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말씀연구>
토마사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믿지 못했을 때의 모습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모습이. 나도 그렇게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19.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이쿠! 깜짝이야. 예수님 인사 받다가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유…굳게 닫혀진 문을 통과하는 영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물질적인 측면도 가지고 계신 예수님. 우리가 생각하는 시공간을 넘어서 버린 그분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하신 말씀은 “평화”였습니다.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시더니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께서 고통을 통해 성취한 평화이며, 고통과 죽음을 통해 그가 처음으로 성취해낸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이며, 예수님께서 극도로 고조된 갈등에 연루되어 이루어진 평화입니다. 이 극도로 고조된 갈등을 성서는 죄라고 부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승리는 본질적으로 모든 갈등을 이겨내는 궁극적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 성취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0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멍난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지상의 역사와 고통을 그저 흘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결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부활신앙은 세상의 고통과는 무관한 환상적 찬양이 아닙니다. 이 신앙은 불가해하고 무의미한 세상의 고통 가운데서 고통이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부활을 맞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21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이 부활의 실재속에서 평화와 화해를 기초로 삼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평화의 인사를 다시 하십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가져온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교회전체를 대표해서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권위와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22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사절은 그 사람과 같습니다. 사절은 파견자를 대리하여 임무를 수행하며, 이런 관계로부터 권한이 부여되고 동시에 파견자의 명예가 사절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최고의 사절이며 계시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맡기는 것은 제자 공동체가 그 사명을 떠맡고 예수님의 권위까지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의 길, 화해의 자세, 그리고 세족례 행위와 수난사화에서 명백하게 표현하듯이 힘과 지배의 포기 등을 수락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대리할 수는 없습니다. 즉 파견을 교회직무에 수반되는 권력의 합법적인 수여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에게 성령을 전해 주십니다. “숨을 내쉰다”는 것은 창세기 2,7절을 상기시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성령을 주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종말론적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샘영의 수여는 죄의 용서라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묘사됩니다(23절).오늘날 죄의 용서는 비교적인 개념에 속하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원래 이 개념은 삶의 완전한 정화, 새로운 출발, 그리고 과거가 말씀히 정산되어 더 이상 어떤 보상도 필요하지 않는 새로운 기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떤 마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성취했으며, 제자들의 모든 활동, 증언, 삶이 기초를 삼았던 바로 화해를 제자 공동체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용서받는 또는 용서받지 못하는”이라는 표현은 “매고, 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일반적인 하느님의 사면이며, 화해와 생명을 위한 보편적 봉헌입니다. 그런데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교회가 제멋대로 회해를 조정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 전체에 약속된 것이므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권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부활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참된 화해와 평화를 주셨으며, 이 평화는 온 세상에 삶이 새로운 기점으로 선포되고 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자 공동체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러한 은총의 보편성은, 교계제도의 힘이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면죄부를 판매하듯 영적인 무역행위가 성행하게 되면, 더 이상 보편적인 의미를 보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습니다.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5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사도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하지 못했던 토마사도와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의 접촉이 없는 나는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토마사도는 보고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토마는 참으로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손바닥의 상처에 자신의 손가락을, 창에 찔린 상처에 손을…이와 같은 극단적인 반응은 나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잠겨 있는 문을 통과하셔서 토마 사도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1주일 동안 토마는 아마도 홀로 의심 속에서 움츠리고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토마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토마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28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렇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내가 믿어야 만이 그분께서 부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결코 내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마 사도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만져 볼 정도로 의심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토마 사도가 자신이 해야 된다고 말했던 것을 행하도록 특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원하시거나, 그렇게 하려고만 하신다면 언제라도 실제적인 증거를 제시하실 수 있다는 것과, 청하는 이의 바람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에 도움이 된다면…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9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손으로 만져 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져 보라고 하시지 않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손으로 만지거나 손을 넣어 보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나를 축복해 주십니다. 나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직접 뵙지는 않았지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참된 용서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참된 용서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2. 토마의 불신앙은 다른이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나는 예수님께 뭔가를 보여 달라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마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신앙인으로서 내가 해결해야될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나눠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