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평화의 날,

 

<평화의 날>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9.1.1)/2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0.1,1)/4


        3. 신은근 신부/7                    4. 이계중 신부/8


        5. 정성우 신부/10                   6. 이영식 신부/12


        7. 유영숙(미리암)/14




<신년 대담>


        8. 정진석 대주교(2001년 ; 요약)/16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9. 강길웅 신부(나)/20             10. 김영진 신부(나)/22


        11. 강길웅 신부(다)/24             12. 강영구 신부/26


        13. 변희선 신부/30                  14. 유영봉 신부/31


        15. 주님의 뜻대로/33                        16. 인간의 행복은/35








1              평화의 날   인권 종중은 평화의 비결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99.1.1)




1. 약 20년 전에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에게 보낸 저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저는 인권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대희년을 한 해 앞둔 새해를 시작하며, 저는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 평화를 굳게 다지고자 하는 모든 분들,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여러분과 함께 참으로 중요한 이 주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인권 존중은 인류의 유산


인간의 존엄은 초월적 가치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이념의 결과를, 그리고 인종 우월주의, 국수주의, 민족 배타주의와 같은 허황된 통념의 결과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간 존엄에 대한 모독은 그 근거가 무엇이든 어떠한 형태이든 어디서 일어나든 결코 그냥 넘겨서는 안됩니다.




3. 인권의 보편성과 단일성


1998년은 세계 인권 선언 채택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은 인류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지닌, 타고난 존엄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인정이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 평화의 토대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이 전인류를 위하여 정해놓은 수준을 모든 경우에서 존중한다면, 인권의 보편성과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 개별 권리의 행사에서 문화적, 정치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생명권


그러한 첫째 권리가 생명에 대한 기본권입니다. 인간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신성불가침한 것입니다. 최근 유전공학 분야의 발전은 매우 불안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과학 연구가 인간에게 봉사하려면, 그 모든 단계에서 면밀한 윤리적 성찰이 따라야 합니다. 한 인간의 존엄과 생명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 인권의 핵심인 종교 자유


종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을 표현하며, 인간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인간 관계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종교 자유는 인권의 핵심입니다. 종교 자유는 불가침 권리이므로, 개인이 양심의 요구에 따라 종교를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자기 양심을 따르도록 요구받으며, 결코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될 수 없습니다.




6. 참여권


모든 시민은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오늘날 일반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선거조차도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승리를 위하여 조작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이러한 행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국제 공동체 안에서 국가와 민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정들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7. 극심한 차별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차별은 인종 집단과 소수 민족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근본 권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별은 그들을 억압하거나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그들이 어느 민족인지 더이상 분간할 수 없도록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국제연합 외교회의에서 정관을 승인한 국제형사재판소가 건실한 법률적 토대 위에 세워진다면 세계 차원에서 실질적인 인권 보호에 점차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8. 자기 성취의 권리


모든 인간에게는 발전할 수 있는 타고난 잠재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인격을 충만하게 실현하고 사회 환경에 적절히 자리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앞날의 성공은 교육에 달려있습니다.




9. 연대를 통한 세계 발전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는 경제․금융 제도의 세계화는 세계의 공동선과 경제적, 사회적 권리행사를 보장할 책임 주체를 시급히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0년을 눈앞에 둔 지금, 되도록 많은 나라들이 현재의 어려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관련 기관들이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면 만족스럽고 확실한 해결책에 이르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10. 환경에 대한 책임


인간 존엄의 증진은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와 이어집니다. 땅과 바다, 기후, 식물계와 동물계에 가해지는 심각한 파괴의 위험은 모든 나라, 특히 부유한 국가들에게 현대문명의 전형적인 소비주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실제로 자연 자원과 그 올바른 사용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촉구합니다.




11. 평화에 대한 권리


어떤 의미에서, 평화에 대한 권리 증진은 다른 모든 권리에 대한 존중을 보장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일부 지역에서 평화 확립을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협상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용기 있는 정치지도자들에게 큰 갈채를 보내야 합니다. 각국 정부에서 살상 무기들의 제조와 판매, 수입과 수출을 규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무기의 대량 불법거래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12. 인권의 문화는 모든 이의 책임


여기서 저는 우리가 이 모든 인간 권리를 보호하는 데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인권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특별히 대중매체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중매체는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나아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대중매체가 상호이해와 평화증진을 주창하여 이루어졌던 대화와 연대의 고귀한 활동에는 마땅히 갈채를 보내야 합니다.




13. 결단의 때, 희망의 때


새로운 천년기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많은 이들의 마음은 더욱더 정의롭고 우호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만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삶의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인간 존엄의 선포자가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이사야서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49,15-16).


이 사랑을 나누라는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그 사랑 안에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비결이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천년기의 여명에서 다 함께 평화를 이룩하도록 합시다.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평화의 날 메시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0년 1월1일)






이것은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천사들의 환호입니다(루가 2,14 참조).


대희년은 이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인류의 참으로 진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토록 뜻깊은 새해를 바라보며,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원을 빕니다. 평화는 가능하다고 저는 모든 사람에게 단언합니다. 평화의 추구는 인류가 아무리 죄악과 증오와 폭력으로 일그러졌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한 가족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이고, 희년의 메시지이며, 새 천년기를 시작하는 저의 바람입니다.




우리는 전 인류가 근본적으로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될 때에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인류 가족 안에서만 신분과 인종과 종교를 불문하고, 온갖 차이와 구별을 넘어 또 그에 앞서 개인의 존엄과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국가 간의 전쟁 횟수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위안이 되긴 하지만,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을 생각할 때 그 양상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죄 없는 어린이와 여성, 아무런 무기도 없는 노인들이 고의적인 표적이 되어 온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아서 결단력과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방향을 전환하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의 신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에서 당사자간의 협상은 물론이고 국제 단체와 지역 단체를 통하여 중재와 화해를 충분히 시도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에 대한 숭고하고 막중한 임무는 한 가족이 되고 또 한 가족임을 인식해야 할 인류의 소명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지구 자원의 보편적 용도에 대한 원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적 양심을 몹시 괴롭히는 한 가지 문제는 무수한 사람들의 빈곤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든 번영하는 부유한 국가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더욱 의로우며 동시에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물질 재화의 용익권과 자신의 노동 능력을 유용한 결실을 위하여 제공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한 가족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류가 아직도 빈곤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무려 14억이 넘는 인구가 극빈 상황에서 살고 있으며 개발 정책 모델의 재고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갈수록 세계적인 차원을 띠는 현재의 온갖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편적 도덕 가치들에 대한 의식의 강화가 과거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증진, 내전과 무력 분쟁의 해결, 소수 민족과 이민의 보호, 환경 수호, 질병 퇴치, 마약과 무기 밀매상과의 전쟁,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부패의 척결 등 이 모든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국가도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으며, 전 인류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대처하고 해결하여야 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하신 첫 인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진 것을 하나로 합치시고, 죄악과 증오를 없애시며, 인류에게 일치와 형제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 있는 이 새로운 인간의 기원이시고 그 전형이시며, 또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인간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희년 동안 자신의 주님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가 되라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평화의 표지요 도구가 되라는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하나인 양 떼로서 만민 가운데 솟은 깃발처럼 온 인류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며, 천상 고향을 목적지로 삼아 희망을 안고 나그네길을 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심각한 장애가 있지만 평화를 위한 노력은 많은 사람의 아낌없는 협력에 힘입어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표징입니다. 평화는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같습니다. 평화의 건설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 가정 안에서 평화의 모범이며 증인으로서 자녀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부모


– 모든 분야의 지식과 인류의 역사․문화 유산에 들어 있는 참된 가치를 전하여 줄 수 있     는 교사


– 국제적 차원의 정의와 연대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노동의 존엄을 위한 오랜 투쟁   을 확대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남녀 노동자들


– 평화와 정의의 증진을 위한 확고부동한 결단을 자신의 정치 활동과 그 나라 정치의 중심으로 삼는 정치 지도자들


– ‘평화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최전선에서 흔히 부족한 자원   을 가지고 활동하는 국제 기구 종사자들


– 세계 곳곳의 다양한 상황에서 연구와 활동을 통하여 갈등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비정부기구 회원들


– 진정한 신앙은 결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 일치 대화와  종교간 대화를 통하여 평화와 사랑의 확신을 전파하는 신앙인들 이들이 평화 건설에 참 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특별히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교와 대학에서, 일터에서, 레저와 스포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평화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내면의 평화, 여러분 주위의 평화, 언제나 평화, 모든 사람과 이루는 평화,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교회가 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 하는 이 희년에 우리는 자녀다운 신심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은혜를 우리에게 너그러이 베풀어주시고 인류가 연대와 평화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00년 1월1일


세계 평화의 날을 기념하며


1999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                          평화의 날   (루가 2, 16-21)


신은근 신부




어느새 새해가 되었다. 어제의 태양과 하늘이지만 오늘을 우리는 새해의 첫 날로 하자고 약속한다. 이것은 새롭게 출발하자는 다짐이다. 2000년이 가고 2001년이 된 것이다. 숫자 놀음 같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시각에 변화가 오면 현실도 바뀌는 것이다. 하늘과 나무와 산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결국은 변화에 목적이 있다.




복음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해들은 목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발견하고는 천사의 말씀이 옳았음을 느낀다. 자신들의 눈으로 구세주를 보고 감명받았던 것이다. 어떤 느낌을 얼마만큼 받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 생활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주님을 만나면 누구나 변화한다. 만남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이다. 목동들은 아기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에서 일생을 바꿀 은총을 받은 셈이다.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만났기에 변화의 은총은 주어져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해 첫날의 공식행사로 미사를 봉헌한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우리 생활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1월1일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며 이 출발에 함께 모신다. 왜 그렇게 하는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인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이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오늘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가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그분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키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기에 스스로 알아서 성장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갓난 아이였던 예수님은 소년기를 거쳤고 청년기를 거쳤다. 그리고 그 삶의 변화에 늘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 계셨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구든 소년에서 청년으로 바뀔 때 자신만의 아픔과 성숙을 경험한다. 그 와중에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 함께 하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선언은 예수님과의 혈연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구세주의 구원사업에 동참자가 되셨음을 공인한다는 표현과 같다.




모든 어머니들은 평화를 기원한다. 그러기에 성모님께 평화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다. 우리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 평화의 은총을 청하는 것은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노력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평화는 말에서 시작된다. 모든 약속이 말에서 시작되듯 평화는 언어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말이 폭력적이라면 평화는 그 사람 주위에 머물지 않는다. 평소 나누는 말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과 가족 안에서 평화스러운 말이 오고 가야 한다. 평화를 투쟁과 정복의 결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평화는 인내와 절제와 일치의 결실이다. 우리 자신과 가정 안에서 먼저 이것이 이루어져야 평화에 다다를 수 있다.




평범한 여인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아무도 어머니에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올 한 해, 기쁨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4                 평화의 날 ,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계중 신부




오늘날의 세계는 공포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동과 동구를 위시한 세계 여러 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언제 핵폭탄이 폭발하여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지 모를 이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됩니다.




오늘날의 평화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소수 지도자들만의 걱정거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어 평화를 위해 모든 이가 아낌없는 헌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알아듣기 쉽게 질서의 유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서로 다른 물질적 이해 관계에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균형이 아닙니다. 평화는 인간적인 차원에 속하는 내적인 질서입니다.




인간의 이지적, 윤리적, 본성과 진리, 덕의 결실과 관계되는 질서인 것입니다. 이 이지적, 윤리적 질서는 모든 인간의 기본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고 상호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비추시는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그 빛은 우리를 밝혀주고, 모든 오류와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며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대화를 끊이지 않고 계속해 갈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비록 하느님의 선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계속 추구하고 굳건히 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교 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평화를 위한 새로운 자세를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5장 9절에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글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하시고 어떠한 복수도 하지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끝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보다 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신해야 하겠습니다. 굶주림, 빈곤, 질병 등과 싸우고, 버려진 이들을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고 해서 쉽게 평화를 성취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힘은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자란다는 겸손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우리에게 위탁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책임인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할 바를 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먼저 말한 대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또 그 분만이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시고,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세우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또 그렇게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인류의 파멸 위기 앞에 나 같은 미소한 존재의 기도가 또는 힘이 평화를 이룩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미소한 기도가 합쳐지면 하느님의 대전에 커다란 기도가 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내릴 수가 있고 조그마한 힘이 합쳐지면 장사의 힘보다도 더 커져서 공산주의라는 마귀의 큰 충복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파티마의 메시지는 이미 이런 부탁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신앙 대회를 보십시오. 80만 교우들의 하느님께 대한 찬양은 얼마나 훌륭하였습니까? 십자가까지 나타나는 기적이 나타났고, 그것이 실제 기적인지 아닌 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비록 그런 일을 제쳐놓고도 신앙 대회 이후 얼마나 전교가 잘 되고 있습니까? 나 하나의 힘은 미소하지만 이 미소한 힘이 합쳐지면 하느님 대전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나부터 열심히 기도합시다.




이 땅 사방에서 하느님께 바쳐 지는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이루고 또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의 평화를 허락하소서.












5             평화의 날  마태오 5,1-12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정성우 신부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제로써 한 해를 보내고 오늘 새롭게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보다 올해가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의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부터 시작되는 오늘 예수님의 행복에 대한 가르치심은 언뜻 수긍이 잘 안가는 이야기 같이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는 새마을 노래가 훨씬 땀을 흘리며 행복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종교적인 몽상가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나 과부를 재판하는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 등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 사정에 어둡기는커녕 오히려 통달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신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악폐들을 거슬러 혁명가로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구속 사업이 혁명보다는 인류에게 더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 마음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면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하느님께서 덤으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마음을 몽땅 비워 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육욕으로 가득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평화가 없습니다.




마음이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 명예나 권력욕에 가득한 사람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무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느님이 아닌 한 무엇이든지 가득히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마음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하느님의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한 마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부자입니다. 자기 죄에 대하여 울고 번민할 뿐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부자인 것입니다. 성교회는 아우구스띠노처럼 큰 죄인이었던 성인은 많았지만 평화를 잃고 번민만 하는 성인은 없었습니다. 깡통을 찬 걸인이라도 그 마음 속에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다면 그 사람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사람입니다. 이




렇게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 속하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은 배가 고파 울고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적인 쾌락만을 얻기 위해 성의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처럼 사실은 성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돈의 노예,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권력의 노예, 미움으로 질투고 고민으로 마음이 가득한 자유롭지 못한 노예들, 그들이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 평화, 행복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그들의 엉뚱한 욕심은 채워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마음의 가난이 결코 비참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참함과 청빈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비참함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비참함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보다 윤택한 삶을 위해서 많은 땀을 흘릴 것이며 이러한 노력은 하느님 뜻에 의합하는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유층만의 소유물도 아니고 노동계급만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억지로 노동계급에 속할 필요는 없으며 또 부유층에 속한다고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마음을 가난하게 가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사는 일입니다. 우리 동양의 격언에도 마음이 고요해지면 신에게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허황한 욕심으로 뒤끓지 않고 고요한 중에 느끼는 하느님의 평화는 우리가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새해에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끝내 손에 잡히지도 않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국이 저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6                                평화의 날


이영식 신부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고(故) 바울로 6세 교황께서 1968년부터 새해의 이 첫날을 평화의 날로 정하시고, 선의를 가진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평화의 깃발 아래 모여들기를 호소하시면서 “이 깃발이 현대 문명의 배를 가장 높은 항구로 향해 인도해 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신자들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특별한 기도를 바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서로 평화의 인사로 새해인사를 나누고 하루 속히 세계에 평화가 정착되고 이 새해에 전개될 모든 사건들이 정의에 입각한 안정을 수반하는 평화 속에 진행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 드리면서 교황성부께서 높이 드신 평화의 깃발 아래 모여든 대열에 참여하여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행복한 사람”(마태 5,9)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사실 평화는 모든 민족들의 소망이며 전 인류가 가장 높은 이상으로 평가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실히 추구하는 평화가 오늘날 갈수록 더욱 위협받고 있는 세계정세이며 특히 남과 북으로 양단되어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황은 더욱더 절박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평화를 수호하여야 할 우리의 사명은 중대합니다.




오늘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을 바울로 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위협이란 국가들 간에 건재하는 이기주의로 인한 위협과 마땅히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생활권과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여 어떤 백성을 절망상태로 몰아 넣는 폭력의 위협… 몇몇 국가들의 막대한 경비를 투입하여 인류를 전멸시킬 무서운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무기에의 의존도가 크게 증대됨으로써 생기는 위협, 상호 논쟁점이 이성에 의한 수단, 즉 법과 정의와 공평에 의해 해결되지 않고 제지와 살인적인 무력에 의한 수단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풍조로 인한 위협들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 이러한 위협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일은, 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민족들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였지만 먼저 우리 각자가 각성하고 그 책임은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자신들이 이같이 무서운 위협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 완력과 기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각자가 집단을 이룰 때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평화를 수호하려면 우리 자신 안에서부터 위협하는 요인을 뿌리뽑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참된 평화’의 뜻을 명백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고 분쟁이 없는 상태라고 소극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근본가치이며, ‘참된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시는 초연한 선물임은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강생하셨습니다.




성탄날 천사들이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를’ 하고 말씀하였고,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마태10,12) 하셨으며,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오늘 네가 평화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을 때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가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14,27)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평화를 주시려고 떠났습니다. 평화를 일시적으로 인류에게 대여하신 것이 아니고 영구히 우리들의 소유물이 되도록 주시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요한14,27)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된 평화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마태5,39). 이 말씀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졌다는 많은 신앙인 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쪽 뺨을 치는 자에게 내밀어야 할 왼쪽 뺨,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주어야 할 겉옷, 오리를 억지로 가자하는 자와 같이 걸어야 할 십리, 저주하는 자에게 하여야 할 축복… 이와 같은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 질문은 모든 인간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국제 관계의 영역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며,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깊이 이 복음의 말씀이 스며들 때 평화에 도전하는 우리시대의 위협이 사라질 것이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에페2,14). 그리고 그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에페6,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저항주의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그의 복음은 분명히 무저항주의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며 그들을 불살라 버릴 까요”하고 말하는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루가 9,55)




겟세마니에서 한 제자가 주님을 잡으러 온 자 중 한 사람의 귀를, 칼을 빼어 베었을 때 그 귀를 낫게 하셨고, 무력으로 제자들이 당신을 수호하기를 원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요한 18,11)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범은 악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수동적 태도도 아닙니다.




적극적인 반응이었으며 절대적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이 악을 향하여 그 사랑을 던지시는 응답이었습니다. “복음의 평화는 인간을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폭력 충동과 호전성을 이성 있는 남성적 미덕과 진정한 인도주의가 충만한 마음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바울로 6세 메시지).




우리는 항상 평화를 거론해야 하고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구축하며 수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의 교훈,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교훈에서 사회를 쇄신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평화를 위한 유일한 무기는 기도’라고 교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로써 우리는 평화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찾고 기도로써 세계를 쇄신시킬 에너지를 얻고 기도로써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증오심과 난폭성이 무엇인지 내적으로 또한 진지하게 자문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 희망찬 새해 아침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간구를 드립시다. 그리고 교황 성부께서 높이 드신 평화의 깃발아래 모여들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됩시다.












7                  평화의 날   숨어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유영숙(미리암)




1999년 새 달력을 걸며 잊고 있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음력 섣달 그믐인 까치설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고 귀신이 신발을 신고 간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신발을 엎어놓고, 졸린 눈 비비며 안 자려고 안간힘을 쓰다 깜빡 눈을 뜨면 아침이었고, 내 눈썹은 하얗게 세어있었다. 귀신이 내 운동화 훔쳐갔다고 금세 훌쩍이며 현관부터 쫓아나갔던 기억…




유난히 형제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내 바보 같은 생각 중에는 ‘정말 어린애가 커서 어른이 되는지 지켜보겠다’, ‘기필코 동산을 넘어가서 떠오르기 전의 해를 만져봐야겠다’는 결심 따위가 있었다.


그 바보도 50대가 되어 그 시절의 순진함은 사라졌지만 ‘작심삼일’일지언정 새해는 항상 일출의 기억과 연결되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석굴암에서, 정동진에서, 일출을 볼 때마다 그 감회가 달랐다. 그 중에서도 ‘과연 저것은 태고의 태양이구나’라는 최초의 느낌은 공룡능선 산행 때, 능선에 올라 막 봉우리 사이에 자태를 드러내는 선홍빛 불덩어리를 보았을 때였다.



박명(薄明)의 첩첩산 봉우리 사이에 그림같이 동그란 선홍빛 태양이 얼굴을 내밀더니 심상찮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하며 천지를 붉게 물들이던 충격… ‘천지창조가 저랬겠구나, 2천 년 전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광야에 바로 저 태양이 저렇게 떠올랐겠구나’ 하는 관상에 이르며 말로 표현할 길 없는 경건함에 젖어들었다. 남은 산행을 위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여러 가지 상념으로 마음은 숙연해졌다.




…하느님은 천지창조의 감격을 인류 대대로 맛보게 하시려고 영원히 죽지 않는 태양을 만드신 건가, 하루가 참 크다는 생각, 이 작은 걸음으로 첩첩산도 넘는데 긴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하잘것없는 걱정들에 매달리느라, 무턱대고 휩쓸리느라, 부주의로 인해, 무계획으로 인해, 게으름으로 인해 낭비한 것들을 반성하고 산에서처럼 매일의 생활에서도 이정표를 확인할 일이라고 마음먹는다.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과 누추한 것들이 선명이 분간되는 것도 일출의 광경이 주는 힘이다. 비록 산에서 내려가면 텁텁한 어제의 일상으로 복귀하고 말 내 깜냥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아파트의 먼지 낀 옥상 위에도 창조의 그 날부터 변함 없는 그 태양이 똑같이 떠오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말 가치있는 일들이 무엇이라는 것도…


세상에 사기꾼만 득실거린다고 생각한 것은 신문 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콘크리트 숲 아스팔트 위에만 살던 사람이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장애인들과 한 주라도 어울리지 못하면 그 냄새가 그리워져 사는 재미가 없다는 이들의 얼굴은 천사 같았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모시는 이냐시오의 집 사람들에게서는 풀향기가 났다. 행당동 철거민 단지에 갔을 때 집 앞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낭자한 소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파릇하고 힘찬 노랫소리였다.




빈민과 함께하는 이들, 벽지의 선교사, 노동자를 위한 일생, 초인적 인내로 글씨를 써 주를 찬미하는 서예가, 슬퍼도 해처럼 웃는 얼굴… 우리 땅에는 조용하고 겸손해서 보이지 않으면서 썩기를 바라는 밀알들이 그렇게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다. 함께 두리번거려 보자고, 세상엔 우리가 감동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숨어있을 거라고.


요즈음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성서를 근거로 하여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것을 믿지는 않지만 괜히 기분이 이상합니다.












8                        신년 대담 (2001년) (요약)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1. 대희년의 의미와 성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5년 전부터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웠고 교회 전체가 대희년 기간에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대희년에 신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입었고 새 신자들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자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대희년에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2. 사목방침과 시노드


   저는 2001년 사목교서에서 교구의 사목방침을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하였습니다. 즉 ꡐ소공동체와 선교ꡑ, ꡐ새천년기의 교구 시노드ꡑ, ꡐ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역할ꡑ이며 이를 잘 실행하기 위해서 세부지침도 마련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새 천년에 열릴 교구 시노드는 함께 가자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교구 신자들은 130여 만 명이며 신부는 690여 명, 수도자는 3000여 명 정도가 됩니다. 사목에 있어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견을 골고루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천년기,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신자 수도 인구 수에 대비할 때 10%를 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교구의 신자 130여 만 명의 소리를 어떻게 종합하느냐가 과제입니다. 시노드 준비위원은 골고루 의견을 취합하기 위한 사람들인데 그들의 모임을 시노드 대의원회의라고도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대표로 뽑은 사람의 의견을 잘 반영해야 합니다. 교구의 현상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제시해야 합니다.




3. ‘지역 주교’ 제도 도입 검토


  현재 서울대교구에는 신자가 130여만 명이며 사제는 690여 명, 수도자는 3000여 명이 있습니다. 이처럼 큰 교구의 사목을 교구장 혼자서 다 감당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2년여 전부터 지구장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구장 제도는 오래 전부터 독일의 큰 교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지구장 제도는 지금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지구에 속한 성당은 12개  정도입니다.


 


저는 큰 교구를 사목하기 위해서는 지구장 제도와 함께 보좌주교들이 지역을 담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지역 주교’ 제도를 신설해볼 계획입니다. 인구가 1000만명이 넘는 도시는 세계에 15개 정도가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이처럼 큰 도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천만이 넘는 도시들이 생겼고 서울은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천만도시의 사목에 대해 교회의 행정 학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사목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대도시에서 하느님 백성의 원활한 사목을 위한 방안 가운데 첫째는 교구를 분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본당을 나누는 분할과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행정단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교구를 분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의 경우에는 주변에 있는 다섯 개의 자치시가 그 자체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를 독립된 교구로 만들어 현재 5개의 교구가 있습니다.


 


학자들이 제시한 둘째 방안은 ‘지역 주교’ 제도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서울 주변의 도시들은 도시기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교구를 분할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구 분할상황까지는 아니고 절반쯤 자치하는 ‘지역 담당 주교’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웨스턴 민스트 교구를 참조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런던은 템즈강을 기준으로 하여 교구를 남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북쪽에 있는 교구가 웨스턴 민스트 교구입니다. 이 교구에는 5명의 보좌 주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역주교(Area Bishop)로 불립니다. 그들은 보좌 주교로서 각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맡은 지역은 독립된 교구는 아니지만 교구장으로부터 상당한 위임을 받아 준 교구장으로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웨스턴 민스트에서는 이 제도를 25년 전에 도입을 하였으며 현재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은 실제로 주임 신부가 가정방문을 해보면 인구수 3만 명이 상한수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교구장이 한 달에 2곳을 사목방문해도 일년에 몇 군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5년에 1번은 본당이나 기관 수도단체를 사목방문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주교는 성무활동과 일반적인 행정업무, 견진성사와 여러 성사의 집전, 성직자 부모님의 장례미사등을 집전해야 하는데 무리가 많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에 지역을 분할하게 되면 본당 70개 정도가 적당할 것입니다. 현재 서울에는 226개 본당이 있는데 셋으로 나누어도 70곳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 전 신자는 400여만 명이며 서울대교구에 1/3인 130여만 명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처럼 큰 교구의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서 보좌주교들과 의논해서 지역으로 담당하면 어떨지 연구 중에 있습니다. 저는 작년 하반기에 사제 평의회 때도 신부님들에게 이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연구하자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들은 후  우리 서울대교구의 실정에 맞는 ‘지역 주교’제도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4. 교회- 친교와 사랑의 공동체


   하느님 백성의 신앙생활은 친교와 사랑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친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성당의 규모는 사랑의 친교가 이뤄질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행정단위에서 동은 인구 3만 명이며 그 수가 넘으면 동을 나누게 됩니다. 천주교회도 인구 3만 명에 본당이 1개가 있으면 맞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인구가 4600여 만 명이지만 전국의 본당은 1200개 정도입니다. 약 300개가 더 신설되면 인구 3만 명에 본당이 1개가 되는 것입니다. 신설되어야 할 300개의 본당 중에서 서울대교구의 과제가 큽니다. 서울의 인구는 약 1300만 명이므로 본당은 430개 정도가 되어야 하지만 226개에 불과합니다. 서울대교구는 앞으로 200개를 더 늘려 본당 공동체를 친교의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5.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정치


   정치의 목적은 국민 전체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계층이나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정권 담당자나 야당에 있는 사람들이 국민전체의 이익보다 자기 정당, 당리당략을 우선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국민 전체를 위해서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지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6. 정의로운 사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세상에는 많은 물질과 재산이 있습니다. 재화는 인류 전체의 공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가 골고루 잘 살기를 바랍니다. 공기와 땅 등은 인류의 공동재산입니다. 따라서 자연환경을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사회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그래야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됩니다.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기업가는 기업가의 윤리를 가져야 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가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한 분배가 이뤄질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파업이나 모임은 국민 전체가 합심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7. 균형을 갖춘 삶의 추구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육신에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만 영혼에는 윤리법칙이 적용됩니다. 사람은 윤리법칙을 지켜야 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지난 20세기에는 물질문명이 발전하였고 그 점이 부각되었습니다. 정신이나 영혼의 면은 소홀하여 균형이 깨져 풍요롭게 살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빈약해 행복감이 덜합니다. 지난날 물질의 풍요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정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더 가꾸어야 합니다. 문화는 물질적 측면보다 영적이며 정신적인 측면을 고양해 줍니다. 21세기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국민은 예전에는 가풍이나 도덕 관념이 있어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렸으나 이제는 조급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도와주고 기다리며 배려하는 국민 운동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8.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


   지난해에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간에 커다란 물꼬를 터준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산가족의 만남은 아주 시급하며 중대한 과제입니다. 이산 가족들이 더 많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100명씩이기 때문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만나면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려도 다 못 만날 것입니다.  면회소를 설치하여 생사확인도 해야 합니다. 다방면의 분야 즉 문화, 체육, 경제적 교류가 여러 가지로 이뤄질수록 통일이 앞당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과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북한 백성 전체의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단체도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9. 방북의 조건


   지금 우리 민족에게는 종교나 신앙 문제보다도 이산가족 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 종교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 상조입니다. 교황님의 방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 일뿐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측은 하지만 몇 명이나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황청에서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북한에 사제의 상주를 요청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에 사제가 상주할 수 있을 때 교황방북의 논의는 활발해 질 수 있습니다. 저의 방북문제 역시 그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10. 인간생명은 최우선의 가치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인간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선용이나 악용은 인간의 도덕에 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도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원자폭탄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합니다. 생명공학의 문제도 과학을 선용할 것인가? 악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악용한다면 부작용은 엄청날 것입니다. 생명공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최우선하는 윤리가 꼭 필요합니다. 




11. 언론의 선용


   교회의 매스 미디어 종사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가톨릭신문과  같은 매체는 교육적인 기능과 오락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방송과 같은 교회의 언론은 교육적 성격이 강합니다. 전파는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이고 소중하며 귀중한 재산이므로 선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송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방송은 국가전체에 유익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건전한 오락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국민을 계도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12. 신년덕담


   우리는 새천년 , 새세기를 본격적으로 여는 2001년을 맞이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셨으니 어떻게 선용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주위 사람, 국가와 민족 전체를 위해서 어떻게 선용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일년 내내 건강하시어 소원을 이루어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자라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기도 드립니다. 장차 그들이 우리 나라와 민족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큰 일을 하기 바랍니다. 노인들께서는 노후를 즐겁고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신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의 영육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9                  성 마리아 대축일 (나해)   복을 빌어 주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민수 6,22~27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제2독서 갈라 4,4~7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 서 나게 하셨다)


복 음 루가 2,16~21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보았다.)




오늘 1독서에서는 사제들이 신년 축제에서 백성들에게 장엄한 축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그렇습니다. 복이란 하느님의 이름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해도 하느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쓰레기나 불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새해 첫 날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빌었던 그 축복의 기도를 오늘 하느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남에게 복을 빌어 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도 먼저 베풀고 사랑도 먼저 나누며 그리고 평화도 먼저 선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받는 길입니다.




교회는 또 매년 1월 1일을 ‘평화의 날’로 정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모두가 원하는 것이요 그것 은 하느님의 ‘임재’와도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거기 계시면 평화요, 하느님께서 거기 계시지 않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서로 다릅니다.




히브리말로 평화는 ‘샬롬'(SALOM)입니다. 살롬은 ‘완전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젖을 배부르게 먹고 잠자는 아기의 얼굴을 보면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활짝 핀 꽃을 보면 역시 평화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자체로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잔잔한 바다, 청명한 하늘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평화를 주며 사람들의 선행이나 사랑에서도 평화를 보여 주게 됩니다. 완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평화가 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바로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매가 사랑하는 어린 외아들을 잃고는 그 상심이 너무도 컸습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한 아픔과 슬픔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래서 아들 곁으로 가기 위해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아들이 나타나 자기는 천국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꿈 속에서 어머니는 기뻐서 울었고 그 후부터는 마음에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마리아와 요셉 가운데 누워 계심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마구간을 천당으로 삼아 거기서 세상을 강복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께서도 인간을 믿으셨습니다. 마리아를 믿으셨고 요셉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평화의 시간을 목동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우리도 평화를 얻기 위해선 먼저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하고 노래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서 이 땅에 참 평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신 지 2천 년이 되는 오늘 과연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왔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평화는 그래서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믿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첫 날에 하느님을 믿고 또 주님을 믿는 마음을 더욱 굳게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일이요, 그것이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며, 또한 그것이 참 평화를 얻는 길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줘야 하고, 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사랑하며, 선을 행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는 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그래서 성실하고 의미있게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 성탄 면접 때의 일입니다. 남편의 사업은 엉망이었고 가정은 파탄 직전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남편은 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술과 여자 문제로 부인을 더욱 피곤하게 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위로를 드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그랬습니다. “신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걱정많은 자매가 멀쩡한 신부를 위로해 주는지 그 지혜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을 반짝반짝 빛나게 사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분들은 그 자체로 복받은 분들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하고 병이 들어 신음해도 그들은 세상을 빛내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 복받는 한 해를 하느님의 은혜로써 살도록 합시다. 먼저 복을 빌어줍시다. 그것이 복받는 비결입니다.












10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루가 2,16-21>(나)   대축일 덤으로 받은 새해


김영진 신부




군종신부 시절, 기차사고로 인하여 발목을 세번 수술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삼촌 신부님이 “김신부, 너의 인생은 이제 덤으로 사는 것이야, 하느님이 한번 더 기회를 주셨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해”하고 말씀하셨다.


사고의 상황을 아는 친구 신부들도 같은 말을 해주었지만, 나는 하느님이 한번 더 기회를 주시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잘 살지 못하고, 대충대충 그럭저럭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새해가 되면 꼭 생각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이 새해를 하느님이 나에게 덤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셨다는 단어다. 어렸을 때에는 발가락이 나오고, 뒤꿈치가 떨어진 양말 대신 새 양말을 새해에 얻어 신기에 새해가 기다려지고 의미가 있었지만, 나이를 조금 먹고 보니 하느님으로부터 한번 더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의미가 부여되곤 한다,


지금까지 잘못하였으니 한번 더 사랑하고, 한번 더 기도하고, 한번 더 봉사하라고, 주신 기회가 바로 이 새해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1997년 정축년을 기회로 얻지 못하고 먼저 가신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성서(루가복음 13장)에서 보면, 과수원지기가 농장에 무화과나무를 심고서 잎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며, ‘내년에는 틀림없이 열리겠지’하며 3년을 기다렸다가 할 수 없이 잘라버리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나라고 하는 인생도 하느님이 열매를 맺게 해주고 싶어, 애지중지 가꾸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3년이 아니라 30년 또는 60년, 또 그 이상의 기회를 주시면서까지 열매 맺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를 무시하면서 산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을 위하여 바쁘게 살고 있나




나는 가끔씩 시간에 대한 강론을 교우들에게 들러준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시간, 모든 이에게 거저 선물로 주어진 시간, 그러나 언젠가는 시간의 주인이신 분께 돌려드려야만 되는 시간, 그 시간들을 자신이 돈이나 주고 산 것처럼,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곤 한다. 시간이란 열매를 맺도록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요 기회요, 인내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바쁘다’는 말이라 한다. 사실 바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하여 바쁘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후회할 일을 하느라고 바쁘게 살았다면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하겠는가?


나는 신부이면서도 전교를 잘 못하는데, 가끔 전교한답시고 시골에서 이래저래 알게 되고 친하게 지내는 이들에게나, 또는 세례를 받았지만 소홀히 하는 이들을 길에서 만나게 되어 “이제 성당에 좀 나오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하면, 거의 모든 이들이 “예, 신부님, 저는 언제 나가도 나갈겁니다. 그러나 요즘 바빠서요”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주신 시간에 하느님을 제외하고 무엇을 찾느라 바쁘게 사는가!



일본에 있는 어느 고아원의 한 아이가 축구공을 하도 가지고 싶어하여, 성탄 때에 고아원 수사님이 선물로 축구공을 사주었더니,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놀던지 나중에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공부도, 기도도 잊어버릴 뿐 아니라, 자기 축구공을 다른 친구들이 못 만지게 하려고 밤에는 끌어안고 자고, 화장실에 갈 때도 안고 가더라는 것이다. 결국 선물로 받은 축구공하고만 노는 어린이, 수사님 말씀도 축구공 때문에 귀담아 듣지 못하는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자녀들을 키우느라 바빠서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부모들, 하느님이 주신 사업체와 재물을 관리하고 여기저기 쓰기에 바빠서 하느님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하느님이 주신 젊음, 건강, 총명함과 뜨거운 정열을 쾌락, 교만, 방탕으로 소모하기에 바빠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선물로 받은 축구공 때문에 친구도 외면하고, 공부도 기도도 잊어버리고, 수사님 말씀도 안 듣는 어린아이와 무엇이 다를까?




새해는,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한번 더 주신 기회요, 사랑이며, 인내다. 기회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빼놓고 바쁘게 사는 시간이란, 후회와 껍데기만 남을 뿐, 믿음과 희망의 열매, 기쁨과 감사의 열매, 사랑과 봉사의 열매는 열리지 못할 것이다. 기회를 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내려질 징벌! 그것은 영원한 멸망일 뿐이다.




새해란 백지를 새로 받아드는 것




성당 뜰을 거닐다가 미화작업을 하는 수녀님에게 물었다. “새해라는 말에, 무엇이 생각납니까?” 수녀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신부님, 저는 새해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백지가 떠오르네요”한다. 백지는 무엇일까?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고, 첫 출발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깨끗하고 순수하며, 거룩하고 고귀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새해란 바로 그러한 백지 한장을 새로 받아드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주신 백지일지도 모를텐데, 여기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될 것인가? 어떤 그림이라야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내 마음대로 내 능력의 그림, 내 지식의 그림, 내 교만의 그림을 그려 왔지만, 이젠 하느님이 내 손을 잡고 나의 백지를 채우시도록 하고 싶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또 마리아와 베드로의 손을 잡고, 그들의 백지를 채워 가셨듯이, 그렇게 하느님이 내 손을 잡고 나의 백지를 채워 가시게 하고싶다.


 


하느님, 한번 더 기회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 그려나갈 백지 한 장을 한번 더 주시어 고맙습니다. 내년도 있으려니 하고 게으르지 않게 하시고, 솜털같이 많은 시간이라고 여유부리지 않게 하소서. 흉내만 내던 신앙이 열매를 맺고, 덤으로 주신 시간을 감사로 엮어 가게 하소서.












11      성 마리아 대축일(1.1.) <루가 2,16~21> (다해)   여러분은 자녀입니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민수 6,22~27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제2독서 갈라 4,4~7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 서 나게 하셨다)


복 음 루가 2,16~21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보았다.)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오늘 2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가지고 새해 첫 날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느님께선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주어진 처지에서 가장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세상이 불공평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납니다. 누구는 죄없이 병으로 고생하며 누구는 또 애매한 십자가를 평생 짊어지고 갑니다. 그래도, 어떤 처지에서고 하느님께선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하고 기타를 잘 쳤으며 또 명랑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묻기를 혹시 다리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느냐고 했더니 그는 자기 다리가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왜 안 보이느냐고 하자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세상엔 봐야 할 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말은 보석처럼 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못난 사람은 평생 못난 것만 붙들고 징징거리며 고달프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고달픈 것을 결코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인 생 자체가 다릅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곳입니다.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종이라면 미래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그저 끌려다니고 이용당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이고 자유인입니다. 위대하신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이며 그리고 그 분 나라의 상속을 우리가 이미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떳떳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긍지를 가지고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누군가를 한동안 미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그 미움을 아주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철저하게 저주하고 배척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 안에서마저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자 내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의 종이 되어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그 사람 미운 생각이 제 머리를 덮고 있었으며 말 을 할 때도 기회만 닿으면 그놈 밉다는 말이 계속 튀어나왔습니다. 잠을 잘 때도 어떻게 복수를 할까 궁리를 했으며 그 사람이 뭔가 잘 못되기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라곤 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끌려다니면서 꼭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언젠가 그가 다시 미운 짓거리를 했을 때 저는 정말 그를 사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진정한 애정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고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가 있었습니다. 원수는 참으로 우리가 갚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갚을 자격도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복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합니다. 참으로 좋은 인사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그런 내용 이 나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복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을 받으려면 먼저 남의 복을 빌어 줘야 합니다. 아무리 미워도 복을 빌어줘야 합니다.




말이 좀 어패가 있는 듯하지만 후손이 편안하려면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을 편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분들이 구원받아 천국에서 평화의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들을 위해서 우리 가 기도를 해 드리고 할 수 있으면 미사도 봉헌해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화를 얻으려면 우리가 먼저 이웃의 평화를 빌어 줘야 합니다.




오늘은 특히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열면서 또한 그의 모친 마리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마리아 와 함께 평화를 기원하면서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또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이며 또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주님이 계시고 찾을 수 있는 천상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해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지금의 처지에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소서” (시 66).












12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루가 2,15-21> 가까이 있는 작은 행복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희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에는 하느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이 하시는 일마다, 또 여러분의 가정마다 풍성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1991년을 역사의 뒤안으로 흘려 보내고 희망의 새해 1992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시고 이렇게 좋은 새날을 맞도록 안배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시다. 교회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인 새해 첫날을 평화의 날로 정하고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 온 가정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평화가 넘쳐흐르기를 기원하고 있고, 특별히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화를 심는 평화의 일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 모두가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덕담(德談)이라고 하지요.


  첫째는,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자는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살아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를 허락하셨다는 기쁨과 행복을 매일 맛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면 가슴에서 생명이 박동하고 생명의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찬란한 햇빛이 온 방에 가득하고, 그래서 억겁(億劫)의 흑암을 걷어 제치고 이 세상에 광명을 끌어들이던 천지 창조의 첫째 날의 환희를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방문을 열어젖뜨리면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얼굴에 마주치고, 가난한 사람도 돈 걱정 없이, 가슴을 열고 그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팔다리를 상하 좌우로 움직여 보고 힘이 온몸에 흐를 때, 어찌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향해 뛰어 보고 땅을 힘차게 굴러 보고, 주먹을 휘둘러보아도 거칠 것이 없는 자유, 그것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며 행복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는 갖가지 신체적인 부자유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런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도 별로 감사히 여기지도 않았고, 사소한 불편에도 불평하며 찌푸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매일 변함 없이 자애로우신 부모님의 모습,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 믿음직한 남편의 모습,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식들, 정다운 형제자매가 만들어 내는 화목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를 바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행복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출근을 하면, 그 또한 큰 행복이 아닙니까?


매일같이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찾아갈 안식처 가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에 돌아와 서로 그 날 있었던 일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저녁을 먹노라면 “서로 미워하며 소고기를 먹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는 잠언의 성경 구절이 그대로 들어맞는 행복 아닙니까?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하루였으나, 어떤 분들에게는 셋방살이 고달픈 하루였으나, 하루를 지켜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바치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부러울 것 있습니까?


 


이렇게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지극히 가까운 데 있습니다. 크고 엄청난 일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에 행복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서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큰일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밝아 온 새해에는 이렇게 가깝고 작은 곳에서 행복을 찾고 감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둘째로는,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을 보면서 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늘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감사할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것이 그렇지 못합니다. 때로는 병이 들어 아프고, 아내는 바가지 긁고, 아이들은 시험에 낙방하고, 어린 자식놈들은 매일 얻어맞고 울며 들어오고, 하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걱정 근심 끊일 날이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세상살이란 이렇게 밝고 어두운 면이 서로 엇갈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을 보고 밝은 면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은 항상 밝게 웃으면서 살 수 있고, 인생을 소극적으로 어두운 면만을 생각하면서 관심 걱정만 하는 사람은 항상 우울하고 어둡게 살수밖에 없습니다.




장미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장미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만을 생각하지 그 꽃에 가시가 있다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장미나무가 한낱 가시나무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장미꽃의 가시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장미의 아름다움과 그 향기를 즐기지 못합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한 송이 장미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면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사람에게 인생살이는 행복한 일, 감사할 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가시에 찔릴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인생살이의 고달픔,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항상 우울하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짚신 장수 아들과 우산 장수 아들을 둔 어떤 어머니의 우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하나는 짚신 장사를, 하나는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매일 근심 걱정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날씨가 화창하게 개인 좋은 날에는 우산 장수 아들이 돈을 못 벌어서 걱정이고, 날씨가 궂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짚신 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지 못하니까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날씨가 맑아도 걱정, 비가 내려도 걱정,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늘 우울하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 못한 이웃집 노인이, 이렇게 하면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짚신 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어서 좋고, 개인 날에는 짚신 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으니 좋지 않느냐. 매일 좋은 일만 생각하라.” 이 노인의 충고를 들은 두 아들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기쁜 일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비가 오는 날도 좋고 개인 날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늘 행복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살이에는 양지와 음지가 엇갈리게 마련 아닙니까? 적극적이요 긍정적으로 밝은 면을 보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보람되게 기쁘게 살며 늘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며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만을 보는 사람은, 항상 우울하고 관심 걱정에 사로잡혀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왜 어둡고 우울하게 살 것입니까? 기쁘게 보람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을 먹이시고 들의 꽃들을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하겠습니까?(마태 6,5 이하).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더 기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밝은 면만을 보면서 인생을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갑시다. 하느님께서 한 송이 장미와 같은 새로운 한 해를 선물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선물 주신 이 새로운 한 해를, 가시는 생각하지 말고, 장미의 아름다움과 향기만을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참된 행복은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데 있습니다. 가장 완벽하고 차원 높은 삶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삶입니다. 샘물은 계속 퍼 써야만 맑은 물이 샘솟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가 그야말로 죽은 바다가 된 것은, 강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물을 흘려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도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이웃과 형제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도 행전 20장 5절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행복해야 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들이고, 그 사람 안에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밝아 온 새해에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빛을 비추며 행복을 나누어주는 생활을 합시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희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골 한 해는 여러분 모두가 참 행복을 누리는 한 해, 진실을 말하며 정의를 실천하는 한 해, 서로 사랑 나누는 한 해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풍성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13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 <루가 2,16-21>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변희선 신부




5년 전쯤에 미국의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나에게 여동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의 내용들은 매우 아름답고 영적이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빠! 얼마 전에 우리 둘째 아이 용수가 손을 다쳤어요. 그래서 저의 마음 고생도 많았지만 새삼 오빠가 손을 다쳤을 때에, 엄마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엄마의 크신 사랑을 더욱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저도 용수를 더 잘 키우려고 매일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어요」




나는 이 아름다운 편지를 읽으면서, 내 동생 벨라뎃따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경제학을 깨우쳐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음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성서와 그분의 구원 경제학을 묵상하고 연구하다보면, 하느님은 이 세상을 한꺼번에 완성하실 계획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들을 당신 구원 경영의 동반자로 초대하시고, 서서히 세상구원을 완성하시려는 그분의 거룩한 구원 의지를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의 가장,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는 바로 성모 마리아님이시다.




곧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성교회는, 그 동안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성모 마리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경륜에 대하여 깨우친 바가 크게 4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이고, 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하심이며, 셋은 성모님의 영혼과 육신의 승천이며, 넷은 성모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올림을 받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구원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전적으로 협력하셨기 때문임도 잊지 말아야한다.


 


성모님은 당신의 일생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하여 깨닫고 협력하셨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믿기 어려운 성령으로 인한 잉태 소식을 전해듣고 기도로 응답한다. 그녀의 응답은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기도였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장 38절)」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를 받고서 보인 반응도, 역시 감사와․찬미의 기도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루가 1장 46-48절)」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목동들이 주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을 때 마리아의 반응도 역시 기도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장 19절)」


마리아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님을 잃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삼일만에 찾았을 때도 계속된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가 2장 49절)」 마리아의 이러한 관상적 기도를 루가 복음사가는,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장51절)」라고 전한다.


이러한 예들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인 구원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협력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2천년 대희년을 1년 안에 맞이하는 새해의 첫날에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묵상 해보자.


▶ 하느님께 나를 이 세상에 부르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  ▶ 하느님에서 나에게 무한한 자유와 지성과 감성을 부여하셨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 여러 가지 재능들을 주셨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을 보내 주셨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앙을 주셔서 당신을 깨닫고 찬미하게 하셨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이 모든 하느님의「선물들은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에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값어치가 결정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자. 「성모. 어머님! 저희 모두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14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 <루가 2,16-21>   신앙인의 모범이신 어머니


유영봉 신부




묵상 : 교회는 초세기부터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불렀다.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신앙인의 모델이며, 교회의 모델이다. 마리아처럼 하느님 중심으로 살 때 우리는 평화의 사도가 들 수 있다.




1. 마리아는 일치의 걸림돌인가?


오늘 축일이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이다. 한 인간인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니, 놀라운 호칭이다. 보통 축일도 아니고 대축일이고, 한국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이 아닌데도 의무축일로 지내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1월1일이다. 새해 첫날을 마리아의 축일로 시작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가톨릭은 역시 ‘마리아교’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일치운동이 활발해지자,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신심은 교회일치운동의 걸림돌인 양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마리아론’이라는 과목이 없어지고 ‘교회론’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경향도 있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신심을 새로이 조명해봐야 하77다,




2. 신․구약의 연결고리 마리아


오늘로서 구세주의 성탄을 축하하는 8일 동안의 축제기간이 끝나게 된다. 구세주의 탄생에 가장 깊이 참여한 마리아의 축일로 성탄축제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은 신약에로 인도하는 빛이며, 구약의 모든 예언과 예표(豫表)는 구세주의 탄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탄생으로 완성된다.




마리아는 인류의 역사를 기원전․후로 구분하는 분기점에 서 있으며, 구세사 안에서 볼 때 구약의 끝이면서 신약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인류에게 구세주 탄생의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묵은 해를 접고, 새해를 여는 1월1일을 성모님의 축일로 지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3. 어떻게 ‘천주의 모친’인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인사하였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라는 엄청난 호칭을 부여하였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그리스도는 뛰어난 인간일 뿐, 결코 신 (神)은 아니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주장이 있었다. (아리우스 이단) 그러자 325떤 전 세계 주교들은 니케아에 모여 이 주장을 이단(異端)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人性) 두 위격(位格)이 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었다. (네스토리우스 이단)


또다시 주교들은 431년 에페소에 모여 이 주장을 이단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선언하였다.




교회는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에 조화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제2위 성자이심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예수가 바로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를 낳은 마리아는 당연히 ‘천주의 모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위상(位相)은 항상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가 어떤 분인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하는 신심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자.




4. 신앙인의 모범, 교회의 어머니


어떤 이들은 ‘마리아는 우연히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되어 만인의 공경을 받는 ‘운 좋은 스타’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예수의 잉태를 수락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의 일생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꿈처럼 지나간 가브리엘 천사와의 만남, 처녀 임신, 요셉과의 말못할 결혼,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의 가출, 방랑설교가가 된 예수, 선동가로 몰린 아들의 체포와 죽음 등, 끝없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예사롭지 않게 태어난 예수님은 마리아에겐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사흘만에 성전에서 찾은 예수는 “어머니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루가 2,49-50)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하느님은 왜 나를 이 일에 끌어들이셨는가?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된 것인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마리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시선을 응시하면서 묵묵히 ‘당신 뜻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를 계속하였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일생 하느님의 뜻을 찾고 쫓는 신앙인의 삶을 사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신앙인의 모범이며, 교회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15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가 2, 10-21)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세주를 낳으신 어머니이시자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여성 중의 여성이며 어머니 중의 어머니시다.


성서는 우리를 루가복음 1,26-38과 교회의 신심으로 안내한다,




우선 준비기도를 드린 후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을 한두번 읽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라는 소식을 전하자,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주저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한 자유와 신앙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천사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는 마리아의 심정으로 들어가 본다.마리아는 처음에는 대단히 놀랐다. 왜 놀랐겠는가?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같으면 약혼이란 혼인을 올리기 전까지 쉽게 파기할 수도 있는데, 유다 풍습의 약혼은 바로 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 나라에서는 약혼도 혼인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혼인한 여자와 똑같은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중죄로서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마을 사람들이 동구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기도 하고,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여성인 마리아가 이 사실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매우 놀란 것이다.




신앙인의 모범 성모 마리아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신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하였다. 천사의 모양이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고, 그 빛 속에서 분명히 돌려온 목소리를 들은 마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에서 순진하게 자라온 그녀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말은 이해도 안되거니와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인사는 구약의 위대한 판관이었던 기드온이나 위대한 예언자들에게 천사가 한 인사가 아니었던가? 더구나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경건한 자나 고생하는 자 또는 특별히 간택하신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닌가?




그러니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는 생소하고 너무나 이상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비천한 나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이 인사는 도대체 어떤 뜻일까? 성서는 처녀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몸이오. 그대에게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가 성령의 힘으로 태어날 것이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란 없소.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을 보시오. 그 늙은 나이에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아기를 가진 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소. 그러니 놀라지 마시오—. ”


이렇게 말하는 천사의 말에 압도된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결정을 내렸다.


즈가리야는 아기 탄생(세례자 요한)의 증거를 달라고 천사에게 도전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호의에 대한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알린 다음, 온전한 자유와 신앙의 행위로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기고 “저는 주님의 여종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 것이다.




온전한 순명과 겸손의 응답




마리아의 그 응답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권력과 악령의 지배하에 있던 인류에게 광명의 빛이 비친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그 응답으로 “세세대대에 만세가 복되다”라고 일컬을 위대한 어머니이자 성모가 되신 것이다.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응답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생활에 적용시켜 왔다.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마리아가 그것을 깨닫고는 즉시 “주님의 뜻대로 이루머지소서”라고 한 그 응답(fiat)은 우리 신앙의 모범이다. 순명과 겸손 그리고 온전한 위탁의 정신이 여기서 나오지 않는가? 그러므로 올바른 자세로 신앙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응답하며 순명과 겸손과 위탁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어떠한가? 나도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소서”라고 기도하며, 교회 안에서 순명과 겸손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안에 머물면서 성모님의 정신을 배우는 방법을 알아보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하고 이런 시간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묵상을 마친다.












16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가 2, 10-21)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의해 좌우”




98년은 암울한 한해였다. 흥청망청 돌아가던 경제가 파탄에 이를 뻔했다. 시골에서도 계를 들어 동남아 여행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두가 1등 국민이 된 느낌으로 살았다. 더군다나 정치판에서 돌아가는 돈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1억원이란 돈이 보통사람에겐 어마어마하지만 정치판에서는 코흘리개 과자 값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나라의 빛이 도대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니, 암울한 한해가 아닐 수 없었다.




뒤돌아 본 한해


지난해의 장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악몽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농사를 망쳐서 가슴 아픈 이들이 많다. 이런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가 했더니, 군에서 터진 여러 사건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건들도 하나씩 역사의 뒤편으로 잠들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는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참으로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새해가 밝았으나 수많은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과거의 모든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된 채 새해를 맞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시련들을 떠안은 체 새해를 맞이한다. 특히 경제적인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경제적인 고통으로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결국 파탄으로 가는 가정들도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지난해보다 늘어날 기미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잡고 소위 데카당식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많다. 이로 인해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성 범죄가 늘어날 가능성이 잦다. 사회 불안으로 서로가 경직되고 살벌해지는 메마른 사회가 되기 쉬운 것도 예상된


다.




새해의 만만찮을 도전




종교적인 면에서 1999년은 특별한 해다. 그 어느 해보다도 신흥종교들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다. 이미 노스트라다무스라든가, 에드가케이시, 제3의 비밀 등이 1999년을 멸망의 해로 예견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종말을 대비하느라 부산할 것이다. 이렇게 여러 집단이 종말이 왔다면서, 일도 안하고 소리내어 기도만 하고 있다든지, 기도가 중요하기에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함께 기도하는데 보낸다면 문제는 심각하게 된다. 가뜩이나 경기가 안 좋은데 일은 안하고 천지개벽만 외치고 있다면, 사회는 점점 불안해질 것이다,


 


새해가 되면 장밋빛 계획으로 부풀어 있는 것이 예사였으나 올해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성모님께 한해를 맡긴다면 우리의 한해도 문제없다, 교회는 특별히 새해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낸다. 마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새해 첫날을 봉헌하는 것이야말로 어린 아이처럼 우리 자신을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내맡기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머니가 있는 한 안전하다. 우리도 성모님이 계시는 한 안전하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에페 5, 16-20참조)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주님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건해져서 악신들과 싸워 이기라고 말한다.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외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말한다,


늘 깨어 기도하라고 거듭 말한다. (에페 6,10-20 참조)




믿음만이 살길이다.




새해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모님께 자신을 다 바치는 것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승리의 한해를 살아가는 길인 듯 싶다.


 


덧붙여서 자신이 어디에 있든 자신이 있는 거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곳을 거룩한 곳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한해가 된다면, 행복이 넘치는 한해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전등이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분들의 집안에는 웃음이 있었고, 행복도 가득했었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세상의 어떤 것들이 있고 없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믿음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의 잣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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