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부활 제 2주일 강론모음(가해, 나해, 다해 공통)


부활 제 2주일






        1. 정종표 신부(가)/2                        2. 유재국 신부(가)/4


        3. 최경환 신부(가)/6                        4. 조순창 신부(가)/8


        5. 강길웅 신부(가)/9                        6. 민병섭 신부(가)/11


        7. 홍금표 신부(가)/13                      8. 함세웅 신부(가)/15


        9. 부활의 의의/18                   10. 팔일후에 예수께서 오시다/19


        11. 토마스의 변신/20                        12. 서울주보/22


        13. 최인호/23                         14. 함세웅 신부(나)/25


        15. 김영국 신부(나)/27             16. 권이복 신부(나)/30


        17. 최종수 신부(나)/32             16. 김영진 신부(나)/33


        17. 강길웅 신부(나)/35             18. 최영철 신부(나)/37


        19. 과연 우리 하느님/38            20. 서울주보/38


        21. 박정미 수녀/40                  22. 김정진 신부(다)/42


        23. 함세웅 신부(다)/44             25. 김몽은 신부(다)/46


        24. 강길웅 신부(다)/48             27. 김신호 신부(다)/50


        28. 신은근 신부(다)/51             27. 김동춘 신부(다)52/


        29. 함세웅 신부/55                  30. 이규철 신부/57


        33. 유영봉 신부/59                  34. 김영남 신부/61


        35. 강영구 신부/63                  37. 정말 주님이십니까/66


        38. 공동체 정신/68                  39. 사도들의 부활선포/70




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당신들에게 평화 있기를


정종표 신부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어야 함을 인식시킨다.




“마리아여,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부활 미사 부속가). 이 말은 사도들이 그들에게 황급히 달려온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진 물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여읜 제자들의 답답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신 것을 아직 모르고 슬픔과 근심에 떨고 있던 사도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캐물으며 자신들의 불안으로부터 헤어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대답하기를 “나는 보았노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과 부활하신 자의 영광을!”(부활 미사 부속가) 하고 기쁨에 넘쳐 말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 한 마디 말은 그들의 부활과 의혹을 씻어내 주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들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시어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요한 20,2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오 보여 주신 그의 양 손바닥과 옆구리로 부활의 증거이지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그리스도의 인사, 즉 그리스도의 평화도 부활의 증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평화는 부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기다립니다. 평화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으로 고백하는 삶은 자연히 평화의 분위기를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외적인 평화와는 다릅니다.




열왕기 하권에 보면 「므나헴」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기원 전 743년부터 737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정권을 쥔 사악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 백성의 적인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입하자 은 천 달란트를 「불」이라고 하는 아시리아 왕에게 지불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에 의하면 “아시리아 왕이 돈을 받고 이스라엘 땅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돌아갔다”(2열왕 15,20)고 합니다(2열왕 15,17-22).




그러니까 「므나헴」의 뇌물로 이스라엘의 외적 평화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평화를 위해서 「므나헴」은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했습니까? 「므나헴」은 돈으로 얼마간의외적인 평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평화, 마음과 영혼의 평화는 아무리 많은 재력이라도, 또한 아무리 강대한 권력이라도 살 수도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냥 무상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에게 “평화가 당신들에게” 하시며 인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화가 손과 옆구리의 상처와 고통으로 산 귀중한 것이라고.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그리스도께 대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요청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평화를 위해서 분투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믿음과 희생적인 삶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사랑의 흔적인 그리스도의 못뚫린 손바닥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완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인간인 한에는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남을 탓할 것 없이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내롭게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찬 인류는 사도들과 같이 우리에게 “크리스챤이여! 너희는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묻습니다. 또한 토마스 사도처럼 손바닥과 옆구리에 손을 대 보자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불안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부활을 증거하여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보았노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과 부활하신 자의 영광을!” 하고 대답하며, 우리들 각자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지니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용감하게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를 대신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고, 이 믿음의 깊이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빌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유재국 신부




제1독서 : 사도 2,42-47


부활의 교리




부활은 나자렛의 예수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그의 교회인 공동체를 낳게 하였다. 부활부터 교회는 부활 사건을 통하여 강생한 하느님의 아들의 신비에 대한 전적인 계시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기 시작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살아 계신 분이다. 예루살렘의 나약한 공동체를 그의 창설자에게 연결시키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교회가 바로 주님의 연장이며 가시적이고 항구한 공동체로 드러났다. 교회는 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직무를 계승하고 드러내기를 원하였다. 첫째로 복음을 선포하고(Gerigma), 둘째로 홰해를 위하여 일하며(diaconia), 셋째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탄생한 새로운 집단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Communio).




예루살렘의 교회는 새로운 도시의 표지가 될 것이며, 보다 많은 사람들을 성부께로 인도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게 할 것이다. 이미 교회를 통하여 구원된 인류의 모습을 식별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결코 젊음을 상실하지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재산을 공동소유로 하며, 함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을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성체성사)




제2독서 : 1베드 1,3-9


본 일이 없으면서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축복의 찬미가로 시작되며, 아마도 성세 성세의 전례와 관련되는 것이다.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던 ··· (1,1) 우리 초대 신자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분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구절이 베드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3년 동안이나 보았다. 그런데도 그의 사랑은 형편 없었다. 베드로는 아직도 호숫가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베드로 너 나를 사랑하느냐?” 또한 닭이 우는 소리도 그는 듣는다.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요한 20,29).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신자의 마음은 보다 절망적인 시간에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 세례 때 받은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복음 : 요한 20,19-31


그분은 부활하셨는가?




토마에게 나타난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은 의심의 동기를 극화한다. 초대 교회도 예수 부활을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의심을 품었다. 구원의 역사의 중심적인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토론되고 있다. 90년경에 적은 요한 복음서는 육체와 물질의 가치와 실재를 부인하는 도쎄 띠스타의 사상을 겨냥하고 있다. 이성적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예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증거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말씀의 육화는 하나의 사실이며, 육화된 예수는 부활한다. 부활한 예수는 귀신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며, 육체가 없는 생물도 아니고, 우주에 날아다니는 존재도 아니다.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다. 신비가인 요한은 예수의 육체를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초교론적이지만 이 사건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이야기는 모든 세대를 통해서 “보지 않고 믿는다”는 유일한 자세를 깨우쳐 준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힌 육체는 아무도 모르게 연화된 것이 아니다. 나자렛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는 같은 인물이다. 부활 주일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요한이나 바오로에게 있어서 “나”라는 용어는 전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영과 육이 분이하지 않은 한 인격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서상에 나타나는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로서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발현에 대한 이야기에서 보면 복음사가들은 부활한 예수의 육체를 지적하지만 아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문이 닫힌 채 드나드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선택한 자들에게만 계시되신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신다. 예수께서 다락방에 나타났을 때 빌라도나 가야파는 예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앙은 “그분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 핵심에서부터 발전하는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한 복음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난 예수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사도 토마스의 외침과 주님의 축복은 요한의 그리스도론을 결론짓는다. 그 목적의 하나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도 믿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현존하시며, 오늘도 부활의 표지인 성사를 통해서 현존하신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 외침 속에서 요한은 육화된 말씀의 신비를 굳게 확인하고 있다. 이같은 확인은 복음서 서언을 연장하는 것이다. “말씀은 하느님이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교회는 주님에게 이같은 흠숭을 드리고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계속된다. 교회는 부활의 자녀들을 계속 낳는 어머니인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영광을 우리는 그렇게도 믿지 못하는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라고 선포하는 용기가 왜 부족한가? 예수는 수난 전에 하느님이었다. 부활 후에 그분은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며 사람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다.












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참된 신앙


최경환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이며 사백주일(卸白主日)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2천년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명을 준수하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굳게 믿으며,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왔고, 또 이같은 구원의 성사를 주 그리스도께서 구원 성업을 완성하신 부활 대축일 전야에 거행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원죄) 통회하고,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 영혼의 결백함과 아름다움을 뜻하기 위하여 흰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부활 제 2주일인 오늘, 그 흰 옷을 벗는 예식을 함으로써, 죄와 불의가 난무하는 이 사회에 다시 뛰어들어, 그 안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온갖 죄악과 불의와 마귀를 거슬러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영세자들이 세례 때 입었던 흰 옷을 벗는다 하여 오늘을 사백주일이라 하였고, 이미 영세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세례 때에 하느님과 약속했던 굳은 신앙과, 세속과 마귀를 거슬러 싸워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를 새삼 새롭게 하면서 특히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반성하기 위하여, 사도 토마스의 불신앙에 대한 성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20장 19절부터 31절 사이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모시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왔고, 또 많은 기적을 보아 왔던 토마스 사도의 당돌하고도 어이없던 불신앙에 대하여 들려주고 계십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고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그리스도께 직접 배웠으며, 수많은 기적과 영적을 보고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의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엄중한 꾸중을 들어 마땅한 것이었으니 “토마스! 나를 보고야 믿소?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생명의 법전인 복음서를 갖고 있고, 2천 년 교회 역사가 증명한 구원의 진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또 부활의 진리를 굳게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석연치 않은 불신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영생에로의 진리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시점에서, 토마스의 불신과는 그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손가락을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 했지만, 우리의 불신은 “나는 내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출세케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우리 집안을 잘 살게 해 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농사를 잘 되게 해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우리 아이들을 시험에 합격시켜 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불신은 이 세상의 행 불행에 두고 있어서, 우리가 세례받을 때의 서약과는 위배된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의 불신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부조리와 죄악과 불신 풍조가 난무하는 사회의 여건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마귀의 온갖 유혹이나 세속의 허무함을 단호히 물리쳐, 하느님만을 섬기고, 하느님께로만 가겠다고 굳게굳게 서약한 세례 때의 약속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2천 년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이 증명해 준 영생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또 세례 때에 오직 하느님께로 가겠다는 욕망과 열망 때문에 조건 없이 발했던 굳은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준엄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마태오 25,41). 오늘 우리는 세례 때의 결백함을 뜻하는 흰 옷을 벗는 사백주일을 맞이하여,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과 우리의 불신앙에 대하여 잠시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불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오직 영원한 생명과 끝없는 기쁨을 얻기 위해 조건 없이 맹세했던 세례 때의 서약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굳고 굳은 믿음으로 영복과 영생의 문을 향해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복음적 삶을 살아야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조순창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는 축제 기간중인 오늘은, 요한 복음을 통하여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성령이 계시고, 사죄권이 있음을 강조하며, 아울러 토마의 신앙으로 우리의 믿음을 다지게 합니다.




하늘같이 믿었던 스승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은 절망과 허무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사형에 처한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을 때에 뜻밖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이 때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야 비리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확인하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시고, 죄 사하는 사죄권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내 눈으로 보고야 믿겠다’고 한 토마가 끝내 보고야 믿는 것을 보시고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믿음의 소중함을 확신하고, 또 다지게 하여 주십니다.




이런 말씀은 첫째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쁨과 평화와 희망의 모습을 제자들이라는 ‘공동체’ 안에 보이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나, 오늘의 모임과 같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은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 안에 새생명으로서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신 것이요, 오늘도 교회에서 ‘세례와 고백성사로 사죄받을 수 있다’는 이 점은 죄 많은 우리에게는 희망이요, 회심하고 사죄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 되고 ‘구원된다’는 것은 크신 사랑과 은혜입니다.




셋째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의 신앙 고백은, 보고 믿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난 확신을 말하며, 그것은 삶의 새로운 변화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하느님을 기적적으로 목격했으나,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새 개종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어도, 새 삶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사에 서로 믿고 두터운 사랑으로 뭉쳐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같이 모두 부러운 새 모습의 생활을 했고, 신앙을 지키고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시오, 성령이 우리 생명이심을 믿는다면, 믿는 이답게 새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거운 바위를 깨고 살아나셨듯이, 나를 싸고 있는 이기심과 배타주의의 껍질을 깨야 하며, 파벌과 독선의 벽을 깨야 하며, 미움과 욕심의 탈을 벗어야, 새 생명으로 부활한 모습으로 사죄와 기쁨과 평화 안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도, 기업가도, 정치인·교육자·군인·학자·근로자도 복음 정신으로 변화되어, 부활의 신비 안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복음으로 삶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민족 구원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믿으면 행복, 의심하면 불행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42-47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았다) 


제2독서 베드 1,3-9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커다란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생각과 원대한 포부가 있기 때문에 지금 오늘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오직 있다면 그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뿐입니다.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허무요 절망입니다. 오로지 죽음이라는 어둠을 향해서 걸어가는 불쌍한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모든 것을 부수고 깨뜨리며 뺏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이 도둑이요 강도이며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죽자 죽음의 세계가 일시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뚫고 지나가시면서 죽음 속의 어두운 휘장과 모순을 벗겨 주셨는데 거기에는 부활이라는 놀라운 세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죽음은 결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인생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비굴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분이 열어 주신 세계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토마가 의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토마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확실하고 분명한 성격이 우리 맘에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사실 이 말씀 앞에서 비굴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땐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으며 기도를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도 믿지 않습니다. 믿는 신앙인 안에 불신이 가득 들어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어떤 형제가 집에서 막내로 귀여움만 받다가 군대에 왔는데 자기 형이 마침 육군 대령이라 더 편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형에게 떼를 썼습니다. 그러나 형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군대에 들어왔으니 고생을 배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더 힘든 전방부대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형의 남자다운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형을 미워하고 부모를 원망하더니 한 달도 못 되어 이북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으며 형은 장군이 될 시점에서 군복을 벗게 되었고 부모는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불신들이 자신을 망치고 이웃을 망치는지 모릅니다. 믿으면 편안하고 행복한데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운 지옥을 살게 됩니다.




어떤 형제가 의처증을 가지고 있는데 눈으로 못 봅니다. 매일 얻어맞고 지내는 부인도 불쌍하지만 더 비참한 것은 의심하는 본인 자신입니다. 하루 종일 그가 하는 일은 마누라 의심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쓰레기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는 실로 절망이며 아무리 잘살고 잘먹어도 허무요 불행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주님만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있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은 머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이웃으로 튀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라는 단어가 그런 것들입니다. 이해와 용서라는 말들도 그렇습니다.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서 버려진 인생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며 ‘꽃동네’에서 죽어가는 이들 곁에 참 사랑을 쏟고 있는 봉사도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레지오나 빈첸시오를 통해 서 숨은 봉사를 하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며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끝까지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 안에서 빛나는 인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모릅니다. 믿으면 실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남들이 봉사와 사랑을 하거나 말거나 제 고집대로 살겠지만 믿는 이들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 때문에 진정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 때문에 손해보고 우리가 또 혹 믿음 때문에 잃었던 것들이 있다면 부활의 새벽에 몽땅 다 찾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도록 합시다.












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토마 사도의 불신앙


민병섭 신부




  오늘의 복음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파스카 축일 당일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과 그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는 부분이며(19-23절), 둘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다른 사도들의 말에 대한 토마스의 불신 부분이고(24-25절), 셋째 부분은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심과 토마스가 신앙을 고백하는 부분이며(26-29절), 마지막 넷째 부분은 요한 복음의 결론과 저술의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30-31절)이다.




  첫째 부분은 자체의 신학적, 문학적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더구나 요한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여러 개념들의 상징적인 내용들을 분명하게 규명해 줄 정도로 충분히 묘사적이다. 이 구절은 특히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처럼 들린다.




  요한은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지 않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불안해하며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제자들의 두려움과 은둔,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극복하시는지가 묘사되고 있다. 두려움과 은둔의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 계시게 만들며, 부활절 평화의 인사를 하게 한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세상의 생명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된 위대한 세상의 화해가 이 평화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고통받으심으로써 성취한 평화이며, 고통과 죽음으로써 처음으로 성취해 낸 평화이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온 평화이며, 예수님께서 극도로 고조된 갈등에 연루되어 이루어진 평화이다. 이 극도로 고조된 갈등을 성서는 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소외, 갈라짐, 자신과 이웃으로부터의 은둔 등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부활이라는 승리는 본질적으로 모든 갈등을 이겨내는 궁극적 승리인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발현에 이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시는 행위, 곧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파견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그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파견과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완수할 힘으로써 성령을 부여하신다. 성령을 주시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수여는 죄의 용서라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부활의 핵심으로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의 부활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참된 화해와 평화를 주셨으며, 이 평화는 온 세상에 삶이 새로운 기점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다.




  둘째와 셋째 단락은 토마스의 불신앙과 관련된 대목이다. 요한은 이미 부활 사화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곧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은 부활 발현에 무조건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받던 제자는 단지 빈 무덤만을 보고 믿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직접적인 확인을 요구한다.




   그는 ‘믿는다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보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달리 물리적인 시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나 예리한 지성의 도움이 필요 없는 내면 깊은 곳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감각적인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의 요청은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여드레 뒤에 나타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자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이라고 예수님께 가장 완전한 신앙 고백을 한다. 이 신앙 고백은 초대 교회 전례에서 사용하던 신앙 고백 형태의 재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의 신앙이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 안에 포함된 행복은 결코 얻어 누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요한은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다행스러운 조건에 있었던 독자들과 또한 같은 조건에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을 쓴 목적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복음 전체의 결론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데 대한 이야기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요한은 자기의 글로써 우리가 토마스와는 달리 완전한 신뢰로 믿을 수 있고 또한 믿어야 하는 사도적 증언을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하느님의 현존


홍금표 신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문제는 나쁘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문제가 없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다 문제를 가지고있는 것이 문제의 참된 속성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공동체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런가 하면 참된 신앙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그 문제와 더블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신의 존재」문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경우에는 이해되는 듯도 하지만, 그러나 삶의 위기의 순간 다시 한번 질문해보면, 또 다시 의문부호를 붙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인 것이다. 필자도 역시 살아가면서 이 같은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위로를 받은 체험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경남 진주에 한 양로원이 있는데, 그곳을 신부가 되고 나서 얼마 후 방문하게 되었다. 봉사자들의 모습과 노인들의 모습, 그리고 역한 약 냄새와 노인들의 냄새가 그곳의 첫 인상이었다. 어떻든,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 갈 예정으로 잠을 청했지만, 건물 곳곳에 배어있는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 간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광주로 떠나게 되었다.


 


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양로원에서의 짧은 20시간 정도의 생활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눈에 스쳐 지나가는 모습은, 낮에 환자 노인들의 오물을 치우는 한 수녀의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까! 나는 단 하루도 살기 힘들어 잘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화가 나서 새벽녘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며, 오물을 치우면서 가지 웃고 떠들을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무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때 그곳 봉사자들의 모습 속에, 하느님이 함께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똑같이 더러움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그 역겨움과 더러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인간적인 의지로만 이겨내려 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쳐버리고 말리라. 아마도 하느님이 그들을 변화시켜 주지 않고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생활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후 그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늘날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봉사자들의 모습을 통해서일 것이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토마 사도의 이야기이다. 토마 사도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라고 고집하고, 결국 예수님을 뵙고서야「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토마 사도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어떤 이들은 토마 사도를 의심이 많은 사람, 또는 보고야 믿는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람,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과 같은 사람 등, 특별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활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토마 사도는 항상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때로는 의심과 회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마 사도의 “나는 그분의 상처를 보지 앓고는 믿지 못하겠다.”란 그 말은, 단지 그분의 상처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기보다는,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고 싶다는 절규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바로 토마 사도의 이러한 소망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때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뵙고,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 점이다.




그 하나의 가능성을 1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 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하느님 현존의 간접 증거였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분명 모습과 방법은 달리 할지라도, 그분의 현존을 보여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여겨졌고, 그 하나의 해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봉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희망의 길


함세웅 신부




오늘의 전례는 오래 전부터 새 영세자들을 위한 주일로서, 성세 때에(부활 전야) 받아 입었던 횐 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주일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독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사도 2,42-47)는 사도행전 1, 2장의 요약과 같은 내용으로 초기 사도교회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지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모두 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② 서로 도와주며 ③ 빵을 나누어 먹고 ④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2,42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이웃을 돕고, 기도해야 하는 신앙인의 실천적 사명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거짓말을 하여 죽음의 벌을 받은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이야기(사도 5,1-11)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표현으로서 하느님을 감히 속여서도 안되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는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어서 재산의 공동 소유와 공동 생활은, 바로 사랑과 친교의 생활을 가리킵니다.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서 ①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행위와 ② 미사 성찬례 때 행해지는 영성체를 동시에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한마음이 되어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은 야훼께서 머무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그 곳은 유다의 전 역사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바로 그 성전이 이제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백성의 사랑과 삶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현장은 구체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본당입니다.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성당,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모시는 성당, 또 기도를 바치고 사랑을 나누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당, 나는 진정 이 성당, 이 본당, 이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아니, 그저 무심히 왔다 갔다 하는 의무만을 채운다는 생각으로 부담감을 덜기 위한 형식적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늘 성전(聖傳), 즉 전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나는 도대체 누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사도들이 전해 주고 초대 신자들이 생활한 그 전통, 죽음을 무릅쓰고 지킨 로마 박해시 대하의 순교자들의 신앙, 또 이 땅에 복음 전파와 그 증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 우리 성당의 주보인 김대건 신부님, 나는 이들을 알고 있는가. 나는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이들이 살았던 그 삶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진정 이들의 전통을 지니고 그 전통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삐 뛰고 있는가 등등….. 꼬리 없이 물어오는 이 모든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숙고하며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을 음미해 봅시다. 그리고 되씹어 봅시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지향했던 그 이상(理想)의 세계-그것이 이미 예수 부활로 실현된 바로 이 현실에서 가능한 사랑의 공동체-를 향하여 달음질치며 ‘한마음’이 되어 봅시다. ‘너’와 ‘나’와 한마음이 되는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제 2독서( I베드로 1,3-9)는 제 1베드로 서간의 말씀으로, 사도 베드로가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새 입교자들이, 불의에 당한 박해와 수모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더욱 실감 있게 들려지는 내용입니다. 그 서두는 ‘하느님을 찬미’하자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신앙인들의 인사는 하느님의 찬미입니다. 신자들이 편지를 쓸 때, 또는 인사를 나눌 때 ‘찬미 예수’ 또는 ‘주의 평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도들의 서간에서 따온 말로서, 깊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함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구체적으로 재현됩니다. 그 때문에 영세를 새로운 탄생, 영신적 탄생, 영혼의 탄생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한 번 받음으로 끝나는 예식이 아니라, 거듭 거듭 새로 나야 하는 연속적 삶으로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오는 그 과정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고 되돌아온 그 믿음의 아들에게는 월계관이 주어집니다. 그 월계관은 더 이상 지상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천상의 은총이며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


도 망쳐지지 않고 원수들에게도 짓밟힐 수 없으며, 잠시 지나갈 이 시간도 시들게 할 수 없는 불멸의 월계관입니다. 그 보증이 또한 하느님 자신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희망을 안고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기쁨, 기쁨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의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바로 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슬픔과 시련, 고통, 안타까움, 유혹, 절망, 답답함, 허탈감이 짓누른다 해도, 눈보라와 먹구름, 천둥소리 그 뒤에 늘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듯이,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을 이를 깨물며 이겨내고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패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결코 운명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적 난관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맞서는 신념의 사람입니다. 지쳐 쓰러질지라도 그는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의 스승 예수님이 이러한 길을 걸으셨고, 피땀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바치며, 그 쓴 잔을 치워 주셨으면 하는 인간적 간구에도 불구하고 대답 없는 하느님,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잃지 않으셨듯이, 그도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당한다는 것 어려운 고뇌를 안고 있다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훠꼴라레(Focolare)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Chiara Lubich)은 “고통,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 그것은 곧 기쁨의 얼굴입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십자가의 길 제13처의 성모님의 고통스러운 모습, 그것도 곧 기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미켈란겔로가 조각한 삐에따(Pieta)상의 성모님 모습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기쁜 웃음 띈 모습과, 죽은 이들을 안고 울고 있는 성모의 모습을 동시에 나타낸 작품으로, 이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기쁨과 고통, 그것은 같은 실체의 양면성입니다. 그것은 수난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일깨워 주는 필연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그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보지 못하면서 희망을 거는 힘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구원은 미래의 것뿐 아니라 신앙으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은 신앙의 항구성 및 불변성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깊은 의미를 오늘의 복음(요한 20,19-31), 불신의 토마가 신앙의 토마로 옮겨지는 장면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오늘의 복음 말씀을 절정으로 하여 끝맺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요한은 12제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비록 배반하고 떠나갔지만 12지파와 함께 전 인류의 보편성을 암시하고 제자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대명사이기에, 이런 12란 수자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드레 뒤란 표현은, 바로 1주일 뒤를 가리키는 것으로, 초대 교회의 모임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매주일 공식적으로 모인 사실을 일러 주는 전례의 초소이기도 합니다. 토마가 예수님을 뵙고 고백한 내용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표현은 바로 헬헤니즘 문화권에서나, 이스라엘 구약에 있어서의 전능하신 야훼께 주어진 칭호로서, 신학적으로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당시 로마 황제가 지니고 있었던 그 칭호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한 초대 교회의 공동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고백은 신앙인인 나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하여 죽으신 예수님,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공동체 안에서 전해진 가르침에 따라 신앙 안에서 살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내적 평화입니다. 그가 평화를


지녔을 때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고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보이지 않는 이 주님을 애덕과 사랑의 실천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한마음이 되어 모일 때,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며, 내 이웃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그러한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 가족, 형제뿐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형제 자매에게서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과 평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9.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부활의 의의




다가온 봄철에 부활 축일을 맞이했다. 온갖 생물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분이 죽어 계실 리가 없다. 살아 계셔도 늙으실 수가 없다. 생명 자체시고 청춘 자체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이시니 마르거나 시들거나 쭈그러드실 수가 없다. 청춘은 젊음이요 젊음은 또 아름다움이다. 주님은 청춘 자체시니 젊음 자체시고, 아름다움 자체시다. 부활도 그 때문에 하신 것이다. 주님은 죽어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무덤에 묻혀 있거나, 더구나 썩으실 수가 없다.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첫 강론을 들어보자.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사도 2,27-28).


청춘과 젊음과 아름다움에서 자연히 기쁨이 생겨나 이제는 부활하셨으니 다시는 죽으실 수가 없다. 이제는 우리에게 더 많은, 더 풍족한 젊음과 기쁜 삶을 주시게 되었다.




그럼 왜 죽으셨을까? 남을 위해 죽는 것만큼 더 큰 사랑과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우리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고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잡으려면 죽음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있는 이가 그 죽음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












1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팔일 후에 예수께서 오시다.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이다. 온 천하는 주님의 부활로 다시 새 생명을 되찾았으며 죽음도 죄악도 소멸하고 영생과 환희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 부활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으며,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1고린 15,5-6). 이 엄연한 사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대표로서 토마의 불신앙에 대해 전해준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고 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다른 사도들이 주님을 뵈었다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복음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의 목격자들이 그것이 참되다고 증언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한낱 지어낸 이야기거나 그저 그러려니 하고만 생각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인지···.




그래서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또 당신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토마는 그제서야 의심이 풀려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부르짖었다. 어떻게 보면 강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믿음은, 오늘날의 완강한 고집을 부리는 불신의 무리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유발케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님은 토마에게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타이르셨다.




이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참으로 복된 말씀이시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참다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해 주는 것”(히브 11,1)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이란 초자연적인 광명이며,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무한한 영원의 것이다.




무한한 빛과 영원의 황홀함은 인간적인 감각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현실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려는 자들에게는 느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이미 천상의 기쁨 속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복된 자들이다.




토마는 너무나도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료 사도들의 증언만으로써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도들의 증언을 못 믿는 어리석음이여! 현세에 있어서도 이것은 되풀이되고 있다. 교회의 증언이 그것이요, 순교자들의 피와 목숨으로 증언하는 것들을 못 믿으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들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대의 이 불신앙자들에게 주님의 부활하신 현존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부활한 자로서, 즉 새사람으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새 사람이란 거룩하고 진리의 생활을 하는 자”(에페 4,24)이다.












11.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가)  토마스의 변신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고 말한다. 그것도 당당하게…. 생전에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였는데 참으로 의아스럽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았고 그 자리에 토마스는 있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토마스는 기적의 음식을 먹고 감격에 겨워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주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ꡒ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ꡓ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진심이 들어있다. 진정 그분은 평화를 기원하셨다.


평화만이 삶의 의심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의심과 평화는 공존하지 않는다. 의심은 인간의 것이고 평화는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셔야만 평화는 가능해진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주시고자 하셨다.




토마스에겐 평화가 없었다. 스승이 죽은 뒤 그는 평화를 잃었다.


그토록 믿고 따랐던 스승이었는데 허무하게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는데, 스승의 무능한 죽음을 토마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스승이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 동료들의 확신에 찬 말이 토마스에겐 혼란으로 다가왔다. ꡒ아무리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단 말입니다.ꡓ 토마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토마스의 의심은 타고난 천성이었는지 모른다. 스승이 살아있을 때도 그는 꼬치꼬치 따져야만 직성이 풀렸는지 모른다. 예수님도 토마스의 그런 천성을 아셨기에 두 번이나 다시 발현하셨을 것이다. ꡒ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ꡓ


토마스는 스승의 발현 앞에서 외친다. 더 이상 무슨 고백이 필요하랴.


그러나 토마스의 이 외침은 그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했기 때문에 토해낸 것은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확인하고 검증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토마스의 변신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복에 있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다시 한번 발현하여 주신 스승의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사건마저 외면하고 있는 고집쟁이 제자 토마스는 자신의 처지를 몰랐지만 스승의 발현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듯 의심으로 평화를 잃었던 토마스를 위해 또다시 발현하신 것이다. 사랑의 발현이었다.




사랑이 없으면 의심하게 된다. 누구라도 하느님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면 그분을 사랑해야 된다.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표현으로 사랑의 길을 고백했다.


ꡒ나의 주님, 나의 주인님이란 말이 아닌가. 당신이 바로 내가 소유하고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인님이란 고백이 아닌가.ꡓ 토마스는 이 고백을 실천하며 일생을 살았다.




오늘 복음을 접하면서 우리에겐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의심으로 멀어져 가는 평화를 느낀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다시 고백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 속에서 그 분은 우리에게도 말해주실 것이다.


ꡒ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ꡓ












1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믿는 사람의 행복


서울대교구 홍보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오늘 요한 복음은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부여하는 발현사화 (發 現史話), 예수 부활 발현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과 토마스 사도의 불신, 그리고 복음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1.발현사화(요한 20,19-23)


안식일 다음날 부활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 말씀에는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2. 예수와 토마스(24-29절)


예수께서 처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동료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소” 해도 말을 전혀 믿지 못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까지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나타나 “내 손을 만져보고 또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에페소에서 씌어진 것으로 전해옵니다. 당시에는 영(靈)적인 것만을 중요시했던 영지주의(靈智主義)의 영향으로 사람은 한번 죽으면 육적으로 부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런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육적으로도 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로고스 찬가’(1,1-18)와 부활한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생선을 잡수신 이야기(21,1-14)가 대표적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보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3. 동기와 목적(30-31절)


요한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집필한 까닭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간직한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인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아 세상에 나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 이 시대에 양심과 도덕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1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가) 평화의 푸른 지팡이


최인호 베드로 작가




톨스토이(Tolstoi, 1828-1910)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이자 사상가입니다. 그는 50대까지는 「전쟁과 평화」 등으로 작가적 명성을 누리지만 후반에는 죽음의 공포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생애를 지배했던 것은 어린 시절 형제들과의 놀이였습니다. 톨스토이는 70세가 넘었을 때 이 추억을 ‘푸른 지팡이’란 소품 속에서 회상합니다.


“내 큰형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비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밀이 밝혀질 때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고 행복하게 살 텐데, 그 비밀은 ‘푸른 지팡이’에 적어 뽈랴나의 골짜기에 묻어놓았다고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믿었지만 지금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푸른 지팡이의 존재를 믿는다.”




톨스토이는 82세에 집을 나와 시골역에서 숨을 거두고, 마침내 고향인 뽈랴나에 묻힘으로써 자기 자신이 푸른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전인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진리의 비밀은 바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예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톨스토이즘이란 사상을 낳았습니다. 이는 화내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맹세하지 말 것, 악에 대해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무저항주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형제애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세 번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의심 많은 토마스 앞에 나타나실 때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란 인사말로 시작하십니다. 살아생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주님은 자신의 말씀처럼 줄곧 평화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심으로서 유다인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는 대혼란”(루가 2,34 참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평화는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폭력, 갈등과 의심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환희로, 의심의 미망(迷妄)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찬양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참평화 그 자체이신 주님의 실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타나실 때마다 항상 우리들의 ‘한가운데’에 서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님이야말로 진리의 중심이시며 톨스토이가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참평화의 푸른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1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보지 않고 믿는 자’만이 참으로 사랑한다.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로 70년대 전례 개정 전에는 부활 8부 주일, 또는 사백(卸白)주일이라 불렀습니다. 부활 8부 주일이란 오늘 복음에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주께서 안식일 다음날(주일)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사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 다시 발현하신 것을 장엄하게 기념함을 뜻합니다. 즉 사도시대부터 이미 매주일 모여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기념한 전례 관습을 오늘 우리는 똑같이 매주일 미사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主日)이란 바로 주님의 날로 부활의 날, 주님을 체험한 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성체를 영하고, 그래서 만민 앞에 하느님을 기쁘게 증언하는 믿음의 날을 뜻합니다.




더 뜨거웠던 박해 때의 부활 감사제


유다인들과 관헌들이 위협하고 붙잡아갈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모였던 초기교회 신앙인들의 열정, 300여 년간에 걸친 모진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신앙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도 지하묘소나 어느 한 곳에 모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던 용기있는 감사제의 거행,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784년대부터 1880년대에 걸친 100년 이상의 군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킨 선조들의 믿음, 오늘의 침묵의 교회에서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있다는 사실, 아니 오늘 이 땅 이 곳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이유로 핍박당하는 소외된 계층, 잊혀진 무리들의 외로운 모임은 모두 맥을 같이 하는 수난과 순교의 사건이며, 그것은 동시에 되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임을 우리는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꼭 보고야 믿겠다던 사도 토마스 앞에 예수께서 발현하셔서 그를 부끄럽게 하시며,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5장 첫머리에 열거된 산상수훈을 진복 8단, 곧 여덟 가지 행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식은 바로 여덟을 모두 종합한 아홉 번째의 행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필연적으로 수난과 고난의 열매임을, 부활의 기쁨은 바로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메시지는 현실에 살고 있되, 현실을 초극하라는 메시지이자 초대이며 명령인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부활 메시지는 불신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서로의 사랑, 서로의 신의를 회복하고 약속에 충실하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체험, 새로 태어난 그 기쁨을 현실의 삶 속에로 이행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란 2000년이란 시간과 역사의 과정을 되올라가 사도들 중의 하나가 되어 구체적으로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의 말씀을 실제로 듣고, 예수를 만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영역을 무한히, 영원히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록 예수 시대에 살지 않았어도, 예수와 함께 먹고 걷지 않았어도, 예수와 함께 살고 지낸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부활의 기쁜 소식,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은 고통과 죽음 속에서 꿈과 희망, 미래를 갖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면서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사도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박해 시대에 쫓겨 배반했던 무리가 또한 우리 자신이었음을, 한국 초기교회의 박해시에 주교와 사제와 신자들을 고발했던 그 무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실감하고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부활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70년대 유신시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우리, 80년 광주의 형제 자매들이 무참히 살육되어 죽어갈 때 외면했던 우리, 아니 권력의 편에 서서 아부하고 부정과 불의를 국가안보, 사회안정이라는 허깨비 우상으로 정당화시켰던 그 불신과 배신을 청산하지 않는 한 부활은 결코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때문에 모이고 또 모이고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때 예수가 우리들 가운데, 역사 한가운데, 삶의 현장 한가운데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부활 신앙은 허구적이며 껍데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부활 신앙이 가능합니다.




예수는 그 시대의 가장 억울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조작된 여론에 의하여 국사범으로, 종교범으로, 정치범으로, 선동자로 몰린, 그래서 사형에 처해진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약한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 그가 누구든 억울한 자, 굶주린 자, 약한 자, 쫓기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면 그가 바로 또 다른 예수라는 사실, 여기에 바로 예수의 근본 교훈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나눔과 희생이 없는 믿음의 허구


오늘의 제 1독서는 사도 4,32-35의 말씀으로 사도 2,42-47의 말씀과 함께 초기교회 공동체를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표현 그대로 공동체, 공동 소유입니다. 기쁨과 슬픔도, 기도와 감사도, 사랑과 우정도, 재물과 음식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동체니, 부활이니, 믿음이니, 예수를 말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제 2독서인 요한 1서의 말씀은 예수의 생애를 고백을 통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믿음, 사랑, 계명 준수, 세례, 수난, 증언, 진리, 성령 등 그리스도교의 기본 명제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들입니다. 그것은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언제나 확산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폐쇄적이며 안주적인 삶은 신앙의 삶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삶은 성장되며 부단히 변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상승의 삶이며 이것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폐쇄적 안주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비복음적입니다. 개방적 신앙이 많아질 때 그 사회 공동체는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예수의 두 발현 장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토마스의 불신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워하며 나는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토마스다’라고 고백하고 자인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눈에 보이는 것에,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 앞에서도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하며 수락할 수 있는 자세와 기도가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크리스찬은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에게 예수는 오늘, 더욱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고 네가 세상을 함께 이긴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믿음과 신념, 부활의 의미 속에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소서. 아멘.












1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예수님과 효주양


김영국 신부




“효주가 살아왔다.” 온 국민의 초조한 관심 속에 진행되던 한 어린이 유괴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어느 조간 신문의 기사 제목입니다.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부모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때문에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를 가져다 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신문에는 그 어린이 부모들의 눈물어린 호소가 기사화되어 실렸습니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그 유괴범들을 향해서 빨리 어린이를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냈습니다. 그 어린이의 친구들은 조회 시간에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대통령도 그 어린이를 살려서 돌려보내 주면 잘 보아주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되고 어린이는 부모와 만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아이가 내 아이도 아니고 내 동생도 아닌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비극의 단면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죄악보다도 더 고약한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생이별을 조장하는 그러한 죄악보다도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살인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은 죽음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와 그 어머니의 생이별은 비록 며칠 동안이었기는 하지만 그 기간은 죽음의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어머니의 만남은 곧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것도 결국은 우리의 슬픈 삶의 과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소망을 마구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이번 어린이 유괴 사건도 바로 그러한 예일 것입니다. 그 어린이의 마음은 아주 순박하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때묻지 않은 소망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루 속에 갇혀 몇 날 몇 밤을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다른 어느 생각보다도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그 어린이는 부모 품에 안겼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또 다시 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슬픈 것은 우리 모두 그러한 생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영원하기를 소망하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의 유대라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도 허술합니다. 같이 놀고 싶고 같이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기대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유대 속에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배신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적인 이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소망을 배신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만남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영원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부활 이야기를 살펴보면 하나의 굵직한 선(線)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갈 때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때에 제자들은 한 방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오늘 우리가 제 1독서에서 들었듯이 공동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문이 잠겨진 곳에 예수께서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은, 유령처럼 나타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던 분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시던 예수께서 사라지셨다고 하는 것은 다시 보이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 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긴 시간을 같이 여행하면서도 그분이 예수이신지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했을 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도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지 못할 뿐입니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 구절은 복음서의 결론과도 같이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함께 있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때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엠마누엘’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리고 있습니다. 엠마누엘이란 풀어 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도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어서,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서울에는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도 계시고 서울에도 계십니다.




이천 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이천 년 후에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들을 한데 모으셨듯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소망에 대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는 채워 주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우리 부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화를 조장하고 인간 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파괴하는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오늘 둘째 독서의 말씀처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믿음뿐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뿐입니다(1요한 5,4-5).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 사랑으로 죄악을 쳐 이기고 보다 큰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못자국이 깊게 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그 사랑의 상처를 우리 마음에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창으로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남은 피와 물까지도 흘리신 그 사랑의 샘을 우리 마음에도 파야 할 것입니다.












1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진정한 평화


권이복 신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내적 평화를 얻도록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구상에 직립 원인의 출현은 약 백만 년 전 신생대 제 4기 홍적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인간 즉 Homo sapiens는 약 7만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인류의 역사는 너무도 다양했고 변화가 심했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서로 싸우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 시기는 한번도 없었으며, 고도의 지혜와 문화가 발달한 오늘날 역시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20세기의 오늘은 그 싸움은 극에 달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스스로 집단 무덤을 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현재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핵 폭탄을 동시에 터뜨린다면 이 지구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족, 인종과 인종, 당파와 당파 아니 더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싸움 역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 없어 민족끼리 분단된 채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민족은 망해도 나만은 잘 살아 보겠다고 17~18세의 가련한 소녀의 얼굴과 젖가슴 속에 똥물을 뿌리고 현 집정자들은 행여나 자기의 권력을 빼앗길까봐 양심적 인사들을 감옥에 집어 넣는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 그럼에도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우리, 도대체 인류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하여 그토록 바삐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고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으며, 음란한 주간지를 보급하려고 구텐베르그는 인쇄술을 발명하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론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실제로는 불안과 파괴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안락한 생활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더욱 더욱 헤어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정치가들은 상실한 인간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무기를 자꾸만 생산하여 힘의 균형을 가져옴으로써 또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몰살시킴으로써 평화로운 지상 낙원을 건설하려 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과연 힘의 균형과 풍요한 재산이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를 줄 수 있을런지요? 인간적인 이들의 조작이 평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레엄 그리인의 소설 「권력과 영광」의 끝 부분에 지상 낙원을 꿈꾸는 젊은 공산주의자와 죽음을 앞둔 젊은 사제와의 의미심장한 대화가 있습니다. 사제를 처형하기 위해 끌고 가는 도중 젊은 공산당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제여 이제 머지 않아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모든 이가 공정하게 재산을 분배받아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지상 낙원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사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모든 이가 부자가 되어 물질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됐다고 합시다. 그러나 못 생기고 인격이 형편없는 아내를 가진 남자가 미인이고 고상한 인격을 지닌 이웃집 부인을 취하고 싶은 욕망 마저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풍요한 물질과 거대한 힘의 균형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인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이기심과 당파심, 끝없는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요한 20,20) 하며 평화를 주신 예수님은 원자폭탄이나 돈을 주시며 평화를 주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즉 평화는 무력과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룩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모든 의심을 버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9) 하며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칠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 평화는 이상이 아닌 실제로 가능한 것이며 신앙인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무상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갈망합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된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권력과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가능케 하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것으로 평화를 얻으려 함은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불안과 공포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평화를 얻는 길은 단 한가지, 부활하신 예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1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참다운 기적


최종수 신부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구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남자만 오 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의 기적은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우쳐 주기에 충분합니다.


성령 세미나 안수기도 시간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어떤 치유의 기적을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받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프랑스 루르드에는 매일 밤 수만 명이 참여하는 성모의 밤이 열립니다. 기적의 샘물에서 치유의 은사를 받기 위해 맨 앞줄에는 불치병에 걸린 수 백 명의 환자들이 침대에 누운 채 참여합니다. 그러나 불치병 환자 중 치유의 기적을 받은 사람은 1년 중에 몇 사람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기적이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을 받지 못했지만 신앙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의 확신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깨우쳐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토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 토마의 신앙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게 하는 신앙인지…….












18.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나)  토마 사도의 후예들 


김영진 신부




내가 사는 시골에도 많은 곳에 예배당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예배당에서 거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봉고차다. 우리 성당에도 낡은 봉고차가 하나 있는데, 시골에선 이 봉고차가 하는 일이 여간 고맙지 않다. 주일학교 학생을 실어 나르는 일, 공소 사람들을 모으는 일, 단체 방문하는 일등, 본당의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에, 모든 교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예배당 봉고차에는 많이 써 놓은 글씨가 하나 있다. 그것은 ‘믿음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믿는 자는 천국을 가나, 믿지 않는 이는 지옥을 간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저렇게 써 놓아야 되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해 보았지만, 한편으론 ‘시골길 여기저기를 누비는 봉고차가, 바로 나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봉고차에 써 붙인 글씨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믿음이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떠나,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단어다. 인간 대 인간, 부족 대 부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믿음만큼 영향을 끼친 단어는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인 믿음은 바로 희망이고 용기이며, 기쁨이고 생명이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절망감이 감돌고 열등의식 속에 사로잡히며 슬픔과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간 아버지가 “어휴, 시원해”하는 소리를 듣고, 첨벙 뛰어든 아들이 너무 뜨거워 튀어나오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듯, 믿는 놈이 바보라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믿음이 없는 개인과 가정, 회사와 집단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고통이 크고, 절망과 좌절 속에 묻혀 있겠는가. 믿음은, 삶을 생명력 있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불신은 삶을 죽음과 파멸로 이끈다.




시골길 누비는 “봉고차 선교사”


톨스토이의 작품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는 두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쪽 집의 닭 한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다. 이쪽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우리 집의 닭이 너의 집에 달걀을 낳았으니 가져오라”고 했고, 저쪽 집의 아이는 “찾아보아도 없다”고 했다.


결국 아이들끼리 “알이 있다, 없다”하고 싸우게 되었고, 이 싸움에 양쪽 집 엄마, 아빠도 자기 집 아이를 옹호하며 싸우게 되었다. 화가 난 이쪽 집의 아버지가 저쪽 집에 불을 지르니, 바람이 불어 이쪽 집도 타버렸다. 집을 날려 버린 두 가족은 잿더미에 올라앉아, 별을 보며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생각하고 반성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달걀 하나 때문인가? 아니다. 달걀 하나 때문이 아니라, 양쪽 집 사이에 깊이 잠들어 있었던 불신이었다.




‘불신은 인간을 교만과 욕심, 그리고 파멸로 이끌 뿐이다’라는 것을 양쪽 집 가족들은 깨닫는다.


한때 서독의 수상이었던 콘라드 아데나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믿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세상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요, 예수가 아직도 무덤에 계신다면, 세상엔 가장 가냘픈 소망의 빛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빌리 그레함 목사에게 하였다 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이며, 교육가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께 한번은 일본 신문기자가 찾아와 “선생님, 간디는 1백살을 살다 죽겠다고 하고, 또 누구는 몇 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선생께서는 몇 살을 살다 죽으실 것 같습니까?”하고 물으니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나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대답했다 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


아데나워 수상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희망이며 생명임을 믿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후에 취한 토마 사도의 불신앙적 태도는, 과학의 시대, 논리와 증거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아야 믿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야무지게 말하던 토마 사도, 그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에 대하여 “토마야,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믿음으로 출발되는 것이며, 믿음이란 마음의 문제이지, 지식과 증거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복제인간을 들먹이며 쇠고기, 콩나물, 참기름, 양주 등 가짜가 판을 친지 오래된 세상에서, 토마의 이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만 보이는 믿음의 길을 한결같이 달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가? 그러나 마른 땅에서 샘이 솟고, 고목나무에서 햇순이 나오듯,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건을 통하여 희망과 용기, 사랑과 생명을 주신다.


 


오늘도 시골길 구석구석을 열심히 달리는 선교사인 봉고차! ‘믿음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달고 쓰러진 영혼들을 찾아다니는 봉고차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주님, 보지 않고도 믿는 이가 되게 하소서”라고.












19.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믿음의 눈을 열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4,32-35 (한마음 한뜻) 


제2독서 Ⅰ요한 5,1-6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세상에 믿음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다. 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사랑도 꽃피고 도덕도 열매를 맺는 것이지, 이 세상에 믿음 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아내를 늘 의심하며 삽니다. 아내는 아주 정숙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말할 때 자기는 의처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별의별 것을 다 캐묻고 따지면서 아내를 달달 볶습니다. 신부가 중재를 해도 남편은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의심하는 사람이나 의심받는 사람이나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늘 교도소요 지옥입니다.




사람은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믿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가 믿을 때 편안하며 믿지 못할 때 모든 것은 흔들리고 파괴됩니다. 더구나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속된 말로 하느님은 꼼짝을 못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도 믿음은 언제나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는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믿음이 바로 최고의 약이며 그 자체로서 능력이었고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의심했을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엄한 심판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토마의 불신앙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요 그런 말 자체가 허구요 기만이었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토마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토마의 불신앙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만 이 믿음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요 만져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그래야 한다면 신앙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한 순간에 다 무너집니다. 기도와 선행과 희생 등도 부활이 전제된 신앙 안에서만이 가능하지, 부활이 아니라면 믿음의 모든 것은 다 허사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지막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한마디로 새로운 삶입니다. 그 생명과 그 삶의 모습은 지금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생명과 하나로 연결되면서도 존재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요한 20,11~18 참조), 엠마오로 가던 길의 두 제자도(루가 24,13~35참조), 티베리아 호수에서의 일곱 제자들도(요한 21,1~14참조)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또 다른 모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어제의 그들이지만 그러나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들입니다. 아주 지독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자주 성을 냈으며 어떤 때는 이해하기 힘든 상식 이하의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매사에 자기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사람이 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살려 줬다며 늘 감사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토마가 믿지 못했을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부활은 결코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안에서 믿음의 눈을 뜰 수만 있다면 그 세계가 부활입니다. 믿음은 우리 생애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따라서 믿으면 믿는 것만큼 행복하지만 믿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합니다.




그리고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새롭게 열어 부활의 삶을 은혜로이 살도록 합시다.












2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삶의 변화로 부활을 살자


최영철 신부




토마사도와의 만남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온통 믿음으로 인한 기쁨과 그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모습과 그 믿음을 갖기 위한 믿음의 본질을 아주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특히 토마 사도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극적인 발현과 믿음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말씀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제2독서(1요한 5, 1-6)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을 이겨내는 힘이 됨을 말하면서, 그러한 믿음의 현실이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는, 서로가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제1독서(사도 4,32-35)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전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즉, 지난주일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난 우리에게 그 부활의 현실적 모습은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의 변화이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에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그 부활은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은총일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가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믿음으로써만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안으로 보아야만 하는 우리 인간의 생활방식에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것 요구하는 현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는 감각적인 차원 이상의 것임을 토마 사도와의 만남(요한 27, 27)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적인 방법만을 고집하는 물질주의적 생활양식에서 믿음이라는 정신적 생불양식으로 넘어 갈 수 있는 인간에게 전개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의 현실이고 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인간의 변화된 삶의 내용이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고 또한 얼마나 빠른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전개되고 있는 것이 온통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를 옭아매어 그것의 노예가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방식에 의한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대해 염려스럽게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의 변화에 대해서 주저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임을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다른 면에서 경고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그 분에 의해서만 우리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는 메시지가 제2독서(I요한 5, 1-6)의 말씀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비판적인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의 내용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안에 삶의 방식을 이제 우리는 물질적인 생활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생활로의 방향전환이라면 우리는 조그마한 부분에서부터라도 시작해야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알아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한, 그래서 여태까지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것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2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과연 우리 하느님




어떤 목사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한참 하고 난 다음, 물었다. “이 다음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모두가 손을 들었다. 이어서 “오늘 저녁에 당장 가고 싶은 사람은?” 할 때 모두가 손을 내렸다 한다.




이것은 나이가 많아서 앓고 있는 할머니가 어서 하느님이 나를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리는데, 막상 죽으라고 하면 억울하다며 화를 내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오늘 당장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은 힘도 능력도 있었지만, 더구나 한창 나이에 죽으신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우리 선조들도, 오래 살기보다는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오늘 당장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죽어갔다.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시다.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 빌라도 총독에게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한 18,37) 하셨는데, 부활하리라는 말씀대로 부활하신 것이 거짓일까?


늘 하신 말씀이나 거동이 진리였고, 한번도 어기신 일이 없다면 부활은 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일까?




사도 베드로는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1-42)라고 하였다.




부활이 확실했기에 제자들은 그 사실을 증언하였고, 그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사도 5,41), 목숨까지 내놓았던 것이다. 부활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하느님”으로 알고 믿는 것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토마처럼 “의심을 버리고 믿어야 할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이 이 세상에 새 희망과 광명을, 삶의 의의를 주고, 우리에게는 재생과 영생의 보장을 갖다 주지 않는가? 한없이 기쁜 부활이여! 영원히 찬란한 부활이여!












2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발현사화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녀가신 후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동료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토마에게 알려주자, 그는 오히려 동료들을 비웃으며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이번에는 토마까지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시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야 토마는 예수님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요한 복음이 씌어진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육으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1세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다는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단사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육적으로 부활하셨음을 토마 사도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의심 많은 토마” 이야기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무관심한 태도라는 가르침입니다. 흔히들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 덮어놓고 믿는 것, 따지지 말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토마처럼 따지고 또 따지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회의에 빠지고 또 빠지고 하면서 이룩된 신앙이야말로 더 값진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얻어진 결과보다 뼈를 깍는 아픔을 겪고서 얻어진 결과가 더 아름다운 것처럼, 신앙도 의심과 회의와 갈등을 겪고서 얻어질 때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태도라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이 주는 가장 귀중한 교훈은 부활이란 보는 사람들의 차지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차지요, 보고서 믿는 것도 좋지만 보지 않고서도 믿는 이들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2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박정미 카타리나 수녀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히브 13,8).


금년 봄은 예년과 달리 애타게 비를 기다렸습니다. 황사 바람이 심했던 날, 태백선의 달리는 기차 밖은 바싹 마른 산야가 목말라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가문 날이 더해지는 동안 마당의 쑥이나 돗나물도 살이 오르지 않고, 잡초마저 더디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물 한번 흠뻑 마시지 못하였건만 차례차례 꽃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 진달래꽃들이 안쓰러웠습니다. 텃밭에 채소 씨를 뿌리고 이레 남짓 물을 주었더니 싹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수돗물로 밭을 적시기에는 산야의 목마름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도시의 버려지는 물줄기는 흙에 스며들지도 못하고 하수도로 흘러가 버리는데, 가려져서 눈으로 보지도 못합니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하는 날 아침, 함흥과 삼척지방에서 타오르는 산불 줄기가 두 가닥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조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산불이 할퀴며 깎아버린 민둥산을 배경으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폐허가 된 집터를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에 절망의 눈물이 흘렀고, 타버린 볍씨를 걱정하는 아낙네의 호소가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군부대 화약고에 불똥이 튈라, 원자력 발전소에 불길이 덮칠라 염려하는 신문 보도를 보며, ‘정치를 개혁하자 바꾸어보자 외치는 동안에, 우리는 또 안일한 자세로 깨어있지 못하였구나’ 하는 자괴심(自愧心)이 들었습니다.




유월에 남북 정상 회담이 있다는 보도가 있은 후로 기대와 쟁점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위성으로 본 한반도의 모습은 손바닥만한데, 철들면서부터 숙명처럼 익혀온 갈라진 민족의 이야기와 분단의 현실을 우리는 반세기 넘게 십자가처럼 걸머져 왔습니다. 그 무게에 눌려 신음하다 쓰러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또 그 무게를 더 무겁게 한 이기적, 파당(派黨)적 다툼은 또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오늘, 묵은 상처와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 자세로 새 걸음을 내딛으라고 초대하시는 듯합니다.


물, 불, 바람, 흙, 그 어느 것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소중히 아끼고 돌보라고 하십니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 산불 이재민이든,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이든, 북녘 동포이든 – 서로 부추기며 함께 걸으라고 하십니까. 총선거가 끝난 시점, 백성이 맡기는 정치의 힘을 겸허하게 씀으로써, 이기심을 극복하고 반목을 헐고 민족이 하나되는 새 역사를 엮으라고 하십니까.


세상을 이기신 주님,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한결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사람이 사람임을 아는 지혜를 배우게 하소서.




2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부활과 신앙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의 부활로 제자들의 신앙심을 굳게 하시려고 노력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요, 중심이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속에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므로 우리의 신앙의 시대는 시작되며 새 생명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믿음으로써 죄악과 죽음을 이기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에서 부활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하며 인사하시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을 믿게끔 배려하셨음이 역력합니다. 그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하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이제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고(요한 20,9) 믿게 되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열두 제자 중 토마스라는 사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적에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여도 좀체로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제자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을 만져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고 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하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신하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믿는 사람이 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토마스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을 굳이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신앙이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부정적 도전을 받아 왔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처음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고 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는 실증주의자(實證主義者)들이나 실험과 논리만을 믿으려는 과학 만능주의자들은 토마스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계속 믿지 않고 있습니다.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하여 가고 계획적으로 퍼뜨린 헛소문이 바로 부활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마태 28,13).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혹은 자기 스승의 부활을 열망하는 제자들에게 심리적 환상으로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부활을 신앙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부활 사건은 조금도 와전되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요, 객관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확실한 체험이 이를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외교인이나 비신자들은 물론이려니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을 그릇되이 알고 있으며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부활의 신앙이 다시 살아나도록 온갖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음은 죄악의 세력이 생명을 삼킨 것으로 일시적이나마 죽음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한 인간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믿음도 그의 죽음과 함께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보통사람들만도 훨씬 못하게 십자가 형틀 위에서 끝내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죽으셨고 무덤에 깊이 장사 지내게 되자 절망과 허무만이 남았을 뿐이며 예수님을 죽이고 만 이 세상이 갑자기 무서워지게 되어 그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도 크게 못 쉬면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망, 그들의 신앙, 그들의 용기는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 아침은 밝았습니다. 새벽이 마치 어둠을 꿰뚫고 나타난 빛의 세계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죽음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극복해 낼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쳐 이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허무함에서 그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해 주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라고 하시며 우리의 신앙심을 북돋우어 주시며 당신의 부활로 인하여 죄인인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심을 명심하고 뜨거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멘.












2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예수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공존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은 옛부터 8부 축일이라 하여 성대하게 기념하였고 특히 새 영세자들에게 기쁨과 믿음을 다시 확인시켰던 날입니다. 부활 축일은 단순히 지나가는 어떤 날의 기념이 아니고 매일 반복되는 사건, 그리고 언제나 연장되어야 할 새로운 의미를 주는 사건이기에 참으로 되새겨야 할 그러한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부활의 사건과 삶이 지니는 반복과 연장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는 사도행전 5장의 말씀으로 초기 교회의 특징을 말해주는 세 번째의 요약입니다. 첫 요약(사도 2,42-47)과 둘째 요약(사도 4,32-37) 그리고 오늘의 제 1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초기 교회의 생생한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바로 그리스도의 반복이며 연장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곧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묻혀야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과 그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가르침은 모두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 때문에 사도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하느님이 이끄시는 것이기에 이 모임의 일원이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 초반부의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이야기로, 신앙인이 지녀야 할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느님과 교회에 바치기로 했는데 그 중 일부를 빼돌리고 바쳤기에 베드로에 의해 벌을 받고 죽습니다. 그의 부인인 삽피라도 이 사실을 계속 속였기에 뒤이어 죽게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이 일화에서 우리는 신앙인이 지녀야 할 솔직성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닌 이러한 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탄을 안겨줍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그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로부터 소명을 받았기에 병자들과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치유해주며 교회를 번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도들은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어려움을 당하며 피를 흘리는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 2독서 묵시록의 말씀도 같은 맥으로 이어집니다. 묵시록은 사도 요한이 환시를 통하여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자신이 받은 소명을 확인해주며 상징적 표현이 가득한 책입니다. 요한은 공동체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며 사도로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함께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 때문에 사실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능력과 기적의 사도로서가 아니라, 환난 중에 외롭게 갇혀 있는 유배자 사도 요한을 만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역시 예수의 십자가 삶의 반복이 아닙니까? 그러나 요한은 긍지와 보람을 지니며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은 확실히 시공을 뛰어 넘습니다. 당시 법정을 갖고 있는 일곱 도시의 교회에 준 메시지는 바로 온 인류에게 준 보편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경우에 받아야 할 벌을 상기시킵니다.




요한은 메시지를 주는 사람,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두려워 쓰러졌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뵈올 수 없다는 구약의 장엄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현, 확인되고 있습니다. 야훼가 항상 계시며 전능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도 바로 존재 자체이십니다. 과거와 현재, 죽음과 부활을 함께 수용한 그리스도, 이분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긴 옷과 금띠는 예수의 사제직과 신앙인의 품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생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재음미할 때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내며 이 교훈을 또한 사랑하는 이웃에게 전해야 할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예언자, 사도, 신앙인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소명, 사도들의 소명, 신앙인의 소명은 자신의 삶, 아니 체험을 이웃에게 전승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삶을 이어받는 과정이며 집약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불신의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명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은 장벽을 뛰어 넘습니다. 닫혀진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도록 예수는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아직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시며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케 하십니다. 열 사도의 모임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토마스의 자세입니다. 자기 중심의 토마스는 공동체의 체험은 인정치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마스는 물론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었지만 곧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예수의 발현을 체험하자 토마스는 더 큰 신앙인으로 급변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신앙, 공동체의 체험을 함께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예수와의 불가분의 관계, 그 연속성을 우리는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복음을 기술한 목적이 바로 예수를 통하여 모두가 생명을 얻기 위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란, 믿음이란 모두 서로의 존재, 서로의 가치, 서로의 생명을 확인해주고 공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공존입니다. 부활은 이 공존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주는 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당신의 삶을 우리가 이곳에서 재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새 삶을 허락하소서. 아멘.












2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김몽은 신부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현실주의적으로 감각적인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았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러한 자들에 대한, 신앙의 진미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말씀을, 토마스의 불신(不信)을 통해서 일깨워 주신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한 자리에 모여서 문을 잠그고 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동족인 유다인들의 박해의 손이 두려웠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사실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그 밖의 유다 권력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슨 트집만 있으면,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 갑자기 예수께서는 문이 잠겨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자비에 넘치는 평화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 속은 의혹과 두려움이 뒤섞여 부활하신 예수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못박힌 손과,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결정적인 주님에 대한 불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열 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모든 일에 있어서 충실하고 고지식한 토마스는, 너무나도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 채 사물을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끝내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직접 주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본 후에야만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막달레나의 증거도, 열 제자의 보증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실로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한 집에 모였을 때, 그때는 토마스도 함께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문이 잠겼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결코 토마스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정을 가지고 그의 불신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기 위한 자비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신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신앙을 얻어 구원될 수 있나 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계신다. 그리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당신의 부활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증거하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진정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신자 생활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종말의 그날까지 증거하면서, 희망과 기쁨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러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쓰여진 믿음의 기초인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활에 대한 확증을 심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나 이때나 부활을 믿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 같다. 특히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될 수밖에는 없다(1고린 15,14 참조).




우리의 신앙이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 부활 신앙이다. 우리는 부활하시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도 믿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시어, 힘차게 활동하신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힘까지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마르 15,16-17 참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같으신 분”(히브 13,8)이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옆에서 우리를 타이르고 계시며, 이 세속의 법칙(이기심)대로 살며는 불행하다고 일러주신다. 오직 주님과 함께 주님 뜻대로 부활하신 주님 따라 살 때 참 행복이 온다.












2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부활은 믿음의 완성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제2독서 묵시 1,9-11a.12-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초등학교 교리반에서의 일입니다. 5학년 남자 아이가 혼자서 키들키들 웃더니만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수녀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때 천당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하여 교리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꼬마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천당은 양로원과 똑같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수녀님이 “왜?”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천당은 늙고 병들어 죽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빨 빠진 할머니, 대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들만 사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아요.”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막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고 수녀님의 교리지도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실 안이 한참 어수선할 때 조그만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하면서 나무라더니 천당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한 분도 계시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네가 어떻게 아니?”하고 대들었습니다. 이때 소녀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파띠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이나 루르드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은 다같이 젊고 예쁜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성모님은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천당에서는 살아 계실 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신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분들 생애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당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거기서 탄복을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발현하셨을 때의 성모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분명히 아주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그렇게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대전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잃었던 부분은 거기서 다 찾을 것이며 미완성이었던 모든 것은 거기서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세상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구자, 가난한 병자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산다 해도 그는 분명히 하느님 나라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 서의 삶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어떤 소년이 있는데 그는 신체적인 불구뿐만 아니라 부모가 그를 버렸다는 아픔의 상처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행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했으며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종일 엎드려 지내는 세월이지만 입으로 책장을 넘기며 성서를 보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 엉망이 됩니다. 막말로 개판이요 요지경이 됩니다. 세상은 그리고 세상 끝까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완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그러나 완성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고 미래를 닫아 놓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래서 불행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는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마만 빠진 것을 보면 그는 아마 믿음의 일을 제치고 다른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쏘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허탕을 치고 우연히 제자들에게 왔을 때 그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고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하고 자기 손을 주님의 상처에 넣어 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토마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거부감 은 오히려 그가 강하게 믿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다시 사시기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토마는 소원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소원도 성취시켜 주었습니다. 강하게 믿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우리의 갈증 을 채워 주었으며 우리의 불안을 제거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 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행복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부조리의 세상에 대한 해답이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두근거리게 기쁜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한다 해도 그 나라에서 다 보상받을 일을 생각하면 세상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따라서 정말 복되게 살도록 합시다.












2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불신의 벽을 허물자


김신호 신부




신임을 주지 못한 동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시작된 부활시기의 두 번째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부활의 벅찬 감격을 나누게 됩니다. 지금은 이름이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활주일 후 첫 번째 맞는 주일을 사백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백주일이란 흰옷을 벗는 주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부활축일에 영세한 새 영세자들이 영세 때 입었던 흰옷을 일주일간 입고 있다가 이날 벗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토마 사도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토마 사도는 여러가지 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토마 사도는 동료들이 경험한 사실이나 또는 전해주는 말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평소에 토마 사도가 동료들과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토마 사도의 태도에서 볼 때에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사도들이 토마 사도에게 그렇게 보지 않고 믿게 할 정도로 신임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건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확인시키는 효과를 오늘 복음은 내용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토마 사도가 처음부터 믿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을 그렇게 써 좋게 만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마 사도는 이러한 불신의 벽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즉시 허물어뜨렸고 거기에다 자신의 신앙고백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삶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경험 중에는 좋은 경험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을 형성시켜 나가게 됩니다.




토마 사도의 신앙고백


배움의 이론에 있어서 환경이나 조건을 유난히 강조하여 사람이 전적으로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의 방향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이 전적으로 틀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적으로 볼 때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다거나 그분을 믿는 행위 등은 이러한 현상에 머무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 없이는 부활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29.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다)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


신은근 신부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미루어 보건대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나돌아 다녔던 것 같다.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토마스는 숨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를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유대사회의 인사라고 하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겐 더 할 수 없는 위안의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비로소 잃었던 기쁨을 되찾는다.




환희에 차 있던 그들 앞에 토마스가 등장했다. 스승을 만난 제자들은 토마스를 힐책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는데 너는 어디 있었느냐. 가만히 있지 왜 그렇게 싸돌아 다니느냐는 불만이다. 그러자 토마스는 반발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나는 밖에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진정 부활하셨다면 손과 발에 난 상처를 본 뒤에야 믿겠다. 토마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너무 똑똑해서 그랬을까. 제자들은 더 이상 토마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돌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한번 더 제자들에게 발현하셨던 것이다. 토마스야,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보지 않고 믿다니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세상인데 어찌 보지 않고 믿어라 하시는가. 토마스는 스승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이다. 보지 않고 믿으라고.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스승의 말씀으로 토마스는 비로소 눈을 뜬다. 부활을 받아들이고 은총을 받아들인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 속에는 토마스의 회심이 들어 있다. 내 모든 지식과 이론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해서 토마스는 믿음의 제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가장 확실한 은총의 축일이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토마스가 말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속에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며 우리는 관리자다. 무엇보다 금년 부활절엔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란 이 믿음이 부활해야 한다. 부활은 깨달음이다. 하느님께서 내 운명과 소유와 모든 것의 주인님(주님)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이 믿음을 금년 부활절엔 토마스의 심정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의심 많은 토마스는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바꾼 것이다. 단순히 손과 발의 상처를 확인했기에 바뀐 것은 아니다. 그 정도 사건으로 사람이 달라질 토마스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가 토마스를 변화시킨 것이다. 사랑은 이론을 앞선다. 사랑 없는 교리가 냉담자를 양산하고 애정 없는 선교가 신자들의 기를 꺾는다.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다. 그런 사랑이 되살아나는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 토마스를 바꾼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라는 것이 부활 후 첫 주일의 교훈이다. 웃기지 마라. 나는 안 믿어. 그렇게 말했던 토마스였지만 스승의 발현 앞에서는 솔직하게 승복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부활의 언저리를 서성대고 있는 수많은 토마스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3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이제는 기뻐하며 따를 십자가의 길


김동춘 신부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노래한다. 교회의 십자가가 세워진 뒤로 세상은 십자가만을 보지 않고, 십자가 너머 부활을 노래할 줄 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부활을 노래한다. 아니 부활을 기대하고 부활을 갈망한다. 부활을 이해하는 데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지는 세상의 질곡으로부터의 부활은, 기쁨이고 승리이고 영광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믿게 되는가? 오늘 전례를 통해 듣게 되는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사도들을 통해 만나게 된 예수


“집 짓는 자들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주께서 이루신 일이옵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나이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오늘 제1독서 후에 노래한 시편의 한 구절이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는 집 짓는 데 필요 없다고 내버려진 많은 돌, 그래서 발에 채이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돌을 기억한다. 그 돌을 모아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시는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고 싶어진다.


 


사도들이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고 제1독서인 사도행전은 전해준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악령이 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들을 머릿돌이 되게 하는 사도들에게서 놀라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아, 당신들 사도들을 보면, 참으로 당신들이 따랐던 생전의 예수를 보는 것 같구려. 마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당신들 안에서 활동하는 것 같구려.”




이제 사람들은 사도들을 보고 예수를 만난다. 사도들 가운데 꿈틀대는 치유의 능력을 보고, 예수를 기억하게 된다. 그 치유의 능력이 세상에서 버려진 돌들을 모아 머릿돌이 되게 하는 것임을, 그 능력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대로 사람들은 사도들에게서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불신자들이 어떻게 열렬하게 스승이 살아 있다고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신다. 평화를 빌며 오신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너무나 잘 이해하시기에,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손으로 만져보라 하신다.




봄은 겨울을 잊게 한다. 때로 나의 풍족한 삶은 이웃의 고통과 가난을 잊게 한다. 개구리는 자기가 올챙이였다는 것을 망각한다. 부활의 영광은 수난의 고통에 대한 보상인가? 부활은 십자가의 상처를 깜쪽 같이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인가?




부활로써 면제되지 않는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를 기억하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부활은 십자가의 길이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보낸다.” 부활은 승리이다. 부활은 거짓과 속임수와 욕심 많은 권력과 불신에 대한 승리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의 스승이 살아났다고, 우리의 스승이 이겼다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의 팔을 높이 들어 올리셨다고, 우리를 내치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예수님의 상처는 왜 그대로 남아 있는가? 부활은 십자가의 길이 승리의 길임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걷게 할 용기를 주지,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를 면제하지 않는다. 봄이 지나면 겨울이 또 올 것이다. 그때 두려움 없이 기뻐하며 스승의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한 제자들이, 그리고 그 제자들의 공동체가 기쁘게 스승의 길을 따랐다.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들이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미리 맛보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부활의 기쁨이 없다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십자가의 길은 얼마나 고된 길인가? 너무나 무거운 짐일 뿐이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가난하지만 공동체를 꾸려가는 사람들, 아프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 쉽게 번돈 쉽게 쓰며 이웃을 기죽이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땀 홀려 일하며, 건강한 웃음으로 내일을 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런가 하면, 부활의 영광에 눈이 먼 사람들도 있을 만하다. 이제 십자가의 길을 끝장났다고, 겨울은 끝났다고, 십자가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고, 부활의 영광을 높이 쌓아가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나 바울로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까맣게 잊고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되뇌인다




안 믿는 자에게 보여 줄 십자가 상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얘기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토마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의 고집은 오히려 솔직하게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토마의 불신은 십자가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뼈저리게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대답하는 토마의 고백은 더욱 가슴을 울린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토마를 용서하시고, 또 토마처럼 불신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에 기뻐하게 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불신의 유혹에 시달린다. 믿음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면, 그 길을 먼저 걸으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무조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예수님처럼 손과 옆구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한다.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셨고, 그 다음엔 제자들이, 그 다음엔 또 다른 제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누군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예기할 수 있다. 믿으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제2독서인 묵시록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 무궁토록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계십니다.” “어떻게요?” “이렇게요!”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상처, 사도들이 베풀었던 치유의 기적, 세상이 놀라는 새로운 공동체,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만 실천하기 힘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 드러난다.




버려진 돌들이 머릿돌로 쓰이는 공동체를, 십자가의 길을 담담하게 기쁘게 걷는 교회 공동체를 보고,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날 것이다(사도 5,14).


  “집 짓는 자들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3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토마사도의 불신앙과  신앙


함세웅 신부




오늘날에도 또 다른 성 토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토마의 언행은, 우리에게 격언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의 말을 전혀 믿지도 신용하지도 않고 자신의 경험, 옹고집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토마와 같은 개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에 대하여 예수


님은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어느 때이고 시간이 되면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일이 지나서 모든 환경이 변한 다음에, 토마도 혼자 곰곰이 생각을 했고, 그 다음 또 다른 사건을 당했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발현을 직접 보고서는 옹고집을 부리지 않고 “내 주시여, 내 천주시여” 하면서 겸손되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신앙의 위기란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서에 정통하고 이론이 밝은 사람들입니다. 허무맹랑한 것을 가지고 왜 야단들이냐느니, 경험만이 논증의 근거가 된다느니, 그야말로 실증론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는 예수는, 만민의 평등을 주장한 박애주의자, 사회 정의의 구현자, 체제보다는 근본적 원리를 주장한 진리의 증언자, 결국 양심대로만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의 무교회주의의 선봉자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성서란 결국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며, 스스로 요약까지도 합니다.


 


참으로 훌륭하게 보이는 이론 전개이지만, 거기에는 바로 불신앙의 토마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유아독존 식의, 자아 집착에 빠진 노예 근성의 사고 방식이 있기에, 가엾기만 한 생각들입니다. ‘장님들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체험을 모두인 양, 악을 쓰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기에 말입니다.


 


만민의 평등, 박애를 부르짖다 죽어간 위인들이 우리 역사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훌륭한 사람들을 우리는 또 역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진리의 증언을 위하여 순교한 분을 우리는 또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착하게 양심대로 살다가 죽어간 올바른 선현들의 발자취를 우리는 또한 눈여겨 살펴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무리 중의 한 사람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예수는 그보다는 질적으로 다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까지 단정적으로 자신을 정의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구원될 것이며, 나를 믿지 않는 자는 버림을 당하리라”라고 따라올 결과까지도 단호히 언급하셨습니다. 그보다는 “나는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임무와 출신을 명백히 하셨고, 더구나 “나는 죽은 후에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다” 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더더욱 “나를 믿는 이는 죽었을지라도 부활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 보증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허무맹랑한 존재이고 성서가 우스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가르침의 일관성과 논리성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인간 중 그 누가 이렇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사람이 있었고 실천했던 사람이 있었겠느냐 하며, 우리는 역설적으로 예수를 증명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토마의 불신앙!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입니다. 그에게는 생각할 자유가 있고, 행동할 자유가 있고, 더구나 판단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불신앙의 자유까지도 존중하십니다. 절대로 신앙을 강요하거나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신앙의 토마가 신앙의 토마, 고백하는 토마로 변한 과정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다른 10명의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그 토마가, 옆자리의 제자에게 동의나 확인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 스스로 깨달았고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토마의 거부, 불신앙을 쉽게 인정하며 수긍하면서도, 토마의 신앙과 고백은 또 비웃으며 거부하는 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우스운 주인공인 나입니다. 그러나 거부하고 비웃는 나를 하느님은 역시 나의 자유를 존중하시며 나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 스스로 예수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또 다른 토마가 곧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토마를 진정 수긍한다면, 신앙의 토마도 수긍해야만 합니다. 진리의 증언자, 박애주의자 예수, 사회 정의 구현자의 예수를 인정한다면, 나는 죽고 부활하신 사람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를 동시에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3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성체를 모시지 않았으니 밥도 굶어야


이규철 신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굳게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0,26~29참조). .




「요셉이는 당당에 다녀왔으니 밥 먹을 자격이 있고‥‥」‥‥새벽 첫 닭이 울면 마을 어귀 바오로의 집 마당에는 호롱불을 든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 큰기침으로 출발 신호를 알리곤 하였습니다. (성당에 갈 때에는 항상 묵주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안성 읍내에 있는 성당 새벽 6시 미사 참례를 위한 행렬 아닌 행렬이 시작되곤 하였습니다. 호롱불(손전등<후레쉬>이 별로 없었음)을 든 어른들이 부지런히 걸어가면, 초등학생인 저는 언제나 왕복 22km(성당까지 11km)를 마라톤 선수처럼 뛰어야 어른들을 놓치지 않고 캄캄한 새벽 어두움의 무서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당 가는 길 중간에 공동묘지가 두 곳 있었음).


  비가 오는 날이나 특히 한겨울 눈이 쌓인 새벽에는 성당 가기가 싫어 억지로 눈을 감고 자는척 하면,「요.셉이는 비가 오고 눈이 쌓였다고 천당 안 갈꺼야?‥‥」 두번도 아닌 딱한 번만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경고!「성체를 모시지 않았으니 밥도 굶어야지‥‥ 」하시며, 꾀병을 부리고 새벽 미사를 궐한 동생에게 아침을 굶겨 학교에 보내시던 어머님! (점심까지 굶으라고 하셨습니다). 야속하기도 하였지만 영혼이 굶었으니 육신도 굶어야지!‥‥ 하시는 어머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옳은 말씀이니까‥‥


  「어려서부터 따라서 해 봐야 커서도 잘 할 수 있는거야?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왜 그렇게 일주일이 빨리 다가오는지,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농사일을 마치고 모이는 시간은 으례히 밤 10시가 되어야 모임) 공소 강당이나 할아버지 회장님댁에서 레지오 쁘레시디움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꼭 저와 동생을 양 옆에 앉혀 놓고, 밥이 깊어 가는 줄을 모르시고,「무슨 일이든지 자주 해 보아야 된다」고 하시며, 믿음이 아닌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 다음에 꼭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하시면서 ‥‥


  「요셉아! 일기장 가져오렴」 ‥‥ 그 바쁜 농촌 생활 속에서도, 매일 저녁숙제 검사는 안 하셔도 일기장 검사는 빠짐없이 확인하시던 어머님이, 한편으로는 야속하고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학교 일기장은 띄어쓰기와 맞춤법 정도로 끝나지만, 성당 일기장만은 꼼꼼이 확인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①「예수님 이름으로 집에서 한번, 학교에서 한 번 이상 착한 일을 만들어서라도 실천할 것과, 아침, 점심, 저력기도를 했는지‥‥ 」 어머님만의 주문 내용과 ② 「적어도 한가지이상 감사할 일은 무엇인가?」의 확인이, 40년이 지난 오늘의 사제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깊은 뜻을‥‥「아버님이 아직 안 들어오셨는데‥‥」‥‥농사일로 늘 바쁘신 아버님은 여름철에는 논농사와 밭농사, 과수원 일로 바쁘시고, 겨울철에는 사랑채에서 새끼 꼬는 일과 가마니 짜는 일로 밤늦게까지 바쁘신 아버님이, 일을 끝내시고 들어오신 후(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안 들어왔으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음)에야 온 가족이 모여 저녁기도(옛날에는 만과라고 하였는데 기도시간이 30분이상 걸렸음)와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친 후, 잠을 잘 수 있었던 어린시절의 어머님의 신앙교육과 어머님만의 믿음생활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어머님만의 신앙교육 ,어머님만의 믿음생활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나를 높이 받드는 사람이니, 올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시편 50, 23)하신 말씀대로, 구차한 농촌생활 속에서 8남매를 키우시던 부모님은「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유딧 8,25)하신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생활로 보여 주시며, 언제나 당신 자신을 등불로 태우시면서 감사하는 생활과 빈 틈 없는 믿음 생활을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마태 25,21)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늘 감사하는 생활과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토마가「의심을 버리고 나를 믿어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왜들어야 했습니까?


무슨 일이든 캐묻고 따지고 계산에 맞추는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숨죽이며 숨어있을 때, 왜 토마는 그 자리에 없었겠습니까?) 의심이 많던 토마는 슬그머니 다락방을 빠져나와, 세상 판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심 없이 어떻게 사흘을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나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고. 눈과 손으로 확인해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토마는 예수님을 또 한번 십자가에 못을 박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땀 흘리며 한 여름을 논밭에서 허우적거리듯 헤어나지 못했을지라도, 인내를 갖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여, 영글기도 전에 낫을 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야훼께 맡기면 다 이루어지리라」(잠언 16,3)하신 말씀대로 다락방 안에서 좀이 쑤시더라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얼마나 벅찬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를 드리기 위해 해 뜨기 전에 일어나 기도한다면」(지혜 16,28)하느님께서 책임지어 주실텐데, 우리는 토마처럼 너무 따지지 않았습니까? 약은 체 하지는 않았습니까? 감사하기보다는 무엇이든 더 얻으려고 애태우지는 않았습니까?「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하신 주님께 모든 것 맡겨드리며 감사의 노래(이사 12,1~6:시편 63,1~11)를 부르며 부활시기를 지내지 않으시렵니까? 12사도로 뽑아주셨는데, 하느님 자녀로 간택하여 주셨는데, 감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이만큼에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의심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3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부활 신앙을 사는 공동체


유영봉 신부




묵상 : 부활장면을 찍어둔 비디오라도 있다면, 부활을 믿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들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부활장면 찍어둔 비디오는 없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부활교리를 가르치던 중이었다. 신부님의 교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중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부활 장면 찍어둔 비디오 같은 것은 없습니까?”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찍어둔 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임마, 그때 비디오가 어디 있었겠어!”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점잖게 나무란다. 




오늘 복음의 토마사도 뿐만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은 ‘예수님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부활교리를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장면을 찍어둔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면 누구나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참으로 죽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 없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고 예수님을 완전히 ’죽어버린 자’로 여긴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자만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활을 증거하는 삶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지적(知的)인 동의인가?


이것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나는 시작이요 마침이며, 살아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지만 이렇게 살아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묵시 1,18)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부활신앙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산다”(요한 11,25)고 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때,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부활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은 현실의 욕심을 뛰어넘어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사도 2,44-45) 사도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철저한 나눔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설익은 신앙인


우리 주변엔 “나는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생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세상에 살면서 좀더 인간답게, 멋있게 살려는 것뿐이지!”하며, 신(新)세대다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무신론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사춘기적인 순수함이고,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멋있어 보이려고 진한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확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부활한 예수님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만날 수 있다


복음은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토마 사도가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토마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 발현했을 때, ‘사도들의 무리’ 안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이 두터운 형제들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교회를 떠날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 당신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3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토마 사도의 불신


김영남 신부




해마다 오늘과 같이 부활 다음 주일이 되면 으레 우리는 미사 때에 부활하신 주님과 토마 사도의 만남에 관한 대목을 복음으로 듣는다. 이 대목이 오늘 읽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 말씀 가운데 나오는「(부활하신지)」 여드레 후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오늘 주일 복음의 대목이 들어있는 요한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 의하면 토마는 한 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7)라고 용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께 대하여 굳은 확신을 갖고 있던 제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을 보면 이토록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토마가 「철저한 냉담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동료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다로 분명히 증언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상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그토록 컸던 만큼, 참혹한 그분의 죽음이 주는 충격도 그만큼 그에게 컸던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열렬했던 그의 믿음과 희망이 어이없게도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토마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 때, 즉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좌절과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부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를 찾아오시어 당신의「십자가 상처」를 만져보도록 하신다. 못 믿겠다며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는 토마에게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의 스승 예수님이 다가가시어「평화」를 선사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다가오심 자체가 이미 토마에게는「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 오셨을 때, 토마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희망을 거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승을 배반한 제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무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던 상태였다. 사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분이 고통스럽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체포했던 「유다인들이 무서워」 도망갔던 것 아닌가? 이런 토마의 비겁함, 불충실함 그리고 불신에도 불구라고 부하신 예수님은 토마에게 다가오시어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하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도 질책의 말씀이라기보다는「십자가의 충격」 때문에 잘 믿지 못하는 토마를 안타까워하며 하시는 격려의 말씀이요,「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으로 부르시는 초대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의 이런 사랑을 접하게 되자, 그 동안 얼음같이 차가웠던 토마의 불신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토마가 드디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한다. 사실, 이 고백이 뜻하는 엄청난 내용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해서 파악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할 때 토마는 이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앓고는 믿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차원으로 넘어서 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토마는 보고 만짐으로써 다시 믿게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믿게 된 것이라고 블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의 부활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죽었던 토마의 믿음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도 두려움도 의심도 절망도 넘어서서 토마에게 다가가 그를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가 많은 분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또는 주변 사람들이 토마처럼 깊은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 아프게도 우리 주변에는 한 때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분들이,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겪은 후에 예수님께 대한믿음마저도 잃고 완전「냉담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그런 분들에게 선포되는「기쁜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쁜 소식」의 출처와 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사랑에 있다. 그분들이 토마가 스스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던 처지에 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시어 그를 그 불신과 좌절의 늪에서 건져내셨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도, 무덤도, 굳게 닫힌 문도 주님의 사랑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한편 토마 사도 이야기는 토마와 같이 믿음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사람들을 신앙공동체가 관용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준다. 그리고 토마와 같이 신앙의 여정에서 「좌절하거나 냉담한 사람들」이 신앙을 되찾는데 있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라는 것도 말해준다. 신앙공동체(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현존을 깊게 체험하며, 서로 사랑하고, 특히 「좌절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한다.












35.      부활 제2 주일   요한 20, 19-31 (공통)  성령을 통한 믿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부활 제2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의 주인공은 당연히 의심 많은 토마 사도입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 사도는 감각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던 의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만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제자들조차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의심 많던 토마 사도에게는 그토록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인 증거를 요구하게 된 것이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의 불신을 씻어 주시기라도 할 양으로 여드레 후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습니다. 토마는 그 때 비로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쉽게 믿지도 않지만, 한번 믿으면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토마 사도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토마 사도의 이런 태도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 즉 오관(五官) 혹은 오감(五感)이라는 것 자체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혹은 기분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똑같은 사물을 놓고도, 사람에 따라서 흑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사람은 맛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맛이 없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좀 맛이 없는 음식도 맛이 있게 느껴질 것이고,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별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얇은 옷도 몹시 덥게 느껴지지만, 겨울에는 두터운 옷도 별로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불확실할 뿐 아니라, 잘 변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우리의 감각기능이 확실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속는 사람이나 사기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속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그리고 다짐을 받고도 속기도 하고, 사기당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지닌 감각 기능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또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감각 기능을 통하여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감각 기능은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줄지는 몰라도, 감각 기능으로 믿음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믿음은 자신의 운명과 삶의 모든 것을 바치는 행위인데,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함으로써 그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고 또 우리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해서 그런지, 흑은 하도 속으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무엇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곳곳에서 성모님이 나타났다느니,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일들을 비디오로 촬영해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이상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충격을 주어서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믿음을 가졌다면,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각 기능을 바탕으로 해서 얻게 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감각 기능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확인한 후에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순간을 불안과 근심 걱정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확실히 처리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이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사를 불신하기에 의심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하느님의 영(靈), 곧 성령(聖靈)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을 닫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믿음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하는 마음을 지니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 해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불신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아무리 눈으로 흑은 손으로 확인을 시켜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에 웅답할 때 비로소 믿음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증언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란 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은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의 사도 행전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 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효가 늘어났던 것은, 바로 신도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그 평화스럽고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힘있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의 부활 사건은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2천 년 전에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분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불신 속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증거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불신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토마 사도와 같이 주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이 주는 평화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마저도 극복하고 사는 우리의 그 삶의 모습,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서 살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3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정말 주님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살롬!」하시며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유다인들이 그 제자인 자기들에게도 어떤 해를 입히지는 많을까 두려워한고 있던 터였고, 또한 자신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의식으로 마음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제자들의 걱정과 어두움을 깨끗이 씻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잘못하고 부족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동료들의 말에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예수


님의 부활을 인정하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 후 예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이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며,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며 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긴 연(鳶)줄에 달려 하늘을 나는 연이 높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구경꾼들은 더 이상 그 연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을 날리는 사람은 그 보이지 않는 연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팽팽하게 느껴져 오는 연줄의 긴장감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 팽팽한 연(鳶)줄이 바로「믿음」인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고백을 우리도 자주 바칩니다. 미사성제 거양성체 때 우리는「내 주(主)시요, 내 천주시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뵙고 마음에 모시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줄이 생명력으로 팽팽하지 못할 때, 우리의 이 고백은 별 의미가 없는 요식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작은 도시에 별로 좋지 않은 술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를 걱정한 신자들이 모여,「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 술집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 도시를 타락에서 보호해 주십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그 술집이 불에 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술빚이 불 타 없어지도록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안 술집주인은 법원에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화재의 책임에 대해 부인을 했다고 합니다. 술집주인은 기도의 힘을 믿었는데 신자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한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 한번 더 그 실상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참으로 열심히 산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을 보면,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사도 5,13-14)고 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화된 삶, 참 생명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신앙에 대해,「먼저 보고 만져봐야만 되겠다」는 조건을 달았던 토마스처럼, 니이체가 한번은 신앙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여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래서 당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제 행동으로 내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무신론자인 나도 혹시 !?—」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수도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경종의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생명력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부활의 증인들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공동체 정신




한국인의 개별정신을 빗대어, 한국사람은 둘이 모이면 당을 셋 만든다는 말이 있다. 둘이서 하나씩 만들고 둘이 합쳐서 하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 사람들은 개인은 약한 듯 보이나 공동체로 뭉치는 것을 잘하고, 뭉쳤다 하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우린 개개인은 똑똑하고 강하나, 일단 공동체로 뭉쳤다 하면 서로 치고 받고 비난하고 결국은 서로 상처를 안은 처 헤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공동체 정신


왜 그럴까? 왜 우린 공동체정신이 부족할까? 오랜 세월 남에게 짓눌려 살다보니 솟구치는 울분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서 너나 할 것 없이 높아지려는 심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럴는지도 모른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그래서 비방과 모략이 난무하고,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어려운지 모른다.



개인의 집은 깨끗이 정리하고 살지만, 공공건물에서는 아무렇게나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이유는 공동체정신의 결여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동업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잘들 한다는데, 우린 동업은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심사숙고해서 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 또한 우리가 얼마나 공동체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 외쳤다. 그 때나 이때나 뭉치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크리스천의 공동체 정신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천은 천주교 신자를 일컫는다. 누군가가 천국 문에는 ‘단체 입장 환영’이라는 문패가 달려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신자들 중, 혹자는 혼자서만 열심히 기도하고, 혼자서만 좋은 말을 많이 하다가 하늘나라로 쑥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만 열심히 살다가 천국에 가면 그만이지 가족이고, 이웃이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천국은 개인주의자들이 가는 곳이기 보다는 함께 가는 곳이다. 주님은 함께 오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대부분은 공동체 앞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둘씩 파견하셨다.(루가 10,1) 둘이나 셋이 모여서 기도하면, 항상 거기에 내가 있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마태 18,20)




오늘 복음은 안식일 다음날 예수께서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벌벌 떨고 있는 곳에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공동체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승 다음으로, 자기들이 잡혀 갈 것이는 생각을 했었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 자리엔 토마가 없었다. 고독을 씹으며 홀로 있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설사가 심해서 집에서 쉬었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어쩠거나 그는 공동체와 함께 있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기가 차서 고지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 본 다음에 믿겠다고 말했다, 고집은 세었던가 보다.


8일 뒤 토마와 함께 제자들이 한방에 모여있을 때 예수께서 또 나타나셨다. 토마는 무안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네 손으로 만져보고 믿어라” 말씀하셨다,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며 신앙을 고백하였다. 토마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였다. 예수님은 토마의 집에 찾아가셔서 만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기를 바라셨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면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고 활동해야 한다. 즉 신자로서 단체에 가입하여 공동체로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따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우리 사회는 날로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의 발달로 암으로의 세계는 작은 나만의 공간을 즐기려는 경향이 더욱 팽배하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서 가족 공동체는 파괴되고, 교회 공동체 역시 와해될 수 있는 공산이 크다.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한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살게 마련이다. 청소하시는 분이 있어야 살 수 있고, 버스 기사님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욱이 크리스천들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천하에 모범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름답게 보존되기 위해서는 대접받기보다는 대접하려는 마음을 서로 가져야 한다. 특히 본당공동체 안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화장실 청소를 마다하지 않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손가락 끝을 튕기면서 남에게 명령하기만 좋아하고, 남에게 박수 받기만 좋아할 때, 그 공동체의 앞날은 밝지 않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께서 하나의 몸을 이루신 하느님은 공동체의 표본이시다. 사랑자체이시기에 하나의 몸이 되신 하느님을 우리 본당이, 혹은 우리 가정이 본받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계셔주실 것이다.












3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사도들의 부활 선포와 성령 체험




부활절이 되면 생각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전에 사목했던 성당에서 늘 봉성체를 모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부활절을 몇 일 앞둔 날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처럼 부활을 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나요?」 그때 나는 십년 넘게 허리병을 앓으신 그 할머니를 바라보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고통 중에서도 마치 어린이처럼 환히 웃으셨다. 그분은 그 날 내가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부활절이 되면 어린이같이 순수한 믿음을 지니셨던 그 할머니의 미소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은 바로 그 할머니의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문을 닫고 모여있었다. 유다인들의 박해가 두려워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시면서 인사를 하셨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몸이 더 이상 물질 세계의 속박에 있지 않은 영적인 몸이라는 것이다(필립 15,44). 예수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혹시 유령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님은 당신의 옆구리와 손을 보여주신다. 양손과 옆구리에는 구멍의 흔적이 있었다. 얼마 전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 받으신 상처자국인 것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유령이나 환시가 아닌 실제적인 몸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죽으셨던 스승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의 기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의 강력한 체험은 당연히 기쁜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전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의 삶이었다. 이제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부활 사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증언은 참되고 믿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으로 전 생애를 통해 주님의 부활, 즉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엔 토마스 사도가 없었다. 후에 이 소식을 접한 토마스는 부활을 부인하며 펄쩍 쥐었다.「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 내 손으로 못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며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때 비로소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알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결코 토마스를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의 불신앙을 애태우시면서 의혹을 풀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부모님이 아직 철이 덜 든 자녀를 대하는 마음과도 같이 사랑과 자비가 듬뿍 담겨있었다.


 


우리는 보통 보고, 듣고, 만지는 등 감각을 통해 사건과 사물을 접하게 된다. 특히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보는 것을 가장 확실한 증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부정확한 때가 많다. 보는 시각 능력만 하더라도 인간의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우리는 세상의 것을 다 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부활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사실이다. 부활을 증언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을 증언했다. 물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그 성령이다. 성령께서 부활을 선포하게 하고 부활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役事)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도 쉽게 믿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겸손되이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도 그 옛날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성령을 다시 내려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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