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주일 강론….혼자만 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농민주일




본당에서 신자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야유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차가 사고가 나서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더듬 더듬 지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은 어디들 두드리고 계실 것 같습니까?


그런데 저 앞에 본당 수녀님이 계신 것이었습니다.


“아니 수녀님께서 여긴 왠일이세요?”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본당 신부님도 와 계세요!”


<그냥  한번 웃어 보자고 썼습니다요…>


<독서와 복음을 간략하게 넣고>


 




오늘은 농민주일 입니다.


교회에서는 농촌을 살리고,


물질 문명에 대조되는 정신 문화의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인간화 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오늘을 농민주일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농민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보았으면 합니다.




만일 형제 자매님들께 작은 텃밭이 있다면 그곳에 무엇을 심으시겠습니까?


도예촌에서 공방을 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집에 가보니 마당 구석에 작은 밭을 갈아 놓고 그곳에 상추와 고추 등을 심어 놓았습니다. 작은 밭이었는데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먹을 것은 충분히 나옵니다.


그 사람의 말뜻은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작은 것 안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텃밭에 먹을 것을 심는다면 그곳에 농약을 주시겠습니까? 안주시겠습니까?




어느 날 농민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고 후식으로 딸기가 나왔습니다.


한 형제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여기에 얼마나 많은 농약이 묻어 있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크고 잘 생긴 놈은 농약 덩어리입니다.”


그러면서 그 형제는 딸기를 입에다 넣었습니다.




이분들은 스스로 무공해 농사를 짓지만, 농약에 비료가 뒤범벅이 된 농작물을 다 먹고 있는데 나만 안 먹어 무슨 소용인가?  혼자만 건강하게 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딸기를 입에 넣었을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혼자만 열심히 산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통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지만 예전에 물통을 보면 나무판자로 만들었습니다.


판자를 여러 쪽 모아 통을 짜는데 그 크기가 다르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에 사는 나는 열심히 일해서 굉장히 높은 판자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데는, 가족을 돌보는 데는 무관심해서 다른 쪽 판자는 아주 낮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무리 물을 열심히 붓는다 하더라도 어찌되겠습니까?


물은 낮은 판자까지만 차고 절대로 더 높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농촌 사람들이랑은 상관이 없으니 수입이든 뭐든 편하고 싸고 좋은 것을 먹자. 나는 농촌사람이니 내 것에만 농약 안치면 되고 이걸 먹는 사람이야 죽던 말던 비싼 값에 팔기위해서 보기 좋게 만들자.


그렇게 크고 작게 통을 짠다면 결국 사회라는 통에 고인 생명이라는 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 스티븐코비는 “상호이익을 도모하라”고 말합니다. 혼자만 살려고 하면 같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






두 번째로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에 보니 저자는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일 중에서 창조적인 것은 농업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업은 있는 물건 팔고 사는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공업도 있는 것을 가지고 모양과 용도만 바꾸는 거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과 같이 농사도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농사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농사를 싫어합니다. 부모도 자식에게는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노동과 고역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입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역은 사람을 삐뚤어지고 잔인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의 고역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사람들은 일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들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을 변화시켜서 노동의 고역(비지땀 흘리면서 하는 노동)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아니고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니 이런 선택은 자녀들을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파괴사업에 열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아파트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프라이드가 외제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제차를 탄 사람이 차를 몰아서 프라이드를 들이받았습니다. 횡단보도에 나 있던 타이어 자국이 바로 그 외제차의 행각이었습니다. 한참일 들이받더니 차에서 사람이 내렸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경찰이 붙잡아 갔습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은 인내를 모릅니다. 남을 배려할 줄을 모릅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된 가치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먹거리를 만드신 농부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욱 힘내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 농사를 짓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병충해, 가뭄, 비 바람 도 막아야 하지만 이젠 외국 농산물까지 막아야 하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논과 밭만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세상의 틀이 잘못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서 마늘이 밀려오는데 어떻게 마늘을 심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농민들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곡식이 제대로 자라는 데 질소, 인산, 칼리의 세 요소가 필요하듯 농민이 제대로 된 온전한 농민이  땅도 갈고 자기 스스로도 갈고 세상도 갈아야 합니다. 줄기 자라는 질소만 듬뿍 주고 뿌리 튼튼히 뻗는 인산과 열매 충실히 맺는 칼리를 주지 않으면 결국 벼는 쭉정이만 달리게 됩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헨드폰 수출을 위해서 마늘을 수입한다면 그 수익금의 일부를 농부들에게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쪽만을 바라보고 다른 한쪽을 강조한다면 우리 사회는  빈 물통과 쭉정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상일도 중요하고, 나 자신의 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을 향하는 일도 무척 중요합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발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좀더 남을 생각해주고, 나 자신을 생각해보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간판이 바뀌더라도 물건이 같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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