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제6주일 강론모음

 

부활 제6주일



         8. 강길웅 신부(나)/14


         9. 김영남 신부(나)/15               10. 김영진 신부(나)/17


        11. 민병섭 신부(나)/20               12. 유진선 신부(나)/23


        13. 이규철 신부(나)/26               14. 조순창 신부(나)/28


        15. 최영철 신부(나)/30               16. 최익철 신부(나)/31


        17. 교구주보(나)/33                   18. 사랑의 기쁨(나)/34






8                    부활 제6주일 (나해)   서로 사랑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렸다)


제2독서 Ⅰ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복 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사랑이며 그 사랑의 극치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생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즉 어떻게 죽느냐 하는 질문과도 일맥 상통하게 됩니다.




어느 시한부 인생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폐혈전증, 신부전증, 간경병증 등 무려 십여 가지도 넘는 병을 앓는 그 사람에게 의사는 이제 얼마 못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먼저, 거리에 버려져 있는 환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들을 목욕시켰으며 옷을 빨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잠도 함께 잤습니다. 그러자니 환자들이 자꾸 불어났으며 식량이 부족했고 재울 방도 모자랐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도하면서 열심히 도와 주었습니다.




과로로 인해서 여러 번 쓰러졌으나 그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병 때문에 일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으나 그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빚도 많이 졌으며 설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자기 보다 어려운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다가 나이 서른에 죽었습니다.




그가 쓰러졌을 때 한국 가톨릭 평신도 협의회에서는 ‘가톨릭 대상’이라는 큰 상을 안겨 주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추기경님이 직접 미사를 주례하셨으며 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참석해서 고인의 뜻에 존경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이름은 김근영이었고 본명은 안토니오였습니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는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벗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언젠가 어린이들이 피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박 2일 피정이었는데 그야말로 전쟁이요 난장판이었습니다. 세면장의 수도꼭지를 있는 대로 다 틀어 놓고 장난질하는 아이들, 이불을 있는 대로 깔아 놓고 재주를 넘는 아이들, 문을 쾅쾅 닫으며 복도를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아이들,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피정지도를 하던 수사님도 부모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는지 모르겠다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자녀는 아무나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도 커서 어른이 되면 우리에게 받았던 그 사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또 전해 줄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벗으로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고달프고 외롭다 해도 하느님께선 바로 그 처지에서 우리를 벗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내 벗이요 그분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아무 부족한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백짓장 하나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로서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지만 미움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하면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움으로 남을 죽이면 자신도 역시 죽이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계명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9     부활제6주일. 요한 15,9-17: (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사랑의 기쁨”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지난 주일의 복음말씀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부분으로, 이미 나왔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더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머물다”(9-10절; 비교 4.5.7절)라는 말과 “열매를 맺다”(16절; 비교: 2.4.5.8절)라는 주제어가 오늘 복음말씀에도 나온다.


오늘 말씀에서 새로운 점은 예수께서 하시는 “내 안에 머물라”는 말씀이 결국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라”를 뜻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그냥 단순히 “내 사랑 안에 머물라”, “내 계명을 지켜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지지 않고 매번, 당신의 예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라는 말씀이 놓여 있고,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다.




그리고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는 말씀에는 앞뒤에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즉 앞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고, 뒤에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렇게 하여 생명까지 내 놓으시며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제자들의 ‘친구(형제) 사랑’의 근본동기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큰 질문이 하나 제기될 수 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으로 되어 있다(요한 15,12; 참조 13,34).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 “명령”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사실 이 질문은 오늘 복음말씀에뿐 아니라, “최고계명”이 무엇이냐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참조: 마르 12,28-34). 사실 ‘사랑’은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계명”이라는 단어를 구약성서의 오랜 전통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의 기본줄기라고 볼 수 있는“십계명”이 본디는 “열 가지 말씀”(deca-logoi –> Decalogue)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십계명은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신 다음에 주신 ‘말씀’이었다(참조 출애 20,1).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서 베푸신 자유에 잘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셨던 “말씀”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계명’의 근본정신은 결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얽어매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계명’은 ‘사랑’을 전제로 한 ‘말씀’이었다. 이런 넓은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도 이해되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인간적 체험들도 생각해 보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즉 사랑하는 상대의 ‘뜻’ 앞에서 일종의 ‘의무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고 자유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는 이미 그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보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바로 이 “실행해야한다”는 의무성 때문에 “계명”이라는 말이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특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른 계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께서 고별만찬의 자리에서 당부하실 만큼 그렇게 간절한 예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상호사랑”은 그보다 먼저 있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다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사이에 오가는 충만한 사랑이 넘처 흘러,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흐르고, 그것은 또 제자들(믿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 세상 곳곳으로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랑 안에 머물라”고 우리를 요청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사랑은 조건 없이 피는 꽃


김영진 신부




새벽미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뒷동산을 찾았다. 정선 아리랑의 발생지 중 한곳인 아오라지 강가에 조그만 성당을 하나 짓기 위하여 모금도 하고, 여기저기 피정지도 등으로 며칠동안 본당을 비웠던 관계로, 또 나의 소중한 벗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어 산소에도 다녀왔기에, 늘 오르던 뒷동산을 그동안 못 갔었다.


 


이래저래 며칠만에 찾은 뒷동산은, 꿈 많은 청춘남녀가 몰래 숨어서 사랑의 불꽃을 피우듯, 꽃들이 만발하고, 저마다의 나뭇잎들이 뾰족뾰족하게 봉오리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 모습들은, 새로운 희망과 사랑으로 뭉쳐진 또 하나의 사랑의 불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비탈길에 놓여있는 작은 바위에 엉덩이를 슬쩍 걸치고, 아버님께서 생전에 기회가 되면 용감하고 씩씩하게 부르셨던 성가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를 흥얼거리노라니, 빽빽하게 치솟아 있는 도시의 빌딩 숲에서 느껴보지 못하였던 평화를 가슴 가득하게 안는 듯하다.


 


실로 진달래꽃과 벚꽃이 어우러지는 산비탈, 그리고 내려다보이는 강가에 피어있는 노란색 개나리꽃들의 행진, 게다가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양 뾰족하게 내밀고있는 나무들의 햇순들, 그 아름다움 속에서 느끼는 나의 고백은 ‘하느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실까? 그분처럼 내 삶도 사랑이어야 하리라’하는 느낌 외에 다른 것은 느낄 겨를이 없음을 본다.


 


삶이란 사랑을 하기 위함이요, 사랑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길이 아니겠는가?


돈을 향한 발길은 수전노가 되고, 권력을 향한 발길은 독재자가 되며, 쾌락을 향한 발길은 방탕아가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발길은 이기주의자가 되지만, 하느님을 향한 발길은 사랑이 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 향한 발길




대자연을 주신 하느님, 그 속에 질서와 조화를 심으시어 사랑과 평화, 기쁨과 행복을 끊임없이 주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로 향한 발길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 때가 되면 아낌없이 자신을 던져 거름도 되어주고, 크고 작음을 탓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제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는 저 한 송이 꽃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 사랑의 축소판이 되어야 함을, 나보다 먼저 알고 실천하여 오지 않았던가!




보잘 것 없는 한 송이 꽃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모두에게 향기와 기쁨을 선사하거늘,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찬양하고 그리워하였으며, 무슨 향기를 뿜어왔던가! 나의 삶도 한 송이 꽃처럼, 또 한 포기의 이름 모를 풀처럼, 하느님을 찬양하고 모두에게 사랑의 향기를 주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은 내 입으로 가장 많이 말하고 있고, 내가 가장 갈망하는 삶이면서도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세상을 맑게 하는 생명수이고,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지만, 자신을 던져 거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십수년전 탄광촌에서 사목할 때 조그만 골방 하나에서 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손녀 삼대가 살아가는 가족이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들에게 가죽 허리띠로 매를 맞은 할머니를, 교우 할머니들이 내게 모시고 왔다. 구렁이를 감은 듯 온몸에 피멍이 든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아들을 고발하여 혼을 내주고 싶었으나, 할머니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울면서 만류하셨다.




때로는 술 취한 아들에게 쫓겨나 대문 옆에서, 키우던 주인집 강아지를 끌어안고 자면서 추위를 이겼다는 할머니, 먹을 것이 없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기차역 대합실에서 구걸을 하면서도, 누가 돈 몇 푼을 손에 쥐어주면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는 생각보다는 아들을 위하여 담배를 한 갑 샀다는 할머니, 나는 그 할머니에게서 사랑이란 미움과 증오를 불사르는 활화산이요, 이해타산이 없으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사랑은 그냥 무조건의 사랑일 뿐이라는 것, 사랑은 조롱을 받고, 매를 맞아도, 어느 것 하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조건 없이 무조건 상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썩는 거름으로 바치는 삶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겼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




  할머니는 나에 비하여 지식도 적고, 가진 바도 적지만, 그러나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지식과 재물을 가졌으니, 그것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인 것이다. 조건을 걸고 꽃을 피우는 꽃이 어디 있으며 노래하는 새가 어디 있는가! 보상을 기대하며 물줄기를 찾는 나무 뿌리가 어디 있으며, 열매 맺는 과일 나무가 어디 있는가!


 


사랑은 장식품일 수 없으며, 꺾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물일 수 없다. 사랑은 승리가 보장된 도박이지만, 그러나 그 승리를 기대하며 거는 도박은 아니다. 사랑은 오직 조건 없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일생을 상대에게 바치는 거룩한 행위인 것이다.


예수께서 “벗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 나에겐 얼마나 가능성 있는 말씀일까! 단 하루를 살아도 목숨을 바쳐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활화산이 되고 싶은 아침이다.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만큼이라도, 다른 이를 위한 거름이 되고 싶은 아침이다.


 


주여! 무덤 위에 핀 할미꽃이라도 좋으니, 저도 이 봄에 조건 없이 피어나는 한 송이의 사랑꽃이 되게 하여 주소서.












11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민병섭 신부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복음인 포도나무의 비유(15,1-8)의 내용을 발전시켜 주고 있다. 곧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중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참여, 곧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대한 주제가 더 부연되어 나타나고 있다.




  오늘 복음의 9-10절은 1-8절과 11-17절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교량 역할을 하며, 비유 설교의 내용을 구체화하면서 실천적인 사랑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9절) 예수님도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말하고 있는 “내 안에 머문다.”라는 말씀은 “내 사랑 안에 머문다.”로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기에, 결국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랑의 결과이며 규칙인 셈이다.




  한편 11-17절은 공동체를 예수님의 벗으로 묘사하고 1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기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곳에 기쁨은 마치 평화처럼(14,27-28 참조) 신자들이 함께 나누는 종말론적 선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 기쁨을 당신들도 같이 나누고 또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표현대로 기쁨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작별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영원히 현존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기쁨은 바로 부활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끝없이 무한하고 완전한 이 기쁨은 복음으로써 비로소 삶의 완전한 의미와 구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사람의 감정과 열정을 상징한다.


   


  복음서의 저자는 12절에서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사랑의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이 사랑의 본질이 모범으로써 더욱 새롭게 규명되고 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어떤 계명이라도 우리 안에 표면적으로만 머물러 있게 되면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랑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먼저 계명을 전해 받고 또 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뒤 마지막에 가서 그 모든 계명의 종합인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전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단서를 붙이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할 필요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범을 따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목적을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서 신앙의 눈을 뜨는 그 순간에, 아무 대가도 없이 무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파도에 잠기는 듯한 느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0-17절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계시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자신의 의사를 거슬러 그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적 자유와 자발성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지는 것이다. 죽기까지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행위는 외적 또는 내적 실패에 따른 결과가 아니기에, 벗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고 진실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시어 철저하게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셨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벗이며, 예수님과 완전한 통교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종’이라는 단어는 고대 세계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노예 계급에 속한 사람을 지칭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 종속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느 의미로 사용하건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 간에 놓여 있는 거리가 ‘벗’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른 것은 ‘가치관의 대변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종의 위치에서 벗의 위치로 바꾸어 주심은 수난이 시작되는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들과 같은 종의 위치를 취하신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요한 13,2-20). 그 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벗이 되었으며, 주님의 비밀들을 알 수 있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또한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며 예수님의 벗이라는 이 새로운 상황에 들어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그분은 우정을 창조하시고, 그로써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사실 그분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비밀을 알려 주셨고, 당신 편에서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요소를 전혀 지니지 못했음에도 먼저 주님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




  오늘의 독서는 베드로 사도가 백인 대장 고르넬리오를 만나고 그를 주님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세 부분을 나누어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다. 베드로도 백인 대장을 공적으로 교회로 인도하고자 했을 때, 그에게 차별 대우를 할 뻔하였다. 모두가 유다 지방 출신인 사도들에게 교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 9-23절에서 깨끗한 짐승 등 온갖 짐승이 다 들어 있는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유명한 영상을 보여 주었던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는 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백인 대장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0,33-34). 베드로의 이 설교는 비록 간결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만, 복음 선포에 대한 기초적인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사용한 이 말은 사무엘 상권 16장 7절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 본다.”라고 말씀하신다. 곧 하느님은 그의 구원의 제공에서 인간들이 끌리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차별 대우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종교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선과 악을 품게 되는 각 개인의 마음에만 관심을 두고 계시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아들은 비록 탕자라 하더라도 항상 그 아버지의 친아들인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기쁨은 다시 찾게 된 선에 있음도 가리킨다. 방탕한 아들의 경우에 그의 기쁨은 자기 자신이 누구냐는 진리에 되돌아왔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과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하며, 우리가 부족한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 이웃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 때만이 우리를 변화시킨 사랑에 힘입어 우리도 이웃들의 삶의 변화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제2독서/1요한 4,7-10




  오늘의 서간에서 요한은 사랑의 원초적인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 그 근원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둘이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능력은 직접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인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말과 뒤이어 나오고 있는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이 말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이라는 뜻이며,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니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신앙의 확신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완전히 무상으로 무한히 베풀어 주실 수 있는 풍요로운 분이시라는 의미에서 그분만이 온전히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은 완전히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현이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힘인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4,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행할 수 있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자신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 곳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다’거나 ‘선하시다’거나 ‘친절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내주는 사랑이시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며 그분과 친교를 이루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12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유진선 신부




몇 년 전 사자를 모델로 하여 만든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한 부부가 동물에 미쳐서 아프리카에서 숱한 동물을 기르다가 사자새끼를 얻어 기르면서 인간이 지닌 애정을 쏟게 되었답니다. 인간의 애정에 의해 성장한 사자는 원래의 자기 본연의 난폭한 야정(野情)을 잃고 자비스런 동물로 변하였습니다. 두 부부는 어느 날 사자를 산으로 쫓았습니다.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고 동물의 제왕(帝王)으로 군림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부는 산으로 돌아간 사자의 행방을 찾아 몇 년 후에 다시 그 현장에 나타나서 사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때에 자신들이 기른 사자가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며 반가와 했습니다. 이 영화는 사자와 부부가 반갑게 만나는 데에서 끝나게 됩니다.


나는 그 영화에서 인간의 진실한 사랑은 난폭한 짐승의 야성(野性)까지 순화시키고 계도시킨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기적을 낳는 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도 제 궤도를 벗어나면 우주 쓰레기가 되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도 하느님 사랑의 궤도를 벗어나면 인간 쓰레기로 저주받을 인간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귀한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생명 전체를 그대로 우리를 위해 제공하셨습니다. 생명의 제공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 생명의 제공이 고통과 사망을 자초하는 일이 될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수치와 고통을 자진하여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무릎 쓰신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이 자기를 저버리고 인류를 사랑한 분을 별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식이 없는 순결한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도량과 선견이 큰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사랑, 그의 순결, 그의 이상이 모두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한가지 일에 중심 하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또 자기를 잊고, 자기의 생명이 어떠한 고통일지라도 상대를 위하여 쓰여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여기에 감격하는데 기초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참된 우리 교회의 형제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참된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에 주려 있습니다.


상점, 거리, 학교, 공장에도 사랑이 없습니다. 응당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 교회에도 있어야 할 사랑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자기를 동정하고 이해하여 주는 사랑,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생명을 나누어주는 사랑, 보고 싶어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고, 주고 싶어하는 사랑,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회 생활의 전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랑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사랑이 우리를 떠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지옥의 맹렬한 화염을 느끼게 됩니다.




성 바오로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사랑이 있음으로서 비로써 우리의 존재가 인정되고 자신이 형성되며 삶의 의의를 갖게 됩니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Ⅰ고린토 13,1-3)라고 하셨다면 우리에게 언제나 떠나서는 아니 될 것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라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꼭 닮아야 할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던가요? 예수님의 사랑은 자발적 수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평안을 구했으나 그는 홀로 눈물지었고 향락의 거리는 술과 연회에 파묻혔으나 그는 홀로 굶주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인생이 향락이라고 가르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일, 자아를 방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선을 넘는 일을 감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것이 「나」를 위하여 있는 나가 아니라 전부가 남을 위하여 있는 「나」라는 실감이 들 때에는 참된 자아의 방기(放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 자아의 방기가 자기를 잊어버리고 되는 대로 내어 맡기는 일이 아니요 오히려 고통과 고독과 곤란을 가져오는 일 일 때에 인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라 하였고 사랑은 십자가요, 희생이요,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곤란을 대신하여 스스로 취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구속의 종교를 구성하는 원칙이 될 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인간적 생명의 원칙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장차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많은 사회에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심정이 비뚤어지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고난이 참으로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할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을 주려고 하신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성한 사람은 의사가 소용이 없고 병든 사람이라야 위원을 요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사회에서 제일 불쌍하고 제일 타락한 계층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이 백성은 아직도 그리스도 교인이 지불해야 할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희생은 결코 사사로운 희생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이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기다려집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또 사랑은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남을 위한 활동이라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희생이 우리의 실생활이라야 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민중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을을 주소서.


감히 주님의 십자가를 그 만 분의 하나라도 본받겠습니다.












13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 하신 주님이신데


이규철 신부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요한 15,9-10,10).


 


요셉 신부님! 시간 좀 있으십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4) 총고해성사를 보기전 우선 서면(書面)으로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부활대축일 감사 철야피정 제1부 가르침을 마치고, 제2부감사 찬미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쉬면서 준비하고 있는데,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세실리아) 한 분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편지봉투 뭉치를 건네주셨습니다.(본인이 수원교구 안양지구 성령 쇄신 봉사회지도신부<1988. 1. 1~1994. 2. 12>로 매주 금요일 철야 기도회를 주관).


새겨서 읽어야 간신히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시작부터 19페이지 끝까지 눈물로 얼룩진 한편의 드라마 대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6.25 전쟁 후「진리가 무엇인지?」「하느님이 무엇하는 분이신지?」 내용도 잘 모르고 부모님 따라 세례를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먹고산다는 게 무언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냉담하던 중에 미신자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손(孫)이 귀한 집안이라 별별 수단과 방법을 써 보았지만 십년이 넘도록 아들이 없자, 부처님을 잘 공양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웃집 할머니를 따라 절(佛寺)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1백일 기도를 다섯 번이나 거듭하고 공양을 드렸지만, 아들은커녕 계속해서 딸만 낳게 되어, 딸 다섯을 데리고 결혼 후 14년만에 아무런 대책(보상)도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산다는 게 죄지만‥‥ 일방적으로 시댁에서 쫓겨나, 딸 다섯을 데리고 먹고살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고, 못해 본 일이 없습니다. 산다는 게 죄였습니다. 연탄불을 피워놓고 딸 다섯과 함께 동반자살을 할까? 하였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종합진단을 받아 보았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제 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좋다는 약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어 보았지만, 시름시름 아프더니 끝내는 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워 꼼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단식기도원에 가면 고친다고 하는데‥‥ 살려 준다고 하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단식기도원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마음에 거스르는 것은 열십자로 만든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가물가물거리는 추억입니다만, 십자가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던 것 같은데‥‥「왜 여기 있는 십자가에는 사람이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을 박아 놓거나 손과 발을 묶어 놓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고, 천주교에서 나무 십자가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상(像)을 붙여놓는 것은 우상숭배요 미신행위이기 때문에, 우리 예배당에는 나무 십자가만 세워 놓는 것리라고‥‥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주 어렸을 때의 천주교 성당, 성당 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그 모습만은 간직하고 살았는데, 우상숭배라니‥‥ 하루 이틀 시키는 대로하다 보니, 1백일이 훨씬 지났습니다.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몸은 쇠진되었고, 누워있으면 천정이 빙빙 도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어서 나에게로 오라」고 손짓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죽기 전에 고향에 있는 성당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큰딸을 오라고 해서 사정사정하여 고향 떠난 지 50년만에 다죽어가는 몸으로 찾아갔으니 반겨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물론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성당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가보니, 성당 앞에 두 팔을 벌린 예수님과 그 아래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시오」(마태 11,28)라는 말씀과, 그 옆에 성모님이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상이 친정 어머님처럼 반겨 맞아주었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미소를 지으시며「어서 오라」고 하신 소리에 깨어 보니, 십자가 앞에서 울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날이 마침 10월 3일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로 성인전이 제대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옥에서라도 주님을 더 사랑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곳에 뛰어들겠습니다」(소화 데레사)라고 하신 성녀의 말씀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뭉클」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요셉 신부님! 십자가의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기보다는 제 자신의 빈 가슴과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서 물에 빠진 사람이 허무적거리듯이 한 평생을 살아 온 제가 감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염치없습니다만‥‥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고 하셨는데, 눈오는 날 강아지처럼 사방팔방 온 마을을 헤매고 다녔으니 감히 하늘을 바라볼 수 없고, 십자가의 주님을 뵈올 염치가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저를 모르시지죠? 한 달 전부터 이웃집 할머니와 철야기도회에 나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맨 뒤 구석에 엎드려 울다가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불안도 없어졌고, 걸어다닐 수도 있을뿐만아니라 밥도 지을 수 있고, 간단한 집안 청소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종일 우는게 일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찬미성가집)












14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조순창 신부




오늘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쳐야 할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신자 가족 여러분들이 주님의 제단 앞에 경건히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을 젖혀놓고 나왔으니, 일 주일간 가장 값진 시간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선 길이기에, 더욱 뜻 있는 한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을 찾았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이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뽑았습니다.”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시어, 한 무리를 이루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정과 교회와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도록 간접적으로 섭리하십니다. 특히 우리가 모두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서 살도록 부르셨으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명하면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다정한 벗으로 부르셨으며, 이렇게 기쁘고 복된 소식을 널리 전파할 복음의 사도로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에 만일, 너무도 자주 우울하고 실망의 상태에서 살아가거나, 마치 서로 헐뜯고 분쟁을 일삼으려고 태어난 듯이 남을 악하게 보며 살아간다든지, 하느님을 무자비하거나 무기력한 분으로 느낀다든지, 신자이면서 생활의 모범이나 말로써 복음을 전할 줄 모른다면, 진실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요, 사랑한 다는 것은 ‘참 행복’일 것입니다. 반대로 소외감 속에서 고립되어, 사랑을 줄줄도 모르고, 사랑을 누구에게 받을 수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상태는 참 불행 일 것입니다.



사랑은 천국을 이루고, 고립은 지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 자체요, 성부․성자․성령의 3위는 사랑의 공동체요, 3위가 서로 사랑으로 일치되듯이, 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서로 사랑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이것이 나의 계명입니다.”(최후의 가르치심)



마음과 마음의 상통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며, 서로 공감하여 이유나 조건 없이 소중한 것을 줌으로써 사랑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보다 교회나 국가나 민족을 위한 봉헌은 더욱 장한 일이며, 보람된 일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매우 숭고한 것입니다. 」


그러면,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목숨을 스스로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만일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앞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빌며, 더 큰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은혜 받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많이 바쳐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성의껏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업인 복음 전파와, 신자 성화를 위한 본당 발전과, 교회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고, 활동하고, 정성으로 헌금하는 것은 사랑의 표시이며,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신자끼리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내어서 대화하고, 서로 위로와 격려를 하며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사랑의 표시로 나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맺어 주신 부부이니, 맞지 않아도 불행이라고 생각지 말고, 주께서 주신 십자가로 알고, 서로 성의껏 져 주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모는 자녀를 고루 사랑하되, 지나친 과잉 보호가 아니라, 사랑의 책망으로 이끌어서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헌신하는 것이 사랑의 표시입니다.




친구나 어른께 서로 친교를 가지며, 내가 가진 학식과 기능으로 , 내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며, 그 대가로 살아가되, 타산적인 생각보다 ‘내 생활 자체가 바로 사회에 기여하는 봉사직’이라고 자부하며 충실히 일하는 것이 사랑의 표시입니다.


한번 사는 인생, 내 하느님, 내 교회, 내 가정, 내 사회, 내 직분, 내 사업에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헌신하는 보람을 거둡시다.


“많이 뿌린 사람이 많이 거둘 것입니다.”












15            부활 제6주일 <요한 15, 9-17>(나)   서로 사랑하여라


최영철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온통 사랑에 대한 메시지로 차 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인간 서로간의 사랑이 그것이다. 사실상 인간 생명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인간 삶은 짐승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생명의 뿌리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의 본질 그 자체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그 사랑의 현실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존재양식에서 말씀하고 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신 하느님이 사랑 안에서 하나이듯이 사랑의 삶에서 비로소 우리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사랑의 삶을 살지 않을 때 거기에는 참다운 생명이 없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삶에서는 그 가진 것이 재앙이 되고 만다.




고부․형제간 재산 싸움




며칠 전 신문에서 재산 다툼으로 얼룩진 한 가정의 추태를 볼 수 있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고발했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고발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또한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서로 고발해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추태 중에 극치이기도 한 이러한 싸움은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않게 터지는 싸움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재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인간 삶의 바탕이 무엇 인가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지식이든 간에, 그 바탕에 사랑의 정신이 없는한 비극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인간다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를 위한 희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사랑의 삶은 계명이란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에는 깊은 의무가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흔히 자기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인간의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해야 할 너에 대한사랑은 의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의무라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삶의 가치라는 보상  


사랑의 계명,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는 말씀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 ‘싫다’라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만약 인간의 사랑이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해석된다면 동물적 사랑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러한 풍조 속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책임질지 모르는 성관계, 그것이 가져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낙태의 현실, 성적 유희를 위한 인격적 파탄 등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계명’이라는 도덕성이 상실되는 한 우리의 이 사회는 생명을 상실한 무리들의 집단체일 뿐일 것이다. 이러한 집단체는 너와 나와의 관계, 가정, 직장, 사회, 그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사랑의 삶’은 계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 남편, 내 자식, 나의 친구, 더 나아가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의 삶을 만들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희생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나를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존재케 할 것이고 나에게 삶의 가치라는 보상을 할 것이다.












16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최익철 신부




예수님은 원수였던 우리를 종으로, 또 벗으로까지 드높이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 이 벗은 또 얼마 안 가서 “형제”로 승격됩니다. 밑도, 끝도, 조건도 없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입니다.



같은 상이라도 주는 이 따라 그 보배로움이 다르고 같은 여자라도 그 남편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집니다. 같은 죄라도 상대자 따라 그 경중이 다르다면 사랑 역시 주는 이 따라 그 무게가 다른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는 사랑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받는 사랑이고 우리를 당신의 배필로 삼아 동등한 상대로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호세아 2;18)




그리고 자신의 그 참혹한 죽음도 부족해서 언제나 당신 살과 피로 길러주시는 그 사랑을 우리만큼 받는 피조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요한 15;12)하신 것처럼 성부께 받으셨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은 어떠해야 할 것입니까? 그 대답은 또한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만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고 아들 예수님은 목숨 다 하도록 그 뜻에 따르셨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말씀이 또한 <서로 사랑하라>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사랑을 위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남이 땀 흘려 나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항상 받는 것에만 익숙해온 우리는 남을 향한 내 마음은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이 내게 향한 마음엔 매우 엄격합니다. 그것은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첫째가는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하시고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39, 마르 12;30-31, 루가 10;27)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사랑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요한 15;13)이라 하셨습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또는 <벗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 놓는 것> 그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몸소 우리에게 실천해 보이시면서 따라 오라 이르시니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기를 쓰고 따라야겠지요.



우리는 입으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곧잘 되뇌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뿐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가고자 하는 이에겐 아주 쉬운 길일 것입니다. 내가 버려둔 이웃이 주님께 극진히 사랑 받는 존재이며 그 이웃 속에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그 이웃에게서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합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벗어나 외톨이가 되면 어디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사랑 받고 있고,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눈이 떠지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토마스의 <성체찬미가>에서 펠리칸이라는 새가 나오는데 이 새는 자기 새끼들에게 먹이가 아주 없을 땐 그 주둥아리로 자기 배를 쪼아 피를 내서 먹인다고 합니다. 본능적이긴 하지만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자신을 희생시키는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러나 핏줄이 이어지지 않은 어느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지요?


예수님의 벗도 못되고 벗만도 못한 종도 아닌 오히려 원수인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목숨을 내 놓으셨으니 그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I 요한 3;16)라고 하였습니다. 목숨을 내 놓아야 할 정도라면 갖고 있는 재물이나 시간과 노력쯤 제공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그런 것들을 주님을 위해 내 놓는다면 얼마나 영광이며 보람이고 또 하늘에 보화를 비축하는 것이니 얼마나 큰 다행스러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인색하고 몰인정하였습니다. 남에게 주면 큰 손해를 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대의 노상에서 이해타산도, 조건도 없는 사랑을 나누십시오. 내 이웃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결국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 앞에 갖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우리의 사랑을 구하시는 주님을 못 알아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구원은 나 하나만의 구원이 아니기에 주께서 베푸시는 사랑도 전체 안에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일치하는 변화된 삶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궤뚫어 보고 ————-(Ⅰ고린 13;1-3)












17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나) 서로 사랑하시오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이야기




  오늘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예수, 신앙인 사이의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받은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계명으로 예수께서 실제로 가르치신 행동원리입니다. 이웃 사랑의 극치는 벗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보다 위대한 이웃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면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친구가 되는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열매를 맺는 길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예수께서는 거듭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적 근본개념을 ‘사랑’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요한 15,9).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이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요한 15,9-12).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께 받은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온전히 이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벗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고 예수께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에 값없이 참여하게 된 인간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 곧 예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요 그리스도인은 포도가지라 했습니다. 따라서 포도가지인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농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이는 그리스도인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달라붙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 하겠습니다.












18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나)   사랑의 기쁨




오늘 복음말씀은 지난 주일의 복음말씀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부분으로, 이미 나왔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더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머물다」(7-10절;교 47.7절)라는 말과 「열매를 맺다」(16절; 비교: 2.4.5.8절)라는 주제어가 오늘 복음말씀에도 나온다.




오늘 말씀에서 새로운 점은, 예수께서 하시는「내 안에 머물라는 말씀이 결국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라”를 뜻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그냥 단순히 “내 사랑 안에 머물라”,“내 계명을 지켜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앓고, 매번, 당신의 예를 들고있다는 점이다.


즉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라는 말씀이 놓여 있고,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다.




그리고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계명」을 주는 말씀에는 앞뒤에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즉 앞에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고, 뒤에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렇게 하여 생명까지 내 놓으시며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제자들의 「친구(형제) 사랑」의 근본동기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큰 질문이 하나 제기될 수 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으로 되어 있다(요한 15,12; 참조 13,34).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 “명령”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사실 이 질문은 오늘 복음 말씀에뿐 아니라, “최고 계명”이 무엇이냐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도「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참조: 마르 12,28-34).




사실 「사랑」은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자유」로운 행위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사랑」이란, 진정한 의미의「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오늘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여기서 우리는「계명」이라는 단어를 구약성서의 오랜 전통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의 기본줄기라고 볼 수 있는「계명」이 본디는 「열 가지 말씀」(deco-logoi→Dealogue)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십계명은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신 다음에 주신 「말씀」이었다(참조: 출애 20,1).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서 베푸신 자유에 잘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셨던「말씀」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계명」의 근본정신은, 결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얽어매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계명」은「사랑」을 전제로 한「말씀」이었다. 이런 넓은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도 이해되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인간적 체험들도 생각해 보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즉 사랑하는 상대의「뜻」앞에서 일종의「의무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고 자유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는 이미 그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보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실행해야한다」.바로 이「실행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계명」이라는 말이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특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른 계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사랑」이다. 오늘 복음은「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께서 고별만찬의 자리에서 당부하실 만큼, 그렇게 간절한 예수님의「뜻이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상호 사랑”은 그보다 먼저 있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더 나아가「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다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사이에 오가는 충만한 사랑이 넘처 흘러,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흐르고, 그것은 또 제자들(믿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 세상 곳곳으로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랑 안에 머물라”고 우리를 요청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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