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가해 연중 16주일 강론

 

연중 제16주일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제1독서: 지혜 12,13.16-19


제2독서: 로마 8,26-27


복음: 마태 13,24-4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3-9)와 가라지의 비유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유사성과 연속성이 있다.


전자에도 후자에도 다같이 씨 뿌리는 사람과 씨가 뿌려지는 밭이 등장하고 있으며 원수 또는 악마가 등장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원수 또는 악마가, 방심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가고 있고”(마태13,19) 후자에서는 가라지를 “뿌리고 있다”(마태 13,39).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예비’




하지만 배경과 의미상으로 보면 아주 다르다. 즉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악의 명백한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때가 오면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내리게 될 마지막 ‘심판’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0-43).


그릿도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예비’는 한편 가라지가 거대한 “세상이라는 밭”(38절 참조)을 황폐하게 하여 농부가 학수고대해온 수확을 형편없이 만들어 버리는 듯 여겨지는 때라도 그의 온갖 희망을 불러일으켜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마치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터무니 없이 갈라놓으면서 세상을 저주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교회는 단지 악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지키기에 급급한 광신주의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맛없는 밀가루 반죽이 “온통 부풀어 오를 때”(33절)까지 그 속에 들어가 없어지는 누룩처럼 되기를 그들에게 바라셨다는 중대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이 진행되는 한 이러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 선한 사람들이 악해질 수 있고 악한 사람들이 선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을 회개시켜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을 확장시켜나감으로써 공중의 모든 새들이 거기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32절).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자’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아주신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을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추수 때까지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늘 복음은 다소 길다. 먼저 가라지의 비유가 나오고 있고(24-30절) 이어서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겨자씨(31-32절)와 누룩 한줌(33절)에 관한 짤막한 두 개의 비유가 등장하고 있다 : 학자들은 이 비유들이 하늘 나라가 확장되는 신비스러운 힘을 예고해주고 있다는 이유로 ‘성장의 비유들’이라고도 부른다. 그 다음 예수께서 ‘어째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그 동기에 대한 언급이 있고 나서(34-35절; 10-17절 참조)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마찬가지로(18-23절 참조)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에 의해 야기된다. 보다시피,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 구성에서 아주 능숙하게 추구하고 있는 구조적 특성이 드러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가 길고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다른 두 개의 비유(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들이 나름대로 논의 되어야 할 가치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전례상 두 개의 이 비유는 따로 발췌해서 제시했더라면 아마 더 좋았을 것이다.


여시거도 장면의 내용이 대단히 현실적이다. 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밤에 그의 원수가 악의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 가라지는 개화기가 되어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종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즉시 주인에게 달려가 알린다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하고 묻자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27-30절).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는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는 약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이야기다. 가라지는 그것이 다 자라 누렇게 되기 전까지는 밀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씨앗을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짓임이 뻔하다.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그때 가서는 일하기도 쉽고 위험부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거나 아니면 가금(家禽)의 먹이로 주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기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진 두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음이 분명하다 : 하나는 ‘그리스도론적’ 의미요, 다른 하나는 ‘훈계적’ 특성을 띤 것이다. 첫째 의미는 직접 예수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있고 둘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변적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주위에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불러일으키셨다. 예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메시아는 필히 자기 주위에다 ‘성인들’과 죄없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한다. “너의 백성은 모두 올바르게 살아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라. 너의 백성은 내가 심은 나무에서 돋은 햇순이요 내가 손수 만든 자랑거리다”(이사 60,21)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모습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예수의 주의에 ‘성인들’의 공동체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사도들 중에도 배반자가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고상한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부하시고 오히려 세리들과 심지어는 창녀들의 친구가 되신다. 대부분의 성서문학이 꿈꾸었듯이 불경스러운 사람들을 올바른 사람들로부터 갈라 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악을 윤리적인 사실-그렇기 때문에 악은 바로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뀌어 질 수 있다-이라기보다는 물리적 사실로 고찰했던 바로 이러한 ‘정의론자적’ 기다림을 거슬러 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다.


그분이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시대는 요한복음이 언명하고 있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므로 분명 모든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가라지가 좋은 씨와 더불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의 표지다!




‘참아주시는’ 하느님과 ‘참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이 사실은 특히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에서 볼 때 더 그렇다 : 우선 악이란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라기보다 그것의 극복을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원해야 할’ 죄인들을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과연 구세주로서의 메시아가 되셨겠는가? 둘째로, 또한 악은 실제로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은 마지막 “추수때”(30절)에 이루어 질 것이다. 그때에는 구세주이신 메시아가 심판자이신 메시아가 되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해응ㄹ 일삼는 s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41-42절).


이것은 하느님 편의 승리를 즉시 보고자 하는 지나치게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의 ‘참을성 없음’에 대한 경고다. 사실 이러한 태도를 잘 보면 열심하다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언제든지 야음을 틈타 침입할 수 있는 ‘적’에 대항하여 항시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평온함이리라!


또한 그것은 선과 악을 어떤 사상적 정치적 구조나 체제, 그리고 집단으로 보도록 우리 모두를 유혹하는 마니교적 사상들에 대한 나오는 종들의 의견처럼 어떤 것을 잘라버리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이와 반대로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은 즉시 우리 마음속에다 억센 가라지를 뿌릴 수 있다.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하는(교회5 참조) 교회조차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도들의 요청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비유의 설명에 담긴 의미인 것 같고 또한 그것은 틀림없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관련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체험을 많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에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낵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37-43절).


쉽게 알 수 있듯이 여기서강조점은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보다는, 마태오 복음사가에서 매우 소중한 주제인(25,31-46 참조) ‘최후 심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다니엘 12,3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마지막 구절(“의인들은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도 ‘종말론적’ 관점을 상기시켜준다.


어째서 이처럼 강조점이 옮겨지는 것일까? 아마도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마태오가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의를 다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 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로써 다른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을 정신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상기시켜야 할 사실은 무엇보다도,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반드시 신앙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우리 안에 있던 선과 악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선과 악의 폭로는 준엄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 악한 행실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즉, 그리스도의 ‘법’ 특히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게 되면 그리시도 신자이건 아니건간에 모두 단죄를 받을 것이며, 올바른 일을 행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보다시피,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떤 특권도 용납되지 않는다. 신앙의 특권까지도!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 신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최후심판의 때가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해주었다.




힘을 가지신 주님은 자비로운 심판을 내리신다


 


제1독서도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들처럼, 하느님께서 강력하게 모든 우상들을 응징해 주시기를 바랐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일부 유다인들을 당혹케 하는 하느님의 행동 양식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대략 그리스도 강생전 1세기 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씌어진 지혜서의 저자는 구약성서의 역사적 발전 단계, 특히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의 내용을 더듬으면서,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와 가나안 백성들을 “당장에 없애버리시지 않고”(지혜 12,9) 그토록 크나큰 관용을 보이셨는지에 대해 놀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하느님은 비록 모든 것을 힘으로 하실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관용의 근거를 발견한다 : “이러한 힘을 가지신 주님은 자비로운 심판을 내리시고 우리들을 대단히 너그럽게 다스리신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시고자 하면 그것을 하실 힘이 언제든지 있으시다. 주님은 이와 같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셨다”(지혜12,18-19).


그러므로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는 데 사용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또다시 대하고 있다. 또 그분은 이런한 당신의 행동을 그분의 “백성”(19절)인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다 : 하느님의 밭에 좋은 낱알은 얼마 안되더라도 가라지에서 변모된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신비스러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하며 또한 비극적이지만 이 세상에 악이 현존하고 있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즉 악의 현존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능력과, 세상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그들의 낙관주의를 입증해 보이라는 도전장이다. 분명 하느님의 능력은 이세상을 우리의 선한 의지의 도움을 받아 지금 나타나고 잇는 모든 양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역사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보다 나은 만들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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