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에 바탕이 되고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문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구약의 온갖 율법과 예언의 정신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두 이 두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의 한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떠보려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자그마치 613조라는 계명이 있었는데 큰 계명과 작은 계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작고 가벼운 계명은 속죄만 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었으나 크고 중한 계명 위반자는 사형에도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율법 전문가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 당시 어떤 율법학자는 “그대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다른 계명은 이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며 최고의 계명을 이같이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마태 23,27)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대담하게 말씀하신 점에 크게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요, 기본적이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데는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꼭같이 중대한 계명이란 것은 지금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다른 어떤 덕행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여하에 따라서 크리스천 생활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첫째 원수까지 사랑하라(마태 5,43)고 하셨고 이어서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루가 15,4)와 탕자의 비유(루가 15,11) 그리고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요한 8,3)등 수없이 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네가 천사의 말까지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내가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역설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즉 이 두 가지 사랑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참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어떤 아들이나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듯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한편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형제에게 대한 참사랑도 없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달은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사랑은 말로나 혀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마태 7,21)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는데(요한 15,10. 14)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에 관해서는 성 야고보 사도가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보 2,16)
끝으로 결론 짓는다면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뚜렷이 보며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저편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가까이 가서 그들의 고통이나 슬픔에 공감하여 그들에 대한 사랑이나 봉사를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4 연중 제 30 주일 마태 22,34-40 (가)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22,20~26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해치면 내 분노하리라)
제2독서 Ⅰ데살 1,5c~10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복 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처럼 인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도 없으며 사랑처럼 인생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사랑은 인생을 아주 풍요롭게 채워 주며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도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약한 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즉 병든 자, 헐벗은 자, 그리고 과부나 고아들은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외롭고 고달픈 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붙잡을 것이 하느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대상자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는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크게 됩니다. 누가 돌봐 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녀에게 부모의 애정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혹 불구된 그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푼 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첫째는 하느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랑은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질이며 율법의 본질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613조목이나 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계명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율법의 조목만 풍성했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법의 본질과 그 정신을 몰랐습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의 모순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백성이 지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오히려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위대한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채 죄만 크게 짓게 되는 모순 속에서 고생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무시하고 있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참 사랑인 양 걸어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사목회 임원으로서 열심히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리 상식에도 밝았습니다. 그분 얘기를 들으면 믿는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당신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레지오 문제로 누군가와 언쟁이 있었는데 몇 달이고 그 사람하고는 상종을 않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참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쁜 사람을 사랑하고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심지어는 강아지나 돼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동시에 이웃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얻는 것이 됩니다. 잘먹고 잘살아도 사랑이 없다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헐벗고 못살아도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는 천당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이 참 하느님 사랑입니다.
5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이웃사랑, 특히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기의 제3부인 계약편으로 십계명의 정신을 따른 법규정집 중 약자보호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특히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 이전의 상식에 속하는 인간성에 기초한 하느님의 요구이며 명령입니다. 몸 붙여 사는 자들은 비록 노예는 아니지만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뜻밖에 집과 재산을 잃고 하는 수없이 다른 이에게 종속된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과부와 고아는 가장을 잃었기에 사회적으로 보호장치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부류의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명하십니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절대적인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에집트의 노예살이의 압제, 억압, 수탈, 가난 속에서 시달렸던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호소와 바램을 하느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법의 기본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을 묵상한 바 있습니다. 야훼란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아니,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 존재상 약자들 편에 서 계신 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신학의 기본입장을 「자유와 해방」이란 관점에서 종합한 1986년 3월 22일 바티칸 교리성성의 훈령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올바른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과 부자들의 하느님이 따로 있는가?”하면서 억지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성서는 배제적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는 하나의 결단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은 사회신분상 많은 것을 보장받고 있는 기득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보다는 억눌려 있고 가난 때문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것은 바로 인정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스나 전철을 타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지체 부자유자를 만나면 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권리를 빼앗긴 가난한 이들에게 마땅히 펼쳐 보이라는 거이 성서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륜이기도 합니다. 인륜의 원칙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까? 특히 성서는 저당 잡힌 자들에게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이불과 담요를 저당 잡혔다면 돈을 못 받았어도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이자도 중요하지만 그 이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이불을 덮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훈입니다. 원래 이자를 받는 것은 성서상 합당치 않습니다. 사랑과 도움의 정신으로 그냥 꾸어주는 것이 성서의 근본사상입니다.
다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용인될 뿐,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걸맞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중요한 윤리원칙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보장받은 위치가 결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또한 나의 재물이 타인의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웃권리에 대한 존중과 애덕과 사랑은 권고 이상의 의무성을 띤 하느님의 강력한 요구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제2독서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 안에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하여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적 추종자들임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데살로니카의 교우들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간직하지 않고 주변의 도시에 널리 전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선포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란 기쁜 소식의 단순한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업적을 되새기고 그것을 본받는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하느님 중심의 유일신사상, 그리스도 중심론, 그리고 종말론에 기초한 희망의 삶을 뜻합니다. 그 첫째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제1의 가치와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삶, 곧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생애의 모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거짓예배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나자렛의 예수, 그분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며 철저하게 이웃을 위해 살다가 죽어간 분입니다. 그분의 언행, 그분의 가치를 어떠한 경우에도 앞세울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우리는 다시 다짐해야 합니다. 끝으로 종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꼭 다시 오시리라는 확신입니다. 하느님께서 꼭 우리 모두의 선업을 갚아주시리라는 희망 안에 우리는 매순간, 매일, 최선의 삶을 또한 다짐하고 있습니다. 엄포적 의미도 있습니다만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진노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변호자를 요구하게 됩니다. 약한 우리 모두의 변호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감히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십계명을 요약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48조항의 명령법과 365조항의 금령법으로, 합하여 613조목이나 되었습니다. 법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졌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복잡한 이 사회를 단순화시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하신 분이시고, 사랑의 본질 또한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13조항의 법, 십계명, 그것은 사랑 하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1독서에 언급된 약자보호 규정도 이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면서 이웃에게 먹이가 되는 희생제사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이웃과 동화되는,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로 사랑 자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 당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 또한 사랑이 되어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6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Ⅰ.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
율법학자가 예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였을 때 그가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 의아스럽습니다. 하여간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외우는 십계명 중의 첫째 계명을 인용하시어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별로 심각하게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격과 인격사이의 관계라는 그리스도 주장을 지적하는 말씀이니 만큼 우리에게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사랑하는 인격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인격과 그 이웃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되 사랑 받지는 못한다면, 이 사랑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짝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하느님의 백성과 그들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인격적 사랑의 기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인격자로서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작용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노예로부터 행방 시켜 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벌하시는 데 있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은 벌을 받는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천주가 주님이신 백성은 복되도다. 당신 유산으로 뽑으신 그 겨레로다.”(화답송)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시어 그들 앞에 서 계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아들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자이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Ⅱ.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쉽습니까?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명확한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랑을 생각할 때, 자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 – 가령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애인이나 자녀나 친구 같은 살아 있는 인격 -을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격자와 인격자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참으로 살아 있는 인격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들어 높이고 우리를 완성에로 이끕니다. “인격은 사랑 안에서 생명에로 이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자인가를, 자기의 내면의 영혼이 어떠한 자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골든브른너).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에게 대해서 마음을 꼭 닫고 있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까닭에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한다.”고 페기는 말했습니다. 사제는 그의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수도자들도 성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Ⅲ.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문제
그런데 문제 거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어렵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며,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베푸신 하느님의 역사를 깨닫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또한 하느님이 우리 앞에 실제로 계심을 알려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성사의 위로, 전례의 힘 그리고 심지어는 고통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잠깐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회상해 봅시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로 올라갈 수 있는지 배우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하느님을 사랑할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는, 하느님께서 이처럼 해 주신 데 대하여 마땅히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위험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적인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편 – 하느님이시거나 사람이거나 사랑 받는 편 -에서 모든 것을 보지 않는 한, 사랑은 자랄 수 없습니다.
Ⅳ. 주님의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인 성체성사
인간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둘 다 약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떨어질 위험 중에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보충과 발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을 무심히 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인격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인격자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는 나의 사랑 받는 이가 남한테서도 사랑 받도록 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근본적인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약하고 우리도 연약하니 만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큰 은혜 – 곧 주님의 사랑의 결정적 증거인 성체성사 -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순종할 원의와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