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 1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 1 주일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제 1 독서 : 신명 26,4-10


제 2 독서 : 로마 10,8-13


복   음   : 루가 4,1-13




해설


“그리스도교 교회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심행위를 거행하고 있는 날들 가운데 빠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은 없다. 왜냐하면 빠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제일을 거룩하게하는 원천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가 받은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빠스카 축일을 지냄에 있어서 신적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 40일간의 단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교드, 사제들, 부제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모든 신자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온전히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을 기초로 하는 하느님의 성전은 구석구석 돌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답고 밝게 빛나야만 하기 때문이다”(성대레오 교황). 교회의 교부시이며 위대한 교황이신 이분의 말씀 가운데는 오늘 우리가 시작하는 사순절 전례주기의 엄숙한 의미와 또한 그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을 총체적으로 표현하시게 될 빠스카의 변모적 ‘선물’의 충만성에 합당하게 참여하는 데 필요한 정화와 준비의 긴 여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오늘 전례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서 대목들은 그리스도적 빠스카라고 하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의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특히 적합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오늘 전례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서 대목들은 그리스도도적 빠스카라고 하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의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특히 적합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우선 신명기에 의한 제 1 독서(26,4-10)를 보면, ‘첫 결실’ 즉 야훼께서 마침내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8절) 당신 백성을 인도해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9절) 약속의 땅에서 얻은 첫 결실을 봉헌하는 기회에 이루어진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전해주고 있다(5-9절).


이러한 봉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양육을 위해 필요한 것을 비롯하여 가지고 잇는 바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그들이 살았던 ‘땅’조차도 지극히 높으신 그분의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해 다른 백성들로부너 빼앗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땅의 첫 결실을 제단 앞에 바치는 순간, 봉헌자의 입을 통해 나열되는 ‘구원의 역사’에 관한 빠른 서술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서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을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26,5-9).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라는 표현은 열두 부족의 시조인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조를 아람인이라고 했다(창세 25,20 ; 28,5 ; 31,20. 24). ‘떠돌며 사는’이라는 말은 유목민이라는 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광야에서 길 잃은 양처럼(예레 50,6 ; 에제 34,4. 16 ; 시편 118,176에서도 같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루가 14,4-6도 참조)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한 자의 모습도 뜻한다.


이 대목은 사순절을 중심으로 해서 볼 때 특별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 같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벗어나 헤매던 오랜 유랑생활 끝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심으로써 행복한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둘째, 억압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우성을 치자 야훼께서는 ‘표적과 기적’(8절)을 행하심으로써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리다. 압박을 당하며 비천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비탄에 젖어 하소연하는 그들의 항변까지도 그분의 선물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항변을 조장하시어 도움을 간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응답하신다.


사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를 당신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그분께 도움을 간청하며 의탁하는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아주 적절한 개념들로써 설명한다. 그는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를 빠스카에서 찾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로마 10,10). 이와같이 고백은 비록 내적으로(마음으로)하는 신앙고백이지만 공동체 앞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적으로(입으로)하는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로는 성세 때의 신앙고백 예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신 사실과 비교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보다 위대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구원행위를 들어높이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쳐부순다. 여기에서도 문제의 열쇠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해방을 갈망하며 구원의 필용서을 절실하게 느껴 하느님께 호소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로마 10,13 ; 요엘 3,5 참조).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도 구원을 향한 우리의 여정 자체와 구원을 간청하는 힘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그분의 선물만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움직임 자체와 열망까지도 다 그분의 선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순절을 구원에 대한 간절한 원의와 염원의 시기로 재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구원의 여정은 사도 바울로가 제시한 바로 그러한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신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만일 그러한 신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애써 하는 고행은 사도 바울로가 조금 앞에서 말한 유다인들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심보다는 한갖 자기 만족의 표현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 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로마 10,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우리는 예수와 사탄과의 극적인 만남을 묘사하고 있는 루가에 의한 오늘 복음(4,1-13)을 통해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순절은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켜 ‘말씀’의 호소와 보다 비밀스런 사건들을 통해 이해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케 하는 시련과 유혹의 시기다.


여기서, 우리는 세 공관복음의 내용을 비교하면 즉시 부딪치게 되는 예수의 유혹사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역사비판학적 문학 특성에 관한 엄청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는 광야에서의 예수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만 세 가지 유혹에 대해서는 하나도 전하지 않으며(1,12-13), 마태오(4,1-11)와 루가(4,1-13)는 유혹의 순서에 있어서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다는 등등의 사실을 깊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오늘 복음을, 사순절 체험을 중심으로 깊이 생각하며 읽어 나가도록 이끌어주는 몇 가지 근본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있다.


우선 첫째 내용은 루가에게 있어서 그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 즉 ‘수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그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걸쳐 계속되는 유혹으로 이해도니다. 사실 루가는 마태오와는 달리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롤 광야에 가셔서 사십잉ㄹ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셧다”(4,1-2)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4,13). ‘다음 기회’한 분명히 ‘수난의 때’를 말한다. 그 때 악마는 유다의 배반(루가 22,3)과 그리스도를 거슬러 육체적 폭력과 탄압의 지휘자로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제 너희의 때가 되엇고 암흑이 판을 치는 때가 왔구나”(루가 22,53)하며 예수께서는 동산에서 그를 잡으러 온 군인ㄷ르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탄이 능란한 솜씨로 예수를 전복시키려 애쓰는 ‘유혹’의 특성을 잘 알려주고 잇다. 사탄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주장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하여 보시오…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3.9절)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유혹사화는 예수께서 성부의 ‘사랑하는 ㅇ아들’이라고 엄숙히 선언되었던(루가 3,22)세례의 장면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사탄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그분의 역할을 승리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전락시키려 한다. 이와 같은 유혹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괴롭히고 있으며, 군중들과(14,15 ; 19,11) 같은 고향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로부터조차(10,20) 집요하게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비웃는 자들이 거의 대항할 수 없는 폭력으로써 마지막 유혹의 조소를 던진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23,35). 군중들은 광야에서 사탄이 한 유혹의 말들을 글자 그대로 반복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유혹은 예수께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어 생활의 계획을 보다 더 쉽고 안일하게 실현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들의 원의에 맞추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고 격력하게 사탄이 야기시키는 무서운 유혹이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그리고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싡자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모범을 통해 원하셨던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기대에 맞도록 들어높이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들을 맞추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고 있는 사탄의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께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성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을 충실히 못박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탄의 유혹을 쳐이기시기 위해 계속해서 성서 말씀에 의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4. 8. 12절). 이것은 변증법적 논쟁이나 세밀한 주석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식별력에 딸라 행동하고 판단하고자 하시는 명백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말씀’은 그 배후에서 그 ‘말씀’을 존재케 하는 최고 ‘절대자’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흠숭하고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느 사순절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즉 그 말씀을 경청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실한 계획에 따라 우리의 생활을 변모시켜 나감으로써만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편의주의적 그리스도교 사상-하느님보다느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더 애쓰는(갈라 1,10참조)-의 집요한 유혹을 쳐 이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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