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7주일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제 1독서: 1열왕 3,5.7-12
제 2독서: 로마 8,28-30
복음: 마태 13,44-52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한 소위 ‘비유적 담화’를 끝맺는 세 개의 비유 가운데서 ‘온갖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바다에 친 그물의 비유’는 다른 독서들(제 1독서와 제 2독서)을 통해 발전되고 있는 담화의 ‘총체적’ 내용에서 약간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비유적 담화의 전체적 관심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또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을 포기해야 할 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늘나라’ 또는 주님의 ‘말씀’ 집중되고 있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잃는다 해도 하늘나라를 잃는 것만큼 큰 손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물의 비유도 좀더 근본적인 점에 있어서는 이러한 관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비록 내용상으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36-43 참조)와 유사하면서도 실제로는 선과 악의 ‘결정적’ 구분과 선택에 관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13,49-50).
이것은 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심판의 판결이 떨어지기 전에 제때에 그리스도를 ‘철저히’ 선택하라는 경고이다.
“당신이 말씀하신 법은 값지나이다”
우리는 성서 메시지의 총체성이 하느님의 ‘나라’ 또는 주님의 ‘말씀’의 가치를 지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말씀’이 ‘하늘 나라’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만들고 있다는-그리스도를 통하여 정확히 입증되고 있듯이-의미에서 본다면 결국 매우 유사하다.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듯이 주님의 ‘법’과 ‘계명’에 대한 감동적 찬미가라고 할 수 있는 시편 118 가운데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몇 구절을 읽어보라 :“당신이 말씀하신 법이야말로, 수천의 금은보다 나으니이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의 법을 황금보다 순금보다 더 괴나이다. 그러기에 계명을 낱낱이 따랐삽고, 거짓된 길이면 모두 미워하나이다. 말씀을 밝히시면 빛을 내시어, 우둔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나이다”(시편 118,72.127-128.130).
“당신 종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혼란스러운 다윗 왕조가 끝난 후 솔로몬 왕조가 시작될 무렵 솔로몬 자신이 바친 기도 역시 모든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특히 다른 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느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즉 ‘지혜’와 ‘분별력’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력과 권력은 다스리는 사람 또는 지배하는 사람의 품위를 높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만일 그러한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지혜와 덕망을 함께, 아니 먼저 갖추지 않는다면 그르 보다 더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 뿐이다. 이러한 일은 흔히 일반 시민 사회의 역사에서, 또 불행한 일이지만 교회의 역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무엇이든지 바라는 것을 청하라는 야훼의 말씀에 이렇게 간구한다 :“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소인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송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1열왕 3,7-9).
그 다음 구절에서 야훼께서는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11절)을 청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며 그에게 “슬기롭고 명석한 머리”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청하지 않은 다른 것들도 무수히 베풀어주신다(12-13절).
솔로몬의 기도는 과연 임금의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 본 기도이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특히 ‘선과 악을 가려내고’, 우리 형제들에게 유익하거나 소용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명석한 머리”는 더더욱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평가해줄 올바른 척도는-특히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또는 밖에서 어떤 책임을 맡고 있는 입장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 그들의 성장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께서 특별히 바라시는 것이며 우리가 필사적으로 추구해야 할 최상의 것이다(마태 6,33 참조). 그 외의 다른 것은 별의미가 없으며 아예 하느님의 나라에서 제외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오늘의 본기도도 바로 이러한 사고를 배경으로 하여 변화무쌍한 이 세상살이에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영원히 멸하지 않는 행복을 청하고 있다 :“주께 바라는 모든 이를 보호하시는 천주여, 당신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없사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풍성히 베푸시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섭리와 인도로 지금 현세의 사물을 사용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영원한 세상에 둘 수 있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하거나 이웃에게 무관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현세의 모든 사물을 현명하게 사용하여 어디에서나 그분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또한 솔로몬이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의 백성을 위해 청했듯이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도와 그분을 ‘따르기’ 위해 청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이제 오늘 복음을 보자.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을 더 밝히 비춰주는 한 쌍의 비유 즉, 감추어진 보물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44-46절).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이 두 개의 비유는 하나의 동일한 가르침을 반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두 개의 비유에는 다같이 값진 보물을 찾자마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버리고 그 보물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짧은 두 개의 비유가 가르치는 있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주인공-적어도 첫장면의- 이 위험부담이 매우 큰 그 일을 하게 되는 ‘기쁨’의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 “결정적인 요점은 그 비유의 두 주인공들 편에서 가진 것을 다 팔려고 내놓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결정하게 된 동기이다. 즉 그들이 발견한 것의 엄청난 가치에 압도되었다는 점이다. 하늘 나라가 곧 그럴 것이다. 하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쁜 소식은 모든 것을 압도하며 가장 큰 기쁨을 주고 또한 모든 생명을 가장 감동적인 봉헌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공동체의 완성에로 안내한다”(J. Jeremias, Le Prabole di Gesu, Paideia, Brescia 1967, p.238).
이처럼 모험적 행위가 가져다 주는 ‘기쁨’의 근거를 고려해 본다할 지라도 비유의 초점은 분명히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고서 그 앞에서 하게 되는 모험을 무릅쓴 결정의 ‘용기’에 있다. 그 엄청난 가치는 바로 그분 곧 자신의 현존으로써, 자신의 육체적 구원의 활동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또 자신을 따르라는 권고로써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시는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하느님의 나라’(마태 12,28 ; 루가 17,21 참조)이다.
그러므로 가치로 볼 때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할 진대 기다리거나 망설이거나 할 수가 있겠으며, 잃어버리느냐 벌어들이느냐 하는 것을 계산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분 때문이라면 생명조차도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하느님의 ‘배타성’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야기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그 ‘좋은 기회’(2고린6,2 참조)가 지금 주어지고 있으며, 다시 또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염려 때문에 그러한 결정의 절박성이 야기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런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절박성은 내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풍요로운 ‘부’ 즉 가장 농도 짙은 구원의 기회 때문에 야기외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선뜻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의 그러한 의지를 강인하고도 용기있게 실현시켜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하찮은 일들을 포기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오직 찰나적인 어떤 순간만을 기다린다거나 우리 자신의 것들도 함께 가지고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그렇게 한다면 훨씬 더 좋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착각하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배타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그 배타성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사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피조물을 배제해야 하는 식으로자리를 차지하는 창조된 실체가 아니시다.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적인 것을 축출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들어가 그것을 변모케 한다. 그러나 이때 인간의 편에서는 하느님의 그러한 활동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겨야 한다. 배타성을 지닌 하느님의 현존은 죄에 물들지 않은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여 새롭게 변화시켜준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손길이 거부되고 있는 인간적 ‘부’는 실제로 하느님께 대해 배타적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은 것이 가장 나쁜 것으로 되고 만다. 그 결과 배타적인 인간 중심적 삶을 고집하며 살게 되고 인간적 부에 대한 무한한 향락은 마침내 유일한 진주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할 때 만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Y. De Montcheuil).
비록 모든 것이 하느님의 나라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은 ‘새롭게 변모’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오늘 복음이 말해주고 있는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밭 또는 값진 진주가 묻혀 있는 밭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기를’ 지극히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혜’이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짤막한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주석가들은 보통 이 구절에서 마태오 자신의 자서전적 체험을 발견하다. 즉 마태오는 이와 같은 식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 체험뿐만 아니라 자기의 복음 저술 활동의 의미도 서술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의 복음은 지극히 아름다운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낡은 것’)이 그리스도라는 근본적인 ‘새로운’빛에 비추어 재해석되어 모아진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이 짤막한 비유의 내용을 주님의 모든 제자에게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예수 자신에 의해 그리고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에 의해 유산으로 남겨진 복음의 무한한 ‘부’를 더 깊게 하라는 권고 일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빛과 힘이 우리에게 거듭거듭 제시해줄 새로운 생활 체험과 복음을 합쳐 나가라는 권고일 수도 있다. 이 방법이야말로, 모든 세대가 처음부터 발굴해서 세상에 드러내야 할 ‘보물’의 진가를 발견하고 또한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이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자들이 매일매일 써 나가야 할 그 유명한 ‘다섯번째 복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에게 다섯 번째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람들이 현재 쓰고 있고 또 마지막 구원의 순간까지 써 나가게 될 영원한 복음이라고 대답하겠다”(M. Pomilio, Il quinto Evangelio, Rusconi, Milano 1975, pp. 89-90).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한 지극히 짧으면서도 압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제 2독서도 크리스찬적 생활의 진가에 대해 깊이 사고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절대적 사랑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으로부터 생각하셨고(에페 1,3-14 참조) 모든 것-생명과 죽음, 슬픔과 기쁨, 건강과 병, 성공과 실패 등-을 우리의 ‘선익’을 위해 마련하셨으며 또한 ‘미리 정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을 통해 “그분의 아들의 모습”(로마 8,29)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8-30).
보다시피,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 계획 속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실’ 계획까지도 세워놓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사랑하신 분을 ‘다시 깊이사랑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