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7주일 강론

 

연중 제 7주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제 1독서 : 이사 43,18-19.21-22,24-25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일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야곱아, 너는 나를 찾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다. 도리어 너는 죄를 지어 나의 화를 돋구었고 불의를 저질러 나의 속을 썩였다.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을 나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제 2독서 : 2 고린 1,18-22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진실성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여러분에게 한 내 약속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바노와 디모테오와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우리를 굳세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사명을 맡겨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확인해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복 음 : 마르 2,1-12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그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 앉아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감히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나는 네 죄악을 씻어주겠다




 인간들이 하느님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성서상의 모든 역사는 원조들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홍수로 인한 멸망, 금송아지 숭배,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의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한 불충실, 유다의 배반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과 배반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새롭게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신다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주는 그 섬기는 자들을 어여삐 여기시나니 당신은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시편 102,13-14)


 바로 이러한 불충실과 용서의 테마 ㅡ 정치적 재난까지도 포함된 어떤 재앙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극적인 전환을 가져다주곤 하는 ㅡ 가 제 1독서에서 비탄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거기서 야훼께서는 장차 이스라엘을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킬 때 새롭게 보여주실 당신 사랑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대조적으로 그 선민들이 빠져 있는 영적인 냉담을 지적하신다 :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일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야곱아, 너는 나를 찾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다 . 도리어 너는 죄를 지어 나의 화를 돋구었고 불의를 저질러 나의 속을 썩였다.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을 나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이사 43,18-19,21-22,24-25)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 자신과 또한 당신의 자비와 충실을 들어높이신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마음이 한없이 넓으심은 무엇보다도 특히 용서하여주심에서 드러난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25절)




아들아, 너는 네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의 마르코복음은 이제 막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 나자렛 예수를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다가왔음을 선포하시며 (마르 1,15참조)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인간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해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뿐만 아니라 또한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즉 사탄에게 세상을 지배하게 하는 악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리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승리는 온갖 죄의 용서를 통해 가장 크게 드러난다.


 이제 오늘의 복음을 좀더 깊이 음미해 보자. 마르코에 있어서 오늘의 복음은 이른바 ‘갈릴래아 논쟁’(2,1-3,6)이라고 하는 독특한 복음사화 부분이 시작되는 기점이 되고 있는데, 이 논쟁사화와 복음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의 수난사화보다 조금 앞서 나오는 ‘예루살렘 논쟁’(12,13-37)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논쟁들은 예수의 활동기간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떤 특별한 문제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 내용을 강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재시적이든 논쟁적이든간에 항상 대단히 의미깊은 어떤 말로써 절정에 이른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 내용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고 목격증인이 드러나고 있다. 즉 이야기의 모든 장면이 아마도 가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서 전개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문앞에 운집하여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가 잔가지와 마른 흙으로 덮힌 지붕을 벗겨재고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내려보낸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12절)에서의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놀라움과 경탄의 요소들은 관객인 우리들을 그 사건의 주역으로 만들어줄 만큼 신선하고도 사실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기적 사화들 ㅡ 예를 들면, 바로 앞서 우리가 이미 주석한 나병환자의 치유 기적(마르 1,40-45)을 들 수 있다 ㅡ 과는 차이점이 있다. 예수께서는 오로지 육체적인 치유를 얻고자 하는 신뢰심만으로 그에게 왔던 그 환자나 그를 데리고 온 동료들의 기대를 처음에는 저버리시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국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5절).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그들뿐만 아니라 특히 거기 앉아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던 몇몇 율법학자들까지도 놀라게 했다 :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감히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학자들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 뿐이다 : “야훼께서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신다”(시편 102,3 ; 이사 43,25 ; 44,22 등 참조).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예수께서 실제로 신적인 존재로서의 어떤 위대한 요소를 지니고 계시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거부한 데 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예수가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은 옳지 못했다. 즉 먼저 예수의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억측을 그만두도록 하기 위해 이중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들추어내신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활동하신다는 표지로서 치유의 기적을 구체적인 논증으로 제시하신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8ㅡ11절).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질문의 내용은 그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치료를 하는 것’ 보다 더 쉬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학자 자신들이 ‘ 죄를 사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의 의도는 앞에서 말씀하신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이 참된 사실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시려는 것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지금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외적인 표지를 택해주심도 ‘더 쉬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더 어려운 일’을 해야 할 때에도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는 자를 통해 기적을 행하실 수 있겠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께 치유받은 태생소경이 질문공세를 펴는 그 유다인들에게 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풍부한 식견으로 가득찬 답변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요한 9,31ㅡ33). 그러므로 ‘ 더 어려운 일’은 ‘죄를 사하는 일’이다. 중풍병자의 치유는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즉 외적인 기적행위는 보다 더 깊은 내면적 실재, 말하자면 영적 중풍병으로부터의 치유를 나타내주기 위한 표지로서만 적용된다. 사실, 현재 하고 있는 모든 논쟁의 쟁점은 무엇이 ‘ 더 쉬운 일인지’ 혹은 ‘덜 쉬운 일인지’를 가리는 그런 지엽적인 토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하나의 기적행위가 갖는 두 가지의 의미, 즉 그 불쌍한 중풍병자의 치유는 병든 육체의 치유일 뿐 아니라, 병든 영혼의 치유이기도 하다는 이 두 위미를 서로 밀접히 연결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하시는 이유는 그 중풍병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다거나 또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요한 9,2ㅡ3 참조) 모든 병이 죄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는 하느님께서 항상 새롭게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셔야 하는 우리 모두와 같이 불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 전체를 구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이 인간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지 육체만 또는 정신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왜냐하면 병이 든 것은인간 전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실제로 보다 더 중한 병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 뿌리 박고 있는 내적인 병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내적 치유부터 시작하신다.


  모든 사악한 것은 ‘인간의 내면, 즉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마르 7,21ㅡ23 참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로지 신앙의 외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잘못된 메시아 사상들이 있다. 만일 구원활동이 인간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악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복음 전체를 통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된다 ;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10절).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당신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신다. 우리가 예수의 입을 통해 듣고 있는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론적인 칭호는 구름을 타고 영광에 싸여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 (마르 13,26;14,62 등 참조)도 표현하고, 또한 그의 ‘야훼의 고난받는 종’(마르 8,31;9,31;10,33.45;14,21,41 참조)으로서의 모습도 표현해준다. 이 칭호를 ‘지상에서 죄를 사할’ 그의 권한과 연결시켜 보면 그것은 한편 예수께서 djEJs 의미에서 종말론적 심판을 예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 요셔야 할 분의 권능이 현존한다. 그러나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풍병자의 경우에서처럼 사람들에게 은총과 자유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그러한 ‘용서하는 권한’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랑의 커다란 시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마태오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그리스도의 피 (마태 26,28)에 대해 언급한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강조했던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사랑하실 줄 아시기 때문에 용서하실 줄도 아신다는 사실에 귀착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며, 그 당시 군중을 사로잡았던 경탄의 감정을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이 느낄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오늘날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2절).




하느님의 아들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새로운 이 용서의 힘을 통해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실한 아들이 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뜻에 따르기 위해 죄를 멀리할 때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다시 받아들이신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의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며 그가 행동할 때에 망설이거나 불성실하다고 비난하는데 대해 자신은 항상 변함없이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즉 그는 이랬다 저랬다 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모범을 들어 설명한다 :“실바노와 디모테오와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2 고린 1,19-20). 하느님의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진실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진실하기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걸어야 할 여정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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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7주일 강론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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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7주일


             7. 김승주 신부(나)/ 13                   8. 김몽은 신부(나)/ 14

             9. 김정진 신부(나)/ 15                   10. 김성배 신부(나)/ 17

             11. 중풍걸린 한 남자(나)/ 19             1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나)/ 20

             13. 민병숙 작가(나)/ 22                  14. 교구 주보(나)/ 23

    7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복음 전파

    김승주 신부


    온갖 죄악에 찌들은 사회의 병폐는 그리스도만이 치유해 주실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복음전파에 힘써야 한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죽어간다”는 말이 과장일지는 몰라도,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 합니다. 가치관은 전도된 지 이미 오래이고, 갖가지 부조리와 사회적 병폐는 날로 인심을 모질게 비틀어버리고 있습니다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은 나 하나만의 치부를 전락하였고, 흉악해가는 청소년 범죄는 이 사회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회는 크나큰 병을 안고 있습니다. 기존질서와 도덕은 마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각있는 사람들은 이 부패와 부조리를 일소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회적 병폐를 시정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질화된 이 사회의 병은 좀체로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병의 뿌리가 뽑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의 겉모양만 보지, 그 근본적인 면은 잘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로는 보면서도 못본 체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회에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하는 빛이 되며, 사회를 정화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 함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사회가 모진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크리스챤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인임을 자처합니다. 신앙은 회개를 수반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이 회개의 실천은 사랑의 생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회개했다는 말을 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즉, 회개는 마음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이 사회의 병폐, 마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사회의 중풍병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은 마땅히 이 사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죄 사함을 베풀어 주실 수 있기에 그리스도만이 이 사회의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기까지에는 수많은 장애가 놓여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 앞의 군중처럼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뭇 사람들을 옭아매는 사회의 온갖 유혹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돈의 유혹이, 권력의 매력이, 명예와 쾌락의 달콤함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실로 오늘날의 복음전파는 날로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가 주저 앉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중풍환자의 친구들이 물러서지 않았듯이, 이 사회의 친구인 우리도 물러서서는 안되겠습니다. 끈질긴 집녑으로 지붕을 벗기고 친구를 예수께 데리고 갔듯이, 우리도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사회를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더욱이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도록 불리운 우리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앉아서 이 사회의 병폐를 개탄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이루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방법을 열어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굳은 확신과 끈기있는 열심히, 난관이 크면 클수록, 어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노력하여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분,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께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복음전파에 노력합시다.






    8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김몽은 신부


    오늘(B해 연중 제 7주일)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중풍 환자를 고쳐 주신 사실을 전해 준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은 주님께서 단순히 환자를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로 인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머물러 계시는 집 주위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도저히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풍 환자를 들것에 떠메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그 지붕을 뚫고 환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 당돌하고 무례한 행위에서 그들의 더할 수 없는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때 하신 말씀은 <당신 병은 나았소>가 아니라,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라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오>라든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기도도 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 자신이며 병을 고치시는 것도 당신의 권능에 속한 것임을 은연중에 보이신 것이다.


    율법학자들도 그 권능에 압도되어 감히 힘 밖에 내어 비난하거나 도전해 오지 목하고, 다만 마음 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 사람이 감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완고하고 눈이 멀었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고집을 부리는 행위로서, 현 시대에도 그런 자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을 말한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신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소? 중풍 환자에게 ‘당신의 지는 용서를 받았소’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겠소? ‘일어나 당신의 요를 걷어가지고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겠소?> 하시고는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신다.


    이 두 가지 말씀은 모두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표현이며, 후자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의 용서나 병고의 치유나 모두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그러한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패악(悖惡)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중풍 환자와 그를 떠메고 온 사람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사람에 넘치는 자비하심에 전폭적인 신뢰로써, 저 중풍 환자와 간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는 자로서 머물러 있는 자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주님의 사랑 안에 주님의 능력에 의해 인간고의 치유를 받게 된다.






    9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사제권과 고백성사

                                     김 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는 과정에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죄권을 가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중풍 걸린 사람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실제로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시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지도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독성죄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의 법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강조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권리와 권위를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하느님을 인간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거나 자기 자신을 하느님같이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과 자기를 똑같이 보는 것이므로 이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통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순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독성도 아니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신인(神人)의 말씀을 깨달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같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큰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는 모든 병 중에서도 가장 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고칠 적도 있고 다룰 수도 있지만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규제하고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산에서 떨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한 번 밑바닥에 떨어져 버린 사람은 제 힘으로 위로 기어오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으로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나 그 후계자들인 성직자들에게도 사죄권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 기인한다고 보십니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히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사도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당신들이 용서하여 주면 그들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그들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0, 22-23)라고 하시며 사도들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은 사제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적에 어느 평범한 한 인간 앞에서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바로 하느님 대전에서 고백도 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또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사해 준다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제들은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제들은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사죄경을 염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 자매를 용서하시기 바라며 나도 그분의 권한으로 내가 할 수 있고 또 형제 자매가 필요한 대로 모든 처벌에서 형제 자매를 풀어 주고 아울러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형제 자매의 죄를 사합니다>하며 십자를 긋습니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볼 적에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가 죄를 뉘우치지 않는대도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뉘우칠 수 있기 전에 우리 생활에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의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일부요, 우리가 고백하는 가톨릭 신앙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사기행위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간음이나 비방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일을 헛되이 지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며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낙태를 지지하는 공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죄권이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죄의 의식을 가짐으로써 참회하며 죄의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 죄악들을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겠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까. 하느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주여, 내 영혼을 씻어 주소서. 나는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하고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고백성사를 타당히 또한 자주 보아야 하겠습니다.






    10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갈망중에 가장 강한 갈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김성배 신부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생명이 있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지, 생명을 잃고난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애착 중에 가장 강한 애착이 생명에 대한 애착이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갈망중에 가장 강한 갈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잃는 것보다도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포기한다.


    그러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의 갈망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병과 죽음 앞에서 여지없이 좌절하고 무너지게 된다. 병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은 손상을 입게되고, 병이 깊어지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 때 사람이 충격을 받는 이유는 병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살기를 바라는 갈망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때운이다.


    사람은 본래 생명과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에 고통을 거부하고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사람은 본래 죽음과 고통을 모르는 생명,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축복받은 생명을 하느님에 선물받았었기 때문이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한없이 완전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곁함이 없이 완전한 생명을사람에게 주셨다. 고통과 죽음은 생명의 결함이고,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지닌 생명도 결함이 있는 생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생명의 결함은 악을 원하고 행하는 의지의 곁함에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겪지 않을 생명, 살기률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갈망이 충족하게 채워지는 축확받은 생명을 사람에게 선물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정신도 결함이 없이 완전하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을 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에는 악을 모르는 거룩한 무지가 있게 하셨고, 사람의 마음에는 선을 향해서 이끌리는 사랑의 열정만이 있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은 알고, 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선한 완전한 생명을, 하느님께 선물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받은 완전한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서도 고통이 없는 생애를 살면서 하느님께 받은 생명을 더 완전한 것으로 완성시켜 가게 하셨다.


    그리고 일생을 마친 다음에는,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죽음을 거쳐서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을라서, 자기가 일생동안 완성시킨 생명에 어울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따서 인간을 만드썼다. 죽음이 세상에 돌어 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 (지혜서 2,23-24).


    하느님께 고통도 죽음도 없는 생명, 악을 알지도 원하지도 않는 완전한 생명을 선물받은 사람은, 악을 알고 원하도륵 권유하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비참하게 훼손시키고 만다. 이제 악해진 사람의 생명은 병고에 시달리며, 세상을 살다가 죽음으로 일생을 마쳐야 하고, 저 세상에서도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누릴수 없는 비참한 생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사슬에 묶여, 죄의 노예가 되고말았다.


    육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보다, 하느님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영흔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비할 데 없이 더 심각하게 우리의 생명을 해친다. 육체의 죽음은 일시적인 고통을 줄 뿐이지만, 영흔의 죽음은 영원한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손상시킨 사람의 생명을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이제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된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하느님의 빛과 사랑을 다시 불어넣으심으로써, 그 사람의 생명을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생명으로 회복시키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치유시켜 주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온 병의 치유률 청하는 이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육체의 병보다 영흔의 병이 더 비참한 것이고, 따라서 병의 치유를 청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것을 상기시키신 것이다.


    사람이 육체의 건강만큼 영흔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육체의 병을 괴로워하는 만큼 영흔의 병을 괴로워하며,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 하는 만큼 영흔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세상에는 회개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교만과 탐욕과 육욕을 버리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깨꿋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다.






    11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중풍걸린 한 남자


    오늘의 복음은 다음 광경(光景)을 우리 눈앞에 똑똑히 그려줍니다. 중풍에 걸린 한 남자를 그리스도 곁에 거적(들것)에 메여옵니다. 이 남자는 내버려둔 채 누어 있습니다. 이 남자의 생명은 거의 희망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도 타인 생각에도 반신불수 병은 나을리 없다고 실망하고 있던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우들은 그 병자를 그리스도의 기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우들은 그 병자를 그리스도께 고쳐주십사 하고 데려 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두 마디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다.

    첫째 말씀은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를 사하노라.”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 병자를 영적을 행하시는 분에게 데리고온 것은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함이 아니고 육신의 병인 중풍을 고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신 것은 우리 인간과는 틀렸습니다. 천주께옵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영혼이 병들었는가, 건전한가, 또는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는가, 살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얼굴을 보고 판단하지만 천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이것이 치료에 꼭 필요한 본래의 마음입니다. 참말로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인간이 아주 고민하는 것은 육체적 차원이 아니고 천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으로써 입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무의미한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작년에 일본 동경을 방문한 인도의 네루 수상이 보도기관의 회의석상에서 “최초의 인공위성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게 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당신의 소견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었습니다. 네루 수상의 답변은 다음과 갔었습니다. “기탄없이 말하면, 인생의 다른 분야에선 우리의 생각이 오늘날 놀랄만한 과학기술의 발달 배후에 뒤떨어진감이 있다는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속에는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악의 힘도 들어갑니다. 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죄는 방의 문이 꼭 잠겨진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이문은 밖에서만 열립니다. 사람이 이문을 닫아버리면 방 속에 갇힌 상태가 됩니다. 밖에서 사람이 와서 이문을 열지 않으면 생명은 이 방 속에서 참지 못하겠지요.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이문을 열기 위하사 강생하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다시 인간은 즐거운 기분에 넘칩니다.

    둘째 말씀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가라.” 또한 복음은 “저 일어나 집에로 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입으로 권능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만은 이러한 병을 고치는 것은 신의 권능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참말로 신 그리스도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중풍병자를 고쳐줄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당신 스스로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똑똑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밖에서 문을 열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체의 전쾌(全快)라는 그러한 작은 영적은 영혼의 구령이라는 가장 커다란 영적의 한 흔적에 지나지 않었습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틀림없는 증거로서 또한 우리의 신앙을 지상의 혹은 지옥의 어떠한 힘이라도 때려 부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상 두 가지 복음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깨닫는 눈을 열어줍니다. 그리스도 안 계시면 사람은 천주님한테서 말리 떨어진 죄중에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달아들면 어떠한 병이라도 고쳐지겠지요. 이리하여 사람은 새로운 존재를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가 묵상한 바는 조그마한 것에 이르기까지 밝히 규정되어야 하며 감추어 남겨 두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백성이 보고 놀라며 이러한 권을 사람에게 주신 천주를 찬양하니라.” 아멘.






    12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치유해주셨다. 성서에서 자주 만나는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중풍병자를 확실하게 고쳐주신다. 환자의 가족들은 극성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한쪽 지붕을 벗겨내고 그 구멍으로 환자를 줄에 매단 채 내려보낸다.


    그들의 기발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아마 무척 놀랐을 것이다. 더러는 웃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붕을 벗겨 환자를 내려보내다니.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우리의 것과는 달랐다. 그 지역은 비가 오는 우기와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확실했기에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대충 나뭇가지나 거적 같은 것으로 덮어두었다. 아마 거적을 걷어내고 그 사이로 환자를 내려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극성스러운 행동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편 이들은 이렇게 적극적이고 열심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법을 따지고 있었다. 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법을 어겼는지, 어기지 않았는지. 하느님 앞에서도 따지고 있었다. 어딜 가나 있는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용서하신다. 그리고 병자를 낫게 하셨다. 그분의 넓은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말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을까. 정말로 고쳐주셨다. 당신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증명하기도 한다. 간증이라고 해서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 하던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성당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생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 정말 그들은 병이 나았을까. 진정으로 병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 병이 낫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든 치유의 은혜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다. 옛날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는데 지금 성체 안의 예수님이라고 해서 병을 낫게 하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언제든지 사람들을 낫게 해주실 분이다. 현대 사회라고 해서 신앙 안에서 그분이 병자들을 낫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는가 여기에 있다. 단순하게 답하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하느님의 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질병도 하느님의 능력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무도 예수님을 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분은 육체의 병을 전문적으로 고쳐주는 그런 의사가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질병은 신비로움에 속한다. 어느 인간이라도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질병도 인간 본질에 속한다.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건강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다. 병으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정의하는 더 정확한 답변이다.


    육체적 아픔만이 치유의 대상은 아니다. 오늘날 육체는 멀쩡한데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에겐 하느님의 개입이 절실하다. 어떻게 해야 될지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께로 가겠다는 중풍병자의 용기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13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한 사람을 위하여

    민병숙 작가


    어느 새벽, 우연히 불교방송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에 대해서 해설하는 것을 듣고 귀가 번쩍했습니다.

    ‘… 나 하나를 위하여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하였고… 나를 세상에 받아 내주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여태껏 저는 이 유명한 말을 한 석가여래만 홀로 드높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알고 의기소침했는데, 이 해설을 듣고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어느 하나 존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뜻을 알게 되어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해당될 테고,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에 의하면 모든 생물, 무생물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에 ‘찰스 황태자 다큐필름’을 번역하면서 영국 왕자 하나 키우는 값이 우리 나라 보통 아이 백 명쯤 키우는 것 만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재벌총수나 대통령이 아프면 천문학적인 치료비가 들어도 아깝지 않겠지만 이래저래 인생과 사업에 실패해서 반 지하 연립에 살다가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면 돈이 있어도 죽고 맙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해보고 죽더라도 아깝지 않으련만, 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세상이 하나의 사랑의 유기체가 되어 숨가쁘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천지가 진동하듯 경외감에 떨면서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한 사람을 위하여 대학 동창이 병원장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고, 입원하기 전날 성서위원회가 원고료를 부쳐주었으며 성서 백주간 지도 신부님이 병원으로 금새 달려와 병자성사를 주시려고 가까운 성당에 주임으로 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에 처음으로 성서 묵상을 가르쳐주신 수녀님이 성모병원에 계시면서 간호 수녀님과 함께 집에 찾아오시어 기도해주시고 검사해주셨을 때 저는 온 태양계가 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도는 듯 황홀했습니다.


    또한 사촌들로 형성된 태양계, 동창들로 결성된 태양계가 바삐 돌아가고, 황해도 이북 한 고향에서 오신 분이 본당 사무장으로 계시어 가정방문을 해주시고, 싱거운 식사를 해야 하는 환자를 위해 후배가 싱겁게 담은 김치를 날라 오고, 시누이 친구가 대녀가 되어 전복죽을 끓여보내고… 그때 죄 없으신 예수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희생제물이 되신 그 신비를 목격하는 듯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분신인 사람 하나하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에 그 모상인 우리 사람도 서로 그 하느님 사랑을 나르느라, 하늘 혈관을 흐르는 피들이 되어 생명력을 뿜어대어 제 안에서 저도 모르게 이 노래가 자꾸 새어나왔습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 너와 나로부터 흐르고 그 사랑은 세상 어두움 밝게 하여주리라.’


    14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이야기(마르 2,1-12)는 전형적인 치유이적 사화로 상황묘사(1-4절), 기적적 치유(5ㄱ절, 11절), 치유 실증(12ㄱ절), 목격자들의 반응(12ㄴ절)으로 엮어졌었는데 어느 전승자가 사죄권 논쟁을 끼워 넣어(5ㄴ절-10절) 예수님의 사죄권을 증명하는 증거 이적사화로 삼았습니다.


    1. 치유이적사화(마르코 2장 1-5ㄱ, 11-12절)

    이 치유이적 사화는 마르코 복음 1장29-34절, 40-45절처럼 그리스인들의 치유이적 사화와 그 양식이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오시자 많은 군중이 모여듭니다. 그곳에 전신마비의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데려왔지만, 군중들 때문에 예수께 다가갈 수 없어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모두 넋을 잃고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2. 사죄권 논쟁(마르코 2장, 5ㄴ-10절)

    이 사죄권 논쟁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사화에 추가적으로 형성 삽입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어느 전승자가 이 사죄권 논쟁을 엮어 이 자리에 삽입한 것으로 그 동기는 이러합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죄권을 행사하자(마태 9,8; 16,19ㄴ; 18,18) 유다인들이 거칠게 항의합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병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며, 그들은 기껏해야 죄인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할 임무를 띠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치유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사죄까지 하신 셈이 되신 것입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치유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치유이적을 통하여 죄인 취급을 받던 많은 불행한 사람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잡수시고 마심으로써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본받아 불행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각별히 아끼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교우들로 하여금  범한 죄를 생각하고 자주 참회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느끼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7주일


             7. 김승주 신부(나)/ 13                   8. 김몽은 신부(나)/ 14

             9. 김정진 신부(나)/ 15                   10. 김성배 신부(나)/ 17

             11. 중풍걸린 한 남자(나)/ 19             1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나)/ 20

             13. 민병숙 작가(나)/ 22                  14. 교구 주보(나)/ 23

    7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복음 전파

    김승주 신부


    온갖 죄악에 찌들은 사회의 병폐는 그리스도만이 치유해 주실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복음전파에 힘써야 한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죽어간다”는 말이 과장일지는 몰라도,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 합니다. 가치관은 전도된 지 이미 오래이고, 갖가지 부조리와 사회적 병폐는 날로 인심을 모질게 비틀어버리고 있습니다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은 나 하나만의 치부를 전락하였고, 흉악해가는 청소년 범죄는 이 사회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회는 크나큰 병을 안고 있습니다. 기존질서와 도덕은 마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각있는 사람들은 이 부패와 부조리를 일소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회적 병폐를 시정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질화된 이 사회의 병은 좀체로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병의 뿌리가 뽑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의 겉모양만 보지, 그 근본적인 면은 잘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로는 보면서도 못본 체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회에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하는 빛이 되며, 사회를 정화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 함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사회가 모진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크리스챤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인임을 자처합니다. 신앙은 회개를 수반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이 회개의 실천은 사랑의 생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회개했다는 말을 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즉, 회개는 마음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이 사회의 병폐, 마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사회의 중풍병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은 마땅히 이 사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죄 사함을 베풀어 주실 수 있기에 그리스도만이 이 사회의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기까지에는 수많은 장애가 놓여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 앞의 군중처럼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뭇 사람들을 옭아매는 사회의 온갖 유혹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돈의 유혹이, 권력의 매력이, 명예와 쾌락의 달콤함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실로 오늘날의 복음전파는 날로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가 주저 앉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중풍환자의 친구들이 물러서지 않았듯이, 이 사회의 친구인 우리도 물러서서는 안되겠습니다. 끈질긴 집녑으로 지붕을 벗기고 친구를 예수께 데리고 갔듯이, 우리도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사회를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더욱이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도록 불리운 우리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앉아서 이 사회의 병폐를 개탄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이루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방법을 열어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굳은 확신과 끈기있는 열심히, 난관이 크면 클수록, 어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노력하여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분,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께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복음전파에 노력합시다.






    8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김몽은 신부


    오늘(B해 연중 제 7주일)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중풍 환자를 고쳐 주신 사실을 전해 준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은 주님께서 단순히 환자를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로 인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머물러 계시는 집 주위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도저히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풍 환자를 들것에 떠메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그 지붕을 뚫고 환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 당돌하고 무례한 행위에서 그들의 더할 수 없는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때 하신 말씀은 <당신 병은 나았소>가 아니라,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라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오>라든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기도도 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 자신이며 병을 고치시는 것도 당신의 권능에 속한 것임을 은연중에 보이신 것이다.


    율법학자들도 그 권능에 압도되어 감히 힘 밖에 내어 비난하거나 도전해 오지 목하고, 다만 마음 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 사람이 감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완고하고 눈이 멀었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고집을 부리는 행위로서, 현 시대에도 그런 자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을 말한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신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소? 중풍 환자에게 ‘당신의 지는 용서를 받았소’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겠소? ‘일어나 당신의 요를 걷어가지고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겠소?> 하시고는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신다.


    이 두 가지 말씀은 모두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표현이며, 후자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의 용서나 병고의 치유나 모두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그러한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패악(悖惡)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중풍 환자와 그를 떠메고 온 사람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사람에 넘치는 자비하심에 전폭적인 신뢰로써, 저 중풍 환자와 간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는 자로서 머물러 있는 자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주님의 사랑 안에 주님의 능력에 의해 인간고의 치유를 받게 된다.






    9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사제권과 고백성사

                                     김 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는 과정에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죄권을 가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중풍 걸린 사람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실제로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시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지도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당신의 죄는 용서를 받았소>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독성죄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의 법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강조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권리와 권위를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하느님을 인간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거나 자기 자신을 하느님같이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과 자기를 똑같이 보는 것이므로 이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통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순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독성도 아니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신인(神人)의 말씀을 깨달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같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큰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는 모든 병 중에서도 가장 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고칠 적도 있고 다룰 수도 있지만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규제하고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산에서 떨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한 번 밑바닥에 떨어져 버린 사람은 제 힘으로 위로 기어오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으로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나 그 후계자들인 성직자들에게도 사죄권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 기인한다고 보십니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히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사도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당신들이 용서하여 주면 그들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그들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0, 22-23)라고 하시며 사도들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은 사제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적에 어느 평범한 한 인간 앞에서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바로 하느님 대전에서 고백도 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또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사해 준다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제들은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제들은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사죄경을 염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 자매를 용서하시기 바라며 나도 그분의 권한으로 내가 할 수 있고 또 형제 자매가 필요한 대로 모든 처벌에서 형제 자매를 풀어 주고 아울러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형제 자매의 죄를 사합니다>하며 십자를 긋습니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볼 적에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가 죄를 뉘우치지 않는대도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뉘우칠 수 있기 전에 우리 생활에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의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일부요, 우리가 고백하는 가톨릭 신앙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사기행위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간음이나 비방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일을 헛되이 지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며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낙태를 지지하는 공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죄권이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죄의 의식을 가짐으로써 참회하며 죄의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 죄악들을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겠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까. 하느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주여, 내 영혼을 씻어 주소서. 나는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하고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고백성사를 타당히 또한 자주 보아야 하겠습니다.






    10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갈망중에 가장 강한 갈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김성배 신부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생명이 있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지, 생명을 잃고난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애착 중에 가장 강한 애착이 생명에 대한 애착이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갈망중에 가장 강한 갈망이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잃는 것보다도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포기한다.


    그러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의 갈망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병과 죽음 앞에서 여지없이 좌절하고 무너지게 된다. 병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은 손상을 입게되고, 병이 깊어지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 때 사람이 충격을 받는 이유는 병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살기를 바라는 갈망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때운이다.


    사람은 본래 생명과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에 고통을 거부하고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사람은 본래 죽음과 고통을 모르는 생명,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축복받은 생명을 하느님에 선물받았었기 때문이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한없이 완전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곁함이 없이 완전한 생명을사람에게 주셨다. 고통과 죽음은 생명의 결함이고,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지닌 생명도 결함이 있는 생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생명의 결함은 악을 원하고 행하는 의지의 곁함에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겪지 않을 생명, 살기률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갈망이 충족하게 채워지는 축확받은 생명을 사람에게 선물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정신도 결함이 없이 완전하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을 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에는 악을 모르는 거룩한 무지가 있게 하셨고, 사람의 마음에는 선을 향해서 이끌리는 사랑의 열정만이 있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은 알고, 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선한 완전한 생명을, 하느님께 선물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받은 완전한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서도 고통이 없는 생애를 살면서 하느님께 받은 생명을 더 완전한 것으로 완성시켜 가게 하셨다.


    그리고 일생을 마친 다음에는,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죽음을 거쳐서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을라서, 자기가 일생동안 완성시킨 생명에 어울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따서 인간을 만드썼다. 죽음이 세상에 돌어 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 (지혜서 2,23-24).


    하느님께 고통도 죽음도 없는 생명, 악을 알지도 원하지도 않는 완전한 생명을 선물받은 사람은, 악을 알고 원하도륵 권유하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비참하게 훼손시키고 만다. 이제 악해진 사람의 생명은 병고에 시달리며, 세상을 살다가 죽음으로 일생을 마쳐야 하고, 저 세상에서도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누릴수 없는 비참한 생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사슬에 묶여, 죄의 노예가 되고말았다.


    육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보다, 하느님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영흔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비할 데 없이 더 심각하게 우리의 생명을 해친다. 육체의 죽음은 일시적인 고통을 줄 뿐이지만, 영흔의 죽음은 영원한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손상시킨 사람의 생명을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이제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완전한 것으로 회복된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하느님의 빛과 사랑을 다시 불어넣으심으로써, 그 사람의 생명을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생명으로 회복시키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치유시켜 주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온 병의 치유률 청하는 이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육체의 병보다 영흔의 병이 더 비참한 것이고, 따라서 병의 치유를 청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것을 상기시키신 것이다.


    사람이 육체의 건강만큼 영흔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육체의 병을 괴로워하는 만큼 영흔의 병을 괴로워하며,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 하는 만큼 영흔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세상에는 회개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교만과 탐욕과 육욕을 버리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깨꿋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다.






    11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중풍걸린 한 남자


    오늘의 복음은 다음 광경(光景)을 우리 눈앞에 똑똑히 그려줍니다. 중풍에 걸린 한 남자를 그리스도 곁에 거적(들것)에 메여옵니다. 이 남자는 내버려둔 채 누어 있습니다. 이 남자의 생명은 거의 희망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도 타인 생각에도 반신불수 병은 나을리 없다고 실망하고 있던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우들은 그 병자를 그리스도의 기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우들은 그 병자를 그리스도께 고쳐주십사 하고 데려 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두 마디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다.

    첫째 말씀은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를 사하노라.”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 병자를 영적을 행하시는 분에게 데리고온 것은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함이 아니고 육신의 병인 중풍을 고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신 것은 우리 인간과는 틀렸습니다. 천주께옵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영혼이 병들었는가, 건전한가, 또는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는가, 살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얼굴을 보고 판단하지만 천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이것이 치료에 꼭 필요한 본래의 마음입니다. 참말로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인간이 아주 고민하는 것은 육체적 차원이 아니고 천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으로써 입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무의미한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작년에 일본 동경을 방문한 인도의 네루 수상이 보도기관의 회의석상에서 “최초의 인공위성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게 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당신의 소견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었습니다. 네루 수상의 답변은 다음과 갔었습니다. “기탄없이 말하면, 인생의 다른 분야에선 우리의 생각이 오늘날 놀랄만한 과학기술의 발달 배후에 뒤떨어진감이 있다는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속에는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악의 힘도 들어갑니다. 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죄는 방의 문이 꼭 잠겨진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이문은 밖에서만 열립니다. 사람이 이문을 닫아버리면 방 속에 갇힌 상태가 됩니다. 밖에서 사람이 와서 이문을 열지 않으면 생명은 이 방 속에서 참지 못하겠지요.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이문을 열기 위하사 강생하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다시 인간은 즐거운 기분에 넘칩니다.

    둘째 말씀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가라.” 또한 복음은 “저 일어나 집에로 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입으로 권능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만은 이러한 병을 고치는 것은 신의 권능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참말로 신 그리스도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중풍병자를 고쳐줄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당신 스스로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똑똑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밖에서 문을 열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체의 전쾌(全快)라는 그러한 작은 영적은 영혼의 구령이라는 가장 커다란 영적의 한 흔적에 지나지 않었습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틀림없는 증거로서 또한 우리의 신앙을 지상의 혹은 지옥의 어떠한 힘이라도 때려 부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상 두 가지 복음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깨닫는 눈을 열어줍니다. 그리스도 안 계시면 사람은 천주님한테서 말리 떨어진 죄중에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달아들면 어떠한 병이라도 고쳐지겠지요. 이리하여 사람은 새로운 존재를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가 묵상한 바는 조그마한 것에 이르기까지 밝히 규정되어야 하며 감추어 남겨 두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백성이 보고 놀라며 이러한 권을 사람에게 주신 천주를 찬양하니라.” 아멘.






    12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치유해주셨다. 성서에서 자주 만나는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중풍병자를 확실하게 고쳐주신다. 환자의 가족들은 극성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한쪽 지붕을 벗겨내고 그 구멍으로 환자를 줄에 매단 채 내려보낸다.


    그들의 기발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아마 무척 놀랐을 것이다. 더러는 웃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붕을 벗겨 환자를 내려보내다니.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우리의 것과는 달랐다. 그 지역은 비가 오는 우기와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확실했기에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대충 나뭇가지나 거적 같은 것으로 덮어두었다. 아마 거적을 걷어내고 그 사이로 환자를 내려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극성스러운 행동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편 이들은 이렇게 적극적이고 열심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법을 따지고 있었다. 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법을 어겼는지, 어기지 않았는지. 하느님 앞에서도 따지고 있었다. 어딜 가나 있는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용서하신다. 그리고 병자를 낫게 하셨다. 그분의 넓은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말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을까. 정말로 고쳐주셨다. 당신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증명하기도 한다. 간증이라고 해서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 하던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성당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생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 정말 그들은 병이 나았을까. 진정으로 병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 병이 낫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든 치유의 은혜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다. 옛날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는데 지금 성체 안의 예수님이라고 해서 병을 낫게 하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언제든지 사람들을 낫게 해주실 분이다. 현대 사회라고 해서 신앙 안에서 그분이 병자들을 낫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는가 여기에 있다. 단순하게 답하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하느님의 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질병도 하느님의 능력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무도 예수님을 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분은 육체의 병을 전문적으로 고쳐주는 그런 의사가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질병은 신비로움에 속한다. 어느 인간이라도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질병도 인간 본질에 속한다.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건강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다. 병으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정의하는 더 정확한 답변이다.


    육체적 아픔만이 치유의 대상은 아니다. 오늘날 육체는 멀쩡한데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에겐 하느님의 개입이 절실하다. 어떻게 해야 될지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께로 가겠다는 중풍병자의 용기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13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한 사람을 위하여

    민병숙 작가


    어느 새벽, 우연히 불교방송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에 대해서 해설하는 것을 듣고 귀가 번쩍했습니다.

    ‘… 나 하나를 위하여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하였고… 나를 세상에 받아 내주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여태껏 저는 이 유명한 말을 한 석가여래만 홀로 드높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알고 의기소침했는데, 이 해설을 듣고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어느 하나 존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뜻을 알게 되어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해당될 테고,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에 의하면 모든 생물, 무생물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에 ‘찰스 황태자 다큐필름’을 번역하면서 영국 왕자 하나 키우는 값이 우리 나라 보통 아이 백 명쯤 키우는 것 만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재벌총수나 대통령이 아프면 천문학적인 치료비가 들어도 아깝지 않겠지만 이래저래 인생과 사업에 실패해서 반 지하 연립에 살다가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면 돈이 있어도 죽고 맙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해보고 죽더라도 아깝지 않으련만, 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세상이 하나의 사랑의 유기체가 되어 숨가쁘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천지가 진동하듯 경외감에 떨면서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한 사람을 위하여 대학 동창이 병원장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고, 입원하기 전날 성서위원회가 원고료를 부쳐주었으며 성서 백주간 지도 신부님이 병원으로 금새 달려와 병자성사를 주시려고 가까운 성당에 주임으로 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에 처음으로 성서 묵상을 가르쳐주신 수녀님이 성모병원에 계시면서 간호 수녀님과 함께 집에 찾아오시어 기도해주시고 검사해주셨을 때 저는 온 태양계가 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도는 듯 황홀했습니다.


    또한 사촌들로 형성된 태양계, 동창들로 결성된 태양계가 바삐 돌아가고, 황해도 이북 한 고향에서 오신 분이 본당 사무장으로 계시어 가정방문을 해주시고, 싱거운 식사를 해야 하는 환자를 위해 후배가 싱겁게 담은 김치를 날라 오고, 시누이 친구가 대녀가 되어 전복죽을 끓여보내고… 그때 죄 없으신 예수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희생제물이 되신 그 신비를 목격하는 듯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분신인 사람 하나하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에 그 모상인 우리 사람도 서로 그 하느님 사랑을 나르느라, 하늘 혈관을 흐르는 피들이 되어 생명력을 뿜어대어 제 안에서 저도 모르게 이 노래가 자꾸 새어나왔습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 너와 나로부터 흐르고 그 사랑은 세상 어두움 밝게 하여주리라.’


    14           연중 제7주일   마르 2,1-12 (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이야기(마르 2,1-12)는 전형적인 치유이적 사화로 상황묘사(1-4절), 기적적 치유(5ㄱ절, 11절), 치유 실증(12ㄱ절), 목격자들의 반응(12ㄴ절)으로 엮어졌었는데 어느 전승자가 사죄권 논쟁을 끼워 넣어(5ㄴ절-10절) 예수님의 사죄권을 증명하는 증거 이적사화로 삼았습니다.


    1. 치유이적사화(마르코 2장 1-5ㄱ, 11-12절)

    이 치유이적 사화는 마르코 복음 1장29-34절, 40-45절처럼 그리스인들의 치유이적 사화와 그 양식이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오시자 많은 군중이 모여듭니다. 그곳에 전신마비의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데려왔지만, 군중들 때문에 예수께 다가갈 수 없어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모두 넋을 잃고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2. 사죄권 논쟁(마르코 2장, 5ㄴ-10절)

    이 사죄권 논쟁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사화에 추가적으로 형성 삽입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어느 전승자가 이 사죄권 논쟁을 엮어 이 자리에 삽입한 것으로 그 동기는 이러합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죄권을 행사하자(마태 9,8; 16,19ㄴ; 18,18) 유다인들이 거칠게 항의합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병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며, 그들은 기껏해야 죄인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할 임무를 띠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치유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사죄까지 하신 셈이 되신 것입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치유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치유이적을 통하여 죄인 취급을 받던 많은 불행한 사람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잡수시고 마심으로써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본받아 불행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각별히 아끼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교우들로 하여금  범한 죄를 생각하고 자주 참회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느끼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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