으로 흘러버렸다는 것입니까?(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 4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으로서의 정체와 서로간의 구별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의해서 제시되었다(에페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의 성전의 돌(주춧돌)로 하느님 아버지의 건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중기, 즉 십자가에 의해 들어 올려지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읍니다. 한편 성령은 여려분을 하나의 로프로 이용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려분의 영을 감아 올리는 기계요, 여러분의 사랑은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도로가 됩니다.

5.2 호교시대의 교부들
호교론자들의 저서에는 어떤 애매모호성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플라토니즘적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스티노는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그리고 에언적 성령께 경배하고 흠숭을 드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의신앙은 예수를 하느님의 오직 한분이신 아드님, 하느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으셨으며, 그 분의 말씀이시며, 첫 아들이심을 믿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호교론 1권 6장, 23장). 성자의 출생은 하느님 의지로부터 이루어지고 조건 지워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자와 성부사이의 어떤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유스티누스는 다른 호교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유일성을 옹호하고 보존하려는 것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
어떤 신학자도 이레네우스처럼 2세기의 사상을 권위있게 요약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두가지 방향에서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고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는 내재적인 측면에서, 또 하나는 구원역사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으로서.
역사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즉,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경향이다. 영원으로부터 상당히 활동적인 것이다. 특히 마르치오니스트의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거슬러 투쟁하였다.이레네오는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창조주가 계실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한분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원리, 힘, 지배권, 덕행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시며, 하느님이시며, 기초자요, 작업자요, 창조자이시다. 그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시다. 그분의 아들이신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게시하고 드러낸다. 아들이야말로 그분을 알고 계시하는 유일한 분이다. 하느님은 단순히 모든 것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자비로, 인내와 지헤, 저의로써 다스리시고, 모든 것이 보기에 좋게 지탱하는 분이시다.

5.3 3세기경의 교부들: 테르뚤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로마의 디오니시우스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의 관심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유일성과 일치였다. 교부들은 하느님의 하나이심에 대한 도전들이 가라앉자 창조와 구원과 화해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으이복수적인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 이것은 하느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대칭되는 것으로 사용되어왔다. 이것은 영어의 economic 다시말해 집안 경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측정될 수 있는 것, 경험 될 수 있는것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는 측량할 수 없는 내적인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 역시 그 자체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과거의 이론이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라고 할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만물의 창조주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다.
테르뚤리아누스는 이 문제를 유비적이고, 성서적이고 인간학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유기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유기체 그 자체는 분리될 수 없다. 그유기체의 힘은 하나이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된다할 지라도 마음과 의지에 있어서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어떠 유비적인것 유사함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사유의문제로 남아있는데, 이 두가지는 모두 이미지, 상상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최고의 신학자였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높은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당시의 플라톤적 사상을 빌려오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은 한분이시다. 그러나 거기에는 로고스가 한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출되고, 그 한분이신 하느님에 참여하고 있다. 마치 하느님의 선서의 이미지로서. 성부는 하느님(the God)- 오리게네스는 오직 하느님 성부에게만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다. 로고스는 the God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God이다. 그에게 로고스는 플라톤적 개념으로서 유출과 참여로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로고스는 두번째 계급으로서의 하느님이다. 플라톤의 사상을 따르면 유출된 것은 어떤 질이 삭감되는 것이다. 그처럼 유출된 하느님은 본래의 하느님보다 질이 떨어지는 어떤 존재가 된다. 불행하게도 오리게네스의 해결은 로고스가 조금도 덜하지 않은 신적 존재라는 교회의 신앙을 정당하게 해 주지 못했다. 최고의 도구로 생각했던 플란톤적 철학이 그 대답을 제대로 마련 해주지 못하였다. 어떻든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시도가 비록 이단적인 아리우스의 해결법을 초래케 하였지만, 계속되는 신학적 연구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아리우스는 본래 알렉산드리아으이 사제였다 그는 로고스가 하느님의 창조물이었다고 논증하였다 비록 완전하기는 했지만 창조물에 불과 했다는 것이었다. 로고스는 무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26번쩨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었다. 그는 삼우일체 문제 해결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당시의 신학자였다. 그가 교황으로 있을 때 이미 세가지의 이단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벨리아니즘: 모달리즘이라고 하는 양태론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생각은 하느님이 한 인격으로서 세가지 상이한 역할을 상이한 기능을 따라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창조주로서, 구원자로서, 그리고 성화자로서. 두번째는 종속론이었다. Subordinationism은 하느님의 세 위격을 인정하면서 성자는 성부보다 덜한, 성령은 성자보다 덜한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세번째로 삼신론(Tritheismo)이다. 이 이론은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분이라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로마로 공의회(시노두스)를 소집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역시 디오니시우스였다. 마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가 이단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노두스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디오니시우스 교황은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며서 다음과같이 정리였다. 1. 한분의 전능하신 창조주가 게시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즉, 바로 그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3.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성자는 아버지 이신 the God으로부터 구별되는 성자다. 디오니시우스 교황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정통 이론들의 이해와 토론의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문제 해결과 설명을 위해 제시되는것은 무엇이든지 유지하려고 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5.4 아리아니즘과 니체아 공의회
교회 역사의 초기에 있어서 신학자들은 신앙의 신비를 세가지 방법 중에서 적어도 한가지 방법으로 대처해야 했다. 첫째는 그들은 신비를 제거하려 하였고, 모든것을 이성으로서 포착하려고 하였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은 그런 신비들을 깊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서 더 이상 질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손을 드는 것이었다(신앙주의 또는 비지성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있다). 셋째로 신비는 결코 해결될 수업슨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문제를 분명하게 하고, 어떤 커다란 이해의 기준에 도달하기를 희망하였다(이것은 정통적이고 많은 교부들이 시도했던 접근 방식이었다).
아리우스는 첫번째 방법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우주 만물의 창조물보다 뛰어난 성자의 탁월함을 부인하지 않고 하느님의 유일성, 한분이심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간단하였다. 성자는 구원경륜에 있어서 그분의 현양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분 역시 우리와 같은 창조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자는 너와 나 보다 더한 어떤 신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아리우스의 시도는 시작에 있어서 경솔하였고, 결론에 있어서 무책임하였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있는 것은 못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성은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사물의 인상(description)으로부터 그 사물 자체안에 그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규정을 얻고자 한다. 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하느님의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구원적이며, 성화적인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위격들이 실제로 서로와 관련되고 있는가? 특별히 성자의 성부와의 관계는 어떤 특이함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성자를 성부와 완전히 동등한 분으로 강조할 때 과연 하느님이 한분이심을 실제로 보존할 수 있는가?
또 다른 한편으로 아리안 논쟁은 지성적인 논쟁이상의 어떤 것이 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구원을 걸고 있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성서도 그리스도안에 우리의 구원이 걸려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성자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온전하게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면, 더 이상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고 우리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처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성자가 우리와 같이 하나의 피조물이라면, 우리가 그의 피조물로서 그를 거스려 죄 짓게 된 창조주 하느님앞에 그는 더 이상 특별하게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바지하는 그의 보상행위는 궁극적인 효과를 지니지 못한다.
325년 이런 그리스도교의 실존문제에 직면해서 소집하게 된것이 니체아공의회였다. 아니러니칼하게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이 첫번 세계 공의회의가 소집되었다. 황제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어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엔 어떤 정치적인 배경도 없지 않다. 황제는 자신의 제국안에서 발생한 이 문제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공의회는 아리안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었다. “우리는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유형 무형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분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받으셨으며, 바로 그분의 독생성자이시다”. 그로부터 이 신앙의 확언은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아주 초기의 신앙고백, 성서적 형식처럼 전통적 가르침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리우스가 정면으로 시비를 걸었던 문제에 대한 공의회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니체아 신경에서 보듯이, “ 오직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릿도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로부터 나신 천주의 외아들이시며,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천주로부터 나신 참 천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이와같이 성자는 피조물처럼 성부의 의지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것이며, 그분의 출현은 다른 어떤 창조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성자는 “창조되지 않고 나셨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하느님의 질서 밖에 있는 완전한 창조물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의 질서안에서 나신 분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질서 안에 머문다. 그분의 존재에 창조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결국 그분은 하느님과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 (homoousios).
그러므로 니체아 공의회는 단순히 하느님의 실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저의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는 누구인지, 성자는 하나이신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것인지 규정하고 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독특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아들로 낳음을 받은 것이지 창조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자는 이름을 제외하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이것은 “존재함에 있어 하나” 또는 공동본질을 지닌 존재(homoousios)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자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한 것이다. 이러한 공의회를 두고 어느 신학자가, 이것은 우리에게 성자가 누구냐 하는 개념으로부터 성자 자신에게 성자가 누구냐 하는 개념으로의 전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소묘적이고, 상호 인격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존적인 양식에서 규정적이고, 설명적이며, 절대적이고, ontological 존재론적인 양식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양식의 변화가 공의회가 단언한 것의 의미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유형에 있어서 니체아 공의회의 선언을 새로운 것으로 만든다.
니체아 신경에 도전하는 반대는 양 극단으로부터 나온다. 단순히 좌파적인 아리아니즘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역시 우파적인 극단적 보수주의로부터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를 중심으로 한 일파들이었다.(에비오니즘).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가로도 간주되고 있다. 이 일파들은 성서가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말자고 하는 견해를 지녔다. 성서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모든 것에 있어서 homoios (like) 비슷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같은 견해는 다시 한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61)의 정식안에서 나타난다. 그들의주장에 의하면, homoioousios 는 성서적 단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니체아 공의회의 정식은 신앙의 정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에우세비안은 그다음세대의 전통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이해(doctrinal understanding)의 진보, 발전의 가능성의 인식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fundamentalist들이었으며, 성서 중심주의자들이었다. 신앙의 진술는 결코 변화할 수 없다는 에우세비안의 특별한 과거(archaism) 재현을 위한 영향력은 반대의 경향을 불러 일으켰다. 예건대 어떤 신앙의 진술도 결코 종결될 수 없다(modernism).
니체아 공의회의 정식은 이 양극단을 피하고 있다. archaism을 거부하고 있다. 성자에 관련한 성서적 진술들은 새로운 이해양식 안에서 이항 내지 호환될 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성서적인 것과 함께 구성요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mordernism을 거부하고 있다. 신앙의 이해에 있어서 “consubstantial (homoousios)“라는 개념은 최종적인 것으로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성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 니체아 공의회가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공의회, 예컨대 에페소 공의회, 칼체돈 공의회에 어떤 헌장의 역할을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에페소 공의회와 칼체돈 공의회에서도 성서적 정식을 를 넘어서서 철학적인 사고 범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본성과 위격을 다루고 그 것을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것을 보게된다. 그리스도론의 논쟁은 칼체돈 공의회에서 종지부를 찍게되는 것을 보게된다.
니체아 공의회느 아타나시우스와 힐라리오의 노력으로 에우세비오(homoiousion파)들이 정통파(homoousion)들과 화해를 이룬다. 힐라리오는 그의 ”공의회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양편 모두가 옳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 상대현의 관련되고 있는 본질적인 정통성을 인식하는 일이 의무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니체아 정통파들은 신성안에서의 위격의 구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적으로 homoiousion을 거부하지 않았다. homoiousion 파들은 만일 진지하게 본질적인 완전한 유사성(likeness)을 믿는다면 본질의일치성(homoousion)을 인정할 수 있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의 공의회에서 그들은 서로 화해를 하였다. 거기서 에우세비안 파가 제시한 정식 “세 위격”을 단순히 삼위일체안에서 하느님의 세위격의 본질을구분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정통적 정식이 생겨난다. ”하나의 본질 (ousia) 세 위격 (hypostases)”.

5.5 4세기 까빠도치아의 교부들: 바실리오, 닛싸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이제는 단지 성령이 신성안에서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성령과 성부와의 관계, 성령과 성자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오리게네스의 시대에는 성령이 문제거리의 중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에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성령은 무로부터 존재가 유래된 하나의 창조물이라는,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충돌하에 특별히 신학적인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성령역시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신성을 지닌다는 주장이 아타나시오에 의해서 시작되면서 까빠도치아의 세 교부들(바실리오와 그의 형제였던 닛싸의 그레고리오, 그의 친구였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마찬가지로 갇은 영광과 흠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실리오 였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세 위격이 서로 나누고 있는 본성이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성령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본질(homoousion: consubstantial)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지니고, 그 존재에 있어서 하나임을 주장하였다.(이러한 관점은 444년에 사망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교부에 의해 더욱 발전 되었다). 바실리오에게 성령은 단순히 (성자가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은 것처럼) 낳음을 통해서서가 아니라, “성부의 입으로부터 내쉬는 숨으로부터” 출현하게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듯이, 성부로부터 단순히 “진행되어(proceed)(파견되어) 나왔다“고 보았다. 그런데 닛싸의 그레고리오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왔으며 (out of God), 그리스도의 소유(of Christ)로 보았다. 성부는 원인을 지니지 않으며, 성자와 성신은 원인을 지니는 것이다. 성자는 직접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떤 종속적인 면을 찿을 수 없다는 것이다.(여기서 이단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부들의 저서에서 본질적인 하느님에 관한 이론은 하느님은 한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가지 존재 방법 또는 세가지 hypostases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각 신적 Hypostases, 또는 각 위격은 신적 본질 ousia이라는 것이다. 이 위격들은 서로간의 그들의 관게에 의해서 구별될 뿐이다. 이 관계가 결정적이다. 다시말해 그 기원이 결정적이 관계를 이룬다. 성부는 낳음을 받지 않았다. 성자는 출생(generation)을 통해 낳음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서로 다르다. 성자는 성령과도 다른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되었다.( is generated, -is spirated, or preceeds).
이 세 까빠도치아의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대표적인 사상을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표현에서 찿아 볼 수 있다.

” 표현의 차이, 또는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차이는 그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사실 그것은 성자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가 아버지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아들됨은 어떤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런 식으로 논리를 따르면 어떤 결핍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이 될수 있다, 성부가 성자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런의미가 아니다.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 뿐이고, 거기에는 어떠한 결핍 또는 본질의 종속적 관계에 의해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을 첫번째로 아버지라는 이름을, 낳음을 받으신 분을 두번째로 성자라는 이름을, 그리고 파견되신 분을 세번째로 성령이라는 이름을 부를 뿐이다. 세위격의 구별은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적 존엄성안에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성부는 한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아버지이신 그분이다. 성자는 성신이 아니다.낳음을 받으신 분은 오직 한분이시기 빼문이다. 그분은 아들로서 존재하는 그분이다. 이 세위격은 신성안에서 하나이며, 이 한분이신 하느님은 그 고유성에 있어서 셋이다…(The Fifth Theological Oration).
이러한 그리이스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접근은 나중에 다마스커스의 요한(749경 사망)에게서 요약되어 나타난다 (The Source of K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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