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6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6 주일






        15. 강길웅 신부(다)/ 27           16. 변희선 신부(다)/ 28


        17. 문종원 신부(다)/ 30           18. 강길웅 신부(다)/ 33


        19. 김용종 부제(다)/ 35           20. 김성배 부제(다)/ 37


        21. 최고의 노이로제(다)/ 39      22. 物神, 가장 위험한(다)/ 40




15.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가난한 마음의 행복


                                                     강길웅 신부




성서를 보면 부(富)는 선이고 가난은 악(惡)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벌어서 부를 누리며 잘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사람이 게을러서 일을 안 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정말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또 말하기를 부자로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재물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을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재물에 자신이 묶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있거나 없거나 재물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할 때 하늘나라는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미 마지막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멸망의 길은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도자부터 석고 타락하여 탐욕에 눈이 어두웠으며 사치와 낭비로서 국민생활은 전체적으로 망조가 들고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등장하여 올바른 길을 재촉했지만 아무도 올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망할 사람은 어차피 망하며 망할 나라도 어차피 망하며 망할 나라도 어차피 망합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망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잘되는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흥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참으로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잘산다는 것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았던 것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것에 탐닉하다 보면 무엇이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이지 눈이 닫혀 못 보게 됩니다. 귀가 닫혀 못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잘 먹으면서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극적으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내용만 가지고 부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릅니다. 도둑질했다는 문구도 없고 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옥에 빠져서 물 한 방울도 축일 수 없는 비참한 시세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욥기에 나오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호사롭게 먹고 마시고 지냈다는 이유 때문에 불행하게 되어 모든 자식과 재산을 몽땅 잃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찾았지만 그가 사탄의 장난에 고생한 얘기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린다고 행세께나 했던 자들은 결국 불행합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복은 말 그대로 「복」입니다. 그런데 왜 복이 불행으로 연결이 되느냐?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복은 참된 복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잘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며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가난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슬퍼할 줄 알아야하며 또 억울하게 여겨져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상품의 광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순간의 삶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기껏해야 70년이고 근력이 좋아야 80년인데, 우리는 그래서 무엇이 더 올바르고 소중한지 좀 찾아봐야 하며 무슨 삶이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고생도 좀 해봐야 합니다. 재물에 묶여 인생을 헛되게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흥청거리고 너무 분수를 모릅니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말 자체가 혐오스럽지만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병든 우리의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총체적으로 썩었다는 말이 있는데 배금사상이 사회 전반에 암처럼 번져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벌되 늘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 재물은 정말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복으로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주님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의 복이 영원히 살아있게 됩니다.












16.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무관심이 판치는 세상은 지옥이다.


                                                                   변희선 신부




  자본주의 경제에서 삶의 최대 가치는 돈을 버는 일이다. 물론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소유한「부자」와 돈이 없는「빈자」라는 두 계층이 생겨났다. 이러한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고자 칼 막스라는 학자는 공산주의를 주창했지만 약 70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부 부유층 사람들은 하룻밤에 천만원이 넘는 돈을 호화 요정에서 쓰고, 병들고 가난한 어느 아버지는 천만원의 상해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는 감옥에 들어갔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국가의 경제를 위하여 월남전에 나가서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중동에 간 근로자들은 비지땀을 흘렸으며, 몇 만원이 안 되는 월급으로도 열심히 일한 언니들의 정성이 모여서 수출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질적 성장은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혼자서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든지 두 사람(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나고, 사람은 이웃과의 만남과 관계가 없으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人間)의 간(間)자는 사이를 뜻한다. 결국 사람은 남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혼자서만 돈을 많이 벌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는 극심한 이기주의와 탐욕이 판을 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졌다.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 관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 관계는 먼저 서로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에서 비롯한다. 안 보면 보고 싶어지고, 만나고 싶어야 정상적인 인간관계이다. 이러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죄악은 그가 돈이 많았다는 것도 아니고, 그가 거지인 라자로를 멸시하거나 모욕을 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 부자의 잘못은 단순히 가난한 라자로에게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이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 원인은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웃 라자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은 것 때문이다.



맹자님은 우물가에서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보면, 먼저 달려가 그를 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이라고 가르쳤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메말라버린 사회는 사람의 본성이 없어진 비인간적인 사회이며, 결국 우리 스스로가 지옥을 미리 만드는 셈이다.


  어떠한 물질도 그 쓰임새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고픈 경우에 좋은 것이며, 배가 부른 이에게는 가치가 없다. 돈은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돈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여질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돈이 필요한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하는 경제적 난국에 빠져 있다. 그러나 30년전보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따뜻한 마음이다. 떡 한 개라도 나누어 먹으려는 따뜻한 가슴이 아쉬운 것이다. 반면에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경제 논리의 풍토에서는 모두가 냉혹하기 쉽다.




  가슴이 따뜻하려면 무엇보다도 겸손과 청빈의 맛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겸손과 청빈의 맛은 나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부터라도 관심과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보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내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머리 속을 비우고 미소와 친절로 이웃에게 다가가자.












17.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부에 중독되지 않게 깨어 있어야


                                                      문종원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권력과 재물을 쥔 자가 아니라, 지상에서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은 라자로와 같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풍요 속에 굶주리는 지구촌의 일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함으로써,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요즘 강남에 사는 어린이들 중에 많은 어린이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 아파트 몇 평이니?” “응, 30평이야.” “야, 좁아서 어떻게 사니, 적어도 40평은 돼야지” “제네는 50평이래.” “부러워한 꺼 없어. 전세 들어 살거든.” “너희 엄마 차 있니?” “없어. 우리 집에는 차 한 대 뿐이야.” “그러면 너희 엄마한테 빨리 뽑으라고 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과 물질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눈 아래 얕이 봅니다. 돈과 인격이 비례한다고 하는 의식이 우리 마음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경제성장과 함께 갑자기 부를 움켜잡은 졸부들은 돈과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릅니다. 자기의 돈이니,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간섭이야” 하며, 큰소리 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호의호식과 과소비로 사치생활을 합니다. 몇 억원짜리 가구를 구입하여 떵떵거리고 살아갑니다.


 


한번은 새 사제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러 오시는 수도회 외국 신부께서 점심 식사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편안하게 좋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방이나, 세계 여러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어느 도시 한 곳에서만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몇 백명이나 됩니다.” 같이 식사하던 동료 사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의식 없이 살아가기 쉽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장 낮은 살 속에 있는 맑은 영혼들




저희 새 사제학교 신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사목상담 실습을 하기 위해서 신경정신과 의원, 본당 구역, 그리고 병원 등 여러 곳으로 파견되어 나갑니다. 저는 성가 복지 병원에 나가는데, 거기서 호스피스(임종) 환자들을 상담합니다.




입원한 환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느라 환자도 지치고, 간호를 하는 가족들도 지칩니다. 가족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이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옷 입고, 대소변 보는 것까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급기야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기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줄려는 마음 안에서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입원한 환자 중에서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 특히 죽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맞이하는 영혼을 볼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사목상담을 하면서, 그리고 동료 사제들의 상담사례를 들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서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지금은 이렇게 수족을 못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상담을 한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봉사함으로써 봉사받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받는 환자들보다 봉사자들이 더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 알고 개인주의에 물들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즐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봉사함으로써 봉사받는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체험하면서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봉사함으로써 마음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에 자기 멋대로 살지 아니하고, 안일과 자기 만족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섬김과 나눔으로써 얻는 풍요로운 삶




오늘 복음에서,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라자로를 위로해주시고,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은 사람들을 위안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으로 배우기에, 자신에게 닥친 역경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를 보게 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과 쾌락을 쫓아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에게 도움과 기쁨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와 같이,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 안에 계시기에, 고통과 어려움의 생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인내를 낳아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합니다.


 


시간이 많아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여건이 허락하여서, 또는 남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에, 그저 하느님의 일꾼으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눕시다. 우리가 이웃에게 인색하다면 우리는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위안해주십니다. 우리는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8.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가난한 마음의 행복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아모 6.1a.4~7 (멋대로 살며 노래하다가 이제는 귀양가리라) 


제2독서 Ⅰ디모 6,11~16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라) 


복 음 루가 16,19~31 (너는 행복하고 라자로는 불행하더니, 이제는 라자로가 위로를 받고)




성서를 보면 부(富)는 선이고 가난은 악(惡)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벌어서 부를 누리며 잘 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사람이 게을러서 일을 안 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정말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또 말하기를 부자로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재물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을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재물에 자신이 묶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있거나 없거나 재물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할 때 하늘 나라는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미 마지막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멸망의 길은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도자부터 썩고 타락하여 탐욕에 눈이 어두웠으며 사치와 낭비로써 국민생활은 전체적으로 망조가 들고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등장하여 올바른 길을 재촉했지만 아무도 올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망할 사람은 어차피 망하며 망할 나라도 어차피 망합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망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잘되는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흥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참으로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 놀았던 것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잘먹고 잘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에 탐닉하다 보면 무엇이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인지 눈이 닫혀 못 보게 됩니다. 귀가 닫혀 못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잘먹으면서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극적으로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 내용만 가지고는 부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릅니다. 도둑질했다는 문구도 없고 또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옥에 빠져서 물 한 방울도 축일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욥기에 나오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호사스럽게 먹고 마시고 지냈다는 이유 때문에 불행하게 되어 모든 자식과 재산을 몽땅 잃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찾았지만 그가 사탄의 장난에 고생한 얘기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린다고 행세 나 했던 자들은 결국 불행합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복은 말 그대로 ‘복’입니다. 그런데 왜 복이 불행으로 연결이 되느냐?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복은 결국 참된 복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잘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며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 은 불행하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가난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슬퍼할 줄 알아야 하며 또 억울하게 여겨져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상품 광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순간의 삶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기껏해야 70년이고 근력이 좋아야 80년인데, 우리는 그래서 무엇이 더 올바르고 소중한지 좀 찾아봐야 하며 무슨 삶이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고생도 좀 해 봐야 합니다. 재물에 묶여 인생을 헛되게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흥청거리고 너무 분수를 모릅니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말 자체도 혐오스럽지만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병든 우리의 사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총체적으로 썩었다는 말이 있는데, 배금사상이 사회 전반에 암처럼 번져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벌되 늘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 재물은 정말 불행의 씨앗입니다. 돈과 재물은 선이고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복으로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은 주님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의 복이 영원히 살아 있게 됩니다.












19.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하느님 말씀에 충실히


                                                         김용종 부제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한 주일 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우리 유행가에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말에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 먼 눈이 멀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자기의 자식은 아무리 못생겼고, 아무리 나쁜 행동을 해도 사랑스럽고, 귀엽게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의 말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는 어떤 것 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어 거기에 깊이 빠지게 되면, 그것 이외에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일어 버리게 되거나 무관심 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잘못된 관심이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불의가 만연하고 사랑이 없는 각박한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독서들은 재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관심이나 이기심으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어, 벌을 받게 됨을 보여주면서, 우리들은 구원을 위해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것을 들려줍니다.



우선 제1독서를 보면 가난한 이들의 옹호자였던 예언자 아모스가 때를 잘 만나 쉽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람들의 몰염치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엄중히 고발합니다. 이것은 부유함은 하느님의 은혜요, 축복으로서 그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의 분배자이기에 형제를 착취하거나 빈곤에 버려 두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재물에만 빠져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께서 진리에 대한 증언을 언급하면서 현실에 대한 진정한 응답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같은 자녀이기에 형제 자매로써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재물에만 정신을 쏟게되면 가난한 다른 형제 앞에서 그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우리들이 자기의 관심이나 자기만의 행복과 이기심에 빠져 하느님의 말씀에 완고하게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두 주인공 즉 부자와 라자로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극도로 부조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화려한 의복에서부터 진수성찬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거에 여유가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거지는 그 부자가 식사 후에 손을 깨끗이 하기 위해 식탁 밑으로 버려지는 빵 부스러기 조차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더구나 떠돌아다니는 개들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서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지고 있습니다. 라자로는 유대인의 표현으로 영원한 행복을 의미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식탁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거꾸로 떨어져 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보게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공평한 재판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로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반부를 주의해서 살펴보면 더 중요한 다른 주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부자가 자기의 다섯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자기와 같은 처지를 당하지 않도록 경고를 해달라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를 보면 부자였으므로 그가 죽은 다음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재산이나 금전의 유무가 죽은 다음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부를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움켜쥔 채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라자로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은데 있습니다. 그가 꾸중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 이야기는 지옥과 천당이라는 죽은 후에 있을 일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부자는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만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관심을 쏟음으로서 하느님이 주신 행복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가난한 이웃형제에게 형제적 사랑으로 나누어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지 못하거나, 들었다고 해도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신자가 오직 하느님께서 죽은 후에 정의를 이루어 주시리라는 이유로 불의를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즉 정의와 사랑이 바로 이 지상에서 모든 사람의 노력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자가 거지 라자로를 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된 관심 때문에 귀와 눈이 멀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인 하느님의 말씀을, 즉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외면하거나 기억하는 일이 없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자가 자신만을 생각하여 자기집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거지 라자로를 보지 못하여 자기의 손을 깨끗이 하기 위해 사용했던 빵 부스러기도 주지 않아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고 남은 것까지 움켜지고 있음으로써,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을 거역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의 행복만을 위해, 나의 안정만을 위해 내 주위에서 부당하게 착취를 당하거나 불의를 당하는 이웃을 보고 외면함으로써 정의를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정의를 이룩하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20.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김성배 부제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우리 주변의 가난한 집과 부자 집을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대비되는 점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담장입니다. 가난한 집 담은 그게 담장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허술하게 처져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또 언제라도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담은 더 이상 집안과 밖을 갈라놓는 방책이 아닙니다. 반면에 부자 집으로 갈수록 그 담은 더 높아지고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안에서 철조망을 둘러치기까지 합니다. 이런 담들은 집 안과 밖을 철저히 갈라놓아서 안에서 밖을 대다 볼 수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담들은 도둑이나 강도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요새를 방불케 하는 이런 담들은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 각박하고 매몰찬 인정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들은 가나하고 모은 재물이 별로 없을 때는 담 없이도 편안히 잘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 늘어가는 재산에 비래해서 담의 높이는 점점 높아졌고 튼튼해 졌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담을 쌓지 않고는 편안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죄악의 와중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궁극적인 비극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쌓아지고 있는 인색함이라는 담입니다. 이 마음의 담은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할 사랑의 실천을 가로막는 담입니다. 인색함이라는 담이 마음에 쌓이기 시작하면, 충분한 재물을 가진 사람도 바로 옆에서 끼니를 거르는 불쌍한 이웃을 못 본체 외면하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재물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재물이지만, 이 재물에 대한 지나친 탐욕은 사람을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만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재물은 내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즉 그것은 내 능력과 땀이 투자된 소극이고, 내 안락한 생활을 위한 보증이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 쓰여져야 하고 어떤 상황아래서도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은 흔히 재물을 많이 가진 부유한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향해 인색함이라는 두터운 담을 쌓음으로서 가진 바를 나누는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세상 재물은 자기 것이기 안전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을 위하여 만민에게 주신 모든 인간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자기 것이라도 가진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정의의 요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 나아가 크리스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풍요로운 재산은 좋은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불행의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사람을 인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부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락과 쾌락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재산을 탕진하면서도 불행한 이웃, 당장 끼니를 못 잇는 담 밖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모른 척 등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이처럼 인색한 부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거지 라자로를 못 본체하고 자신의 영화와 쾌락만을 추구했던 부자는 사후에 하느님의 호된 심판을 받고 응분의 보속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 부자 집 대문에서 평생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았던 라자로는 죽은 다음에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낙원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부자는 그때에야 비로소 인색했던 자기 생활을 땅을 치며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부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부자가 책망을 받는 것은 부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풍부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에 대한 지나친 액착과 그로 인해오는 인색한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인색이라는 담장이 처지면 자기 주위의 불쌍한 이웃을 보고도 모른 척 등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라자로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인색함이라는 담장이 사랑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위의 이웃들에게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봐야 갰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는 저 불쌍한 라자로가 방치 된 채 있지 않도록 노력해야 갰습니다.












22.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최고의 노이로제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면에서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 개인 개인을 독립적으로 보면 비교될 수 없으므로 독자적인 상태에서는 평등한 것이다. 왜냐하면 질이라는 것은 비교될 수 없는 대상이므로 본질적인 면에서, 본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고 살게 됨에 따라, 양적인 면이 비교하는 기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양은 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양은 비교할 수 있게 되고 비교를 통한 우열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살게 된 다음부터, 신분이나 또는 힘에 의한 사람의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구성한 후에 생긴 사람의 차별은, 끊임없는 신분상승의 욕구를 인간이 갖도록 만들었고, 비교를 통한 최고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최고에 대한 욕구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리가 만든 무엇이 세계에서 최고이며, 우리가 가진 무엇이 최고니 하면서, 최고에 대한 노이로제 현상을 우리 사회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거나 또는 외국에서 사온 어떤 물건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끝없는 신분상승 욕구




  이러한 최고에 대한 소유욕구는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차별성을 은근히 나타내려는 잠재적인 인간의 욕구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신분제도에 의한 차별성은 전통사회에서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에 존재하는 새로운 신분의 차별화를 꾀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소위 말하는 상류층과 자신이 적어도 중산계급이라는 입장 표명을 통하여, 산업사회는 또다시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차별성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정착하는 차별적인 사회의 현상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새로운 계급을 낳게 하고, 새로운 사회의 층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표면적으로 인도사회만큼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사회는, 적어도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인도사회에서 이러한 엄격한 신분제도가 지켜지는 이유는, 종교를 밑바탕으로 구성된 사회의 구성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환생할 때에, 지신의 신분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더 나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종교의 가르침이 잘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조적인 두 사람은, 현세의 삶과 내세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에서 비교되고 있다. 라자로는 현세에서 더 이상 떨어질 여지가 없는 가장 밑바닥 삶의 조건에서 살았고, 부자는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반전되고 있다. 라자로는 이제 복된 위치에 사는 자가 되었고, 부자는 고통스러운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하느님께 초대받는 삶




   이 비유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는 위로와 희망을 주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부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삶을 살지 말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우신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서, 현세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느님께 영광 받는 삶으로 초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자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바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선택할 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도 사실 세상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요소가 있을 때에 그 희망을 좇아가게 되지, 하느님을 선택하기는 어렵게된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인 처지와 장래의 운명을 잘 나타낸 것이 오늘의 복음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22.     연중 제26주일   루가 16, 19-31(다) 物神, 가장 위험한 우상




묵상 : 루가 복음은 ‘가난함=구원’, ‘부유함=멸망’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물론 의로운 부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재산과 돈에 대한 집착, 물욕이 모든 악의 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신(物神)보다 더 위험한 우상은 없다.




  ‘가난함= 구원’, ‘부유함 = 멸망’인가?




  복음서마다 어떤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복음사가의 신학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부자는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그냥 가난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


그렇다면 모든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다 멸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에서도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고 한다. 그러나 루가의 병행구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라고 말한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아마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보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 표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표현에 훨씬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예수님은 온갖 불의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호의호식하는 당시의 부자들과, 과중한 세금과, 엄격한 율법의 무게와, 식민통치에 시달리면서, 묵묵히 운명처럼 가난을 받아들이고 희망 없이 사는 민초들을 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구원될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의로운 부자를 찾기 힘든 나라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 읽은 것인데, 현재 세계 최고의 거부)는 ‘빌 게이츠’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누가 제일 가는 거부였는가를 따지면 ’빌 게이츠’는 6위이고, 석유 왕 ‘록펠러’가 1위, 강철 왕 ’카네기’는 5위라고 한다, 이들 거부들은 하나같이 작은 돈을 아꼈고, 자신보다 공익을 위해서 돈을 썼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구 5만명 이상의 도시에 록펠러나, 카네기 이름으로 된 병원, 공연장, 학교 연구실, 복지시설 등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록펠러는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배는 더 힘들다”고 말하였다, 카네기는 사적으로는, 어릴 적 스코틀랜드 고향에서 토끼를 기를 때 풀을 뜯어주던 소꿉친구에게 먹고 살만큼 한 밑천을 주고는, 1달러를 관에 넣고 죽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공익을 위해 철저히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는다.




  자기 재산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 안에는 남의 몫이 함께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세살짜리 손자에게 몇십억원을 유산으로 남기며 재산을 철저히 분산, 은폐하고도 버젓이 공직에 재기용되는 우리의 세태와는 너무나 다르다.




  물신(物神 = 맘몬  mammon)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없다




  물욕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가장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다. 유다는 30은전에 스승을 팔았고, 아버지가 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유산을 탐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현실이다. 그 뿐인가? 청부살인, 미성년자 인신매매, 성적(成績) 조작, 부정대출, 온갖 비리의 묵인 등, 세상을 죽음의 골짜기로 만드는 많은 죄악들이 바로 물욕때문이 아닌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바로 물신 즉 맘몬(mammon)이다.




  예수님은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4)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 18,25)하시며, 성서 곳곳에서 재물의 유혹과,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경고하셨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욕과 물욕이 가장 끊기 힘든 욕구라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성욕은 차츰 쉽게 조절되지만, 물욕은 점점 더 강해진다, 그래서 ‘노욕(老慾)은 하늘도 못 말린다’는 말이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실직자가 속출하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가진 자들이 참으로 고통을 분담하려는 자세로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을 때,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는 부자에게 구걸하는 걸인이 있고, 저 세상에는 걸인에게 구걸할 부자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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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26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6 주일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제 1독서 : 아모 6,1a. 4-7


    제 2독서 : 1디모 6,11-16


    복음 : 루가 16,19-31


    해설

    우리는 지난주의 전례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내용이 금주에도 계속 이어지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만일 재물을 그 약은 청지기가 발휘한 수완을 본따서라도(루가 16,1-8)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헤치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의 독서들은 그 ‘위험성’이 순전히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임을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복음 내용은 비유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정말로 있었던 사실적인 이야기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


    물론 제 1독서도 같은 관점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후견인인 예언자 아모스가 때를 잘 타 쉽게 돈을 벌어 갑작스레 부자가 된 사람들의 몰염치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엄중히 고발하는 또 다른 대목이다(오늘 제 1독서 참조).

    마지막 구절은 대개 25년쯤 뒤에 사마리아의 포위함락(B.C. 722-721)과 더불어 있게 될 북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안심하고 흥청대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폭발하려는 찰나에 있는 화산 입구에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 자시이 불을 당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재물이 무엇보다도 특히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어 버릴 때 그 재물은 선동과 반란을 야기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즉 한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을 갈라놓음으로써 외부적인 것이 됐든 내부적인 것이 됐든 어떤 공격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회로 만들어 버린다. 사마리아 왕국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그 세력이 약화되어 아주 쉽게 앗시리아 침략자의 전리품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아주 손쉽게 갑작스레 돈을 번 사람들의 무절제한 사치풍조가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지게하고 또한 의지가 박약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러한 행동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렇게 해서 어처구니없이 낭비를 일삼는 ‘소비주의’가 오늘날 모든 사회계층에 만연되어 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생필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이러한 풍조가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전염되듯 퍼져가는 이 모든 풍조는 마침내 특별히 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소수 특권층의 사람들을 거스려 절망적인 욕구불만과 거센 분노를 자아낸다. 이렇게 재물이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야기시킬 수 있다.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로지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 버릴 때 찾아 드는 모든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루가 16,19-21).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화려한 의복에서부터 진수성찬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여유가 있었고, 가난한 거지는 그 부자들이 식사 후 손을 깨끗이 하기 위해 식탁 밑으로 버려지는 빵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으며, 게다가 뗘돌아다니는 개들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가 ‘자기 집 대문간에’ 드러누워 있었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잘 살도록 태어났고 그 거지는 고통 중에 살도록 마련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오늘날에도 아무런 종교적 감각은 갖고 있지 않으나 자기 재물을 정당화시키는 이상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다.

    죽음의 순간에는 갑자기 장면이 뒤바뀐다 :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이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22-23절).

    여기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지고 있다. 라자로는 유다적 표현으로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을 식탁에 자리잡게 되고, 반면에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거꾸로 떨어져 심한 괴로움과 고통을 겪게 된다. 지금, 그 부자는 예수께서 그 다음 구절에서 최상의 기교로 설명해 주시는 그와 아브라함 사이의 환상적인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자기의 전 생애 동안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이던 그 부자의 정신상태는 여전하다. 즉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은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대답하였다”(24-26절).

    저 세상에 대한 순전히 상상적인 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저 세상을 서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 즉 기쁨의 세계와 고통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이다. “심판 후에는 고통의 구렁과 위로의 자리가, 그리고 지옥의 용광로와 에덴의 복락이 서로 마주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제 4에스드라세(7,36)는 기록하고 있다. 의로운 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갈증과 극심한 고통으로 이루어지는 (제 4에스 8,59) 죄인들의 형벌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제 4에스 7,58).

    그러므로 ‘부자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죽은 자들의 세계를 재미있게 묘사해 주는 ‘신곡’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전통적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사가 펼쳐지는 동안 늘 겨기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혹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a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하는 대답은 바로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체념적인 무기력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만들어 줄 수가 있다 :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의해 손상된 모든 균형을 바로잡아 주실 만큼 우리를 생각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마지막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잇는 것은 무한한 희망이 된다. 그렇지만 종교란 인간들의 불의나 압박 앞에서 하나의 ‘진정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언제나 부자로 하여금 거드름을 피게 하는 상황이 됐든 가난한 이로 하여금 공포감 속에서 움츠러들게 하는 상황이 됐든 그러한 모든 상황을 거스려 일어날 수 있는 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켜 세상 사물에서 마음을 끊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에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마침내 그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자기의 다섯 형제들만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28절) 경고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오직 하느님께서 저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어 주시리라는 이유만으로 불의를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히려 그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바뀌어질 수 있고 또한 바뀌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불의를 거스려 싸워 입증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이 바로 이 지상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노력에 의해 실현되기 시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특별히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으로 족하고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 것으로 족하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라자로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그 부자에게 대답하는 내용은 이에 관한 것이다 :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29-31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마음이 매우 굳어 있기 때문에 라자로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기로 작정했었다(요한 11,46-53 ; 12,10-11 참조).

    누구든 자기 자신의 보루나 편견으로부터 해방되고자 마음먹지 않으면 마치 유다인들이 예수를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마르 3,22)고 고발한 것처럼 아주 명백한 사실을 항상 왜곡해서 해석하게 될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이러한 내용은 어떤 상황에도 다 적합한 것이지만 특히 재물에 관한 이야기할 때 더 적합하다. 어째서 그 부자는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의 마음을 닫았을까? 왜냐하면 우선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이사 58,7)고 반복해서 권고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하느님의 말씀에 그렇듯 완고하게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왜냐하면 재물을 소유하고서 모든 것을 다 소요한 양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소유한 모든 사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상실해 버려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소유의 양식에 의하면 나와 내가 가지고 잇는 것 사이에는 살아 있는 관계가 없다. 그것과 나는 사물이 되어 버리며 나는 사물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사물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체의식 즉 정신적 균형이 내가 사물들 –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 –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에 의한 존재양식은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 모두를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E. Fromm, Avere O essere?, Mondadori, Milano 1977, pp. 108-109).

    “예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음은 경제적 조건이나 또는 다른 조건, 가난이나 부유함을 마니교적 자세로 특별히 우대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현사회-경제적 상황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는 점이다”(R. Fabris in I Vangeli, Cittadella Ed, Assisi 1975,  pp.1174-1175).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6 주일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제 1독서 : 아모 6,1a. 4-7


    제 2독서 : 1디모 6,11-16


    복음 : 루가 16,19-31


    해설

    우리는 지난주의 전례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내용이 금주에도 계속 이어지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만일 재물을 그 약은 청지기가 발휘한 수완을 본따서라도(루가 16,1-8)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헤치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의 독서들은 그 ‘위험성’이 순전히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임을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복음 내용은 비유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정말로 있었던 사실적인 이야기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


    물론 제 1독서도 같은 관점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후견인인 예언자 아모스가 때를 잘 타 쉽게 돈을 벌어 갑작스레 부자가 된 사람들의 몰염치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엄중히 고발하는 또 다른 대목이다(오늘 제 1독서 참조).

    마지막 구절은 대개 25년쯤 뒤에 사마리아의 포위함락(B.C. 722-721)과 더불어 있게 될 북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안심하고 흥청대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폭발하려는 찰나에 있는 화산 입구에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 자시이 불을 당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재물이 무엇보다도 특히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어 버릴 때 그 재물은 선동과 반란을 야기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즉 한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을 갈라놓음으로써 외부적인 것이 됐든 내부적인 것이 됐든 어떤 공격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회로 만들어 버린다. 사마리아 왕국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그 세력이 약화되어 아주 쉽게 앗시리아 침략자의 전리품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아주 손쉽게 갑작스레 돈을 번 사람들의 무절제한 사치풍조가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지게하고 또한 의지가 박약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러한 행동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렇게 해서 어처구니없이 낭비를 일삼는 ‘소비주의’가 오늘날 모든 사회계층에 만연되어 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생필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이러한 풍조가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전염되듯 퍼져가는 이 모든 풍조는 마침내 특별히 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소수 특권층의 사람들을 거스려 절망적인 욕구불만과 거센 분노를 자아낸다. 이렇게 재물이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야기시킬 수 있다.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로지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 버릴 때 찾아 드는 모든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루가 16,19-21).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화려한 의복에서부터 진수성찬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여유가 있었고, 가난한 거지는 그 부자들이 식사 후 손을 깨끗이 하기 위해 식탁 밑으로 버려지는 빵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으며, 게다가 뗘돌아다니는 개들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가 ‘자기 집 대문간에’ 드러누워 있었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잘 살도록 태어났고 그 거지는 고통 중에 살도록 마련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오늘날에도 아무런 종교적 감각은 갖고 있지 않으나 자기 재물을 정당화시키는 이상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다.

    죽음의 순간에는 갑자기 장면이 뒤바뀐다 :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이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22-23절).

    여기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지고 있다. 라자로는 유다적 표현으로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을 식탁에 자리잡게 되고, 반면에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거꾸로 떨어져 심한 괴로움과 고통을 겪게 된다. 지금, 그 부자는 예수께서 그 다음 구절에서 최상의 기교로 설명해 주시는 그와 아브라함 사이의 환상적인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자기의 전 생애 동안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이던 그 부자의 정신상태는 여전하다. 즉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은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대답하였다”(24-26절).

    저 세상에 대한 순전히 상상적인 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저 세상을 서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 즉 기쁨의 세계와 고통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이다. “심판 후에는 고통의 구렁과 위로의 자리가, 그리고 지옥의 용광로와 에덴의 복락이 서로 마주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제 4에스드라세(7,36)는 기록하고 있다. 의로운 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갈증과 극심한 고통으로 이루어지는 (제 4에스 8,59) 죄인들의 형벌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제 4에스 7,58).

    그러므로 ‘부자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죽은 자들의 세계를 재미있게 묘사해 주는 ‘신곡’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전통적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사가 펼쳐지는 동안 늘 겨기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혹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a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하는 대답은 바로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체념적인 무기력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만들어 줄 수가 있다 :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의해 손상된 모든 균형을 바로잡아 주실 만큼 우리를 생각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마지막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잇는 것은 무한한 희망이 된다. 그렇지만 종교란 인간들의 불의나 압박 앞에서 하나의 ‘진정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언제나 부자로 하여금 거드름을 피게 하는 상황이 됐든 가난한 이로 하여금 공포감 속에서 움츠러들게 하는 상황이 됐든 그러한 모든 상황을 거스려 일어날 수 있는 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켜 세상 사물에서 마음을 끊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에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마침내 그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자기의 다섯 형제들만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28절) 경고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오직 하느님께서 저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어 주시리라는 이유만으로 불의를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히려 그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바뀌어질 수 있고 또한 바뀌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불의를 거스려 싸워 입증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이 바로 이 지상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노력에 의해 실현되기 시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특별히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으로 족하고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 것으로 족하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라자로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그 부자에게 대답하는 내용은 이에 관한 것이다 :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29-31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마음이 매우 굳어 있기 때문에 라자로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기로 작정했었다(요한 11,46-53 ; 12,10-11 참조).

    누구든 자기 자신의 보루나 편견으로부터 해방되고자 마음먹지 않으면 마치 유다인들이 예수를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마르 3,22)고 고발한 것처럼 아주 명백한 사실을 항상 왜곡해서 해석하게 될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이러한 내용은 어떤 상황에도 다 적합한 것이지만 특히 재물에 관한 이야기할 때 더 적합하다. 어째서 그 부자는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의 마음을 닫았을까? 왜냐하면 우선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이사 58,7)고 반복해서 권고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하느님의 말씀에 그렇듯 완고하게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왜냐하면 재물을 소유하고서 모든 것을 다 소요한 양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소유한 모든 사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상실해 버려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소유의 양식에 의하면 나와 내가 가지고 잇는 것 사이에는 살아 있는 관계가 없다. 그것과 나는 사물이 되어 버리며 나는 사물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사물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체의식 즉 정신적 균형이 내가 사물들 –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 –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에 의한 존재양식은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 모두를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E. Fromm, Avere O essere?, Mondadori, Milano 1977, pp. 108-109).

    “예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음은 경제적 조건이나 또는 다른 조건, 가난이나 부유함을 마니교적 자세로 특별히 우대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현사회-경제적 상황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는 점이다”(R. Fabris in I Vangeli, Cittadella Ed, Assisi 1975,  pp.1174-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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