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제 1 독서 : 이사 42,1-4. 6-7
제 2 독서 : 사도 10,34-38
복 음 : 루가 3,15-16. 21-22
해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받으시는 세례도 바로 그분의 구원적 사명을 계시해준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커다란 공현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현사상의 연장으로서 세례 축일을 공현 축일 다음에 즉시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였던’(마태 2,11)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초대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의식 속에 들어 있었던-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이 예수의 세례를 통해 확실히 그리고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점에 공관 복음의 전승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도 전하고 있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의 근본적 중요성이 있다(마태3,13-7 ; 마르 1,7-11 ; 루가 3,21-22 ; 요한 1,29-34).
뿐만 아니라, 백부장 고르넬리오에게 전도하였던 베드로의 담화내용(오늘의 제 2 독서)에서조차 예수의 세례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읍니다”(사도10,37-38). 여기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다만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이루어졌다는 연대기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 세례를 통해 나자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신학적 의미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즉 요한의 세례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특히 예수께서도 친히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자, 그러면 신약성서의 전승 가운데 그렇듯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깊이 살펴보자.
이 점에 있어서 오늘의 제 1 독서-이사야에 의한 네 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 가운데 첫째 노래를 전해주고 있는-는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 3,22)라고 울려퍼진 그 소리는 명백히 ‘야훼의 종’을 상기시켜준다. 이사야 예언자가 42,1에서 하고 있는 그 표현-“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은 정확히 말해 신비스러운 야훼의 ‘종’에 관한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에게서 이사야 예언이 총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명백히 알아본다.
그러므로 오늘의 제 1 독서를 다시 신중히 읽어본다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에 최상의 권한을 부여받아 세상에 널리 선포되는 그분의 메시아적, 구원적 사명의 윤곽이 미리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제 1 독서 참조).
여기서 첫 번째로 고찰해야 할 점은 그 ‘종’과 야훼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관계다. 만일 그 종이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까지도 그를 통해서만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만큼(6절)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명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야훼께서 그와 맺으신 친밀하고도 유일한 관계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야훼께서 그를 ‘믿어주고’ ‘기가 꺾이지 않도록’ ‘손을 잡아 지켜주고’ 그를 ‘뽑아’ 마음에 들어하였으며 그에게 당신의 ‘영’(1절) 즉 힘과 빛을 항구히 주시어 그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때 부딪치게 되는 무수한 어려움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굴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의 사명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가 ‘성실하게’ ‘온 세상에 펴게 될’ ‘바른 인생길’(1.4절)은 법적 의미에서 말하는 “정의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예언적 사명이다. 그는 ‘만국의 빛’이 되어(6절) 모든 사람들-이교도들까지 포함해서-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할 것이다.
하지만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은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기를 요구한다 : 그래서 그는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줄 것이다”(7절). 그러한 변화는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치유로 메시아에 의해 초래될 근본적 ‘쇄신’의 증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기까지 할 것이다(6절).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와 같은 그러한 표현들에 담긴 풍부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요한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태생소경의 치유사화(9장)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이와 같이 메시아는 위대한 사명을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야기시키기 위해 소란을 피우지 않고 겸손되이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구원될 수 있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려 애 쓸 것이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할 것이다”(3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염려와 세심한 배려, 그리고 희생과 자신의 봉헌이 필요하다. 그러나 메시아는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사명 앞에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꺼져가는 심지를 되살리고 부러진 가지를 단단히 결합시키기보다는 잘라버림으로써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될지라도 말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예언이, 참으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시지만 그런 사실들을 널리 알리지 못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행동을 통해 입증됨을 본다. 가난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그를 믿지만 율법학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한다(마태 12,17-22).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보다시피, 야훼의 종이 장차 맡게 될 사명에 대한 이사야 예언은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있지 않다.
루가에 의한 오늘 복음(3,15-16. 21-22)은 내용상으로 보아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위대성과 더 나아가 신성의 신비를 강조하여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점이 결코 그리스도가 ‘야훼의 수난받는’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케하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오늘 복음의 사상적 배경도 이사야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 예수의 세례는 분명히 메시아를 드높이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 예수의 세례는 분명히 메시아를 드높이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겸손’(스스로 낮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늘 복음은 명백히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 부분(3,15-16)에서는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였던 백성들에게 하는 요한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반드시 오실 그분이 자기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그분이 베푸실 더 유효한 세례 즉 ‘성령과 불로’베푸는 세례를 통해 입증하며 선포한다. ‘성령’은 메시아가 사람들을 세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믿는 이들에게 쏟아 부어주는 창조적이면서도 쇄신적인 힘을 암시한다. 그리고 ‘불’은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정련되듯이(시편 12,7 ; 19,11 등 참조)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화작용만이 아니라 선과 악을 결정적으로 구분시켜 주는 종말론적 의미도 암시한다.:“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루가 3,17).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세례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둘째 부분(3,21-22)에서는 예수의 세례에 대한 루가복음사가가 특유의 묘사 내용을 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요한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예수께 전적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보다 ‘더 훌륭한 분’이 비록 다른 죄인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낮추시지만, 이미 와 계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루가 3,3)였다. 여기서 예수의 행동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가 실질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을 취하고자 하는 긴장된 내용은 사람들에게 쇄신의 여정이 ‘겸손’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제시해주고자 한다 : 우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잘못과 고통의 짐을 느낄 수 정도에 따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랑의 행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 순간에 예수의 머리 위에 성령의 임하심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메시아는 그를 가득 채웠던(이사 42,1 ; 11,2 참조)하느님의 영의 현존 덕분에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자신의 사명을 시작하고 마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의 세례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마태 26,28참조)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긴 여정의 시작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세례’를 수난과 죽음이라고 한다:“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50).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후의 ‘세례’까지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성부께 받아들여진다.:“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 위에서 살펴본 이사야서의 내용이 우리에게 입증해주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 내어주는 행위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시켜준다. 그러므로 예수께 대한 성부의 특별한 사랑이 예수를 모든 사람들과 결합시켜준다.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특별히 사랑하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우리를 더욱 사랑하게 하신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루가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21절)일어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기도에 관한 주제를(루가 3,16 ; 6,12 ; 9,28-29 ; 22,41참조) 특별히 성령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루가의 현저한 의도를 다시 한번 파악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녀에게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는 아버지의 예를 들어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신뢰심을 갖도록 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3)사도 행전에서도 성신 강림절에 성령을 기다림과 기도를 연결시키고 있다:“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사도 1,14;4,31참조). 성령은 겸손과 기도의 강렬한 원의를 통해 기다리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루가복음사가는 주님의 세례에 내포된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또한 ‘성령과 불로’(16절) 이루어져야 할 그리스도교 세례의 내용에 대해서도 밝혀주고자 한다. 즉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 세례란 각자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자신이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 봉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훼의 종이 되도록 성령께서 각자 안에 이루어주시는 ‘변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세례는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봉헌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가 우리 안에 이루어주는 ‘친자관계’의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한 그 세례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가치 즉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그러나 또한 성령이 그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확고한 힘을 통해 이루러 오신 ‘하늘 나라’에 속하고자 하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사건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