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5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5 주일




        13. 한의수 신부(다)/ 21           14. 강길웅 신부(다)/ 22


        15. 강영구 신부(다)/ 24           16. 이상호 신부(다)/ 27


        17. 원유술 신부(다)/ 28           18. 김정진 신부(다)/ 29


        19. 약은 청지기의(다)/ 31        20. 재물은 천국을(다)/ 32




13.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 


                                                            한의수 신부




  어떤 부자 사람이 집에 관리인을 두었습니다. 이 관리인이 주인의 눈을 속여가며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러서 모든 문서를 정리한 수 사표를 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직장을 잃게 된 관리인은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재산을 잘 관리할 걸,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장부를 정리하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먼저 주인의 빚장이들을 잘 포섭해서 빚을 탕감해 준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즉시 올리브 기름 백통을 빚진 사람을 불러서 문서에 50통이라고 고쳐 쓰게 하고 밀 백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80섬으로 고쳐쓰게 하였습니다. 이같이 관리인은 자기가 살기 위해 온갖 부정한 수단을 다 썼습니다. 이것을 본 주인은 세속의 아들들이 얼마나 묘한 방법으로 머리를 써가며 재물에 욕심을 내고 있는가 하고 감탄하였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을 통해서 재물에 대한 3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십니다.


  1. 재물의 원주인은 누구인가?


  2. 그 재물을 누가 맡아서 관리하는가?


  3. 그 재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 창조하신 만물을 인간이 맡아서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재물의 본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돈을 벌어서 샀다든가 또는 자기 앞으로 등기가 난 재물이면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대신 관리해 주고 커서는 내가 하며 늙어서는 아들이 대신 관리해줍니다. 더 하고 싶어도 관리하고 있는 동안만 소유하게 마련입니다. 재물의 본 주인은 하느님이요, 우리는 그 재물을 맡아서 관리할 뿐이라는 것을 똑똑하게 깨닫는다면 재물을 보는 눈이나 재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를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과 소질을 받았습니다. 이 능력과 소질은 사용하지 않으면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사후 하느님 대전에 가서 셈을 바칠 때 ‘악하고 충실치 못한 종’이라고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쾌락에 도취되어 술이나 도박으로 허비하고 사치나 허용으로 재산을 낭비하는 것은 세속의 자식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벌어서 부당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좋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시오.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당신들은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루가 16,9). 재물을 부정하게 쓰지 말고 불쌍한 사람이나 교회사업을 도와줌으로써 공덕을 쌓아 천국에 들어갈 차비를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재물로 인해서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각자 자기 재산을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14.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자유인이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아모 8,4~7 (가난한 사람들을 돈으로 부려먹는 자들에 대한 경고) 


제2독서 Ⅰ 디모 2,1~8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기도) 


복 음 루가 16,1~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은 얘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뿌리’라는 걸작 드라마가 언젠가 KBS 제1TV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6부로 나뉘어진 긴 대작을 저는 다 보진 못했으나 흥분과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의 스토리였습니다.




주인공의 한 사람은 ‘쿤타킨테’라고 아프리카 만딩고 족의 용사의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북을 만들 나무를 구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노예 사냥꾼들에 붙잡혀서 미국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는 갖은 학대와 노동과 비참한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지만 “나는 아프리카에서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는 않습니다.




탈출을 기도하다가 발가락을 잘렸으며, 어떤 검둥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느니 보다는 노예일 망정 미국에서 문명의 생활을 하는 것에 더 큰 기쁨과 위안을 갖기도 했지만 쿤타킨테는, 인간에게는 먹는 것, 입는 것보다 더 높고 위대한 자유의 이상이 있음을 항상 잊지 않았으며, 하나밖에 없는 딸 ‘퀴즈’에게도 그 정신을 심어 줍니다.




퀴즈가 어느 날 갑자기 또 다른 농장의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퀴즈는 농장주인에게 순결을 잃게 되지마는 “네가 내 몸을 뺏았지만 내 마음까지 빼앗지 못할 것이다.”하며, 아버지 쿤타킨테가 자기 자신에게 심어 준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퀴즈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정신을 가르칩니다.




몸은 노예일 망정 마음까지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신을 생활 속에서, 말 속에서, 꾸지람 속에서 늘 심어 줍니다. 이 퀴즈가 한번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성이었고 그리고 건강하며 믿음직한 사내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만의 교제 끝에 결혼을 포기합니다.




그 남자가 경제력도 있고 믿음직하며 훌륭하긴 하지만 그 남자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완전히 묶여진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몸은 노예일 망정 마음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럴수록 이상과 꿈을 가져야 하는데, 그 사내는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매여 있는 이를테면 구제불능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퀴즈는 아주 멋진 흑인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더 길게 진행됩니다마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아무리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은 노예로 묶여지지 않고 인간의 소중한 자유의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그래서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형태의 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돈의 노예가 있고, 술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사치와 허영의 노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유를 모릅니다.




일은 고귀한 것이며 신성한 것입니다. 돈도 선한 것입니다. 술은 또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생기를 줍니다. 낚시나 골프도 마찬가집니다.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정말 살맛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불행합니다. 묶여져서는 안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소중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며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정당하게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어쩌면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하느님 위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현대인들은 핑계가 많고 이유나 변명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속성이고 그것이 바로 마귀의 끄나풀입니다. 어떤 형제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자기 아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고 또 자기 자녀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리고 겨우 돈만 주고는 자기는 자기대로 놉니다. 노예라서 그럽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 땀흘려 수고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요 숭고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묶여져 있다면 그는 슬픈 노예인 것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요 우리는 그 관리인입니다. 종이 아닙니다.


따라서 재물 앞에 결코 굽신거려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절대로 노예로 묶여져서는 안됩니다. 비록 굶는 한이 있어도 자유인답게, 자녀답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도록 합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15.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사필귀정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6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제5 지구 8개 본당이 한자리에 모여 신앙 대회를 가졌습니다. 주님 안에 한 형제인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서 한마당 축제를 벌였고, 특별히 우리 본당 교우들의 단합된 모습과 봉사는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주신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신앙 대회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본당의 평협 상임위원 여러분과 각 신심 단체장과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본당 교우 여러분의 사랑에 찬 봉사에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 모든 본당 행사에도 이번 신앙 대회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함께 협력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잠시 같이 묵상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특별히 돈과 재물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이 땅에서의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생활은 참으로 대조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활이 대조적이었던 것처럼, 저 세상에서의 생활도 지극히 대조적이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호사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라자로는 부잣집의 개만도 못한 생활을 하면서 고통 중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저 세상에서는 그 처지가 백팔십도로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상에서 가난과 고통 가운데서 살던 거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행복과 평화를 누렸지만,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아쉬운 뜨거운 유황불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해서 부자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형벌을 당해야 했습니까? 부자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까? 부자가 남의 재물을 탐을 내었습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했습니까? 아니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끼쳤습니까? 혹시 재물이 탐이 나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습니까? 흑은 남의 여자를 빼앗아서 가정을 파괴시킨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의 말씀 가운데 부자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부자는 자기 것 자기가 먹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호사스럽게 살았다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죽어서 유황불 속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부자의 잘못은 이렇습니다. 부자는 돈과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들이 자신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돈과 재물은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돈과 재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여러 가지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돈과 재물을 얻기 위해서 밤낮으로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돈과 재물에 얽매이게 되면 멸망하게 됩니다.



돈과 재물은 향락을 제공해 주는 대신에 인간을 눈멀게 합니다. 향락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인간은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여름철에 불을 향해서 날아드는 불나비들을 아시지요. 화려하고 환한 불빛에 현혹된 불나비들은 자기들이 죽게 된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무조건 불빛을 향해서 날아듭니다. 결국은 그 불나비들은 불 속에서 타 죽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혹은 사람을 직접 죽이거나 한 일이 없지만, 그는 자기 발로 돈과 재물의 늪으로 걸어가서 거기 빠져서 죽은 것입니다.


돈과 재물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상을 추구하게 되면 돈과 재물은 갑자기 죽음의 늪으로 변하게 됩니다. 늪이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일단 한번 빠지면 헤어 나을 수가 없는 곳이 바로 늪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마주렌의 늪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지요? 1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독일군과 러시아 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그곳의 지리에 정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묘하게 러시아 군을 늪 가까이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돌격을 개시했습니다. 러시아 군은 저항할 힘을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건너편에 이끼와 풀이 무성한 마주렌 늪을 앞에 두고 독일군이 뒤에서 추격해 왔습니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늪 밑에는 죽음의 뻘 밭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러시아 군인들은 그 늪을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릎까지 빠진 러시아 군인들은 거기서 걸을 수도 빠져 나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허리까지, 가슴까지 급기야는 구조를 요청하며 내젓는 두 팔만 보인 채 온몸이 늪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한동안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그 늪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마주렌의 늪은 수백 명의 러시아 군들을 집어삼키고도, 죽음의 가면을 감춘 채 평화롭게만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 돈과 재물이 주는 향락에 매료되어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아마 그 부자는 자신이 늪에 빠졌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이미 돈과 재물이 주는 향락에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파멸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한 채 파멸 당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부자는 돈과 재물이 주는 향락에 눈이 먼 나머지 인격 파탄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람, 특별히 돈과 재물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돈과 재물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선 인간이 치사해집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파렴치한 인간으로 변합니다. 더 나아가면 인격 파탄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 부자는 돈과 재물이 주는 향락에 빠져서 철저히 인간성이 마비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부자의 눈에는 자기 집 대문간에서 빵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는 거지 라자로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그는 거지 라자로를 보았지만 철저히 그의 불행과 가난을 무시해 버렸던 것입니다.


  돈과 향락에 빠진 그 부자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거지 라자로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자기 집 대문간에 서성이는 한마리 강아지 정도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웃과 형제의 불행을 외면한 인격 파탄자인 그 부자는 구제 받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부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그의 동생들을 염려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대목을 보면,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성서를 늘 곁에 두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말하자면 그가 성서의 가르침이나 율법과 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성서가 보이지 않았고, 율법과 계명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돈과 재물이 제공하는 향락과 안락에 길이 든 부자에게, 성서의 가르침이나 율법 따위는 향락을 얻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두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는 율법서와 예언서 곧 성서의 가르침을 외면한 그 부자가 지옥 불 속에서 고통 당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지척(咫尺)이 천리(千里)라는 말을 아시지요? 부자와 거지 라자로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참으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까움이 천리보다도 더 멀었습니다. 부자의 눈에는 자기 집 문간에 있는 거지 라자로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만큼 부자와 라자로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 나눔과 베풂이 없는 곳은 그렇게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자가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라자로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지만, 사실은 라자로가 그에게 물 한 방을 건네 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깊디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골짜기는 라자로가 만든 골짜기가 아니라 부자가 평소에 만들어 놓은 골짜기였습니다. 부자가 평소에 만들어 놓은 골짜기가 너무 깊고 넓어서 라자로가 고통 당하는 부자에게 물을 가지고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기도 하고 “뿌린 대로 거둔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그것들을 이기적인 향락을 얻는 데만 사용하게 될 때, 우리는 가족 사이에 그리고 이웃과 형제들 사이에 깊디깊은 골짜기,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는 이 이야기를 남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제자인 우리가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곧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돈과 재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서로 나누고 베풀고, 인간답게 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을 때, 곧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용할 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돈과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돈과 재물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변해서 인간들 사이에 가로놓은 골짜기를 메우게 될 것이고, 행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돈과 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 인간은 끝도 없이 깊은 불행의 골짜기에 곤두박질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재물에 감사를 드리면서 자유인으로서 그것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함으로 축복과 은총을 받도록 합시다. 언제나 주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6.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 


                                                            이상호 신부




사람의 기본권 중에 소유권이 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하여 자기 소유대로 만들고 그것을 생활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본래 남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얻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썼는지, 우리가 가졌던 것을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써버렸는지는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선(善)일 뿐입니다. 세속의 재물이 부정하게 됐다면 이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세속의 재물은 소유권을 따라 사람들의 수중을 오고 가면서 혹은 성스럽고 혹은 부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속의 재물을 지녔을 때 착한 목적보다 부정한 목적으로 사용할 경향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각성을 촉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아끼고 있는 모든 것이 얼마 안 가서 남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속의 재물이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될 때 우리 차지로 남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영신적 부(富)는 영원히 우리 차지로 남을 것입니다. 아무도 빼앗길 염려도 없는 내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것을 아끼고 또 자기 것이 될 것을 애써 찾습니다. 남의 것이 되고 말 세 속의 재물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면 우리 차지가 될 영신적 부를 얻기 위하여는 기도와 희생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세속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보다 진정 내 것이 될 영원한 것을 정성껏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17.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 


                                                   원유술 신부




오늘 루가 복음에서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을 예수께서 칭찬하신다. 물론 청지기의 비양심적인 윤리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민첩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그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가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오히려 빛의 자녀들의 삶을 경고하신다.


 


세속 사람들은 이 현실을 빠르게 판단하고 그 대책을 간구하는데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이제 곧 세말이 닥치면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 아직까지 세상의 것을 위해 모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청지기처럼 민첩한 결단을 내려 빛의 자녀로 생활을 바꾸어 그 대책을 세울 것인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린 하느님의 나라를 등한시할 것이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것을 주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망하여 거지가 되고 어제까지만 해도 권력과 명성을 한 몸에 지닌 자가 오늘 아침에 그 모습을 감출 때 그것이 그를 영원히 지켜주지 못한다. 결국 불완전하고 허무한 것에 우리 모든 것을 바칠 순 없다. 보다 소중하고 참된 하느님 나라에 우리 모든 것을 맡기고, 그 곳에 재물을 쌓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실직한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이 현실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값지게 올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것에는 성공을 하면서도 사실 인생에 있어서 실패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오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삶을 거두어들이신다면 당신은 어떤 대책으로 맞아들이겠는가?












18.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의 재물을 어떻게 얻어야 하며, 또는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복음에는 악한 청지기(마름)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 부정한 행위를 찬성하시거나 그 행위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해서 입니다. 이 악한 청지기가 세속의 온갖 거래에 있어 약삭빠른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영신 일에 있어 우리는 더욱 약삭빨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하고 약삭빨라야 하겠습니까.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다음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만큼 희생을 바치며 피와 땀을 흘리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사업체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한 사업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합니다. 그는 가정과 가족들도 소흘히 할 때가 많고 귀한 사업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오락과 여가를 잊고 지냅니다. 그래서 그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대머리가 되고 겉늙게 됩니다.




그는 위궤양이나 이와 비슷한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는 성공하기를 원하며 그는 자기의 야망을 달성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급기야 자수성가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할 적엔 세상을 떠나는 신세가 됩니다. 그처럼 애지중지하여 쌓아 놓은 재산은 하등 그에게 도움이나 이익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족에게나 자손들에게 크게 도움이나 행복을 준다고 성급하게 단정하기 힘듭니다. 흔히 자손들은 그 재산으로 인하여 불화를 야기할 뿐 아니라 게으름뱅이가 되고 돈 귀한 줄 모르고 주색잡기로 모두 탕진해 버립니다.


 


이 어찌 물려 준 재산을 좋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현명하신 신자 여러분! 세상 재물을 위하여 그처럼 발버둥치며 악착같이 모은 것의 결과가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가정을 윤택케 하기 위하여 근면하고 절약해야 되겠지만 하느님을 제쳐 놓고,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소흘히 하면서까지 물질 위주로 혹은 물질 제일주의로 산다는 것은 우리 신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절대 배격할 점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시오.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거나 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합니다.”(마태 6,20)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 긍정이 가고 이치에 맞는 말씀으로 우리 귓전에 들려 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하늘에다 재물을 쌓을 생각을 하고, 둘째로 재물을 하늘에다 쌓는 데 있어 우선 육신 일보다 더 부지런하고 신경을 많이 써 가며 수고와 시간을 아끼지 말고 계획성 있게 안전하게 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에서 성공한 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이제까지 살았던 연설가들 중 가장 웅변적인 연설가였던 ‘데모스테네스’는 두 가지 커다란 장애물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더듬었고 또한 음성은 가냘펐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설가가 되기로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는 입에다 조약돌을 물고 열변을 토했고, 바닷가에 밀려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는 입 속에 있는 조약돌을 삼키지 않으려고 정신을 때문에 말을 더듬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렇게 실천했습니다. 지루한 나날이었지요. 그러나 ‘데모스테네스’ 처럼 힘있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처럼 그는 위대한 연설가가 되었답니다.



신자 여러분! 이상의 이야기로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세속의 야망인들이 재물과 명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가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얼마나 분투 노력하고 있는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우리의 지상목표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각오와 결심을 하여야 되겠습니까? 정말 절대 비장한 각오와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순교자 복자들을 보십시오. 더구나 우리 복자들 중에서도 혜성의 위치에 있는 김 안드레아 대건 신부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의 진리와 나라를 이 땅에 심으려고 얼마나 고생과 학대와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는 사제가 되어 2년도 채 못 되는 기간에 그가 이룩하신 업적은 실로 놀랄 만하고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만큼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복음을 널리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한강 백사장인 새남터에서 고귀한 선혈을 뿌리며 장한 순교의 영광을 얻을 때까지 그가 생각하고 그가 행동하던 것 모두가 하느님을 위해서였고 하느님 말씀을 널리 알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분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하느님을 위하여 노력하고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요즈음 순교자들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손이란 긍지와 자랑으로 이에 손색이 없는 생활태도로 나오도록 우리 다 같이 노력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멘.












19.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




세계 인구 40억이 평균 100년을 산다면 4000억년이 된다. 그동안 자지도 쉬지도 먹지도 않고, 예를 들어 성모송만 계속 염한다 해도 대죄 하나를 속죄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나 하나가 백년을 산다하고 그동안 자지도 쉬지도 먹지도 않고, 줄곧 성모송을 염한다고 속죄될 리 없다. 그러나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히브리 9,22)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절망하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여 그분의 역사하심에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 늘 잊지 않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마음쓰고 산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제물이 되어 그분의 제단에 쌓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 기능과 재능, 시간과 생명 전체를 주신 분에게 되돌려 드려야, 약고 정직한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씨 조선 효종 때 서울 사는 선비 “김학성”의 어머니는 한 솥 가득한 은덩어리를 마당에서 우연히 발굴했는데, 자식의 장래를 위해 이것을 땅에다 묻고 이사갔다고 한다.


  세상 재물을 경시하기보다는 주신 것이니 이를 친구로 삼아 선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밥을 먹어도 배고프니까 먹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때문에 죽으나 사나 우리의 일거일동, 생활 전체가 주님만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자(1고린 10,31). 없어서는 안 될 재물이지만 그 재물에 노예는 되지 말자. 세상일보다도 신앙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을 위해야겠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20.     연중 제25주일   루가 16,1-13 (다)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생은 가시밭길이라고도 하고 또한 인생은 고통의 바다로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은, 심리적으로 서운한 감을 유발시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서운한 감정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젊은 사람이나 또는 자식을 많이 둔 사람에게 모욕이나 하시하는 대접을 받았을 경우, 자식 없는 서러움에 잠길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월세나 전세를 사는데 집주인과 마찰을 하는 경우, 집 없는 서러움으로 서글픈 감정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돈 때문에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거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돈 없는 서러움에 잠기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서러움은 외적인 자극에 의해 심리적인 요소가 영향을 받고, 외적으로 결핍된 삶의 조건이 인간을 괴롭게 만듦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외적인 요소를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누구나 쉽게 이러한 심리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외적 삶의 조건에 대한 결핍된 요소는 인간의 육신적인 욕구가 정신적인 욕구를 대체할 때에, 인간 누구도 만족스러운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욕심이 채워지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고 이러한 욕심은 끝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심




  인간의 외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고 이를 통하여 사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삶의 요소와는 별 관계 없이 자신의 내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바꾸니, 바로 거기에 천당과 극락이 있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어찌 보면 더 빠른 지름길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삶의 조건은 갖추어져야만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약은 청지기는 적어도 이러한 외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고 살다가 삶의 조건을 남용한 나머지,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되었고, 이것은 청지기에게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방법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실현하기가 곤란한 것들이었다.


  땅을 파면서 막노동을 하는 것도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므로 힘이 들어 못할 것 같고, 쉽게 거지 노릇을 하자니 지금자지 자신이 누리던 신분에 비추어 볼 때 너무 격에 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나중에 자기를 괄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죄를 생각해내고, 그 방법을 쓰고 있다.




   재물도 잘만 사용하면




예수님은 이러한 청지기의 잘못도, 적어도 윤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태도를 칭찬하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가 좀 알아듣기 힘들지만, 예수님은 여기에서 어떤 윤리도덕적인 기준을 설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위기에 처한 청지기가 재빠르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자신의 설 곳을 마련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들도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라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사는 데 겪는 서러움이 사람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재물도 오히려 구원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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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25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5 주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제 1독서 : 아모 8,4-7


    제 2독서 : 1디모 2,1-8


    복음 : 루가 16,1-13


    해설

    이 주일과 다음 주일의 근본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이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흔히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루가복음사가는 자기의 복음 16장에서 약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함께 전해 주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어느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재물 사용법에 대한 몇 가지 권고를 제시하고 있다. 그 두 개의 비유는 비록 어조는 서로 다르지만 다 같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잇는 하늘 나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거기에 들어갈 차비를 갖추는데 있어서 이 세상의 재화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요소가 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전례의 전체적 분위기에 맞추어 채택된 첫째 비유의 내용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은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아모스서에 의한 제 1독서는 기원전 8세기에 사마리아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 (B.C. 783-743)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대개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호기로 삼으려 했다. 여기서, 양을 치던 목자(아모 1,1 ; 2열왕 3,4) 아모스의 분노가 법적으로 상거래가 금지되어 있던 안식일과 ‘초하루 축제’를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지키려 했던 그 당시의 모든 불의한 행위들과 고리대금업에 반기를 들어 폭팔한다.

    목자 아모스 예언자의 호된 비난의 소리를 들어보자(오늘 제 1독서 참조). 이것은 그야말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착취 형태로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품위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시켜 나갈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의식을 키워 나가 성취시킬 수 있는 길을 막아 놓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또는 정치 형태가 우익이 됐든 좌익이 됐든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 현상을 보라!

    바로 이런 까닭에 아모스의 격렬한 외침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에 반기를 들고 또한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 재화의 ‘의미’를 자신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재조명시키라는 아주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촉구가 되고 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다”


    소의 ‘약은 청지기의 비유’라고 불리어지는 그 비유의 내용은 바로 이점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불행을 극복할 줄 알았던 그 청지기의 능력에다 초점을 맞추어 제자들에게 본보기로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16,8). 그러므로 본질적인 불의한 행위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악을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불의한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능숙하고도 확고하며, 설득력 있는 그 ‘방법’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집주인’은 그렇듯 비열한 사기를 당한 땅 주인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7,6 ; 11,39 참조). 이와 같은 사살은 비유의 내용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빛의 자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꿈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은 이러한 표현으로써 자신들을 규정지으면서 ‘빛의 자녀들’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세속 또는 어둠의 자녀들’ 즉 공동체 밖의 사람들 사이를 명백히 구분 짓고자 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마니교적 분리주의를 배격하시면서 당신 제자들도 경제적 사회적 분야에서 활동하되 아주 능숙한 그 사기꾼이 채택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 기준과 목적에 의해 하라고 권고하신다 :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청지기를 불러다가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하고 물었다.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주었다….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1-8).

    여기서 관용을 베푸는 청지기의 마지막 파멸의 행동으로 서술되고 있는 그 모험적 행동의 고대 동방사회의 실상을 생각해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사회에서는 광대한 땅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소위 청지기들이 주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농토의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거기서 자신들의 보수를 챙겨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청지기는 아주 기발한 부정행위를 생각해 낸다. 관습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관리책임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이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즉 첫 번째 사람(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퍼센트를 삭감해 주고, 두 번째 사람(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퍼센트를 감해서 기재한다. 이런 식으로 그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 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둬들일 뿐만 아니라 그 빚진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은 정직하지 못한 그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8절). 사실 그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구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직접적으로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한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특히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 때문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줄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사실상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을 알라는 권고로 끝나고 있다 : “그러나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9절).

    이 구절의 의미는 아주 묘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세속의 재물’(원래 셈족 언어로는 ‘부정한 돈’이라고 표현됨) – 보통 불의, 사기, 그리고 타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재물을 공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도 ‘친구들’ – 우리가 죽었을 때에 성부 곁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 을 사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집’이라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은 구원의 자리 즉 천국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의 말씀을 상기해 보라 :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친구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막연하여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미루어 추론해 볼수는 있다 :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하느님 곁에서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으로서, 여기서는 의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사실 재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사용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거나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때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나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다같이 참 ‘저주’가 있게 될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바로 이러한 자원에서 정말로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다.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온전히 그의 것이며 그 어느 누구도 결코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재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의 의미는 비록 똑같지는 않지만 ‘세속의 재물’, ‘충실’, ‘맡기다’와 같은 어휘상의 연결을 통해 볼 때 같은 선상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이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10-12절).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마지막 표현은 대화 전체를 통해 가장 냉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다 :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항상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든 관심을 끌어당김으로써 사람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은 액세서리,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즉 밖으로 몰아내야 할 ‘적대자’의 위치로 전락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있으며, 마침내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와 같이 재물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다.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재물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로써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가에게 있어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또는 소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이것은 또한 옛 교부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 “네게 관리하라고 맡겨진 재물을 마치 네것인 체하는 너는 도둑이 아니냐? … 네가 가지고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이고, 네 가방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외투는 헐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집에서 썩어 가고 있는 신발들은 신을 신지 못한 이들의 것이며, 네가 감추어 둔 돈은 궁핍한 이들이 것이니라. 네가 베풀어줄 수 있는 이들이 많으면 많은 만큼 그만큼 너는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성바실리오).

    오늘날의 교회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9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재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류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여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어느 정도 달려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로가 제 2독서(1디모 2,1-8)에서 권고하듯이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5 주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제 1독서 : 아모 8,4-7


    제 2독서 : 1디모 2,1-8


    복음 : 루가 16,1-13


    해설

    이 주일과 다음 주일의 근본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이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흔히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루가복음사가는 자기의 복음 16장에서 약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함께 전해 주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어느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재물 사용법에 대한 몇 가지 권고를 제시하고 있다. 그 두 개의 비유는 비록 어조는 서로 다르지만 다 같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잇는 하늘 나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거기에 들어갈 차비를 갖추는데 있어서 이 세상의 재화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요소가 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전례의 전체적 분위기에 맞추어 채택된 첫째 비유의 내용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은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아모스서에 의한 제 1독서는 기원전 8세기에 사마리아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 (B.C. 783-743)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대개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호기로 삼으려 했다. 여기서, 양을 치던 목자(아모 1,1 ; 2열왕 3,4) 아모스의 분노가 법적으로 상거래가 금지되어 있던 안식일과 ‘초하루 축제’를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지키려 했던 그 당시의 모든 불의한 행위들과 고리대금업에 반기를 들어 폭팔한다.

    목자 아모스 예언자의 호된 비난의 소리를 들어보자(오늘 제 1독서 참조). 이것은 그야말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착취 형태로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품위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시켜 나갈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의식을 키워 나가 성취시킬 수 있는 길을 막아 놓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또는 정치 형태가 우익이 됐든 좌익이 됐든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 현상을 보라!

    바로 이런 까닭에 아모스의 격렬한 외침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에 반기를 들고 또한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 재화의 ‘의미’를 자신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재조명시키라는 아주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촉구가 되고 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다”


    소의 ‘약은 청지기의 비유’라고 불리어지는 그 비유의 내용은 바로 이점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불행을 극복할 줄 알았던 그 청지기의 능력에다 초점을 맞추어 제자들에게 본보기로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16,8). 그러므로 본질적인 불의한 행위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악을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불의한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능숙하고도 확고하며, 설득력 있는 그 ‘방법’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집주인’은 그렇듯 비열한 사기를 당한 땅 주인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7,6 ; 11,39 참조). 이와 같은 사살은 비유의 내용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빛의 자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꿈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은 이러한 표현으로써 자신들을 규정지으면서 ‘빛의 자녀들’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세속 또는 어둠의 자녀들’ 즉 공동체 밖의 사람들 사이를 명백히 구분 짓고자 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마니교적 분리주의를 배격하시면서 당신 제자들도 경제적 사회적 분야에서 활동하되 아주 능숙한 그 사기꾼이 채택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 기준과 목적에 의해 하라고 권고하신다 :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청지기를 불러다가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하고 물었다.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주었다….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1-8).

    여기서 관용을 베푸는 청지기의 마지막 파멸의 행동으로 서술되고 있는 그 모험적 행동의 고대 동방사회의 실상을 생각해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사회에서는 광대한 땅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소위 청지기들이 주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농토의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거기서 자신들의 보수를 챙겨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청지기는 아주 기발한 부정행위를 생각해 낸다. 관습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관리책임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이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즉 첫 번째 사람(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퍼센트를 삭감해 주고, 두 번째 사람(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퍼센트를 감해서 기재한다. 이런 식으로 그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 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둬들일 뿐만 아니라 그 빚진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은 정직하지 못한 그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8절). 사실 그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구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직접적으로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한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특히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 때문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줄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사실상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을 알라는 권고로 끝나고 있다 : “그러나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9절).

    이 구절의 의미는 아주 묘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세속의 재물’(원래 셈족 언어로는 ‘부정한 돈’이라고 표현됨) – 보통 불의, 사기, 그리고 타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재물을 공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도 ‘친구들’ – 우리가 죽었을 때에 성부 곁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 을 사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집’이라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은 구원의 자리 즉 천국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의 말씀을 상기해 보라 :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친구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막연하여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미루어 추론해 볼수는 있다 :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하느님 곁에서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으로서, 여기서는 의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사실 재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사용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거나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때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나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다같이 참 ‘저주’가 있게 될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바로 이러한 자원에서 정말로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다.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온전히 그의 것이며 그 어느 누구도 결코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재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의 의미는 비록 똑같지는 않지만 ‘세속의 재물’, ‘충실’, ‘맡기다’와 같은 어휘상의 연결을 통해 볼 때 같은 선상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이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10-12절).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마지막 표현은 대화 전체를 통해 가장 냉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다 :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항상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든 관심을 끌어당김으로써 사람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은 액세서리,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즉 밖으로 몰아내야 할 ‘적대자’의 위치로 전락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있으며, 마침내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와 같이 재물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다.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재물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로써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가에게 있어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또는 소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이것은 또한 옛 교부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 “네게 관리하라고 맡겨진 재물을 마치 네것인 체하는 너는 도둑이 아니냐? … 네가 가지고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이고, 네 가방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외투는 헐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집에서 썩어 가고 있는 신발들은 신을 신지 못한 이들의 것이며, 네가 감추어 둔 돈은 궁핍한 이들이 것이니라. 네가 베풀어줄 수 있는 이들이 많으면 많은 만큼 그만큼 너는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성바실리오).

    오늘날의 교회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9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재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류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여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어느 정도 달려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로가 제 2독서(1디모 2,1-8)에서 권고하듯이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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