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0 주일






                                                6. 김영진 신부(나)/ 10


        7. 강길웅 신부(나)/ 11         8. 신은근 신부(나)/ 13


        9. 김영남 신부(나)/ 14         10. 내 살을 먹고(나)/ 16


        11. 내 살을 먹고(나)/ 18      12. 내 살을 먹고(나)/ 19


        13. 내 살을 먹고(나)/ 20      14. 교구 주보(나)/ 21


        15. 임영숙 논설위원(나)/ 22  16. 주님의 만찬(나)/ 24




6.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당나귀만도 못한 신부  


                                                           김영진 신부



1264년 독일 신부 하나가 로마를 순례하던 중, 「보르세나」에 들러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과연 밀떡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걸까? 계시지도 않는 예수님을 계신다고 생각하며 헛도깨비처럼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 예식을 거행하는 중에, 갑자기 밀떡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밀떡이 살덩어리로 변하는가 하면, 포도주 잔에 있던 포도주가 피가 되어 잔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교회 축일로 지정하였다,


 


미사에 늘 참례하는 신자들 중에는, 밀떡 속에 과연 예수님이 살아 계실까? 하는 의심을 하는 이들이 꽤 많다. 어찌 신자들 중에만 의심을 품는 이들이 있겠는가? 명색이 사제라고 하는 나 자신도 그런 의심을 한두번 가져본 게 아니다. 의심하고자하는 그런 유혹이 떠오를 때마다 신학교시절 영적지도를 맡아 해주셨던 이00 신부의 말씀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신학교를 마칠 무렵,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 갈 소중한 말씀 하나를 부탁드리러 갔던 나에게 “자네가 신부가 되면, 매일 자네 손으로 성체를 축성하게 되네. 그런데 그 성체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몸이요, 살아있는 빵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자네는 훌륭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네”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뭐 이런 것을 시시하게 말씀해 주시나 하면서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신부가 된 오늘까지 지도신부의 그 말씀은 참으로 소중한 말씀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불사의 약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요, 하늘에서 내러 온 살아있는 빵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의심을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떤 목사가 길거리 선교를 하면서 소리치기를 “이 약을 드시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약은 구약과 신약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는데,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약 중에 약이요 참된 불사의 약은, 구약과신약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성체”라고 하셨다 한다. 그렇다. 성체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불사의 약이다.




예수님도 친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산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좀더 오래 살 수 있는 약이라고 하면,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도 사 먹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영원히 사는 약, 불사의 약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소홀히 하는 이들이 어찌 나 하나 뿐일까.


 


안토니오 성인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안토니오 성인이 강론을 하는데, 성당 뒷좌석에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나와 앉아 있는 귀족 한사람을 보고 내기를 하자고 한다. 내용은 당나귀 한 마리를 3일동안 굶긴 뒤, 당나귀가 좋아하는 당근을 오른쪽에, 그리고 축성된 성체를 왼쪽에 놓고 당나귀가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하는가 하는 내기였다.


냉담 중에 있던 귀족은 안토니오 성인의 내기를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신부님이 당나귀를 3일 동안 성체있는 곳으로 가도록 교육시킬지 모르니, 자기가 데리고 있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




3일 후에 동네 사람들이 당나귀가 하는 짓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귀족은 3일 동안 굶긴 당나귀를 끌고 나오며 의기양양하였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당나귀가 어떻게 행동할까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으로 나온 당나귀는 두리번거리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당근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를 돌려 성체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며 놀라워했고, 당나귀는 당근 있는 곳으로 천천히 가서는 배고픔을 채웠다.


성체에 관한 교리를 듣고 보지도 못했던 당나귀조차도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요, 구원의 빵이며, 불사의 약임을 인정할진대,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우리들, 성서와 교리를 통하여 성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보고 배운 우리들이 어찌 한 조각의 의심이라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는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인 성체를 잠시라도, 단 한번이라도 의심하였던 것이 부끄러운 시간이다. 당나귀도 인정한 불신의 악이요, 생명의 빵인 성체를 행여 그대도 나처럼 부끄럽게 의심하였던 적이 있지는 않았는가.












7.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와서 먹고 마셔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잠언 9,1~6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제2독서 에페 5,15~20 (여러분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 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오늘 1독서에서는 지혜가 새 집을 짓고 잔칫상을 걸게 차려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초대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느님을 인격화시킨 상징이며 일곱 기둥을 세운 집은 하느님의 성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자리에 속없는 사람들을 초대해서는 거저 먹고 마시도록 사랑을 베풉니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마셔라.” 이 말씀은 보통 고마운 말씀이 아닙니다. 지혜는 사실 그 잔치에 여간 공들인 것이 아닙니다. 소를 잡고 포도주를 빚었습니다. 최고 의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는 공짜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초대의 깊은 의미입니다.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라.” 좋은 음식을 무료로 하느님 전에서 먹되 다만 그 음식을 먹고는 행실을 바르게 고쳐 새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훌륭한 음식을 먹고도 삶이 개선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과 그 음식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철없고 속없는 어리석은 자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미련한 자들입니다. 세상 똑똑한 척하지만 참 지혜를 모르는 사람, 없어질 것에는 죽자사자 붙잡고 매달리면서도 영원한 것은 쉽게 내버리는 사람, 참 평화를 외면하고 오로지 거짓 평화에만 푹 빠져 있는 사람, 객관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자기 편견만 고집하는 사람, 남이야 어찌 됐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 진실이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들 삶 속에서 닫혀진 사람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지혜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는 사실 거저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인생들이 하느님 대전의 훌륭한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음식은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 집에서 하느님을 먹습니다. 완전히 무룝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복음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미사는 바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천상의 잔치에 비유됩니다. 초대하는 주인은 예수님이요 음식은 예수님의 살과 핍니다.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도 없으며 그보다 더 귀한 음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냥 무료로 하느님 대전에서 먹습니다. 참으로 행운아들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뭐 잘났다고 그분의 초대를 받아 그분의 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잘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못난 것뿐이요 더 있다면 죄악들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실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보답하는 길이요 감사하는 길입니다.




언젠가 미사 중에 성체를 나눠주는데 한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따라 나왔다가는 자기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웃으면서 안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드니까 굉장히 서운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고 나자 그 꼬마가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가져오더니만 성체를 달라는 것입니다.


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엽게 보였습니다.




그때 꼬마에게 그랬습니다. 그 떡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모시려면 기도도 해야 하고 또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자 꼬마가 말하기를 자기는 주의 기도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엄마 말도 잘 듣는다고 했습니다. 좌우간 그 날 그 꼬마를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는데 그 과정에서 내 자신에게 반성되는 바가 컸습니다.




나는 사제로서 과연 저 어린이만큼 성체를 모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저 꼬마처럼 내가 성체를 모시기 위해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가. 부끄럽게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냥 의무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별 감사의 뜻 없이 성체를 모신 것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죄도 그런 죄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먹으면서도 고마운 줄을 모르니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요 비천한 존재들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가공스러운 일은, 그 귀한 성체를 기다림 없이, 고마움 없이, 그리고 행실의 개선이 없이 그냥 먹고 모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에 대한 깊은 의미를 새롭게 은혜와 축복으로써 간직하도록 합시다.












8.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


                                                      신은근 신부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표현은 직설적인 표현이다. 성서 말씀이지만 거부감이 있다. 오늘의 우리가 이러할진데 당시 사람들이 반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들은 반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영성체를 통한 만남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 만남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모시는 행위가 아니다. 살과 피를 함께 섞는 만남이다. 이보다 더 강한 만남의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다. 그때마다 살과 피를 섞는 강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어떤 결과가 있었던가. 아무 느낌도 없는 행위에서부터 여러 형태의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만큼 진한 느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는가, 여기에 있다. 모르면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는다. 모르는데 어찌 예수님을 만난다는 감각이 오겠는가. 그러기에 그분은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하셨던 것이다.




성체는 생명의 빵이다. 희망이라는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하늘의 빵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의 구세주였던 그분은 이제 구체적 인간 나에게 오셔서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 그러니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좌절해서는 안된다. 육체적 질병이 있건 사업상 어려움이 있건 인간관계의 곤란함이 있건 어떤 상황에 있건 실망해서는 안된다. 생명의 빵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고 생활한다면 성체는 진정 생명의 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의 빵은 평화를 준다. 지식이 아닌 깨달음의 평화를 준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많이 소유하면 결과가 평화인 것으로 착각한다. 물질뿐 아니라 영적 지식과 체험도 많이 소유하면 평화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소유는 평화로 가는 방법은 될 수 있지만 평화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평화의 본질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데 있다. 그분이 주셔야 인간은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살과 피는 성체성사를 의미하며 영원한 생명은 희망과 평화를 말한다.




어린이들은 첫 영성체를 위해 한달 가량 준비를 한다. 어린 나이지만 그들은 누구를 모시는지 잘 알고서 성체께 나아간다. 그런 아이들은 예수님을 모신다는 기쁨과 경외심을 나름대로 느낀다. 그러나 준비없이 나온 어린이들은 행사 위주로 생각한다. 사진찍고 축하받는 데 신경을 쓴다. 성체는 그저 작은 과자일 뿐이다. 어찌 어린이 뿐이겠는가. 준비없이 성체 앞에 나선다면 누구에게나 그럴 수 있다. 미사를 위해 집을 나설 때 오늘은 성체를 모시는 날, 성체의 힘으로 한 주간을 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과 피를 통한 만남이 현실로 느껴질 수 있다. 정성으로 성체를 영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그분이 오셔서 내 운명을 바꾸어 주시기 때문이다.












9.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김영남 신부




요한복음 6장 끝에 나오는 오늘 복음말씀은 분명히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히는 말씀이다.


단순히 “빵을 먹는다”라고만 말하지 않고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온다.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며 “주님의 성찬[식사]”(1 고린 11,20) 예식을 가졌는데 이 때 “그리스도의 피”의 잔을 나누어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의 빵을 나누어 먹었다(참조: 1고린 10,16; 사도 20,7). 




인류 구원을 위하여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을 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를 받아들여 믿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식사’라는 관점에서 잠시 묵상해 보자. “먹고 마심”에 관한 우리의 일상체험을 곰곰이 반성해 보면 성체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장 분명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먹고 마심’(영양섭취)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식사’행위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유지을 위한 행위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아마 아무도 의료기구를 통한 인공적 영양분 투여를 ‘식사’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식사’의 결정적인 구성요소인 ‘다른 사람들과 친교’라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 되었지만, 본디 가족들에게 있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하기야 ‘가족’이라는 말 대신에 ‘식구’라는 말도 쓰지 않는가.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새로운 사람과의 사귐도 식사 초대를 통하여 더욱 깊어진다. 즉 식사는 ‘친교’를 가져다준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중에서도 “식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식사를 하셨다는 대목이 여러 곳에 나온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은 물론이고, 굶주린 백성들과도 함께 식사하셨고, 심지어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도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식사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에서 아무도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수난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마지막 일은 제자들과의 ‘식사’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오늘 복음은 썩어 없어질 생명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영원히 계속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 예수님과의 ‘친교’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성체성사는 이 ‘친교’를 상징만 할뿐 아니라, ‘친교’를 실제로 이루어준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성체성사 때의 빵과 포도주는 단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참석자들 상호간의 인간적 친교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상징일뿐 아니라, 실제로 그 친교를 이루어 주는 힘을 갖고 있는 “참된 양식이다”(요한 6,55)  이런 면에서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더 힘있게 들려온다.




이레네오 성인께서 하셨다는 다음 말씀도 힘이 있다. “곡식의 낟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싹이 트고 이 세상 만물을 장악하고 계신 하느님의 입김으로 번식하듯이, … 우리의 몸은 성체성사를 통해 양육된 후 지상에 떨어져 썩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성부의 영광을 위해 부활시켜 주시는 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성 이레네오, 반이단론, 5,2).




다른 한편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헌신”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이 사셨던 ‘사랑의 삶’을 살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거행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태도인가! 일찍이 바오로 사도도 이런 문제를 당면하고 개탄하신 적이 있다(참조: 1고린 11,17-22).




한 때 고린토 공동체 내에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부활하여 현양되신 주님과의 친교”와 그 친교를 바탕으로 “신자들 서로간의 친교”와 사랑을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밝히 드러내어야 하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굶는 사람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잘 먹고 취한 사람이 있는 불미스러운 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듣고, 바오로 사도는 그런 현상은, 결국 “하느님의 교회”를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강하게 개탄하였다.(1고린 11,17-22 참조). 성찬기도 제3양식에 나오는 다음 기도처럼, 성체성사적 삶을 살려고 우리 모두 노력해야겠다. “그리스도 몸소 저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시어… … 모든 성인과 함께 상속을 받게 하소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성체성사’를 실현하는 것은 한 평생이 걸린다.












10.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인간적인 지혜란 인생을 성공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현명하고 능수 능란하게 처신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지혜는 세상에 대한 깊은 고찰을 그 내용에 포함시키며 인간 본성과 경향에 대비하여 윤리 도덕 체계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적 차원을 배제한 세속의 지혜는 철학으로 발전하지만 궁극적인 인간 문제를 제시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배제한 지혜는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간 본성에 막혀 있는 인간적 한계를 돌파할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참다운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갈등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여 놓으신 하느님의 지혜를 인간들이 아전인수식으로 도용하여 자기들 편한대로 합리화한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유일한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거짓된 지혜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악이라 명확히 지정해 놓으신 것을 선이라고 위장하여 혹세무민하는 것은 하느님을 능멸하고 기만하는 행위이므로 하느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거짓으로 바꾸어 놓은 자들 스스로, 자기 안목만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관찰하면서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숨결을 감지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자연현상을 눈여겨 살펴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이치와 삼라 만상의 순환이 하느님의 지혜의 소산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살펴보고 하느님의 섭리 앞에 순응한다면 세상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을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세상 난관을 돌파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참된 지혜의 선물을 간청하면 우리의 행위를 하느님의 지혜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 한낱 어리석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로 드는 어리석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자기 몸을 십자가에 던져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세상의 현자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눈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미련함의 소치이고 어리석음의 극치이며 비아냥의 대상으로 비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이기셨고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을 제자로 택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2000년을 맞이한 이 순간까지 거대한 하느님의 교회를 이루어 놓으셨으며 세말까지의 그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완전 평정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로 볼 때 세상의 현명함이 인간 자신을 옭아매는 미련함이고 세상의 교활한 간계를 쫓는 행동은 어리석음이며 자기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 앞에 인간의 지혜는 사상루각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권능 앞에 우리 인간의 능력은 가물가물 꺼져 가는 불티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정의 앞에 나의 주장은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초라한 것이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인간의 사랑은 자기 이익과 편의만으로 위장된 뻔뻔스러움과 몰염치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의 지혜에 승복하고 주시는 은혜를 감지덕지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 뿐입니다.












11.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나그네 여정에 교통신호표지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정신차리고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음주는 불가합니다. 물론 술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음주운전이 교통사고의 원인이 되듯 음주와 폭음이 인간의 윤리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계명, 윤리규범, 교회규범 등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집에 무사히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외를 보현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때로 성서의 요구나 십계명의 원칙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 같고 제재를 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 여정을 위한 안전판이란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때 필연적으로 축복이 깃들이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성체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은 긴 음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음악에는 어떤 주제곡이 자주 반복됩니다. 그 주제곡은 자주 반복되기에 저절로 외워지고 누구나 흥겹게 콧노래로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주제곡은 생명의 빵, 영원한 빵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인 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유리를 위해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헌신적 삶, 이 모든 것이 곧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빵과 음료수로 내어주신 희생과 사랑입니다.




예수의 성체는 그분의 강생,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한 공존의 삶, 약자들의 벗, 끝까지 고통을 감수하신 초연한 죽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실현된 부활을 압축한 총체적 상징이며 실체입니다. 누가 감히 자신의 삶과 피를 먹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계속 그분을 먹고 자라난 하느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수님과 갈릴 수 없다는 것이 이 성체의 교훈이며 명령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 이 삶과 이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바로 이웃의 먹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12.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얻어먹고 사는 거렁뱅이 즉 거지들이 꽤 많았습니다. 청계천이 거지들 집합 장소였는데 거기 아주 유명한 거지 두목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거지 두목이 이제 늙어서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하 거지들을 모아놓고 별것 아니지만 유산 분배를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누구에게는 자기 깡통을 주고, 또 누구에게는 그동안 푼푼이 모아놓은 동전 꾸러미를 주고 또 다른 거지에게는 언젠가 길에서 주운 고장난 시계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목 거지의 아들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아들 거지에게는 무얼 줄까 하고 궁금해 하는데 그 두목 거지는 품에서 조그만 종이 뭉치를 꺼내 아들 거지에게 주면서 여기 네가 평생 먹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모두들 그 종이 뭉치가 무언가 궁금했습니다. 무슨 집문서나 땅 문서가 아닐까? 혹 수표책은 아닐까 하면서 펴 보았더니 그것은 집문서도 아인 메모책이었습니다. 그 메모책을 펴보니 정월 초하루는 삼청동 김부자네 맏아들 장가드는 날, 정월 초이튿날에는 수표동 박부자네 환갑 잔치, 이렇게 일년 삼백 예순 날의 얻어먹을 집 명단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명단만 가지면 평생 얻어먹는데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거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양식입니다.




우리는 오늘 지지난 주일과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빵을 먹음으로 해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빵은 한번 먹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살게 되고 이 빵을 먹음으로 해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낙원 동산을 쫒겨난 우리 인간들에게는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다시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며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양식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하는 성체는 이미 말씀과 함께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만들어 주시고 성자께서는 우리의 양식으로 존재하시며 성령께서는 그 양식과 함께 우리의 동반자가 되신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자신의 살을 우리에게 준단 말인가 하고 의심을 품거나 배척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조그만 밀떡 안에 예수님께서 존재하신가 하고 의심을 갖거니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조그만 밀떡 안에 계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그들의 눈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 처럼 닫혀 있기에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체 안에 계시는 생명의 빵이시고 영원한 삶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모셔 성체 안에 하나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이가 생명의 양식, 영원한 삶의 양식인 성체를 모실 때,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늘 가르쳐 주신 마지막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아멘












13.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예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꾸합니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적으로 말씀하신 ‘살’을 유다인들은 신체적 ‘살’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53-54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이만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당신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사람) 안에 머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이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56-57절).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의 뜻깊은 결론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으로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육(人肉)을 먹지 않았고 짐승의 피든 사람의 피든 마시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알아들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체성사적으로 ‘살과 피’를 언급하셨는데 유다인들은 신체적인 ‘살과 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 때 빵과 포도주안에 임재(臨在)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체성사 때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님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신앙인은 성체성사 때 모시는 빵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성체성사 때 당신을 모시는 이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양식이요 생명의 원천임을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히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또 교우들간에 일치를이루어야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보았던 시로 마무리를 지을까 합니다.


“나를 마시지 않겠소?”


‘커피’는 하느님, ‘물’은 ‘나’ / 그분을 받아 들여 내 안에서 녹이려 한다.


물인 나는 당연히 깨끗한 생수여야 하고, / 커피를 녹이기 위한 내 마음은


늘 뜨겁게 준비되어야 한다. /


당연히 말씀과 성사와 기도의 스푼을 준비함은 필수이다.


어느 순간 커피가 내 안에 들어와 /


잘 젓고 잘 녹아서 한 잔의 커피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물이라 하지 않고 커피라 한다.


진한 향을 내품는 커피인 나


나를 마시지 않겠소?












14.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성체성사는 구원의 원천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예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꾸합니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적으로 말씀하신 ‘살’을 유다인들은 신체적 ‘살’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53-54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이만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당신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사람) 안에 머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이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56-57절).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의 뜻깊은 결론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으로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육(人肉)을 먹지 않았고 짐승의 피든 사람의 피든 마시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알아들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체성사적으로 ‘살과 피’를 언급하셨는데 유다인들은 신체적인 ‘살과 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 때 빵과 포도주안에 임재(臨在)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체성사 때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님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신앙인은 성체성사 때 모시는 빵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성체성사 때 당신을 모시는 이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양식이요 생명의 원천임을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히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또 교우들간에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15.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파티마의 성모님


임영숙 요안나/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




우연히 파티마를 찾았습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출장 갔다가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출장 떠나기 전 어느 모임에서 만난 주교님이 제가 리스본에 간다는 말을 듣고 파티마에 가 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장 중에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리스본에 도착한 후 파티마에 갈 수 있는가를 알아 본 것은 순전히 주교님께 그곳에 가려고 노력은 했다고 말씀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어설픈 노력이 놀라운 응답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한 채 말입니다. 제가 파티마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일행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고 싶다고 나섰습니다. 그때까지 전혀 가톨릭 신자인 줄 서로 몰랐던 언론인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와 함께 세미나를 가진 유럽 언론인들까지 파티마에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한국과 유럽 연합(EU) 언론인들을 초청한 포르투갈 주최측은 난감해 했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파티마 방문을 신청했던 사람들만 주최측이 마련한 버스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EU주재 한국대사,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 씨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EU대사 내외 분은 개신교 신자였는데도 부인이 파티마를 그 전에 방문한 후 참으로 은혜로웠다면서 적극 권고해서 따라 나선 것이었고, 소설가 이문열 씨 역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파티마는 참으로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아니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의 집을 거쳐 루치아의 집과 정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어린 세 목동을 성모 마리아의 발현에 앞서 “더 많이 기도하라”며 준비시킨 우물에서 물도 마셨습니다. 그리고 1917년 성모님이 여섯 번에 걸쳐 발현하시고 마지막 발현 때 7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태양의 기적’을 보여 주신 코바다이리아(놀랍게도 ‘평화의 분지’라는 뜻입니다)를 찾아 발현장소에 세워진 소성당에서 기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우리 일행은 파티마의 성모님이 당신께 봉헌하기를 원하셨던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비행기 예약이 잘못돼 일행 중 일부는 러시아로 갈 수 없게 된 상황이었는데 파티마를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먼저 탑승할 수 있게 돼 우리는 “은총을 입었다”고 농담을 나누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저는 파티마의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인류 구원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회개와 봉헌, 희생과 기도이지만 저는 극히 작고 개인적인 일로 파티마의 성모님을 찾습니다. 마치 성모님을 만나러 가는 루치아에게 당시 사람들이 질병의 치유 등 사소한 부탁을 했듯이 말입니다.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아이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때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영향을 받아 살던 집을 팔아야 했을 때도,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저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통해 평화를 얻었습니다. 올해는 성지순례를 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대희년입니다.












16.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나)        주님의 만찬




  요한복음 6장 끝에 나오는 오늘 복음말씀은, 분명히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히는 말씀이다. 단순히 「빵을 먹는다」라고만 말하지 않고, 주님의「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온다.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며「주님의 성찬」(1고린 11,20) 예식을 가졌는데, 이 때「그리스도의 피」의 잔을 나누어 마시고,「그리스도의 몸」의 빵을 나누어 먹었다(1고린 10,16; 사도 20,7).




  인류 구원을 위하여 파견되신「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을 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를 받아들여 믿는 이들에게는 참으로「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띤 「식사」라는 관점에서 잠시 묵상해 보자. 「먹고, 마심」에 관한 우리의 일상체험을 곰곰이 반성해 보면, 성체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장 분명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먹고, 마심」(영양섭취)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식사」행위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 유지를 위한 행위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아마 아무도 의료기구를 통한 인공적 영양분 투여를「식사」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식사」의 결정적인 구성요소인「다른 사람들과 친교」라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 되었지만, 본디 가족들에게 있어서「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하기야「가족」이라는 말 대신에,「식구」라는 말도 쓰지 않는가.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새로운 사람과의 사귐도 식사초대를 통하여 더욱 깊어진다. 즉 식사는「친교」를 가져다준다.




  예수님의 지상생활 중에서도「식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식사를 하셨다는 대목이 여러 곳에 나온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은 물론이고, 굶주린 백성들과도 함께 식사하셨고, 심지어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도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식사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에서 아무도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짓이다. 수난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마지막 일은 제자들과의「식사」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오늘 복음은 썩어 없어질 생명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영원히 계속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 예수님과의「친교」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성체성사는 이「친교」를 상징만 할 뿐 아니라,「친교」를 실제로 이루어준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성체성사 때의 빵과 포도주는, 단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참석자들 상호간의 인간적 친교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상징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친교를 이루어 주는 힘을 갖고있는「참된 양식」이다.(요한 6,5)




  이런 면에서「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더 힘있게 들려온다.


이레네오 성인께서 하셨다는 다음 말씀도 힘이 있다. 「곡식의 낟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싹이 트고, 이 세상 만물을 장악하고 계신 하느님의 입김으로 번식하듯이‥‥‥우리의 몸은 성체성사를 통해 양육된 후, 지상에 떨어져 썩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성부의 영광을 위해 부활시켜 주시는 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성 이레네오, 반이단론 5,7).




  다른 한편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의「사랑과 헌신」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이 사셨던「사랑의 삶」을 살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거행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태도인가!


일찍이 바오로 사도도 이런 문제를 당면하고 개탄하신 적이 있다.(1고린 11,17-27).


한 때 고린토 공동체 내에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부활하여 현양 되신 주님과의 친교」와 그 친교를 바탕으로「신자들 서로간의 친교」와 사랑을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밝히 드러내어야 하는「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굶는 사람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잘 먹고 취한 사람이 있는, 불미스러운 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듣고. 바오로 사도는 그런 현상은, 결국 「하느님의 교회」를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강하게 개탄하였다(1고린 11.17-22 참조). 성찬기도 제3양식에 나오는 다음 기도처럼, 성체성사적 삶을 살려고 우리 모두 노력해야겠다. 「그리스도 몸소 저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시어 ‥‥ 모든 성인과 함께 상속을 받게 하소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성체성사」를 실현하는 것은 한 평생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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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성체와 성혈을 상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체와 성혈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내가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던 간에 말입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중고등부 지구 학생 체육대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임을 믿습니까? 손드는 학생들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못 느끼고,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어른 신자 중에도 “성체가 상징 아니었습니까?”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은 계속 생길 것입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빵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 빵으로 힘을 얻어 구원을 향해 한발자국씩 나아갑니다. 성체로 힘을 얻은 신앙인들은 그렇게 생명을 향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따졌습니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말다툼 이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금지되어 있었고(창세 9,4;신명12,16), 더 나아가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사람의 살을 먹는 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결국 그를 죽인다는 것인데…, 그러니 말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피를 엄중하게 금지된(창세 9,4;신명12,16)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특별히 그들의 귀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살을 먹는 다는 것은 전적으로 어느 한 대상 즉, “어느 사람을 거슬러 비방하는”(시편 27,2) 것이거나 또는 그 대상을 파멸시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었습니다(루가12,9). 어떤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도 어떤 사람을 잔인하게 살육한다는 뜻을 지닌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잔인한 영화의 대사를 보면 “갈아 마신다.”라는 표현이 “죽여 버리겠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분명히 사람 잡아먹는 이야기로 해석하고 즉각 거부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래서 그들의 대표로서 한마디 해야 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나 또한 그들의 이해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야 성서를 전체적으로 읽다보니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빵이 살로 변하여 이야기가 나왔으니 놀랄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이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지금 이 시간에는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살과 피는 바로 성체입니다.


    1264년 독일 신부 하나가 로마를 순례하던 중, 「보르세나」에 들러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과연 밀떡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걸까? 계시지도 않는 예수님을 계신다고 생각하며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 예식을 거행하는 중에, 갑자기 밀떡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밀떡이 살덩어리로 변하는가 하면, 포도주 잔에 있던 포도주가 피가 되어 잔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교회 축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도록 내어주는 이 빵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으로 성체 안에서 만나고 받아들여져야 할 분이시기에 이에 그들의 어떠한 오해도 바로잡아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생명을 얻고 싶으면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된다고 되풀이하여 더욱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합당한 예복(혼인잔치의 비유)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례미사 때 듣는 말씀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체로 힘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체를 힘을 내서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왜 첫영성체 해야만 성체를 영할 수가 있나요? 이 말씀대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생명을 주기 위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세우신 조건은 또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 근거를 두고 그리이스 교회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체를 영하게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라틴 교회는 성체 영하는 규정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양식을 영하는 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성의 분별과 신심과 존경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 됩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돈의 가치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쓸 줄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에게 돈을 안 주지요. 용돈을 주기 시작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고, 돈을 쓸 줄도 알아야 주지 않습니까?


    여러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51-58절 안에 있는 말씀들이 원래는 요한 복음 안에서는 최후의 만찬에 관한 말씀 안에 있었으나 생명의 빵의 설교의 첫 부분을 강조시키기 위해 옮겨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부분에는 성체성사의 제정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준비하시는 그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는 맥락에서 더욱 잘 이해가 됩니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자동차가 연료가 없으면 멈춰 버립니다. 생명의 빵도 그렇게 되었으면 쉽게 이해할 텐데… 미사 참례 한번 안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성체 한달 영하지 않으면 말을 못하게 되고, 기도 안하면 숨이 막혀 버리고… 그렇게 되면 잊어 버리지도 않고, 안 찾을래야 안 찾을 수가 없을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난 벌써 걷지도 못하고 숨이 막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지요…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은 상징적인 뜻이 아니고, 참된 양식이며, 그분의 피도 비유적인 뜻으로 말하는 음료가 아니고, 참된 음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을 먹고 이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그리스도를 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분에게서 샘솟는 생명의 물을 풍요롭게 마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사랑을 받고 있는 친구처럼 성체를 영한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성체와 성혈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음식이요 참된 음료입니다. 먹고 마시는 이에게 생명을 주고 또한 신적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어렵게 외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나오게 된 “보상금(위로금)”으로 작은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일구어서 두 가족이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은 어머니의 마음대로 커 주지 않았습니다. 삐딱한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들은 어머니 몰래 작은 밭을 팔았습니다. 도박 빚 때문에 밭을 몰래 팔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그 밭이 어떤 밭인데, 그 밭은 네 애비 피여! 그 밭이 바로 네 애비 몸이란 말여! 어떻게 그것을 팔수가 있냐! 이놈아!~”

    아버지의 목숨이 밭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던 아들은 그 밭이 그저 밭일 뿐 이었던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빵과 포도주만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이 없다면 밀떡과 포도주밖에는 안 보일 것입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오신 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실 수 있던 힘은 바로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닭장 안에서 독수리를 두려워하는 병아리인줄 알고 있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의 생명, 인간 전체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히브리적 표현은 살과 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만나를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을 상기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맺으시고자 원하셨던 계약의 조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후 모세는 희생 제물로 바쳐졌던 황소의 피를 받아, 반은 제단 위에 붓고(야훼를 대신하는 제단), 반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의 성립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맺었던 계약이나,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빵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성체를 영하는 나는 예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내가 성체를 모실 때와 모시지 않을 때의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체를 모시면 내 삶이 달라집니까? 성체를 모신 힘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2. 나는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왜 믿고, 믿지 못하겠다면 왜 믿지 못하고 있습니까?

  2. user#0 님의 말: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성체와 성혈을 상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체와 성혈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내가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던 간에 말입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중고등부 지구 학생 체육대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임을 믿습니까? 손드는 학생들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못 느끼고,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어른 신자 중에도 “성체가 상징 아니었습니까?”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은 계속 생길 것입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빵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 빵으로 힘을 얻어 구원을 향해 한발자국씩 나아갑니다. 성체로 힘을 얻은 신앙인들은 그렇게 생명을 향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따졌습니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말다툼 이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금지되어 있었고(창세 9,4;신명12,16), 더 나아가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사람의 살을 먹는 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결국 그를 죽인다는 것인데…, 그러니 말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피를 엄중하게 금지된(창세 9,4;신명12,16)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특별히 그들의 귀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살을 먹는 다는 것은 전적으로 어느 한 대상 즉, “어느 사람을 거슬러 비방하는”(시편 27,2) 것이거나 또는 그 대상을 파멸시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었습니다(루가12,9). 어떤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도 어떤 사람을 잔인하게 살육한다는 뜻을 지닌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잔인한 영화의 대사를 보면 “갈아 마신다.”라는 표현이 “죽여 버리겠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분명히 사람 잡아먹는 이야기로 해석하고 즉각 거부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래서 그들의 대표로서 한마디 해야 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나 또한 그들의 이해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야 성서를 전체적으로 읽다보니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빵이 살로 변하여 이야기가 나왔으니 놀랄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이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지금 이 시간에는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살과 피는 바로 성체입니다.


    1264년 독일 신부 하나가 로마를 순례하던 중, 「보르세나」에 들러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과연 밀떡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걸까? 계시지도 않는 예수님을 계신다고 생각하며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 예식을 거행하는 중에, 갑자기 밀떡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밀떡이 살덩어리로 변하는가 하면, 포도주 잔에 있던 포도주가 피가 되어 잔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교회 축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도록 내어주는 이 빵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으로 성체 안에서 만나고 받아들여져야 할 분이시기에 이에 그들의 어떠한 오해도 바로잡아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생명을 얻고 싶으면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된다고 되풀이하여 더욱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합당한 예복(혼인잔치의 비유)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례미사 때 듣는 말씀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체로 힘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체를 힘을 내서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왜 첫영성체 해야만 성체를 영할 수가 있나요? 이 말씀대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생명을 주기 위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세우신 조건은 또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 근거를 두고 그리이스 교회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체를 영하게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라틴 교회는 성체 영하는 규정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양식을 영하는 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성의 분별과 신심과 존경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 됩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돈의 가치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쓸 줄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에게 돈을 안 주지요. 용돈을 주기 시작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고, 돈을 쓸 줄도 알아야 주지 않습니까?


    여러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51-58절 안에 있는 말씀들이 원래는 요한 복음 안에서는 최후의 만찬에 관한 말씀 안에 있었으나 생명의 빵의 설교의 첫 부분을 강조시키기 위해 옮겨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부분에는 성체성사의 제정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준비하시는 그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는 맥락에서 더욱 잘 이해가 됩니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자동차가 연료가 없으면 멈춰 버립니다. 생명의 빵도 그렇게 되었으면 쉽게 이해할 텐데… 미사 참례 한번 안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성체 한달 영하지 않으면 말을 못하게 되고, 기도 안하면 숨이 막혀 버리고… 그렇게 되면 잊어 버리지도 않고, 안 찾을래야 안 찾을 수가 없을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난 벌써 걷지도 못하고 숨이 막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지요…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은 상징적인 뜻이 아니고, 참된 양식이며, 그분의 피도 비유적인 뜻으로 말하는 음료가 아니고, 참된 음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을 먹고 이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그리스도를 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분에게서 샘솟는 생명의 물을 풍요롭게 마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사랑을 받고 있는 친구처럼 성체를 영한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성체와 성혈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음식이요 참된 음료입니다. 먹고 마시는 이에게 생명을 주고 또한 신적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어렵게 외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나오게 된 “보상금(위로금)”으로 작은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일구어서 두 가족이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은 어머니의 마음대로 커 주지 않았습니다. 삐딱한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들은 어머니 몰래 작은 밭을 팔았습니다. 도박 빚 때문에 밭을 몰래 팔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그 밭이 어떤 밭인데, 그 밭은 네 애비 피여! 그 밭이 바로 네 애비 몸이란 말여! 어떻게 그것을 팔수가 있냐! 이놈아!~”

    아버지의 목숨이 밭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던 아들은 그 밭이 그저 밭일 뿐 이었던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빵과 포도주만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이 없다면 밀떡과 포도주밖에는 안 보일 것입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오신 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실 수 있던 힘은 바로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닭장 안에서 독수리를 두려워하는 병아리인줄 알고 있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의 생명, 인간 전체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히브리적 표현은 살과 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만나를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을 상기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맺으시고자 원하셨던 계약의 조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후 모세는 희생 제물로 바쳐졌던 황소의 피를 받아, 반은 제단 위에 붓고(야훼를 대신하는 제단), 반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의 성립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맺었던 계약이나,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빵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성체를 영하는 나는 예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내가 성체를 모실 때와 모시지 않을 때의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체를 모시면 내 삶이 달라집니까? 성체를 모신 힘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2. 나는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왜 믿고, 믿지 못하겠다면 왜 믿지 못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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