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았다 함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우물쭈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 받았습니다.” 우리는 견진 성사 때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키우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을 받는 장면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사도2,1-6)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먼저 언어의 장벽이 없어졌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신비롭게 받아들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모습을 술에 취한 모습이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새 포도주에 흠뻑 취했군”.(사도2,13)
그런데 외국인이 아니면서도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잘났고,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받아들일 여유가 조금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날 작은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도심 속의 주택이었는데 집 주인은 마당을 흙으로 채우고 그 위에 온갖 꽃들과 나무들을 심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정원 가운데에는 작은 절구통이 놓여 있었는데, 돌로 된 작은 절구통에는 연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작은 정원에 새가 날라 왔고, 새들은 작은 연못에서 물을 먹고 목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란 나무가 있어야 만이 새가 날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정원이어야만 새들이 날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남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상대방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작은 정원에 새들이 날라 오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지 못해서 어려운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연다면 사도행전의 그 장면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이 당당하게 유다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군중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날 세례 받은 사람들의 수는 3,000명 가량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3,000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바꿨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것을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도들은 체포되어 법정에 섰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고, 또 매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골방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신앙을 증거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그 예전의 신앙의 선조들처럼 피로써 신앙을 증거하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투신하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그저 삶의 자리 안에서 신자라는 것 잊어먹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되는 것들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남들 앞에서 식사를 할 때 성호경을 긋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침·저녁 기도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무리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와 가끔의 평일미사가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신앙을 증거 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을 받았다 함은 용서하는 삶으로 들어 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모든이가 성령을 받고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죄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용서받은 사람이고 그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