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주일 (나해) 강론 모음

 

사순 제 4주일






        12. 김정진 신부(나)/21


        13. 김창이 신부(나)/22             14. 조순창 신부(나)/25


        15. 민병섭 신부(나)/26             16. 최영철 신부(나)/30


        17. 강길웅 신부(나)/32             18. 김영남 신부(나)/34


        19. 김영진 신부(나)/36             20. 신은근 신부(나)/38


        21. 서철승 신부(나)/39             22. 서울교구 주보/40


        23. 박정미 수녀/41                  24. 십자가 위에서의/42


        


12.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구원을 얻는 길”


김정진 신부




오늘은 우리 인생의 궁극 목적인 구원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사업의 계획과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는 길을 명백히 제시해주십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을 보내시어 인류 구원이란 대사업을 이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비교함으로써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떠나 사십년 간 광야를 지나가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독사에게 물렸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구리뱀을 만들어 놓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리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구제된 것은 구리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구제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옛날 하느님은 당신의 전능과 자비에 온전히 신뢰하고 높이 들린 구리뱀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사람을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십자가상의 매달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죄악의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믿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천주 성자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천주 성부의 의노와 진노를 풀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성부와 인류 사이에 들어가셔서 양측을 화해시키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 계획은 성자에게 있지 않고 성부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이도 성부이십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매달 듯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달으시고 그분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이도 성부이십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은 성부께로부터 비롯하여 완성된 것입니다.



비록 인류의 구원 사업이 성부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상 많은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시며 고통을 느끼신 분은 성자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같은 혹독한 죽음을 당하였습니까. 이같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을 십자가상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사실로 보아도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천주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며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같은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이에 보답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우리의 보답과 협력을 요구하십니다.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선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라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류의 절대적인 보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단받지 않을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으로 벌써 죄인으로 판단받은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즉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신앙이란 우리의 정신과 마음, 우리의 사랑과 생명을 남김없이 온전히 예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나타나고 사랑의 실천에 드러납니다. 성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하는 때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종종 바치도록 합시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의 길이신 당신께 굳은 신앙을 우리에게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열매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고 당신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13.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다”


김창이 신부




몇 달 전 에이레의 유명한 성령 운동가 스켈렌 신부가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는 강론에서 어둠 자체에 긍정적인 뜻이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둠은 빛이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기에 빛은 어둠에서 더욱 밝은 법이고, 어둠이 짙을수록 그곳에 투사되는 빛은 더 밝게 마련이다.



장님에게도 빛이 필요하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캄캄한 밤에 길을 가는 데 반대쪽에서 초롱을 든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까 장님이었다. 그 사람은 “장님에게 초롱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장님은 “눈 밝은 사람이 이 초롱불을 보고 비켜가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둠을 허락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해서 빛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더 밝은 빛을 주시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 22장 16절에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빛나는 샛별’이라고 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샛별을 바라보노라면 곧 떠오를 태양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암흑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도처에 전쟁과 굶주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에도 수 년째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파괴가 계속되고 있고,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각지에는 수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매일 수십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국제 테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80세 노인으로부터 3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마구 잡아가고 죽인다. 안심하고 여행조차 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농촌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농촌 사람들은 막대한 빚을 지고 절망 속에 허덕이고 있다.



상록회라는 구라 단체가 나환자 마을에 1천만원을 주어 소를 사게 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에 가 보니까 소들은 간 데 없고 사료 빚만 수백만 원어치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소값은 폭락하고, 거기에 비해 사료 값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서울 사람들은 농촌의 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빈부의 차와 실업자들의 급격한 증가는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라고 생각된다. 이런 급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공산주의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방의 짙은 어둠을 보면 질식할 것 같다. 이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빛은 이 세상의 빛이 아닐 것이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보면 그 빛이 아무리 밝아도 마침내는 어두운 밤바다에 삼켜져 버린다. 인간에 의해서 밝혀진 빛은 밤을 낮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을 하늘처럼 믿으면서 살아왔지만,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우리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나를 일깨워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빛의 반사체로 될 때 이 사회는 참으로 밝아질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때, 정부와 국민이 그리스도의 양심을 되찾을 때 이 사회는 밝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정신 생활이나 신앙 생활에서도 캄캄한 밤을 체험할 때가 있다. 기도나 기타 정신적, 신앙적 가치에 무관심하거나 무미건조해지고, 하느님이 눈에 안보여 암담하고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공연히 우울해져서 신경질이 나고 주위 사람들이 싫어질 때도 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도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25년 동안이나 그녀는 정신적, 신앙적 어둠 속에서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샛별을 좇아 실망하지 않았다.



긴 터널에 들어가면 캄캄해서 밝은 끝이 안보이지만 끝이 꼭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가듯이, 데레사 성녀는 긴 세월을 실망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어둠 자체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샛별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죄악도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긍정적이 뜻이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온 어느 예비역 장군이 신문기자들에게 말하기를, 분단이 되어 있는 현실이 한국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을 없애려면 선도 없어진다. 악 안에서 선을 찾으려는 것이 하느님의 의향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죄인이기 때문에 성인도 될 수 있는게 아닌가? 죄로 인하여 구원이 왔기 때문에 부활 전야 예식 때 사제는 “오, 복된 죄여! ” 라고 외치는 것이다.


고통의 긍정적인 의미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딸을 셋 둔 어느 어머니가 임신을 했는데 마침 맹장염이 발생했다. 수술을 해야겠는데 마취를 하면 유산이 될 형편이었다. 그 여인은 마취를 하지 않은 채 맹장 수술을 받았고, 그 후에 아들을 낳았다. 고통의 가치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고통이나 죄악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사람을 하느님께 의지하게 만든다. 속담에 대감 집 개가 죽으면 밥 먹다 말고 수저를 놓고 달려가고, 대감 본인이 죽으면 밥을 다 먹고 천천히 간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렇게 약삭빠른 사람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욥은 ‘환난을 겪은 후에 처자나 친구들이 다 소용없다’ 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고통이나 죄악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진주는 모래가 조개 속에 들어가 수백 년 동안 닦여진 후에 완성된다. 금도 불가마 속에서 여러 번 단련된 후에 순금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죄를 지어 보고 고통도 겪어 본 후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 케고르는 “욥은 인생의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고통이나 고난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14.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예수님처럼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자”


조순창 신부




에덴 동산은 인류의 고향입니다. 그 에덴 동산 한가운데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7) 는 하느님 말씀보다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적이다.”(창세 3,5) 라는 간교한 마귀의 유혹의 말을 믿고,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는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불행의 길을 가는 인간을 붙잡지 못한 하느님은 과연 무능한 분입니까? 미움이 사무쳐 아우 아벨을 쳐죽이고, 죄책 때문에 저주를 받은 몸으로 끝없는 방랑자가 된 카인에게 하느님은 무자비한 분입니까?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던 시드키아 왕이,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그릇된 정치를 펴고, 다른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놀림감으로 삼았을 때, 바빌론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70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도록 묵인하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사랑하신 것입니까?



무엇이나 잘 되면 제가 잘한 때문이고 무엇이나 잘못 된 것은 조상탓으로 돌리기 쉬우나, 실낙원은 하느님을 믿지 못한 인간의 탓이요, 카인의 저주는 미움때문이며, 예루살렘의 폐허 유배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예언자를 학대한 인간의 병든 마음과 그릇된 생활의 결과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 사랑 때문에 귀하니까 부러울 것 없이 다 해주고, 무엇이나 들어주는 것만이 좋은 부모입니까? 분수에 따라 안되는 것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으며,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 따끔한 매를 드는 부모가 나쁜 부모입니까? 존경받는 부모가 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사순절 4주일, 앞으로 부활 대축일을 향해 가는 사순절의 중간, 땀흘려 힘겹게 고개마루턱에 오른 우리에게, 고향 잃고 성전을 떠나서 포로 생활을 하며, 깊은 회개로 정신을 차린 이스라엘에게 페르샤 왕 고레스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역대 하 36,23)


고 한 말은 해방의 칙령이요, 자유의 선포요, 실향민에게 귀향의 희소식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과 희망은 구원이며 하늘나라입니다. 그것은 잃은 낙원을 찾는 것이요, 가나안 복된 땅을 차지하는 것이며, 폐회된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이고, 죄와 죽음에서 사죄와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로 하느님을 믿고, 두 번째로 죄와 병을 십자가에 못박아 고치고, 세 번째로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과 자비를 나누어서, 오늘의 낙원을 이루고, 내일의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건강하고 올바른 신자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버리지 못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고향과 하느님의 집을 그리워하며, 참행복과 영생과 더 나은 세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도 많은 불행이 있습니다.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 오염된 물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 정신박약이나 불구로 회생의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 못배우고 권세 없이 천대받는 사람, 소외당한 설움에 지친 사람, 실패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 등등,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면, 왜 빛보다 어둠이 가득하고, 희망보다 불안이 더 큰 오늘이며, 악이 선을 이기고, 억지가 순리를 다스리는 현실이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결점을 바로잡지 못하고, 내 마음의 병을 다스리지 못하며, 사회와 교회의 병폐를 고치지 못하는 까닭이며, 자비심과 사랑의 부족 때문입니다. 나만 아는 이기심이나, 독점하려는 욕심, 대화와 이해의 문을 닫아 버림, 고집, 무관심이나 무시와 자만 등을 과감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버립시다.




그리하여, 병을 고치고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모으시는 그 숭고한 십자가상의 사랑의 묘약으로, 죽어가는 세계를 소생시켜 주시도록 바라며, 불행을 탓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랑과 자비로 살 때에 이 세상은 바로 낙원이 될 것입니다. 












15.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니고데모와의 대화


민병섭 신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누는 대화(3,1-21)를 통하여 첫 번째 표징에서 파생하는 두 번째 주제가 나타나고 있다. 곧 메시아 시대에서의 새로운 삶이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첫 번째 담화에 속하는 이 사건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방문하여 이루어진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의 명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영향력 있는 종교적 분파인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예루살렘 최고 의결 기관이며 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유다인 의회 의원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선생들 중 하나였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1,18)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2,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을 신임하지 않으셨다(2,24). 여기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역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알았다고 한다(3,2). 이처럼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감명을 받고 그분께 끌리었지만, 그분을 단순히 대단한 예언자요, 백성을 회개시키도록 파견된 ‘하느님의 사람’ 이상의 존재로는 보지 못하는 다른 유다인들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 자격이 단순히 출생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정상적인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에서 선택된 사람이 되는 조건을 달리 설명하신다. 곧 새로운 세상의 새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1-8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빛을 받아들여 빛 속에서 걸어야 한다(9-21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3,3)라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되는 “새로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뜻은 바로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빛과 어둠의 대화요, 영과 육의 대화이다. 그러하기에 어둠에 속한 니고데모는 빛이고 영의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 질서에만 눈이 밝았고, 눈에 보이는 출생만 이해했지, 거기에 내포된 영적이고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새로운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파견된 그분의 외아들을 믿고 그분의 빛 속에서 걸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파견된 분을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으로부터 새로 남은 오직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 ‘높이 들리심’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요한이 ‘높이 들리다’는 개념에 부여하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 “들리다”라는 단어를 ‘높은 권세로 높임을 받는다'(8,28)는 뜻과 ‘십자가에 달린다'(12,32)는 이중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요한 복음에서 이 단어가 갖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것이 가져오는 영광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시는 이유는 16절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가장 탁월하게 계시하는 ‘징표’를 이 세상에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구절은 요한 복음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리켜 예로부터 ‘작은 복음’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 부분에서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아들’ 대신에 ‘외아들’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로 ‘말씀의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고 있다. 아드님께서는 세상을 단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파견되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생명의 판정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사랑 자체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는 파멸시키는 힘이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단죄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을 믿지 않을뿐더러 더 나아가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드는 하느님의 빛이 그를 심판하려는 것, 곧 그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에서 그를 구원하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과거에 붙들려 끌려가지 않거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 폐쇄되지 않는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하느님 안에서 빛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1독서/2역대 36,14-16.19-23


  역대기의 맨 마지막 장에 속하는 제1독서에서 성서 저자는 유다의 마지막 2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한 이들에 대하여 주마등처럼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여기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왜 이렇게 바빌론의 유형과 추방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겪게 되었느냐이다.




  그러기에 왕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36,1-11). 특히 오늘의 독서 부분에서 저자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를 단죄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의 저자가 이스라엘의 비극을 바라보는 눈은 예레미야와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레미야는, 종교적인 장님이 되었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당시의 통치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장차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것도 보고 있었다. 역대기의 저자 역시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표현 방식은 예레미야와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더욱 인상깊다. 아담에서 출발하여 시드키야에 이르기까지, 유다 나라가 시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왕과 백성이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일꾼들인 예언자들을 끝까지 거부하였기 때문이라고 그의 이야기는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야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시게”까지 하였던 것이다(16절). 그러나 역대기의 저자는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극으로 끝맺고자 하지도 않고 있다. 저자가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리는 반면, 그들의 의무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며 동시에 희망을 가지라는 권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올 것을 믿는 사람들은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이 수난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희망을 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역대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집이 두 번째로 건축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장래는 그들이 성전 건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권고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의 영광은 새로 세운 성전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정의가 그들의 생활에 넘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데 열심한 사람들은 오늘의 말씀에 더욱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우리의 생활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2독서/에페 2,4-10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먼저 하느님을 자비가 넘치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자비란 단순히 ‘호의적인 뜻을 갖는다’는 것을 넘어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하느님의 자비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범행으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왜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공도 없는, 아니 죄 투성이가 되어 당신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자리에 앉게 하시는 것은 엄청난 선물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넘어 아버지의 오른편, 하늘로 들어 올려지셨고, 우리는 세례로 그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그분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이미 그러한 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영광에 우리가 영원히 참여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희망이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바로 이것을 보증하여 주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특권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힘이라고 사도는 강조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다’는 측면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는 측면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기에 어떠한 인간적 행위로도 그분의 완전성을 거스른 죄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오직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태어난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은 온 생애에 걸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되는 창조물이며, 그분의 은총이 우리의 선한 생활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무한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 그분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전하며 증인이 되고픈 마음까지도 불러일으켜 주시며, 동시에 그러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주시는 분이시다.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이러한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그것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다.












16.             사순 제4주일 요한 3,13-25 (나) 한번 더 용서 못한 이유


최영철 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메시지는 십자가의 현실적, 모습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라는 말이다. 신비스러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사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사랑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이지만, 그것이 어떤 때에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막연한 어떤 아름다운 개념으로 전락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갖는 때는, 사랑의 삶을 사는 때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 그것이 위선으로 전락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자주 보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니는 표지는 십자가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사랑의 징표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랑의 현실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오늘복음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정립해야 하지 않겠나 한다.




자기 부정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요한 3, 1히 그것을 입증하셨다면 그 입증의 현실이 십자가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들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좀 던 구체화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는데 왜 최초의 인간의 죄를 한번 더 용서할 순 없었는가, 단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그 엄청난 단절을 가져오게 하시었고, 그 결과 비참한 악의 세력에 빠지게 하셨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느님답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이 의문을 제기했던 성서공부를 하던 어떤 형제분은 이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 형제의 의문은 현실을 사는 우리들 삶 속에서 수없이 제기되는 의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의 삶과 십자가의 삶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때 나는 그 형제에게 “하느님은 그런 인간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는 용서가 안되는 원리와 같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결국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은 아픔으로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고, 그 아픔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용서하고 싶은 아픔으로, 또한 커지게 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갖는 마음이 아닐까, 결국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용서의 현실은 자기 부정, 즉 자기가 죽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가에서 그 용서의 현실이 십자가의 현실이 아니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십자가로 승화시킬 때


참으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현실적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 주어지고 있는 아픔을 십자가로 승화시킬 때가 아닐까 한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이루셨고, 그것으로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되였다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름을 위i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을 통해 주어지는 희망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서 자기 부정, 자기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17.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역대 36,14-16.19-23 (이스라엘 백성의 귀양과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나타난다)


제2독서 에페 2,4-10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 음 요한 3,14-21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들을 시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이 죄를 지어 교도소에 있다 해서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을 더 생각하고 걱정하여 사랑하게 됩니다. 만일에 잘못했다 해서 그 아들을 버린다면 그는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벌로써 바빌론에 귀양 갔다가 하느님의 자비로 풀려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위아래가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나와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박해하여 못된 짓만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의 책벌을 받아 나라가 망했고 백성들 은 포로로 끌려가 혹독한 고생을 합니다. 피 눈물나는 쓰라린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음이 여리신 분이십니다. 여리다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벌을 주시면서도 못내 안쓰러워서 고통받아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냥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샤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백성들이 고국을 찾아 돌아오게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벌을 허락하시면서도 죄인에 대한 사랑만은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큰 애정으로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셨고 그리고 구원의 새 길을 훌륭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도 사실 기뻐하게 됩니다. 대단히 모순된 말 같지만,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조금도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옛날 ‘구리뱀’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 당신께서 바로 그와 같은 희생제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의 발로였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구리뱀 사건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시나이 반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에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서 하느님을 원망하여 불평들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으면 고생 뒤에 낙이 올 텐데도 바로 눈 앞의 현실적인 고달픔만 가지고 하느님을 의심하여 대들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뱀을 보내시어 백성들을 벌주셨는데 나중에 백성들이 뉘우치자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게 하여 그 구리뱀을 보는 사람은 불뱀에 물려도 죽지 않고 치유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벌을 주시면서도 그 옆에는 항상 자비의 은총도 함께 마련해 두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실로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집니다(로마5, 21 참조). 죄가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치유되었으며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복음에서도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성서에 이 귀절만큼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떤 부모도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키지는 않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데 하나 있는 아들을 적지에 보내어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을 못 본 체하시고(마태 27,46참조) 죽음의 길을 걷도록 안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의 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은혜로운 사순 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면 그는 참 신앙인에 될 수 없습니다. 왜 기도해야 되고 왜 선행을 해야 하며 왜 사랑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는 실로 불쌍한 인간입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혼자 몽땅 짓고서는 도리어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하느님이 선이라면 왜 자기를 그렇게 버려 두시느냐고 절규했습니다. 신앙은 내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통사고에서 생명을 건진 후로는 하느님 사랑을 진실되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기쁨을 묵상하는 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지만 불원간에 그분의 부활에 동참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와 실수에는 아픈 매도 있지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다시 한번 성찰해 보고 하느님의 자비에 늘 푸른 기대를 걸도록 합시다.












18.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워 주면서


김영남 신부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그분의 반대자들에게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였다면 하느님께서 그를 결코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성서 자체에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신명 21,23; 참조 갈라 3,12)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반박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죽으신 것이 아니라,「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며, 그분의 죽음은 성서말씀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말씀에 따라서」 (1고린 15,?) 된 것이었다고 선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이 강조되어 있고, 구약성서가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절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면서, 구약성서에서 근거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광야에서 높이 들려 매달렸던 구리뱀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민수 21,4-9에는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광야에서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의 청원기도를 들어주시면서 지시하기를「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매고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는데, 모세가 이 지시대로 하였더니, 과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옛날 이야기 (민수 21,4-9)는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한 예시였다. 구리뱀의 일화는「높이 들려 매딜린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시였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 점은 믿음이다. 이미 구약의 구리뱀 이야기 안에서도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구리뱀을 쳐다보았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구리 덩어리에 불과한 것 같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따랏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의 태도는 바로 그 앞의 대목에 나오는 불평불만으로 대들었던 태도와 매우 대조를 이룬다.




오늘의 우리도 영원한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높이 달리신 그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드높이’‘쳐다’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본디 치욕과 무력함의 상징이었다. 그 십자가가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때로는 많은 방해와 저항을 받으시면서까지, 사랑과 정의로 일관하셨던 그분 삶의 최종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에 관한 위의 모든 말은, 그분의 “부활에 관한 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으로 끝났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오해의 여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인류에 대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요한 3,16/ 로마 8,32)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워 주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더욱 굳세게 가지라고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하여 더욱 예민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단체적으로도 지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자극하며, 더 나아가 죄에 물든 우리 사회의 구조도 개선해 나가도록 요청한다. 남이야 고통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편안함’만을 생각하며, 거기서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도는 결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그렇게 팔짱끼고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불신앙을 고집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에서 멀어지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불신앙을 고집하는 이런 사람들을 오늘 복음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요한 3,19)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말씀은 오늘의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죄스러운 실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일부러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고 있는 형편은 아닌가? 사실 이기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문을 닫아걸고, 그 하느님 사랑의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여, 일부러 어둡고 추운 골방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9.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믿음의 손익 계산서 


김영진 신부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를 가르쳐주던 이선구 선생님께서, 하루는 국어 시간에 국어와는 다른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했던 교리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믿음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린 나에게 그 교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선생님의 교리 가르침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만일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느님이 있으면, 자기 멋대로 살았는데 하느님이 계시니까 ‘큰일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다면, 자기 멋대로 산 것에 대해 벌을 줄 분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죽어서 하느님이 계시면 상을 받을테니 큰 ‘축복’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득도 손해도 없는 본전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평가할 때에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 멋대로 죄를 지으며 살다가 죽으면 ‘아! 그 사람 그렇게 살더니 결국 죽고 말았군’하고 평가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하느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의 경우엔 ‘아까운 사람 죽었네’하고 평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느님을 믿어서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볼 것은 없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삶을 손익 계산으로 따진다는 것은 어딘가 어리석고 우스워 보이지만, 그 시절 나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교리였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축복과 본전’이라는 열매와 하느님께 대한 불신으로 얻어지는 ’큰일과 다행’이라는 열매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모양으로 살더니 결국 죽고 말았군”하는 소리와, “아까운 사람 죽었네”하는 소리 중 어느 소리를 택할 것인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일종의 장사요 투기다. 그런데 이 장사는 이득이 보장된 장사요, 수만배 이상 남는 것이 확실하게 보장된 완전한 투기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으로서 구원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판결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 믿음이 주는 이득은 인간을 구원과 의인으로 이끄는 엄청난 장사인 것이다.




‘믿음은 수만배 남는 확실한 장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곁에 보내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살기만 하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의 자로 잴 수 없는 이득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서 맹인 목사 윤인수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맹인이 되었고, 집이 가난하여 구두도 닦고 신문도 팔면서 가게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어느 날은 장사가 조금 잘되어 돈을 평소보다 많이 가지고 왔더니, 병이 들어 누워 계시던 홀어머니께서 아들 인수에게 “얘야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하더니 “십일조를 떼어서 하느님께 바치자구나”라고 말씀하였다. 이에 어린 인수는 화를 내며, “어머니, 나를 소경으로 만들어 놓고, 엄마는 병이 들게 하셨으며, 집안은 전쟁으로 거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런 하느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린 인수의 손을 쓰다듬으며 “인수야, 고향 잃은 것도 한스럽고 집과 재산을 잃은 것도 원통하며, 건강 잃은 것도 서러운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리면 너와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니?”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이 믿음이 어렸을 때부터 소경이던 인수를 목사로 길러낼 수 있었던 큰 이익이 된 장사였던 것이다.




믿음은 고통과 절망,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희망과 기쁨, 인내와 용기, 그리고 사랑과 용서라는 열매를 준다. 죄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며,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이다,




연주를 듣다가 왕이 벌떡 일어났다고 하는 그 유명한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빠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나중에는 남의 돈까지 썼지만 건강도 찾지 못하고, 남의 돈도 갚지 못하여 반신 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갔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절망, 슬픔의 장소인 감옥 안에서, 그의 불후의 명작인 ‘할렐루야’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고통․시련 중에서 믿음마저 잃는다면


소설가 0, 헨리도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대출에 관련되어 감옥에 갔으나, 그곳에서 쓴 작품이 그의 유명한 ‘마지막 잎새’라는 책이었고, 미국에서 네 번씩이나 대통령을 하였던 루즈벨트도,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으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 최강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일을 하였다.




헨델도, 헨리도, 루즈벨트도, 모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장사꾼이었다. 그대는 지금 고통과 시련의 한 가운데서 있다고 생각하는가?


직장과 가정 일로, 건강과 재물 때문에 고통과 시련의 한밤 중에 서 있다면, 역경 중에 기회가 오는 법이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장사꾼으로 나서보자. 당신 아들까지 내주시며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믿음의 장사꾼 발등을 찍으시겠는가.












20.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구리뱀 사건


신은근 신부




구리뱀 이야기는 구약성서 민수기에 나온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난 이스라엘인들은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난다. 모세의 인도로 그들은 희망에 부풀어 떠난다. 하느님의 기적을 보았던 그들인지라 사기는 충천했고,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인간의 본성은 연약하기 그지없음을, 사막을 이동하며 생활해야 했던 그들이기에 사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에서의 생


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리움은 불평으로 바뀌었다.


우리를 이 사막에서 죽일 셈이냐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게 해다오. 불평은 도가 지나쳐 하느님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인들의 생존은 그 자체가 은총과 기적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하느님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시련이라는 응답이 왔던 것이다.




갑자기 불뱀이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혔다. 불뱀은 일종의 방울뱀 같은 것으로 물리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물려죽었고 치명상을 입었다. 사람들 사이에 두려움인 팽배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부족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겁먹은 백성들은 뉘우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계시가 모세에게 내렸다.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달아놓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서 안에서 배반과 회개를 되풀이한다. 현실이 편안하면 그들은 쉽게 하느님을 잊어버렸고, 이교 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하느님은 시련을 통해 그들을 다시 부르셨다. 민족적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당신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우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고있는 신앙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배신과 뉘우침은 우리 생활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구리뱀 사건은 과거에 끝난 사건아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삶의 어두움과 고통을 체험한다. 인간관계의 억울함과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난다. 그럴 때면 신앙의 무력감은 커지고 하느님도 멀리 느껴진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분의 뜻이 담긴 시련이 아닌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혔던 사막의 불뱀이 아니겠는가.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쳐다봐야 한다.


광야에서 구리뱀이 모세의 손에 들렸던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기에 그분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불뱀에게서 벗어나 상처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분을 쳐다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쳐다보는 것이 되는가.


그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분 중심으로 생각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사순절 넷째 주일의 교훈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시련 앞에서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쳐다본 뒤, 불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상처는 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세월은 약이 아니라 마취제일 뿐이다. 하느님만이 삶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수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자.












21.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예수 편에 서자


서철승 신부




금은방을 운영하는 본당 신자가 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열 돈의 금이라며, 2개의 예물을 팔러 왔단다. 실제 무게를 달아보니 각각 아홉돈, 여섯돈으로 합 열 다섯돈이 되었다. 그냥 모른체하고 열돈의 금액만을 내 줄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내도 사실대로 손님에게 말씀드리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손님에게 솔직히 이야기하자 손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아홉돈에 해당하는 예물만을 팔 고 집에 돌아갔다. 당장에는 그 신자가 돈을 덜 만지겠지만 그 손님은 그 금은방 주인의 솔직함에 매료되어 평생 단골이 되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우리 신자가 예수님 편에 서서 용기있게 믿음을 실천한 예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소경이야말로 용기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 다. 소경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육적인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도 뜨게 되었다. 소경이었던 사람과 그의 부모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하여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 소경의 부모는 유다인에게 배척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 아들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반면 소경이었던 사람은 자신 의 눈을 뜨게 해준 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당당하게 증언하였다. 소경이었던 사람과 그 부모의 모습이 바로 빛 속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빛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당하게 자기가 믿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반면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의 힘을 믿기에 진실을 보고도 말할 수가 없다.




우리들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편에 설 수도 있고, 또 그 반대편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편에 서서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며 용기있게 살아갑시다.




ꡒ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ꡓ(에페 5, 8)












22.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 복음(요한 3,14-21)은 재생(再生)에 관하여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3,1-12)와 작가의 명상록(3,13-21)으로 나뉩니다.




1. 복음 이야기


예수께서는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 3,14)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아 물뱀에게 물려 죽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나무기둥 꼭대기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민수 21,4-9).




요한 복음서 작가는 예형론을 전개하여 ‘구리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기꺼이 보내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요한 3,15-17).


이 심판은 인간 각자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앙의 결단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된다는 내용으로 요한 복음서 작가의 종말관입니다(요한 3,18-21).




2. 우리의 이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빠의 뜻’을 이루시려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셨다가(요한 3,13ㄱ.16-17) 십자가 죽음을 거쳐(요한 3,14) 하늘로 올라가신(요한 3,13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아들을 통하여 세상 구원을 이룩하신 것입니다(요한 3,15-17).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각자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모두 이러한 구원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요한 3,19-20). 그래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3,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하느님의 거룩한 영(성령)이 작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성령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23.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어떤 만남


박정미 카타리나 수녀


이십여 년 전 어느 여름 날, 저는 세검정 부근에 있는 오래된 한옥의 피정 집에서, 주말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한낮에 저는 해야할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집 앞의 돌층계에 아무 생각 없이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골목길을 따라 꾀죄죄한 차림의 한 남자가 걸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배가 너무 고파. 밥 좀 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는 저의 집이 아니니 밥은 드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이걸로 무엇이든지 사 드셔요” 하며, 마침 호주머니 속에 있던 지폐 한 장을 주었습니다.




그때는 그 돈이면 국수 한 그릇은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받으며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걸 내게 다 주면 거기 점심은 어떻게 할 꺼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집에서 식사를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하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저는 엉뚱한 제의를 했습니다. 마침 날씨도 더운데, 피정 집 뒤 옹달샘에서 씻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선뜻 그러겠다고 했기에 샘터로 안내를 하고 수건도 건네주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한낮에 시원한 샘물로 세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했습니다. 발길을 돌리던 그 손님은 그 집 대문 기둥에 걸려 있는 ‘예수 고난회 피정의 집’이란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 집이 예수의 친구들이 사는 집이오?” 라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얼떨결에 “네, 그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약간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들판에 버려진 이삭을 주어보려고 기억의 뒤안길을 더듬어 볼 때,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여름 한낮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에게 누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수의 벗입니다”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아니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이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때는 몇 번이나 될까요? 


예수님을 만나고 사귐으로써 그분을 더욱 깊이 알고 더 간절히 사랑하게 되며 나아가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그리스도 신자들은 곧 예수님의 벗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 사이는 만나는 것이 즐겁고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이에 서로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공유하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요한 15, 15)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터득하신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남김없이 전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당신과 한 마음 한 뜻을 지니기를 바라신 것이 예수님의 우정입니다.












24.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나)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죽음의 의미”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그분의 반대자들에게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였다면 하느님께서 그를 결코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성서 자체에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신명 21,23; 참조 갈라 3,13)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반박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며, 그분의 죽음은 성서말씀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말씀에 따라서”(1고린 15,3) 된 것이었다고 선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이 강조되어 있고, 구약성서가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절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면서 구약성서에서 근거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광야에서 높이 들려 매달렸던 구리뱀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민수 21,4-9에는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광야에서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의 청원기도를 들어주시면서 지시하기를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매고 그것을 쳐다보게하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는데, 모세가 이 지시대로 하였더니, 과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옛날 이야기(민수 21,4-9)는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한 예표였다. 구리뱀의 일화는 “높이 들려 매달린”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시였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믿음이다. 이미 구약의 구리뱀 이야기 안에서도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구리뱀을 쳐다보았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구리 덩어리에 불과한 것 같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게된다”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의 태도는 바로 그 앞의 대목에 나오는 불평불만으로 대들던 태도와 매우 대조를 이룬다. 


오늘의 우리도 영원한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높이 달리신 그 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드높이”, “쳐다”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본디 치욕과 무력함의 상징이었다. 그 십자가가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때로는 많은 방해와 저항을 받아가시면서까지, 사랑과 정의로 일관하셨던 그분 삶의 최종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에 관한 위의 모든 말은 그분의 ‘부활에 관한 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으로 끝났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오해의 여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인류에 대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요한 3,16; 참조: 로마 8,32).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워 주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더욱 굳세게 가지라고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하여 더욱 예민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도 지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자극하며, 더 나아가 죄에 물든 우리 사회의 구조도 개선해 나가도록 요청한다. 남이야 고통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편안함’만을 생각하며 거기서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도는 결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그렇게 팔짱끼고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불신앙을 고집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에서 멀어지는 행위자체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불신앙을 고집하는 이런 사람들을 오늘 복음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요한 3,19)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말씀은 오늘의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죄스러운 실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일부러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고 있는 형편은 아닌가?  사실, 이기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문을 닫아걸고, 그 하느님 사랑의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여 일부러 어둡고 추운 골방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복음 나눔 8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