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6 주일
1. 김창석 신부(가)/ 2 2. 강길웅 신부(가)/ 4
3. 임승필 신부(가)/ 6 4. 구본식 부제(가)/ 7
5. 교구 주보(가)/ 9 6. 최인호 작가(가)/ 10
1.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창녀(娼女)들이 먼저
김창석 신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오 21, 31).
예수의 충격적인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 말은 창녀들의 죄를 찬양한 것이 분명 아니다. 예수의 이 말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의식하고 한 말일 것이다.
그 당시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적 또는 형식적 종교인들이어서, 하느님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더 위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기들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회개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그 당시 사람들의 천시를 받던 세리나 창녀들은,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령 쇄신 설교가인 동시에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인 페리시 신부 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 불구의 자녀에게 더 큰사랑이 가는 부모의 심정을 알면 이해가 가는 말일 것이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이고, 또 하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다.” 또 장 자끄 루소는 “범죄는 부끄러워하되 죄인이라고 자인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고, 풀톤 쉰은 “죄인이 되는 것은 절망적이지만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희망적이다”라고 말했다.
대성인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랠 일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오다니 하고 놀래고, 둘째는 교황이나 주교, 신부들, 그리고 평소에 독실하기로 유명했던 신도 회장들이 천국에 보이지 않는데 놀래고, 셋째는 평소에는 소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많이 와 있는데 놀란다.”
<복음>을 보면 예수의 눈에는 겸손한 죄인이 교만한 성인보다 낮게 보인 경우가 많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19, 10)고 말했다.
요즈음 현실을 보아도 이런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성직자들이나 기타 직업적인 종교인들은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고, 교만하고, 체면만 차리고, 표리부동하게 겉만 꾸미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평소에는 더러 죄에 떨어지지만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겸손하고, 진지하고, 겉꾸밈이 없다.
이러나 양면적인 형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앙에 형식적인 신앙과 실질적인 신앙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두 가지 신앙은 같은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제는 다를 수가 있다.
형식적인 신앙은 머리로만 믿는 것이다. 머리로만 믿으니까 의심이 많다. 체면만 중요시하고, 불평이 많고, 비판적이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신앙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일단 집에 돌아가거나 직장에 나가면 기도를 전혀 안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생각조차 안 한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신자인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신자가 아닌 사람만도 못 하다는 평을 듣는다. 불우 이웃을 돕자는 권유를 받으면 거북한 반응을 보이거나 생색만 내려고 한다.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마음으로부터의 열심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실질적인 신앙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일요일뿐 아니고 다른 요일에도 교회에 나아가려고 애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직장이나 학교나 기타 장소에서도 틈만 있으면 하느님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한다. 불우 이웃 돕기를 솔선해서 하고 남몰래 도와 주고,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하지 않는다. 이러나 사람은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 친구들로부터 신자다운 신자라는 칭찬을 받는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형식적 신앙 없이도 실질적 신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환자들을 돕는 상록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많은 회원들이 매월 1천 원의 회비를 내서 한꺼번에 1천만 원씩을 만들어 나환자들을 돕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회원 중에 직업적 종교인들이나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아무 종교도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는 사실이다.
어느 요정의 여종업원들이 상록회의 위원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마음씨는 일종의 종교심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죄스런 생활을 하고 있음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속죄의 뜻으로 한 달에 1천 원씩이지만 나환자들을 돕는데 보람을 느끼는 마음―이런 마음이 일종의 종교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천국은 본점이고 우리 마음은 천국의 지점이란 말이 있는데,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토인비가 말하기를 “오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문화나 과학이 아니라 종교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종교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2.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자신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18,25~28 (못된 행실을 털어 버리고 돌아서면 자기 목숨을 건질 것이다)
제2독서 필립 2,1~11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
복 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신앙의 열매를 세속의 눈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요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형편없이 개판으로 살았던 자들이 하느님의 칭찬을 받아 천당에 일찍 들어가는가 하면 열심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들은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받아 천당문 밖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 말씀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마태 21,31).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이요 충격적인 발언입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도대체 창녀들만 못하며 도둑이나 세리만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다툰 뒤에 저를 찾아와서 상담한 일이 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남자의 얘기를 들으면 여자가 나쁩니다. 남자 자신에겐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얘길 들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나빠도 보통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에겐 흠이나 잘못이 없는데 왜 늘 서로 싸워야 하는 모순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왜 유대교에서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창녀나 도둑만도 못하다는 꾸지람을 하시느냐? 아주 뻔한 것입니다. 도둑이나 창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 매달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남은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불행도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천당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요, 자기 죄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천당에서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또는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려 자비를 빌었을 때 그는 이미 낙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루가 23,39~43참조). 도둑이었던 세리도 자신이 부정직하고 욕심 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했을 때 그는 이미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신의 공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믿음이 없고 사랑이 부족하며 용서가 없었고 그리고 이웃을 너무도 무시했던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습니다(루가 18,9 ~14참조).
옛날 어떤 임금이 교도소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죄수들이 임금에게 자신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그때 임금은 그러냐고 하면서 그들을 동정해 주었는데 마지막 한 사람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훌쩍 훌쩍 울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 보니 자기는 죄가 많아서 임금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처지라고 한탄하더랍니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그랬답니다. 이곳은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왜 죄인을 이곳에 들여보냈느냐고. 그래서 그 죄인은 그 날로 석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흔한 말로 ‘주제파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주제파악이 안되면 아주 피곤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하느님은 무슨 잘못이나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제파악이 안되는 죄만은 용서가 안됩니다. 용서를 하시고 싶어도 계속 감추고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창녀만도 못하고 도둑만도 못한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를 보면서 그리고 그들의 끝없는 거짓말과 변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숨기고 감추는 추태가 더 심했습니다. 못난 사람은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딱지 만한 잘못이 있으면 가슴을 치며 두려워합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어리석은 삶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앞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잘 살고 잘 믿는 길입니다.
3.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임승필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자기에게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직접 갑니다. 그리고는 부릅니다. 이 부름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아들아!”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그대로 “얘야!”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분부를 내립니다. 딱딱한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게 분부합니다. 그런데 명령은 부드러우나, 그 내용은 쉽지 않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이 뙤약볕에서 고생해야 합니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기 싫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명령을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들이 자율적으로 대답하라 수 있는 자유를 이미 주었습니다.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는 아들들의 대답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같이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를 줍니다. 이 시간은, 아들들이 ‘안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가, 마음을 고치고 일하러 가게 해줍니다.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곧 ‘가겠습니다.’ 하고서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결심을 뒤바꾸게도 하고, 결심을 순화 내지 강화하기도 합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맏아들의 대답을 직역하면,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가 됩니다. 퉁명스러울 정도로 딱 잘라 거절합니다. 그는 다른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노동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반항의 그 달콤함을 만끽하려고 그러는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거역함으로써 자존심과 독립심, 그리고 해방감을 누리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뉘우칩니다. 비유는 이 뉘우침의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비유를 듣는 청중이 저마다 다름대로 상상해서 알아듣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둘째의 대답을 직역하면, “예, 주인님!” 정도가 됩니다. 선뜻 대답하면서 동시에 정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게,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빈 대답이 되고 맙니다. 결국 거짓 약속, 거짓 맹세가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각자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예, 아버지!” 하고 바로 포도밭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였다면 완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생활에서건 불완전합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유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그들은 그 두 아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쉽게 대답합니다. 올바른 대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 대한 판단이 곧 자신에 대한 판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예수님 비유는 듣는 이에게 판단을 요구합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판단을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판단은 남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 내 자신에 대한 판단입니다.
하느님에게 응답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려는 우리는 늘 불완전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좌표는 무엇이고,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판단은 또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와 같이, 빈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예, 아니요
구본식 부제
신앙으로 가지게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자.
우리 말 주에서 하기 힘든 말이 하나 있지요. “뜰에 콩까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하는 말입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만 그러나 조금만 빨리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 새어 마옵니다. 이 이야기를 초등학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 아니요”라는 말입니다. 천천히 해도 또 빨리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뜰에 콩깍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까지인가”하는 것은 자꾸 연습하면 안될 것도 없지만 ‘예, 아니오’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한 말이기에 어렵다고 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생겨 먼저 약속을 취소할 일이 생겼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약속은 “예”이고 두 번째 취소는 “아니오”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예, 아니오”를 아주 흔히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남발한다면 그 사람들을 가리켜 신의 없는 사람, 거짓말 잘하는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고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약속을 하고많은 계약을 맺고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 부부끼리의 계약, 형제 사이의 사랑, 친구사이의 우정, 또는 동료 사이에도 어떤 약속 소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을 저버릴 때 불효자가 되고 모든 관계에서 신의를 잊어버리게 되면 의리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형태의 약속이든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맺어지고 행해지는 약속이 이처럼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나가서 보다 큰 약속, 보다 큰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약속은 혈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인정(人情)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돈이나 이익 관계일 수도 잇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와 하느님과의 약속은 나의 생명을 두고 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배반할 때에 바로 죽음이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약속을 했습니까?
우리는 세례 때에 이 약속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죄를 끊어 버리기로 약속을 했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했으며,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이 따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의 결과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이 상태를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약속을 저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례 때에 “예”하고 대답을 한 사실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니오”하는 행동을 하는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인간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기키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무어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하고는 “아니오”라는 대답과 같은 행동으로 포도밭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가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너희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해야할 바를 충실히 지키며, 죄를 끊고 악의 유혹을 끊으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힘써 일 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답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덧붙여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란 대답을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니오, 싫습니다”고 대답을 하고 실행하는 자가 훨씬 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예”하고 대답을 하고 그 대답에 충실한 행동을 하는 자일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놓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영원한 삶과 생명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질 때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을 원하고 선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받쳐서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서 “예”하고 기꺼이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어떤 유혹이 일어나더라도 깊이 반성을 하면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은 이상 열심히 하느님께 매어 달리고 충실히 생활하여 약속의 대가인 영원히 생명을 차지합시다.
5.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교구 주보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마태오는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구전해온 예수의 전승을 이 자리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은 두 아들의 비유(28-31절 전반부)와 비유의 설명(31절 후반부-32절)으로 되어 있다.
1. 두 아들의 비유
처음에는 포도원으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중에 일하러 간 맏이는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로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과는 반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곧이곧대로 실천하며 따른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배척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예수 전승들이 복음서 여러 곳에 자주 나온다.
2. 비유의 설명
이 비유 설명과 비슷한 내용이 루가 7장29-30절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태오는 그것을 예수의 어록(語錄)에서 베낀 것으로 여겨진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의인으로 자처하여 일반 백성, 더욱이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리들과 어울려서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세경륜(救世經綸)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3. 비유에 담긴 의미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상대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구약의 예언자들, 요한, 예수, 신약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번번이 배척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을 처벌하시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신다. 하느님께서는 옛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택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21,32), 열매(21,41-43), 예복(22,11)을 갖추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멸시하던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을 예수께서는 스스럼없이 대하시고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말씀과 행동으로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에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친교와 우정을 나누시면서 회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음을 선포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외된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그들을 우선적으로 끌어안으며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자주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6.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창녀와 세리
최인호 베드로/작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는 뛰어난 설교가로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 특히 성서의 가르침을 설교하였고,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도덕적 개혁에 노력하였는데, 반대자들의 박해를 받고 여행하던 중 피로와 열병으로 죽은 성인입니다. 그분은 생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 또 기념비가 기리는 자들의 궁전들은 모두 묻혀버렸으며, 도시를 점령하고 전승탑을 세우며 많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자들은 석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지만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창녀였으며 어떤 나병환자의 집에서 예수께 기름을 부었던 여인은 전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고 있다.”
크리소스토모가 찬양했던 창녀의 이름은 ‘마리아’,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태 26,13)라고 말씀하신 그 여인입니다.
창녀는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두 명의 창녀가 나오는데, 한 사람은 마리아이며 또 한 사람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성녀로 변화합니다.
성서에는 또 다른 직업의 죄인이 등장하는데, 바로 세리입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적국인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어들이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신 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키 작은 세관장 자캐오가 나무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가 1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였던 이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죄인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비난하자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예수님은 ‘가겠다는 말만하고 가지 않는 둘째아들’보다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일하러 간 맏아들’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거역했던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도 뉘우치면 누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녀 마리아야말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말처럼 ‘전 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는 성인’인 것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지금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고 어떻게 뉘우치고 변화하는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계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