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1. 성민호 신부(가)/ 2 2. 최정오 신부(가)/ 4
3. 조옥진 부제(가)/ 6 4. 양주열 부제(가)/ 9
5. 최인호 작가(가)/ 10 6. 체험과 신앙(가)/ 12
7.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가)/ 13
1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성민호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요한 세자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으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셨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공현 대축일날, 예수께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알려주신 사실을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시고 더욱이 삼위일체이신 성삼의 발현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천주 성자이심을 다시 한번 더욱 확실하게 선포하신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 심부름꾼에 불과한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천주 성자로서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시기에 구태여 어떠한 세례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죄인들이나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 점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도 퍽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황송하고 두려운 나머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제게 오십니까?”하면 굳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하자는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주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동시에 직접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삼위일체의 현존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장엄하게 공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세례는 성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선구자로서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의 탁월한 인품에 매혹되고 엄격한 생활과 훌륭한 가르침에 감동되어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장차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와의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로써 요한은 장차 주님이 베푸실 세례야말로 구원과 직결되는 근본적인 세례로서 인간의 죄를 태워 없애버리는 동시에 성령의 강림으로 사람을 새로이 탄생시키는 재생의 성사임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과연 요한의 예언대로 주님은 후에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으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삼의 이름으로 이 신비스럽고 놀라운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신비체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하찮은 우리를 뽑으시어 지존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세례의 은총이야말로 참으로 큰 은혜이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특은입니다.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하느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가 이처럼 중대하고 필수적인 성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셨고 친히 세례를 받으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될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정하신 이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은 간단하지만 효과가 이처럼 엄청나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의 작용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면서 세례 때 약속한 것처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세례의 특은을 간직하며 일생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다소나마 보답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존하신 천주 성자께서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에 강생하시어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마치 죄인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늘을 열리게 하였고 성부와 성령을 동원시켰으며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30년간의 조용했던 사생활을 마치고 구세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날이며, 동시에 세례의 신비를 보여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바오로 사도는 아주 똑똑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4).
따라서 우리도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하며, 결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명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세례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 구원사업에 한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각오이어야 하며 한 해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이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면서 금년 한 해도 주님 안에서 보람있게 지냅시다.
2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세례받으신 예수님
최정오 신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는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16).
우리는 부활과 성탄 때가 되면 그때까지 교리를 배우며 익혀오던 예비자들이 주님의 아들 딸들이 되고 구원에 대한 확실한 외적 표시로서 성세성사 곧 세례받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영세하신 분은 물론, 이번 성탄 때 영세하신 분들은 예비자라는 긴 교육기간을 이제야 마친다는 안도감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구원에 확고한 보증이 곧 영세였기에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분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시란 말인가?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영세를 받지 않으셨더라면 구원받지 못하실 분이었던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가 복음서는 이런 질문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하고 회개의 세례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세례가 그분의 공생활의 출발점이었음을 가르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 나타난 때는 예수님이 30세 되시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예루살렘 순례 이후 18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나자렛에 사시면서 시골 목수노릇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성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할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이 왔다는 어떤 표시를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때 마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하느님 나라를 강론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보시고 이제 당신의 때가 온 것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당신의 때가 왔음을 세례자 요한을 보고 다시 한번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결심하셨고,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인 셈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이사야 42장을 보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야훼의 종」이 등장하며, 이분이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가르칩니다. “나의 종을 보라……내가 뽑은 자에 대하여 나의 영혼이 만족하느니라”하고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심을 암시합니다.
또 53장에는 그 종에 대하여 “야훼께서는 우리 모든 이의 잘못을 그에게 지우셨도다”하고 우리를 구하실 분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실 것인가를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복음말씀이 이를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표시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께 대한 예수님의 복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바쳐 비천한 종이 되고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실에서 두 가지 교리를 배웁니다.
1.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명은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이 사명을 완수하시는데 권력과 영광보다는 비참한 죽음과 십자가로 그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을 예수님이 성부께 당신의 위치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신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대답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제 완전히 당신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는 일종의 서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표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도 스스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에서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30년의 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성세로써 당신 사명을 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세받기 전의 방황을 모두 청산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갖고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로부터 메시아로 인정받은 반면, 예수님은 마땅히 야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하나의 서약입니다. 우리의 세례도 같습니다. 우리가 온갖 잡신에 마음이 이끌리고 만신창이가 되고, 고통으로 괴로와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일련의 인간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세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사업을 번뇌와 고통과 죽음으로 완수하셨듯이 우리도 생활의 불안정에서 오는 온갖 고통 번뇌 괴로움 불신 그리고 비참과 절망까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에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세례」축일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3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조옥진 부제
인생행로에서 나그네인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길잡이로 삼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면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던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날은 인류 구세사의 중대한 한 사건으로 우리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가장 깊은 양심의 번뇌의 소리를 듣고 한번은 적어도 나는 무엇때문에 존재하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생의 여로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철인들이나 문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한결같이 인생을 가르켜 나그네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행인이 되어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각 가지의 생의 사건들로 희비의 연속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공짜로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동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때도 있고, 인생행로에서 만나는 타인들로부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 타인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와같이 길을 걷기도 원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기로 결심할 때도 있으며 남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바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그네인 인간은 때때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시련과 고초로 나그네인 서러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으며 드디어는 자신을 위하여 타인에게 악을 저지르기도 할 것입니다. 때문에 나그네인 인간은 타인을 만났을 때 그를 멸시할 수도 있고 타인이 나에게 귀찮은 존재로 나타났을 때 이를 박멸하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과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의 모순을 발견하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인생의 길잡이로 되어 주기를 애절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세적인 물질에서 부귀영화를 인생의 길잡이로 여겨 이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지마는, 여기 모이신
신자 여러분은 물질보다 오히려 2000년전 조그만 팔레스티나의 요르단강에서 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라는 인물에 전 인격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한 입문성사로써 물과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세례성사인 것이며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성사의 신비성에 대해서 다함께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메마른 사막을 걷다가 불타는 목마름때문에 기진맥진하여 푸른 샘을 찾습니다.
인간은 드디어 물을 만나 마음껏 목을 추기다 못해 온 몸을 물 속에 담구어 버립니다. 물은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은 또 더러운 인간의 몸을 씻어 줍니다. 그래서 물은 또 정화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고뇌와 죄악의 더러움에서 인간은 자신을 씻으려 할 때 모든 종교들은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세례도 요르단강에서 죄인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시어 이 인간의 정화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하여 예수는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악이 없으신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씻기기 위해서 당신이 몸소 실천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물속에 잠긴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죄악에서 회개하며 신의 생명의 기쁨을 맛볼 것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물 속에 잠긴 예수는 또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는 뜻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고(1고린 3,5)”, 그리스도신자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져 거룩하게 된다”는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세례와 구원을 예수의 죽음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물은 잠긴다. 장례식이라는 뜻으로 물에 잠긴다는 사실은 무덤에 묻힌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세례행위는 구약의 충실한 야훼의 종, 즉 “고통당하는 종”의 숙명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희망이 없는 죽음이 아님을 절실히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물에서 몸을 담근후 수면위로 나타났을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은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이 공포의 말씀은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같이 죽고 부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례는 구원신앙의 표현이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기인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하여, 그의 구원계획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죽고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든 죄악과 불의에서 회개해야 하며 복음을 신앙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악에서 회개한 이는 복음의 진리가 인간 구원의 옥토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서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외우지 않았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을 모든 이들 앞에 고백하고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에 몸을 씻고 재계하는 기계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행위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는 동화되기를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모든 죄악에서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죄악의 무덤에 묻히고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며, 드디어는 지옥의 문을 부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서, 법에서, 죽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즉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명으로 이전하여 새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두고 생명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물은 외부로 더러움을 씻어 주지만 성령은 내부의 더러움, 즉 원죄나 본죄까지 말끔히 없애 줍니다. 그래서 세례 때에 성령으로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완고해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죄로 인해 말라버린 인간에게 침투하여 은총의 생기를 불어넣어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고 그리스도의 힘을 입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종말의 승리까지 힘차게 걷는 희망에 가득찬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인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기 때문에 나 혼자 구원될 수 없으며 타인을 만나 같이 동행할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깨끗한 물은 생명의 정화를 상징하지만 죽음과 죄에서 허덕이는 인류의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두차례의 세례, 즉 요르단강에서의 물의 세례와 갈바리아에서의 피의 세례가 바로 그리스도교 세례의 근원을 이루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바입니다.
예수의 생애는 바로 이 물의 세례에서 시작하여 피의 세례로 마친 것이라고 볼 때 예수를 따르고 믿는 우리 신자들이야말로 그와 운명을 함께하기를 요구한 것이 지당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행로가 주어질 때 우리는 실망과 고독의 골짜기에서 허덕일 수 없으며 비록 어려운 시련일 망정 나그네의 시련과 고충을 기쁨으로 알고 구원의 정착지인 영원한 생명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4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사랑 받기 위하여
양주열 신부
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커다란 주머니가 있습니다. 그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재물로, 명예나 권력으로, 쾌락으로 빈 주머니가 가득 채워지는 듯하지만 기쁨은 잠시뿐, 이내 비어버리고 마는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하여 인간의 삶은 또다시 고달파집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빈 주머니를 채우려는 노력의 연속인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마음을 열고 주머니 속을 들여다봅니다.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깊은가? 혹시 새는 구멍은 없는가? 이 속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요함 중에 떠오르는 깨달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한 처음 나를 사랑으로 내시고 나와 함께 하셨던 주님을 떠나온 허전함을 채우려는 열망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주머니를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고민스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는 정말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복음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라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고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시어, 겸손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자신을 구유에 눕히셨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목동들에게 천사들로 하여금 구세주가 나신 소식을 전하게 하고 당신을 가장 처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다음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백성이라 여겼던 유다인들이 아닌,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의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느님만을 섬기며 성령이 충만하여 살아오던 노인 시므온과 안나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을 찾아 먼저 다가오시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낮음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며,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란 바로 교만한 마음을 돌이켜 겸손되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자녀가 되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풍요로웠던 우리의 처음 시작을 기억합시다.
5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최인호 베드로/ 작가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이 희곡에는 전형적인 비극의 인물로 복수의 화신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등장하는데 극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독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극중 내내 고민하던 햄릿은 결국 복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에서 방황하는 햄릿은 흔히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햄릿처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자유선택에 맡겨진 ‘선택의 인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죽하면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말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요한 1,27)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마태 3,6).
예수님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자 생명이자 빛이시므로 죄의 어둠은 있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백할 죄가 없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은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사양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 일들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단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초라한 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셨으므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마태 26,39)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죄많은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면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임을 예수님은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참조) 베드로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길보다 사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햄릿처럼 항상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선택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그 정답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6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체험과 신앙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체험이 없으면 산지식이라 수 없다, 한국 남자들은 모이기만하면 군대 체험으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가 좋은 부대에서 지내다 제대했다고 뽑낸다. 취사병으로 일했다는 사람이나 전방 철책선을 밤새워 지켰다는사람은 별로 없다. 모두가 자기 과시병에 걸려서 침소봉대를 하는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다보면 군대에 갔다 오지 뭇한 사람은 할말이 없어서 슬금슬금 구석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책을 통해서 군대생활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도 체험이 없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위로 제대한 사람은 한두마디 거들 수는 있으나 면제받은 사람은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체험은 귀중한 것
외국 사람에게 아무리 김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도 한번 맛을 보게 하는 것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다. 그래서 체험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이 있고 단체적인 체험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개에게 물린 적이 있으면 그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개라도 가까이 오면 은근히 마비 현상이 일어나고 자기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개인의 체험은 그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종살이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홍해를 걸어서 건너는 체험을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흥해를 건넜턴 그들의 체험은 민족의 하느님 체험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과거에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느님 사랑의 체험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600만명의 유다인들이 학살되어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체험
구약성서에는 모세나 엘리야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대화들은 하느님과 그들 개인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깨 바치는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르단강으로 가셨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 회개하시려고 가신 것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돌에게 모범을 보이시려고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고 성부깨서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예수님께 하나의 큰 체험이었다. 그 옆에 있턴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난 성령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이 체험은 예수님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체험으로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자신의 신원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신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시려고 길을 나서신다.
복음의 메세지
예수님의 사생활은 30년간 계속되었다. 목수로서의 사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분께서 음식을 짜게 잡수셨는지 맵게 잡수셨는지 노래는 잘 하셨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사생활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즉 메시아로서의 생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공생활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시작하신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잘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으셨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데 그 원인이 되셨고, 구세주로서의 임무시작에 있어서도 그 원동력이 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우리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례, 즉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은 새롭게 되셨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이 새롭게 변화되었는가? 만일 세례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나 별로 변한것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았는가?
우리는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세례을 받았을 때 뜨거운 감정이킵도 느쪘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체험했는가? 과연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세례에 대하여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령 체험을 오늘의 세례자들에게도 체험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 그 체험을 못 잊어하면서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만일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체험이 없었다면 체험을 쇄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또한 일상의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할 것이다.
7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
내가 예수회 수도훤에 입회하게된 동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결정적인 이유가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서을 대신하교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예수회의 유명한 학자들처럼 되고 싶기도 했고, 복잡한 세상사를 떠나서 조용하게 道(도)를 깨우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예수회에서 살게된 깊은 뜻은 요즘에 와서야 조금씩 깨우치게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뭔가 새릅게 살아야겠다는 그 당시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수도생활을 택하도록 이끈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수도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갸야하나? 이 두 가지의 기로에 서서 그 어느 것도 깁게 선택하거나 포기하기가 나로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며칠간 기도도 해보고 여러 사람들과 밤늦도록 대화도 해보았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급기야 나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비뽑기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나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예수회의 입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기한이 끝나기 전날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내가 어차피 양단간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면 무조건 물 속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일단 선택하고 난 다음에 차차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아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예수회의 수련자가 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10시경에 잠을 잘 때까지 빈틈이 없는 하루를 지냈다. 이러한 수련 생활을 통하여 과거의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태어남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나에게 특별히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나 중심으로 살다가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 중심의 생할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나의 삶의 뿌리를 옮겨서 마치 다른 나무에 접목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우선 집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 맛, 늦게 잠자는 버릇, 소리나게 음식을 먹던 습관, 큰 소리로 말하는 버릇, 남이 말할 때 딴전 피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골라서 하는 경향, 경쟁심 등등을 포기하기란 어떤 때는 죽기보다 싫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작은 포기와 희생을 통하여 나 자신이 새로워짐도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을 읽어보면 성모 마리아님과 요셉의 가정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온 인류를 위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물로 베푸는 세례와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단순히 통회의 세례이며, 사람들이 통회를 원한다는 징표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온 생애에 걸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서에서 이 새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2장 12절).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는 새 삶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성사를 그리스도의 몸(나무)에 접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세례를 예수님의 몸 안에 뿌리를 두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여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리하여 나의 삶을 본받아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제노베파: 강론모음 마태3장 [01/28-1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