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6주일







         9. 강길웅 신부(나)/ 15                   10. 김정신 신부(나)/ 16


         11. 김몽은 신부(나)/ 18                  12. 김영국 신부(나)/ 20


         13. 김승주 신부(나)/ 22                  14. 교구 주보(나)/ 24


         15. 교구 주보(나)/ 25                    16. 나환자를 고치시다(나)/ 28


         17. 민병숙 작가(나)/ 29                 


9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나병환자의 용기와 믿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레위 13,1~2.44~46 (부정한 사람은 진지 밖에 자리잡고 따로 살아야 한다) 


제2독서 Ⅰ고린 10,31~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복 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드러내시던 예수님께서 이번엔 죽은 인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나병환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권위는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를 정도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점차로 믿게 됩니다.




나병은 실로 무서운 병입니다. 옛날엔 한번 걸렸다 하면 그 시간부터 완전히 죽은 인생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눈은 흘기게 되고 입은 비뚤어지며 목소리는 쇳소리를 내게 되고 눈썹이 빠지며 손가락 발가락 들이 오그라들고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에 돌기가 생겨서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징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차라 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 나병에 걸린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느님께로부터 벌받은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나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했 습니다. 그들은 진지 밖에 자리잡고 따로 살아야 했으며 혹시라도 건강한 사람이 잘못 접근하게 되면 자기는 ‘부정한 사람이오.’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병을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맞아 죽어야 합니다. 부모와 가족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외롭고도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병환자였습니다.




제가 신부 되고 나서 부임한 첫 본당에는 나환자 정착마을이 있었는데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착마을에 있는 환우들은 100%음성환자로서 이제 더 이상 환자는 아닌 셈입니다.


다만 일그러진 상처로 건강한 세상에서 맘놓고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서 그들과의 접촉을 대단히 두렵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것이 환우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한번은 정착마을에서 식사를 하는데 회장님이 저 때문에 약간 불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주 찾아 주면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에게 일당을 주고 또한 부식비를 별도로 지불하여 신부님 식사준 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소 사목회의 재정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말고 각 가정을 돌면서 그 가정에서 먹는 대로 식구들과 함께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누추한 집에 어떻게 신부님을 모시며 더구나 환자들이 어떻게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일주일 에 두 번은 동네 잔치가 되었으며(일주일에 두 번 방문했음)백 호나 되는 정착마을을 4년 동안에 네 바퀴나 돌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돈 한 푼 주시진 않았지만 돈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셨다.”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치유 그 자체를 넘어서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간주되었던 그들에게 높은 인격의 가치를 부여해 주신 것이며 또한 어떤 인생도 예수님 앞에서 치유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 모두가 본받기를 그분은 은연중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나환자에게 손을 갖다 댄다는 것은 같이 부정 타는 일인데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모르고 속에는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생들입니다. 그들은 속은 썩었어도 겉은 멀쩡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병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평생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 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에도 교회 안에서나 교 회 밖에서도 그런 무리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솔직하게 내보이면 고쳐질 텐데 감추고 있기 때문에 평생 불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환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자기 병을 갖고 나감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곁으로 달려오기를 항상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늘 측은한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용기있게 나아갑시다. 그 분만이 진정 우리를 고쳐 주시며 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저를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아멘.












10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영혼의 나병 환자들


                                        김정진 신부


전도 여행을 시작한 예수님은 수 없이 모여드는 백성들을 기꺼이 맞으시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들린 자들을 성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또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인자하신 모습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의 고관들이나 지도자급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교제하고 사귀신 것보다 가난한 사람, 세리나 죄인들을 더 가까이 하시며 동정하시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지겨워하고 전염이 될까 피해 가는 문둥병자를 가까이 하시고 온전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나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였고 나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큰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은 불결하고 불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병 환자와 접촉을 했다면 그는 그 자신을 다시 정화하는 예식을 행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다른 사회인들 속에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의상 불결한 사람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의하면 에수님은 전혀 다른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당시의 풍습을 깨뜨리고 예수님은 나병환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시었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를 만나시어 기적으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당대 사회의 지도자층이나 유력한 집단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고 저들이 적대 행위로 나오리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이나 풍습에 매이는 것보다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시오>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불쌍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나병은 전염이 잘 안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눈썹이 빠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살이 썩어 들어가고 피부가 곪는 흉측한 모습입니다. 흉악 망측한 것의 대명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둥병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고 타기(唾棄)하는 병 중의 못된 병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육체적인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됩니다만 그보다도 영혼의 나병 환자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육신은 남과 같이 성하고 겉모양으로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이지만 기실  그 마음과 정신상태는 썩었고 신앙면에 있어서는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빈사상태에 놓여 있는 영신상 문둥병자가 우글거립니다. 그의 영혼은 썩어 들어갑니다. 그 영혼은 곪을 대로 곪아서 아주 흉측하게 보입니다. 일대 수술을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영혼의 중한 병을 깨닫지 못하고 치료하려고 서둘지 않습니다. 끝내 그들은 영혼의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마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나병 환자는 좋은 점을 보여 줍니다. 영혼의 나병 환자들의 갈 길을 제시해 줍니다. 이 사람은 몸이 나창으로 덮이고 피부가 곪는 최악의 상태에서 절망의 진구렁에 빠져 있었으나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온갖 법적 장벽과 인간이 명하는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동네로 들어와 예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뛰어가 바로 그 앞에 엎드려 간곡히 외치며 부탁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임은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생각만 있으시다면 말입니다>(마르 1,40). 그러자 예수님은 이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상처투성이의 그 사람 몸에 선을 얹었습니다. 그리고는 위엄에 찬 명령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소.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헌옷이 벗겨나가듯 나창이 이 나병 환자로부터 말끔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영신상으로 나병에 걸린 자들도 역시 이와같은 심정으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깨끗이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만하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기도를 올린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기 좋게 하느님께 배척을 당하였고 반대로 세리의 겸허한 기도는 하느님께 청허되어 의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하였답니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 이 기도의 정신은 오늘의 나병 환자의 심정과 일맥 상통하는 겸손하고도 애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기도라야 하느님께 의합되고 가납된다는 진리를 항상 명심합시다. 아멘.












11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김몽은 신부




오늘(연중 B해 제 6주일)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낫게 해주신 사실을 전해준다. 이 기적에 대해서는 마태오(8,1-4)와 루가(5,12-16)도 똑같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나병 환자와 같은 깊은 믿음과 용기이다. 우리에게 굳은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해서 용기를 가질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오늘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자비의 마음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제 1독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나병 환자는 다른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즉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나는 부정(不淨)하다’고 외칠 것이며, 병이 나을 때까지는 언제나 부정한 상태로 있을 것이니,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할지니, 집 밖에서 살 것이니라>(레위 13,44-46)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결코 군중들 속에 끼어서는 안되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는 감히 그러한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그만큼 예수님께 대해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행위를 범해 가면서까지 군중 속에 끼어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머물러 계시는 집에까지 찾아 들어갈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완전히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한 나병 환자는 그의 필사적인 신뢰로써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선생님을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생각만 있으시다면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신뢰에 찬 간청이냐! 주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이 없으시다.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 다만 행하지 않으시는 것은 마음이 없어서이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병 환자는 이러한 굳고 깊은 신뢰로써 예수님의 자비심에 호소했다.




예수님께서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 주겠소.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나병 환자의 나병 증세는 곧 사라지고 그는 깨끗하게 나았다. 그의 믿음이 주님의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주님의 기적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율법서에는 성한 사람이 나병 환자를 만나면, 그도 역시 부정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법이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율법에 구애됨이 없이 환자에게 <손을 갖다 대시었다.> 얼마나 자애 깊으신 주님이신가! 우리의 믿음도 그와 같이 굳고 깊어서 주님의 자애로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했으면 싶다.










12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문둥병자는 누구인가?


                                            김영국 신부




오늘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금년엔 우연하게도 2주일 전인 음력 설날에 나병 환자들을 위한 구라주일을 지냈습니다. 그때에 나병 환자들을 돕기 위한 특별 강론도 들었고, 특별 헌금도 우리 모두 냈습니다. 그런데 2주일 후인 오늘, 정월 대보름날도 또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사시던 그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나병이라고 하면 회복 불능의 병으로 취급되었고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불쌍했던 것은, 이 나병 환자들이 길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여러분들이 제 1독서에서 들었듯이 자신이 나병 환자라는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녀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은 의례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더러운 사라들을 가까이 하시면서, 더군다나 그들의 몸에 당신의 손을 대셔서 그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더러운 사람들마저도 모두 다 당신 품안으로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었고, 또 그들의 질병을 완전히 고쳐줄 수 있는 능력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2주일 전인 구라주일에 특별 헌금을 냈었는데, 그때 특별 헌금의 액수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들 모두가 나병 환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어떤 애덕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낸 조그마한 헌금들을 모아 가지고 그 보기에 흉한 나병 환자들을 우리와는 떨어진 고세 모두 격리시켜 놓아서 우리가 그 흉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전염될 걱정도 덜고 하는 등의 여러가지 무의식적인 바램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헌금이 그들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우선 우리 자신이 나병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들의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과연 우리가 나병 환자들을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이라고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한 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도 결국은 영신적으로 하느님 앞에 문둥병자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건강하고 나병에 걸려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의 모습은 문둥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론을 하고 있는 저나, 강론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나병 환자일 수 있습니다.


명절날 이런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우리 자신을 문둥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결국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뜻이 될 수 있겠고, 또 우리가 지은 죄를 나병으로 비유한다고 할 때에 그 죄는 아주 큰 죄, 대죄, 우리가 그 죄를 짓고 죽으면 지옥에 갈 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 앉아 계신 많은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럼 그렇지, 내 영혼이 문둥이와 같이 후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회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 수훈을 잘 읽어보고 우리 자신을 반성할 때,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하는 하느님의 계명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느님의 계명들 중의 가장 큰 계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난 간음한 적이 없다.”라고 쉽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다. 조그만 조는 지었다 하더라도 큰 죄는 짓지 않았으니까 나는 하느님 앞에 나병환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태오 복음 5장 21절부터 나오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지방 법정에서 벌을 받게 도고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서 벌을 받게 되고 자기 형제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느 사람은 마음으로 벌써 그 여자와 간음한 것입니다.’




이 두 귀절의 말씀을 볼 때에,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향해서 분노하고 증오하며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형제를 죽이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이성을 바라보면서 헛된 욕망을 품음으로써 간음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 의롭지 못한 일에 우리 모두는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나는 착한 사람, 그리고 너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주의 아무도 내 영혼은 이 부드러운 살갖과 같이 건강한 영혼이고, 네 영혼은 나병 환자와 같이 썩어 문드러진 영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어떤 사람은 눈처럼 깨끗한 사람, 어떤 사람은 흙처럼 새까만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흰색과 검은 색이 두리뭉실 서로 섞여서 나타나는 회색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뚜렷이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만성 피부병 환자와도 같은 영혼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러한 회색과 같은 존재이고, 나병 환자와 같은 그런 존재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모두가 서로 같은 처지에 있고, 같은 상태의 어떤 병중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서로의 병을, 상대방의 흠을 서로 감싸주고 위로해 주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조그마한 잘못을 하든 큰 잘못을 하든 그 사람의 잘못을 언제든지 눈감아 주고, 또 위로해 주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도록 옆에서 격려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인간들이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감싸주고 눈감아준다 하더라도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 우리 영혼의 모습을 모두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우리 영혼의 잘못들을 모두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가까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자주 병실에 드나든 적이 있습니다. 같은 병실에 사 사람 모두가 비슷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각각 그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자기의 병세가 더 나쁘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의 병은 이제 다 나았다고 위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세 사람 모두 자기를 담당한 주치의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신뢰심을 갖고, 마치 세살 먹은 어린 아이처럼 이것저것 조그마한 증세나 상태까지도 모두 다 털어놓고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육체적인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에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형제의 잘못이 작은 잘못이고 내 잘못이 큰 잘못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형제를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혹은 우리 자매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도 결국은 그러한 비슷한 죄, 같은 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처럼 자기를 고쳐줄 수 있는 예수님께, 주님께 우리의 썩어 문드러진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하며 따져볼 것이 아니라, 내가 지는 죄는 그것이 작건 크건 간에 하느님 앞에 무조건 털어 놓고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영혼은 당신 앞에 나병 환자와 같습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로 우리 모두 주님께 달려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3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예수님께 애원하며


                                               김승주 신부


문둥병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며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했다.


우리도 우리의 나약성을 솔직히 고백하며 죄의 용서를 겸손되이 간청하자.




옛부터 의술은 인술(仁術)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만큼 의술이 차지하는 몫이 숭엄하지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귀중하다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일 또한 귀중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나라도 젊은 의학도들은 처음으로 환자들을 대하게 되는 임상 실습에 앞서 엄숙하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외웁니다. 참다운 의사로서의 정신을 되새기며,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부터 지상(至上)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고 굳게 맹세합니다.




모든 의료인을 대변하는 숭엄한 선서. 이렇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기에, 그 생명에는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하자를 없애려는 그들의 노력, 즉 치유 행위란 그만큼 인간의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는 어느 병에 있어서나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문둥병일 경우 더욱 그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문둥병은 누구나 다 두려워합니다. 구라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그 병에 대한 인식도 차츰 올바로 계몽되어 가는 오늘날에도 문둥병은 아직 두려운 병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물며 의학이 전혀 발달되지 못한 2000년 전의 이스라엘에서야 어떠했겠습니까?


문둥병자는 불결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스스로 불결함을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은 자, 그래서 비록 살아있지만 죽은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는 모습을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얼마나 신뢰 가득찬 애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애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에게 손은 갖다 대시며 깨끗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절대적인 금기조항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손을 뻗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지극한 신뢰와 예수님의 지극한 애정이 함께 만난 겁니다. 여기서 문둥병은 깨끗이 완쾌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불결에서 해방되었고, 죽음의 고통에서 소생의 기쁨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기적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돌이켜 보게 하십니다. 문둥병자의 믿음은 죽음에서 소생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은 우선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나약성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육체라는 제한된 조건을 지닌 우리이기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솔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의 상태에서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해방되기 위해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우리는 저 나병 환자처럼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 죄의 상태를 고쳐주시도록, 그리하여 영원한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뛸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은혜를 애원해야 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지극한 신뢰심으로 달아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이러한 간청을 듣기 위해 우리 앞에 계십니다. 특히 당신이 세우신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존중되어 마땅한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 몸에 하자가 생겼을 때 마땅히 치유되어 보존되어야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맑고 깨끗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며, 이 영혼의 치유는 더더욱 숭엄한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우리는 우리의 나약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저 나병환자처럼 지극한 신뢰심으로 우리 영혼의 병을 씻어주시도록 간청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고백성사를 열심히 받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으면서도 결국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지극한 애정으로 손을 내어밀어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도록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따뜻이 감싸주시며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고백성사에 진실된 마음으로 열심히 참여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4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소외된 이들을 생각하는 교회




오늘 복음(마르 1,40-45)은 마르코 복음서에 단 한 번 나오는 나병 치유 이적사화입니다. 상황묘사(40절), 기적적 치유(41-42절), 치유실증(44ㄴ절), 치유된 사람의 반응(45절) 순으로 엮어졌습니다.




1. 나병 치유이적 사화


성서에서는 문둥병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했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레위 13,45-46). 그리고 나병은 죽음처럼 회복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이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나병환자를 측은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나서 그에게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오직 제관에게만 가서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병의 치유 여부는 제관들이 확인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가서 제관에게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레위기 14장2-32절의 규정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 나병을 고쳐 주신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께서 내리신 함구령을 지키지 않고 그 일을 두루 퍼뜨렸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외딴 곳에 가서 머무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동기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치유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는 기적들을 행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나서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치유이야기에는 그리스도론적인 동기가 담겨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만이 나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민수 12, 9-15 모세; 2열왕 5,1-27 엘리사).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나병을 고쳤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람인 모세나 엘리사보다 탁월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전권을 물려받으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멸시 당하는 불행한 사람들을 각별히 아끼시고 애련히 여기신 예수님의 처신을 본받아 소외된 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5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이웃 위한 삶 통해 얻는 가장 큰 자유


                                                     – 서울주보(1988, 2, 14)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공동 가르침 중의 하나는 나병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유다인들은 나병을 죄와 잘못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1월 마지막 구라주일에 나병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 나환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크리스챤의 의무를 함께 묵상한 바 있습니다. 어쨌든 성서는 모든 질병, 특히 나병을 죄악과 동일시했습니다. 이것은 질병이 주는 부정적 현상 속에서 죄의 흉함을 깨닫고 늘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권고와 교훈으로 이해해야 할 내용입니다.




죄는 하느님을 멀리 떠난 고립 상태


오늘의 제1독서는 레위기 12장의 말씀으로 나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는 정결례법의 원칙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사람들도 모름지기 거룩해야 한다는 성화(聖化)명령의 강조입니다. 사실 사람은 사는 동안 자연히 때묻고 더러워지게 마련입니다. 특히 구약의 유다인들은 출산과 같은 자연적 현상과 질병과 같은 부정적 현상에 그 어떤 죄성이 있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에 때를 묻히듯, 부정한 요소들이 깨끗한 요소를 더럽힌다고 여겼기에 정(淨)과 부정(不淨), 성(聖)과 속(俗)을 엄격히 구분하며 격리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의미에서 연유되어 윤리적 및 종교적 동기로 확산된 것입니다. 사실 죄와 잘못이란 하느님을 멀리 떠난 고립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난 주일의 1독서인 욥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유다인들은 고통과 질병을 꼭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이에 억울한 욥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며 실의의 독백을 읊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우선 위생학적 견지에서 나환자 및 전염병 환자들을 공동체에서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이를 집행하고 선언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다 특유의 공동체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이 물론 귀중한 존재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을 대에는 그 책임을 지고, 질병에 걸렸을 때에는 공동체를 위하여 마땅히 양보하고 희생해야 된다는 원칙입니다. 사제는 개인을 돌보고 개인에게 봉사하는 하느님의 사람이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위하여 죄인과 전염병자를 공동체에서 격리시킬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논리로 이해할 것만은 아니며, 개인의 잘못과 질병이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윤리적 교훈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공동체에서 격리될 불의․고문․파렴치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꼭 격리되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인들, 잔인한 무리들, 공동체를 파괴하며 삶을 죽이는 무리들은 마땅히 격리되어야 합니다. 불의한 권력자, 고문자, 파렴치범, 비양심적인 사람,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사람, 이들은 모두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일정한 기간 동안 보속과 단련, 정화의 시련기를 거쳐야 합니다. 크리스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필요한 사제들이기에 공동체의 성화와 보존을 위하여 이 사회적 책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결코 게으르거나 소홀히하지 않도록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의 말씀은 우상숭배와 그와 관련된 음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토에는 여러 우상신전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음식을 우상에 바쳤고, 심지어는 시장에 파는 음식물도 우상에 바쳐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에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생긴 것입니다. 우상에 바쳐졌던 음식을 사먹어도 무방한가 아니면 불가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대답한 사람들은 그러한 음식을 먹어도 무관하다 하며, 좀 세심한 사람들은 그러한 음식은 먹을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음식은 원래 무관하니까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권리주장보다는 양보심을 내세워, 만일 내가 담대하여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이 나에게는 무관하더라도 나의 이 행위가 마음 약한 이웃 형제에게 악한 표양과 놀라움을 준다면 그 약한 형제를 위하여 그런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바오로는 먹고 마시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논쟁 그 자체에 말려들지 말고, 더 큰 가치를 추구하여 더 큰 기준으로 살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늘 이웃을 생각한 사랑의 사람입니다. 자신보다는 이웃을 앞세운 희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을 기쁘게 해주는 그것이 가장 큰 자유임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바오로는 생의 존재 이유를 타인에 두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타인 중심의 삶, 이것이 위대한 크리스찬, 위대한 사도의 존재이유이며 가치인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 대목에서 이론적 설명보다는 실천적 결단과 지혜를 통하여 신자들을 교육하며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찬은 모름지기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란 결코 타인을 방해하거나 타인을 거북하게 하는, 타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타인을 생각하며 양보하는 겸덕을 바오로는 크리스찬의 실천적 지혜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똑같이 된 예수의 강생원리이며, 자신을 이웃과 동화(同化)시키는 사랑의 원리인 것입니다.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삶을 철저히 추종한 확신의 사람이었기에 자기 자신을 자신있게 내세우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양보한, 철저하게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 이긴 나환자의 믿음


오늘의 마르코 복음은 나병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시는 예수의 기적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독서와 연결된 이 대목은 공동체를 위하여 격리된 나병환자가 대사제이신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어 다시 공동체로 수용된다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병환자의 심리적 고통과 갈등, 그 사회적 냉대를 우리는 이루 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나환자는 실망과 좌절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희망과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나환자는 무엇보다도 예수께 신뢰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대한 철저한 의탁으로 나환자는 실망과 좌절을 이겨냈으며, 질병을 치유시킬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끌어당길 수 있었습니다. 믿음과 기도가 이룩한 결실을 우리는 분명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환자의 이러한 자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 우리에게 많은 묵상자료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선 나환자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同情)을 지니셨으며 그에게 손을 갖다대셨습니다. 동정과 접근, 악수, 이 심리적․물리적 일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예수는 나환자를 바로 또다른 자신으로, 벗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접근했습니다. 동정과 접근은 이와 같이 불가능을 이기게 합니다. 치유된 나환자는 이 일을 널리 알리고(복음선포) 퍼뜨렸습니다. 구체적 증언과 확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교훈을 따라 약자, 병자에게 다가가 힘과 용기를, 치유의 은혜를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님과 같이 동정, 동화, 접근하는 마음과 자세를 지니며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16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 ‘나병환자를 고치시다’




나병은 문둥병이다. 살이 문드러진다고 그렇게 불렀다. 이 병보다 더 비참한 병은 역사상 없었다. 나병에 걸리면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옮아갔다.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상적 생활이 허락되지 않았고 사회는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격리당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뵙고는 깨끗하게 해달라며 청을 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 나병이 나은 것이다. 문둥병의 상처가 없어진 것이다. 그 사람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상상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열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밖에 표현 할 수 없다. 절망에서 희망을, 포기에서 재생을, 죽음에서 부활을 그는 체험했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그 사람은 ꡐ그 체험ꡑ을 평생 간직했을 것이다. 그 체험이 어떤 체험인데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의 교훈은 바로 이 나병환자의 체험을 묵상하는데 있다. 그의 체험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보는데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는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기적들은 없는지. 나를 숨막히게 했던 사건들은 없는지. 불가능하다고, 도저히 안되겠다고 단념했는데 기적같이 반전된 사건은 없는지. 운이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분이 봐주시면 운명도 바뀌고 인생도 달라질 수 있다.




기적은 있다. 우리는 몰랐지만 기적이었던 사건, 기적이었던 만남은 반드시 있다. 우리는 기적인줄도 모르면서 잊고 살았지만 그분이 기적으로 체크해놓은 사건과 만남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분의 허락없이는 누구에게도 기적같은 사건, 기적같은 만남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은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망각하면서 일상사에 묻혀 살고 있을 뿐이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그분을 믿었다.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분의 힘을,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영혼과 정신을 바꿔놓았다.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은 믿음의 힘이었다. 참으로 그는 달라진 운명으로 세상을 향해 뛰어갔을 것이다. 그 뒤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기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은총이 된다. 기억하는 순간마다 힘이 된다. 지난날의 감정과 느낌을 찾아낼수록 그만큼 그분의 현존과 애정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리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기적은 한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계속해서 나를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은총인 것이다.




우리는 나병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나병처럼 우리의 영혼을 문드러지게 하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 망각이라는 잘못이다. 은혜를 잊어버리고 축복을 잊어버리고 재생과 거듭 태어남을 잊어버리는 잘못이다. 그리하여 불안과 두려움을 영혼 안에 허락하는 잘못이다.




ꡒ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ꡓ(마르 1,40―41) 나병환자의 이 기도가 어찌 그 사람만의 기도이겠는가. 오늘 우리도 그런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런 기도가 없기에 신앙의 힘도 믿음의 기쁨도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ꡒ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ꡓ(마르 1,41) 주님 말씀에 담긴 애정을 묵상하며 한 주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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