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주님 세례 축일

 

주님 세례 축일





        1. 성민호 신부(가)/ 2                      2. 최정오 신부(가)/ 4


        3. 조옥진 부제(가)/ 6                      4. 양주열 부제(가)/ 9


        5. 최인호 작가(가)/ 10             6. 체험과 신앙(가)/ 12


        7.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가)/ 13  


1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성민호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요한 세자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으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셨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공현 대축일날, 예수께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알려주신 사실을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시고 더욱이 삼위일체이신 성삼의 발현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천주 성자이심을 다시 한번 더욱 확실하게 선포하신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 심부름꾼에 불과한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천주 성자로서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시기에 구태여 어떠한 세례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죄인들이나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 점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도 퍽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황송하고 두려운 나머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제게 오십니까?”하면 굳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하자는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주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동시에 직접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삼위일체의 현존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장엄하게 공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세례는 성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선구자로서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의 탁월한 인품에 매혹되고 엄격한 생활과 훌륭한 가르침에 감동되어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장차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와의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로써 요한은 장차 주님이 베푸실 세례야말로 구원과 직결되는 근본적인 세례로서 인간의 죄를 태워 없애버리는 동시에 성령의 강림으로 사람을 새로이 탄생시키는 재생의 성사임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과연 요한의 예언대로 주님은 후에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으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삼의 이름으로 이 신비스럽고 놀라운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신비체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하찮은 우리를 뽑으시어 지존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세례의 은총이야말로 참으로 큰 은혜이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특은입니다.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하느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가 이처럼 중대하고 필수적인 성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셨고 친히 세례를 받으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될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정하신 이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은 간단하지만 효과가 이처럼 엄청나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의 작용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면서 세례 때 약속한 것처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세례의 특은을 간직하며 일생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다소나마 보답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존하신 천주 성자께서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에 강생하시어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마치 죄인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늘을 열리게 하였고 성부와 성령을 동원시켰으며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30년간의 조용했던 사생활을 마치고 구세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날이며, 동시에 세례의 신비를 보여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바오로 사도는 아주 똑똑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4).




따라서 우리도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하며, 결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명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세례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 구원사업에 한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각오이어야 하며 한 해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이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면서 금년 한 해도 주님 안에서 보람있게 지냅시다.












2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세례받으신 예수님


                                                        최정오 신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는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16).




우리는 부활과 성탄 때가 되면 그때까지 교리를 배우며 익혀오던 예비자들이 주님의 아들 딸들이 되고 구원에 대한 확실한 외적 표시로서 성세성사 곧 세례받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영세하신 분은 물론, 이번 성탄 때 영세하신 분들은 예비자라는 긴 교육기간을 이제야 마친다는 안도감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구원에 확고한 보증이 곧 영세였기에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분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시란 말인가?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영세를 받지 않으셨더라면 구원받지 못하실 분이었던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가 복음서는 이런 질문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하고 회개의 세례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세례가 그분의 공생활의 출발점이었음을 가르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 나타난 때는 예수님이 30세 되시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예루살렘 순례 이후 18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나자렛에 사시면서 시골 목수노릇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성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할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이 왔다는 어떤 표시를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때 마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하느님 나라를 강론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보시고 이제 당신의 때가 온 것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당신의 때가 왔음을 세례자 요한을 보고 다시 한번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결심하셨고,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인 셈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이사야 42장을 보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야훼의 종」이 등장하며, 이분이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가르칩니다. “나의 종을 보라……내가 뽑은 자에 대하여 나의 영혼이 만족하느니라”하고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심을 암시합니다.


또 53장에는 그 종에 대하여 “야훼께서는 우리 모든 이의 잘못을 그에게 지우셨도다”하고 우리를 구하실 분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실 것인가를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복음말씀이 이를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표시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께 대한 예수님의 복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바쳐 비천한 종이 되고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실에서 두 가지 교리를 배웁니다.




1.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명은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이 사명을 완수하시는데 권력과 영광보다는 비참한 죽음과 십자가로 그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을 예수님이 성부께 당신의 위치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신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대답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제 완전히 당신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는 일종의 서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표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도 스스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에서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30년의 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성세로써 당신 사명을 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세받기 전의 방황을 모두 청산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갖고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로부터 메시아로 인정받은 반면, 예수님은 마땅히 야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하나의 서약입니다. 우리의 세례도 같습니다. 우리가 온갖 잡신에 마음이 이끌리고 만신창이가 되고, 고통으로 괴로와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일련의 인간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세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사업을 번뇌와 고통과 죽음으로 완수하셨듯이 우리도 생활의 불안정에서 오는 온갖 고통 번뇌 괴로움 불신 그리고 비참과 절망까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에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세례」축일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3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조옥진 부제




인생행로에서 나그네인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길잡이로 삼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면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던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날은 인류 구세사의 중대한 한 사건으로 우리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가장 깊은 양심의 번뇌의 소리를 듣고 한번은 적어도 나는 무엇때문에 존재하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생의 여로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철인들이나 문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한결같이 인생을 가르켜 나그네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행인이 되어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각 가지의 생의 사건들로 희비의 연속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공짜로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동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때도 있고, 인생행로에서 만나는 타인들로부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 타인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와같이 길을 걷기도 원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기로 결심할 때도 있으며 남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바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그네인 인간은 때때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시련과 고초로 나그네인 서러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으며 드디어는 자신을 위하여 타인에게 악을 저지르기도 할 것입니다. 때문에 나그네인 인간은 타인을 만났을 때 그를 멸시할 수도 있고 타인이 나에게 귀찮은 존재로 나타났을 때 이를 박멸하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과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의 모순을 발견하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인생의 길잡이로 되어 주기를 애절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세적인 물질에서 부귀영화를 인생의 길잡이로 여겨 이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지마는, 여기 모이신




신자 여러분은 물질보다 오히려 2000년전 조그만 팔레스티나의 요르단강에서 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라는 인물에 전 인격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한 입문성사로써 물과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세례성사인 것이며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성사의 신비성에 대해서 다함께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메마른 사막을 걷다가 불타는 목마름때문에 기진맥진하여 푸른 샘을 찾습니다.




인간은 드디어 물을 만나 마음껏 목을 추기다 못해 온 몸을 물 속에 담구어 버립니다. 물은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은 또 더러운 인간의 몸을 씻어 줍니다. 그래서 물은 또 정화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고뇌와 죄악의 더러움에서 인간은 자신을 씻으려 할 때 모든 종교들은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세례도 요르단강에서 죄인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시어 이 인간의 정화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하여 예수는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악이 없으신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씻기기 위해서 당신이 몸소 실천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물속에 잠긴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죄악에서 회개하며 신의 생명의 기쁨을 맛볼 것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물 속에 잠긴 예수는 또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는 뜻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고(1고린 3,5)”, 그리스도신자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져 거룩하게 된다”는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세례와 구원을 예수의 죽음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물은 잠긴다. 장례식이라는 뜻으로 물에 잠긴다는 사실은 무덤에 묻힌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세례행위는 구약의 충실한 야훼의 종, 즉 “고통당하는 종”의 숙명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희망이 없는 죽음이 아님을 절실히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물에서 몸을 담근후 수면위로 나타났을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은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이 공포의 말씀은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같이 죽고 부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례는 구원신앙의 표현이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기인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하여, 그의 구원계획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죽고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든 죄악과 불의에서 회개해야 하며 복음을 신앙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악에서 회개한 이는 복음의 진리가 인간 구원의 옥토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서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외우지 않았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을 모든 이들 앞에 고백하고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에 몸을 씻고 재계하는 기계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행위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는 동화되기를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모든 죄악에서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죄악의 무덤에 묻히고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며, 드디어는 지옥의 문을 부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서, 법에서, 죽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즉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명으로 이전하여 새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두고 생명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물은 외부로 더러움을 씻어 주지만 성령은 내부의 더러움, 즉 원죄나 본죄까지 말끔히 없애 줍니다. 그래서 세례 때에 성령으로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완고해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죄로 인해 말라버린 인간에게 침투하여 은총의 생기를 불어넣어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고 그리스도의 힘을 입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종말의 승리까지 힘차게 걷는 희망에 가득찬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인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기 때문에 나 혼자 구원될 수 없으며 타인을 만나 같이 동행할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깨끗한 물은 생명의 정화를 상징하지만 죽음과 죄에서 허덕이는 인류의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두차례의 세례, 즉 요르단강에서의 물의 세례와 갈바리아에서의 피의 세례가 바로 그리스도교 세례의 근원을 이루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바입니다.




예수의 생애는 바로 이 물의 세례에서 시작하여 피의 세례로 마친 것이라고 볼 때 예수를 따르고 믿는 우리 신자들이야말로 그와 운명을 함께하기를 요구한 것이 지당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행로가 주어질 때 우리는 실망과 고독의 골짜기에서 허덕일 수 없으며 비록 어려운 시련일 망정 나그네의 시련과 고충을 기쁨으로 알고 구원의 정착지인 영원한 생명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4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사랑 받기 위하여


                                                                양주열 신부




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커다란 주머니가 있습니다. 그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재물로, 명예나 권력으로, 쾌락으로 빈 주머니가 가득 채워지는 듯하지만 기쁨은 잠시뿐, 이내 비어버리고 마는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하여 인간의 삶은 또다시 고달파집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빈 주머니를 채우려는 노력의 연속인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마음을 열고 주머니 속을 들여다봅니다.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깊은가? 혹시 새는 구멍은 없는가? 이 속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요함 중에 떠오르는 깨달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한 처음 나를 사랑으로 내시고 나와 함께 하셨던 주님을 떠나온 허전함을 채우려는 열망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주머니를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고민스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는 정말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복음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라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고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시어, 겸손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자신을 구유에 눕히셨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목동들에게 천사들로 하여금 구세주가 나신 소식을 전하게 하고 당신을 가장 처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다음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백성이라 여겼던 유다인들이 아닌,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의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느님만을 섬기며 성령이 충만하여 살아오던 노인 시므온과 안나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을 찾아 먼저 다가오시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낮음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며,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란 바로 교만한 마음을 돌이켜 겸손되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자녀가 되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풍요로웠던 우리의 처음 시작을 기억합시다.        












5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최인호 베드로/ 작가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이 희곡에는 전형적인 비극의 인물로 복수의 화신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등장하는데 극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독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극중 내내 고민하던 햄릿은 결국 복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에서 방황하는 햄릿은 흔히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햄릿처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자유선택에 맡겨진 ‘선택의 인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죽하면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말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요한 1,27)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마태 3,6).




예수님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자 생명이자 빛이시므로 죄의 어둠은 있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백할 죄가 없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은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사양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 일들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단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초라한 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셨으므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마태 26,39)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죄많은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면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임을 예수님은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참조) 베드로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길보다 사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햄릿처럼 항상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선택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그 정답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6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체험과 신앙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체험이 없으면 산지식이라 수 없다, 한국 남자들은 모이기만하면 군대 체험으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가 좋은 부대에서 지내다 제대했다고 뽑낸다. 취사병으로 일했다는 사람이나 전방 철책선을 밤새워 지켰다는사람은 별로 없다. 모두가 자기 과시병에 걸려서 침소봉대를 하는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다보면 군대에 갔다 오지 뭇한 사람은 할말이 없어서 슬금슬금 구석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책을 통해서 군대생활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도 체험이 없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위로 제대한 사람은 한두마디 거들 수는 있으나 면제받은 사람은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체험은 귀중한 것


외국 사람에게 아무리 김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도 한번 맛을 보게 하는 것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다. 그래서 체험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이 있고 단체적인 체험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개에게 물린 적이 있으면 그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개라도 가까이 오면 은근히 마비 현상이 일어나고 자기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개인의 체험은 그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종살이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홍해를 걸어서 건너는 체험을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흥해를 건넜턴 그들의 체험은 민족의 하느님 체험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과거에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느님 사랑의 체험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600만명의 유다인들이 학살되어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체험


구약성서에는 모세나 엘리야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대화들은 하느님과 그들 개인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깨 바치는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르단강으로 가셨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 회개하시려고 가신 것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돌에게 모범을 보이시려고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고 성부깨서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예수님께 하나의 큰 체험이었다. 그 옆에 있턴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난 성령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이 체험은 예수님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체험으로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자신의 신원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신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시려고 길을 나서신다.




복음의 메세지


예수님의 사생활은 30년간 계속되었다. 목수로서의 사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분께서 음식을 짜게 잡수셨는지 맵게 잡수셨는지 노래는 잘 하셨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사생활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즉 메시아로서의 생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공생활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시작하신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잘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으셨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데 그 원인이 되셨고, 구세주로서의 임무시작에 있어서도 그 원동력이 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우리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례, 즉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은 새롭게 되셨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이 새롭게 변화되었는가? 만일 세례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나 별로 변한것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았는가?




우리는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세례을 받았을 때 뜨거운 감정이킵도 느쪘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체험했는가? 과연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세례에 대하여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령 체험을 오늘의 세례자들에게도 체험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 그 체험을 못 잊어하면서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만일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체험이 없었다면 체험을 쇄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또한 일상의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할 것이다.












7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


 


내가 예수회 수도훤에 입회하게된 동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결정적인 이유가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서을 대신하교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예수회의 유명한 학자들처럼 되고 싶기도 했고, 복잡한 세상사를 떠나서 조용하게 道(도)를 깨우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예수회에서 살게된 깊은 뜻은 요즘에 와서야 조금씩 깨우치게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뭔가 새릅게 살아야겠다는 그 당시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수도생활을 택하도록 이끈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수도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갸야하나? 이 두 가지의 기로에 서서 그 어느 것도 깁게 선택하거나 포기하기가 나로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며칠간 기도도 해보고 여러 사람들과 밤늦도록 대화도 해보았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급기야 나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비뽑기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나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예수회의 입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기한이 끝나기 전날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내가 어차피 양단간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면 무조건 물 속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일단 선택하고 난 다음에 차차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아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예수회의 수련자가 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10시경에 잠을 잘 때까지 빈틈이 없는 하루를 지냈다. 이러한 수련 생활을 통하여 과거의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태어남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나에게 특별히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나 중심으로 살다가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 중심의 생할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나의 삶의 뿌리를 옮겨서 마치 다른 나무에 접목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우선 집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 맛, 늦게 잠자는 버릇, 소리나게 음식을 먹던 습관, 큰 소리로 말하는 버릇, 남이 말할 때 딴전 피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골라서 하는 경향, 경쟁심 등등을 포기하기란 어떤 때는 죽기보다 싫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작은 포기와 희생을 통하여 나 자신이 새로워짐도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을 읽어보면 성모 마리아님과 요셉의 가정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온 인류를 위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물로 베푸는 세례와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단순히 통회의 세례이며, 사람들이 통회를 원한다는 징표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온 생애에 걸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서에서 이 새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2장 12절).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는 새 삶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성사를 그리스도의 몸(나무)에 접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세례를 예수님의 몸 안에 뿌리를 두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여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리하여 나의 삶을 본받아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211.215.187.241 제노베파: 강론모음 마태3장 [01/28-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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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주님 세례 축일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주님 세례 축일<1>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마태오 복음11장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가 도래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1독서에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속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즉 이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듯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고,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의 발바닥의 때만큼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과 자비에 희망을 걸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얼마되지 않는 빚을 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기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에게 베풀었던 자비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낙태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어떤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는 가정이며, 시어머니는 레지오 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며느리가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못 낳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온화한 시어머니였지만 집에서는 그렇게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이번에도 며드리는 아이를 가졌는데 초음파검사를 해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낙태를 강요했습니다. 남편은 아무말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말만 따랐습니다. 며느리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낙태를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우리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하면서 며느리를 끌고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나온 아이는 사내 아이였습니다. 즉 병원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풍지박살난 그 집은 어디론지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적어도 4천5백만명의 무죄한 태아가 인공유산으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1백 50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웬만한 시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 이렇게 무죄한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 의해서 살해당해 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두 살 미만의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원치 않는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입니까? 남자가 아니라 태어나면 구박만 받을 것 같아서 입니까?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서 세상을 힘들게 살 것을 염려해서 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신자들은 교회에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96.3%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5.6%가 인공임신중절수술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모본당 신자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얻어냈습니다. 낙태에 대한 질문에서 낙태행위가 죄악이라고 생각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낙태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가 넘는 53.2%가 나타났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둑질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나약한 생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라 하여도 꺽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권고 사항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그래서 낙태를 한다면 우리중에 자신있게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회이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입는 성사로써 하느님은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어떤 조건도 없이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이것은 성인이 아닌이상 말하기가 곤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매번 고백성사를 보지만 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기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위해서는 매일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중에 “국산 다 그렇지 뭐!”, “조선 것은 때려야 말을 들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품중에는 대충 만들어서 파는 불량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 100이면 100 다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한 것을 느낄 것이며, 다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이 회개를 대충하면 불량신자가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뭐 그래!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라고 뭐 다른거 있나… 열심한 신자가 이런 소릴 들으면 열을 올리며 “하느님 믿는 사람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라. 몇 명이 그런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를 봐라.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냐? 추기경님도 신자고 우리 본당수녀님도 신자다. 아마 열을 올리며 되는말 안되는말을 다 동원해서 설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하지 못한 신자는, 그런 얘기가 나오면 끼고 있던 묵주반지도 슬며시 빼서 주머니에 넣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량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그것은 바로 회개를 했으면 그것을 삶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내가 믿는 것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투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해시대 순교하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에 투신하는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그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받은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난주의 공현축일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례로 예수님은 사생활을 마감하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세례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위한 출정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독서에서는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즉 이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11장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듯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비록 볼품없지만, 내세울 것 없지만,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잘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없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서 내세우고,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나를 인정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간다면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다시 돌아올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과 자비에 희망을 걸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얼마되지 않는 빚을 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기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에게 베풀었던 자비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낙태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는 가정이며, 시어머니는 레지오 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집 며느리가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못낳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온화한 시어머니였지만 집에서는 그렇게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이번에도 며드리는 아이를 가졌는데 초음파검사를 해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낙태를 강요했습니다. 남편은 아무말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말만 따랐습니다. 며느리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낙태를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우리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하면서 며느리를 끌고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나온 아이는 사내 아이였습니다. 즉 병원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풍지박살난 그 집은 어디론지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적어도 4천5백만명의 무죄한 태아가 인공유산으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1백 50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왠만한 시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 이렇게 무죄한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 의해서 살해당해 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두 살 미만의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원치않는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입니까? 남자가 아니라 태어나면 구박만 받을 것 같아서 입니까?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서 세상을 힘들게 살 것을 염려해서 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신자들은 교회에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96.3%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5.6%가 인공임신중절수술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모본당 신자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얻어냈습니다. 낙태에 대한 질문에서 낙태행위가 죄악이라고 생각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낙태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가 넘는 53.2%가 나타났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둑질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느님을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의도대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나약한 생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관리인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라 하여도 꺽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그래서 낙태를 한다면 우리중에 자신있게 세상에 태어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이나 성별로 존경받고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회이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반드시 자신이 관리인임을 명심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입는 성사로써 하느님은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어떤 조건도 없이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매번 고백성사를 보지만 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기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무척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회개가 아니라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하느님 보시기에 어떤지 생각해 보는 자신에 대한 매일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중에 “국산 다 그렇지 뭐!”, “조선 것은 때려야 말을 들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품중에는 대충 만들어서 파는 불량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 100이면 100 다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한 것을 느낄 것이며, 다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이 회개를 대충하면 불량신자가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뭐 그래!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라고 뭐 다른거 있나… 열심한 신자가 이런 소릴 들으면 열을 올리며 “하느님 믿는 사람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라. 몇 명이 그런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를 봐라.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냐? 추기경님도 신자고 우리 본당수녀님도 신자다. 아마 열을 올리며 되는말 안되는말을 다 동원해서 설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하지 못한 신자는, 그런 얘기가 나오면 끼고 있던 묵주반지도 슬며시 빼서 주머니에 넣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량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를 했으면 그것을 삶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내가 믿는 것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투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해시대 순교하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에 투신하는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그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받은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우리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는 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세례 축일<학생>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고 우리를 그 사랑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세례자 요한의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메시아가 도래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1독서에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속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어떤 학생은 이런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나를 구속하고 있는 지겨운 시험과 보충수업등에서 나를 구하소서. 아마 이런 청은 안들어주실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 22절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고,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저와, 별것도 아닌 여러분이 우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의 발바닥의 때만큼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옛날에 눈먼 소년과 귀머거리 소녀가 사랑을 했습니다. 둘은 너무 사랑해서 항상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나무아래서 눈먼 소년은 매일 그 소녀에게 시를 써서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귀머거리 소녀는 매일 소년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소년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아서 소년에게 보여주며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 그림을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애절한 사랑은 하느님을 감동시켰고, 마침내 하느님이 천사를 불렀습니다. “가서 저 젊은 두 연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오도록 해라”. 천사는 먼저 소녀에게 갔습니다. 소녀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디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되어서 당신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려고 왔습니다. 소원을 말해보시오!

    질문: 소녀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소년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소녀는 천사님 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사랑하는 소년이 계속 장님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일 소년이 눈을떠서 나의 추한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나보다 더 예쁜 애들을 본다면 소년은 저에게서 떠나갈 것입니다.  

    천사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실망한 천사는 이번에는 소년에게 갔습니다. 헤이 소년! 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디 소원하나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전 소원이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만 옆에 있으면 됩니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 소녀가 계속 귀머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녀는 그에게로 떠나갈 것입니다.

    천사는 또 한번 실망하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소년과 소녀는 무척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내가 소년과 소녀였다면 어떤 소원을 말했을까요?

    성숙한 사랑이란 나를 위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도 노력없이는 성숙될 수 없습니다. 항상 상대방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눈먼 소년과 귀머거리 소녀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가 뚤려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귀 기울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보면 혜성이가 엄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디 할 수 있어” 그리고 엄지가 자신의 남편인 마동탁을 위해서 한번만 져달라고 부탁하자 그것마저도 들어줍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잠시 예수님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러진 갈대의 마음과, 깜박거리는 등불의 심지의 마음도 헤아리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러진 갈대요 깜박거리는 등불의 심지라고 생각해 본다면 더 쉽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리도 짧고, 앉은키나 선 키나 비슷하고,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다고 합시다. 아니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합시다. 성질도 더럽고, 이기적이고, 혼자 잘난체 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져도 내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혜성이가 엄지한테 말하듯 우리도 예수님께 “ 예수님 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오셔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셨고, 예수님께 세례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즉 그분의 시종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겸손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세례자 요한이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숭을 받고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 이십니까? 라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 친구들끼리 얘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무지무지하게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 사랑에 응답해야 하며,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user#0 님의 말:

     

    주님 세례 축일<1>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마태오 복음11장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가 도래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1독서에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속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즉 이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듯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고,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의 발바닥의 때만큼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과 자비에 희망을 걸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얼마되지 않는 빚을 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기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에게 베풀었던 자비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낙태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어떤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는 가정이며, 시어머니는 레지오 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며느리가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못 낳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온화한 시어머니였지만 집에서는 그렇게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이번에도 며드리는 아이를 가졌는데 초음파검사를 해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낙태를 강요했습니다. 남편은 아무말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말만 따랐습니다. 며느리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낙태를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우리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하면서 며느리를 끌고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나온 아이는 사내 아이였습니다. 즉 병원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풍지박살난 그 집은 어디론지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적어도 4천5백만명의 무죄한 태아가 인공유산으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1백 50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웬만한 시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 이렇게 무죄한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 의해서 살해당해 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두 살 미만의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원치 않는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입니까? 남자가 아니라 태어나면 구박만 받을 것 같아서 입니까?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서 세상을 힘들게 살 것을 염려해서 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신자들은 교회에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96.3%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5.6%가 인공임신중절수술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모본당 신자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얻어냈습니다. 낙태에 대한 질문에서 낙태행위가 죄악이라고 생각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낙태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가 넘는 53.2%가 나타났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둑질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나약한 생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라 하여도 꺽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권고 사항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그래서 낙태를 한다면 우리중에 자신있게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회이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입는 성사로써 하느님은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어떤 조건도 없이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이것은 성인이 아닌이상 말하기가 곤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매번 고백성사를 보지만 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기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위해서는 매일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중에 “국산 다 그렇지 뭐!”, “조선 것은 때려야 말을 들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품중에는 대충 만들어서 파는 불량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 100이면 100 다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한 것을 느낄 것이며, 다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이 회개를 대충하면 불량신자가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뭐 그래!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라고 뭐 다른거 있나… 열심한 신자가 이런 소릴 들으면 열을 올리며 “하느님 믿는 사람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라. 몇 명이 그런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를 봐라.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냐? 추기경님도 신자고 우리 본당수녀님도 신자다. 아마 열을 올리며 되는말 안되는말을 다 동원해서 설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하지 못한 신자는, 그런 얘기가 나오면 끼고 있던 묵주반지도 슬며시 빼서 주머니에 넣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량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그것은 바로 회개를 했으면 그것을 삶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내가 믿는 것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투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해시대 순교하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에 투신하는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그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받은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난주의 공현축일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례로 예수님은 사생활을 마감하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세례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위한 출정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독서에서는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즉 이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11장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듯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비록 볼품없지만, 내세울 것 없지만,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잘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없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서 내세우고,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나를 인정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간다면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다시 돌아올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과 자비에 희망을 걸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얼마되지 않는 빚을 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했기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에게 베풀었던 자비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낙태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는 가정이며, 시어머니는 레지오 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집 며느리가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못낳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온화한 시어머니였지만 집에서는 그렇게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이번에도 며드리는 아이를 가졌는데 초음파검사를 해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낙태를 강요했습니다. 남편은 아무말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말만 따랐습니다. 며느리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낙태를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우리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하면서 며느리를 끌고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나온 아이는 사내 아이였습니다. 즉 병원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풍지박살난 그 집은 어디론지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적어도 4천5백만명의 무죄한 태아가 인공유산으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1백 50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왠만한 시 하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 이렇게 무죄한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 의해서 살해당해 왔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두 살 미만의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원치않는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입니까? 남자가 아니라 태어나면 구박만 받을 것 같아서 입니까?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서 세상을 힘들게 살 것을 염려해서 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신자들은 교회에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96.3%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5.6%가 인공임신중절수술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모본당 신자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얻어냈습니다. 낙태에 대한 질문에서 낙태행위가 죄악이라고 생각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낙태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가 넘는 53.2%가 나타났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둑질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느님을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의도대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나약한 생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관리인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라 하여도 꺽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원치않는다고 해서, 여자 아이라고해서, 태아가 장애아라고 해서…그래서 낙태를 한다면 우리중에 자신있게 세상에 태어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이나 성별로 존경받고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요,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회이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반드시 자신이 관리인임을 명심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입는 성사로써 하느님은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어떤 조건도 없이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매번 고백성사를 보지만 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기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무척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회개가 아니라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하느님 보시기에 어떤지 생각해 보는 자신에 대한 매일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중에 “국산 다 그렇지 뭐!”, “조선 것은 때려야 말을 들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품중에는 대충 만들어서 파는 불량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 나라 사람 100이면 100 다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한 것을 느낄 것이며, 다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이 회개를 대충하면 불량신자가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뭐 그래!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라고 뭐 다른거 있나… 열심한 신자가 이런 소릴 들으면 열을 올리며 “하느님 믿는 사람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라. 몇 명이 그런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를 봐라.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냐? 추기경님도 신자고 우리 본당수녀님도 신자다. 아마 열을 올리며 되는말 안되는말을 다 동원해서 설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하지 못한 신자는, 그런 얘기가 나오면 끼고 있던 묵주반지도 슬며시 빼서 주머니에 넣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량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를 했으면 그것을 삶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내가 믿는 것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투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해시대 순교하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믿음에 투신하는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그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받은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우리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는 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세례 축일<학생>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랑밖에는 모르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고 우리를 그 사랑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와 세례자 요한의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메시아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메시아가 도래하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1독서에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는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속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어떤 학생은 이런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나를 구속하고 있는 지겨운 시험과 보충수업등에서 나를 구하소서. 아마 이런 청은 안들어주실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이루어 졌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 22절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1독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고,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저와, 별것도 아닌 여러분이 우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의 발바닥의 때만큼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옛날에 눈먼 소년과 귀머거리 소녀가 사랑을 했습니다. 둘은 너무 사랑해서 항상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나무아래서 눈먼 소년은 매일 그 소녀에게 시를 써서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귀머거리 소녀는 매일 소년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소년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아서 소년에게 보여주며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 그림을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애절한 사랑은 하느님을 감동시켰고, 마침내 하느님이 천사를 불렀습니다. “가서 저 젊은 두 연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오도록 해라”. 천사는 먼저 소녀에게 갔습니다. 소녀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디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되어서 당신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려고 왔습니다. 소원을 말해보시오!

    질문: 소녀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소년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소녀는 천사님 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사랑하는 소년이 계속 장님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일 소년이 눈을떠서 나의 추한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나보다 더 예쁜 애들을 본다면 소년은 저에게서 떠나갈 것입니다.  

    천사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실망한 천사는 이번에는 소년에게 갔습니다. 헤이 소년! 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디 소원하나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전 소원이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만 옆에 있으면 됩니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 소녀가 계속 귀머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녀는 그에게로 떠나갈 것입니다.

    천사는 또 한번 실망하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소년과 소녀는 무척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내가 소년과 소녀였다면 어떤 소원을 말했을까요?

    성숙한 사랑이란 나를 위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도 노력없이는 성숙될 수 없습니다. 항상 상대방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눈먼 소년과 귀머거리 소녀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가 뚤려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귀 기울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보면 혜성이가 엄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디 할 수 있어” 그리고 엄지가 자신의 남편인 마동탁을 위해서 한번만 져달라고 부탁하자 그것마저도 들어줍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잠시 예수님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러진 갈대의 마음과, 깜박거리는 등불의 심지의 마음도 헤아리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러진 갈대요 깜박거리는 등불의 심지라고 생각해 본다면 더 쉽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리도 짧고, 앉은키나 선 키나 비슷하고,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다고 합시다. 아니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합시다. 성질도 더럽고, 이기적이고, 혼자 잘난체 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져도 내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혜성이가 엄지한테 말하듯 우리도 예수님께 “ 예수님 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오셔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셨고, 예수님께 세례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즉 그분의 시종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겸손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세례자 요한이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숭을 받고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 이십니까? 라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 친구들끼리 얘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무지무지하게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 사랑에 응답해야 하며,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user#0 님의 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왜 이토록 미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서 머리를 수그리셔야만 할까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일까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어찌하여 물로 씻겨지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13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오셨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요한은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청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거절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요? 지는 아직 당신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도 받지 못했는데 말입니다요….”성령의 세례는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대신하게 될 것이며,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지어 줄, 바로 지금의 우리가 받고 있는 세례입니다. 요한이 감히 사양할 만 합니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g o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과 세례자 요한을 합하여 “우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나”라고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잘 아셨고, 결국 예수님의 자신의 일과 세례자 요한의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 같은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올바른 사람도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뜻을 밝히기 위해 세례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를 인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루와즈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신의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나오는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물을 거룩하게 하고 이것으로써 당신 죽음에 앞서 세우실 셰례의 물에 권능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예식으로써 유다인의 세례를 폐지하시고, 예수님의 세례를 세우려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한 행위는 메시아와 선구자의 사명에 가장 어울리는 완전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오시고, 또 세례자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공식적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이 보였다.

    세례를 받으신 후 물어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비롯하였으며, 예수님의 활동의 시작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비롯됩니다(성령으로 잉태). 이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준비하시면서 광야로 나가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주 야훼의 영이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는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라…,’”(이사야61,1). 모든 사명을 주 하느님께로부터 비록쇠지만, 사명을 수행하도록 재촉하시며 붙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은 단지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단 하나의 아들, 영원하신 본성에 있어서 하느님과 동등하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벌써 시편(2,7)에서도 예언되었고, 성모님께도 그것을 천사가 알려 주었습니다(루가1,35).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셨고,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을 취하시고, 죄인으로서의 태도를 가지시고 요르단 강에 오셨다는 것은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살아가신 예수님의 겸손, 죽기까지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겸손할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더욱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묵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겸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4. user#0 님의 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왜 이토록 미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서 머리를 수그리셔야만 할까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일까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어찌하여 물로 씻겨지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13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오셨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요한은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청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거절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요? 지는 아직 당신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도 받지 못했는데 말입니다요….”성령의 세례는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대신하게 될 것이며,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지어 줄, 바로 지금의 우리가 받고 있는 세례입니다. 요한이 감히 사양할 만 합니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g o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과 세례자 요한을 합하여 “우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나”라고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잘 아셨고, 결국 예수님의 자신의 일과 세례자 요한의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 같은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올바른 사람도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뜻을 밝히기 위해 세례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를 인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루와즈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신의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나오는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물을 거룩하게 하고 이것으로써 당신 죽음에 앞서 세우실 셰례의 물에 권능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예식으로써 유다인의 세례를 폐지하시고, 예수님의 세례를 세우려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한 행위는 메시아와 선구자의 사명에 가장 어울리는 완전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오시고, 또 세례자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공식적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이 보였다.

    세례를 받으신 후 물어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비롯하였으며, 예수님의 활동의 시작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비롯됩니다(성령으로 잉태). 이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준비하시면서 광야로 나가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주 야훼의 영이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는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라…,’”(이사야61,1). 모든 사명을 주 하느님께로부터 비록쇠지만, 사명을 수행하도록 재촉하시며 붙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은 단지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단 하나의 아들, 영원하신 본성에 있어서 하느님과 동등하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벌써 시편(2,7)에서도 예언되었고, 성모님께도 그것을 천사가 알려 주었습니다(루가1,35).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셨고,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을 취하시고, 죄인으로서의 태도를 가지시고 요르단 강에 오셨다는 것은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살아가신 예수님의 겸손, 죽기까지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겸손할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더욱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묵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겸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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