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3주일
31. 송종의 신부(다)/57 32. 한종훈 신부(다)/59
33. 김몽은 신부(다)/60 34. 함세웅 신부(다)/62
35. 강영구 신부(다)/63 36. 강길웅 신부(다)/67
37. 서경윤 신부(다)/69 38. 이재경 신부(다)/71
39. 홍금표 신부(다)/73 40. 열매맺지 못하는/75
31.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회개와 징표
송종의 신부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회개가 없으면 멸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부터 이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져진 경고였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갈릴래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다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가지고 군중들은 예수께 물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러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실적 응보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많은 복을 받고 세상을 악하게 사는 사람은 현세에서 그 벌을 받는다는 그러한 사상에서, 졸지에 죽음을 당한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큰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그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커서 그런 재난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현세의 재난이나 고통이 결코 하나의 벌일 수 없고 다만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한 배반이나 무관심에 대해서는 책벌을 가하겠다는 하느님의 경고임을 가르쳐주신 말씀이었다. 요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밝혀 보여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의 무화과나무는 일차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박토에서도 잘 자라나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로서 사람의 손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는 포도원지기에 의해 기름 좋은 땅에 심겨져서 정성스런 돌봄을 받는 커다란 특혜를 입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이와 같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계약을 맺고 예언자들의 돌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 곧 이스라엘 백성이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않자 하느님은 베어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멸망의 위기 속에서 포도원 지기의 간절한 청원에 의하여 심판이 1년 더 연기됩니다. 이 연기가 없었더라면 무화과나무는 당장 잘리웠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멸망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복음의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할 뿐만 아니라 세례로써 그리스도 신자가 되 우리 자신들을 표상합니다. 우리는 세례로써 하느님 나라라는 포도원에 심겨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를 받음으로써 기름진 거름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신앙인으로 자라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다는 증거는 바로 사랑과 기쁨을 드러낼 수 있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그의 사랑을 받는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잔잔한 기쁨의 물결이 우리의 가슴을 출렁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시는 열매는 또한 평화와 인내입니다. 이웃이 미워질 때, 생활이 곤궁할 때 인내함으로써 세상이 주지 못하는 주님의 평화를 우리는 맛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친절하게 남을 대하고 착하게 진실되게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가 모두 무화과나무의 참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맞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오늘 들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파괴적인 경고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심판을 면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란 어떤 의미에서 “회개”의 삶에로 불린 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배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령강림날 아침에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겪고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고 과거의 어두운 삶을 청산하였듯이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옛 사람의 탈을 벗고 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며 꾸준히 자신을 완성해 나가야 하듯이 그리스도 신자들도 세례 때 다시 태어났지만, 완성된 그리스도 신자가 되도록 꾸준히 회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떼르뚤리아누스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는 것이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하느님의 완전함에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끝없는 회개에 불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 하고 라틴어로 “꼰베르시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개조를 뜻하고 마음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몸은 가만히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신과 마음과 의지를 다해 다시 돌아서는 것-하느님을 떠나서 내달리다가 회전을 하여 하느님께 전인적으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러한 회개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느님께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진정한 심정에 잠길 때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봅니다. 그 눈물은 더러운 죄를 씻어내는 신비한 힘을 지닌 듯이 보입니다. 울고나면 사람들은 마음이 후련함을 느낍니다. 우리도 회개의 표시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그 회개의 표로 남에게 무언가 베풀기를 강력히 권하는 바입니다.
우리를 돌아다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이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견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라면, 이 회개의 끝은 여러 가지 받은 은혜들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의 중반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바로 오늘 복음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한 해만 더 연기해 달라는 그 기간입니다. 다음 일주일을 회개와 그 회개의 표시를 드러내는 날로 보냅시다.
“참으로 회개한다면 그 회개의 징표를 대시오!”
32.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한종훈 신부
나는 가끔 가까운 교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왜 신부님들의 강론은 한결같이 고리타분한지 모르겠습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공에 뜬 말씀들만 하시니 말입니다”
또는 “신비에 찬 말씀들 뿐입니다” 혹은 “맥이 하나도 없습니다” 등등 많은 평을 들어왔습니다. 이런 평을 들을 때 나만 아니라 많은 신부님들도 다소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가 연일 수십 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열렬한 설교를 하여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 설교를 들은 사람은 한결같이 그 열렬한 웅변에 탄복하였습니다. 통역하는 목사의 똑같은 몸짓과 똑같은 억양과 똑같은 열의에 사람들은 더 많이 탄복하였습니다.
나 자신도 많이 탄복하였지만 웅변으로 인한 탄복에 지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의 말씀이기에 웅변 중의 웅변이라고 나는 항상 자부하고 있습니다. 단지 현대인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현대인의 관능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사순절의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웅변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웅변을 들으려는 마음에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보다도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달콤한 속삭임보다도 입에 쓴 충고에 더욱 맛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현대인은 관심을 가져야 할 남의 일에는 외면을 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좋은 일에는 도리어 발벗고 나서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때의 남에 대한 관심이라면 비단 커다랗게 두드러진 사건들을 가르치는 뜻은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정면에서 남이 나를 범죄로 유인할 때 이를 쉽고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지만, 소극적인 방법으로 간접적인 유혹을 당하면 쉽사리 떨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사회 안에서 개개인이나 타인과의 대인관계에서, 그것이 원만하지 못하고 따뜻하지 못하고 기쁨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숨겨져 있는 상호간의 이해 부족이 아니겠습니까? 이해부족이란 크리스천적 사랑의 결핍이라는 뜻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교우 여러분들이 사랑의 결핍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반성하는 자세로 마음을 고치도록 다시 말해서 회개하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로 함께 듣고자 하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베어버리라는 주님의 웅변입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쓰고 싶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효성이 지극한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드리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표시하려고 애쓰지요. 온갖 만물이 그 나름대로 제 목적과 구실이 있다면, 만물의 관리를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에게는 더 말할 수 없는 훌륭한 목적과 구실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 하겠고 사람답다 하는 것은 다른 생물처럼 입을 땅으로 향하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 말고도,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서 있는 동물 중에 하느님과 지상에 제 구실을 다하는 동물임을 자각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도 열매를 맺어야 하는 책무가 지워졌다고 할진대, 각 사람이 가진 능력과 재능과 특기들을 잘 가꾸어서 머리로 표시하는 하느님과, 발로 딛고 서 있는 사회 안에 이웃들에게 보람을 안겨주도록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들을 순박하고 겸손되이 하나도 버리지 말고 가꾸자 하는 것입니다.
33.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하고 되풀이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는 것을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기회만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 반란의 근거지는 대개 축제가 있을 때, 성전을 중심으로 했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이 희생물을 바치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학살했다는 말씀을 예수께 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실로암 연못 근처에서도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깔려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 그 당시의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 주십니다. 즉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참변을 당하고 죽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잘못을 하느님께 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불의의 참변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근히, 그들이 무슨 특별한 잘못을 하느님께 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은 변을 당한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잘 들어두시오.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참변을 당한 그들이 지금 살아있는 다른 이들보다 더 죄가 많다든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와 악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천재이변이나 그밖의 인위적인 불운이나 참변은 결코 하늘로부터의 책벌이 아니라, 오직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경고입니다. 즉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한 것인 동시에, 세상의 종말에 당할 심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 대한 경고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불행이 있고, 참변이 있으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불상사들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빨리 회개하라는 경고의 표시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 자기에게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며, 언젠가는 종말의 그날이 닥쳐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역시 그것을 말해 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를 한 해만 더 기다려 주시는 주인처럼 우리의 회개한 삶을 기다리십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회개는커녕, 탐욕과 미움, 쾌락과 안일, 방종과 나태 중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Ⅰ고린 10,10). 이 사순절 동안에 우리 모두는 참으로 회개한 인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썩지 않는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고자 하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요한 15,16)
34.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구원과 멸망
함세웅 신부
사순절의 전례적 의미는 회개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 회개는 늘 반복해야 할 그리스도교 신자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겉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라는 구약의 외침이나 “뉘우치고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르라”는 신약의 외침은 신앙인에게 규범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틀림없는 하나의 초청입니다. 그러나 이 초청은 응해도 상관없고 불응해도 무관한 그러한 초청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확실한 결과가 따라나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초청에 응했을 경우에는 구원이 있고, 불응했을 경우에는 멸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구원이냐 멸망이냐! 라는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13,1-9)은이 후자의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모두 망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문에는 꼭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망한다”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회개하면 구원된다”란 말씀이 훨씬 부드럽지만 이러한 부드러움도 한계가 있다는 것, 참는 것도 분수가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약장수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아니라, ‘하느냐, 안하느냐’ 중의 결정과 선택을 요구하는 기한부적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류탄의 안전핀을 잡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입니다.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의 시간 차이는 불과 1~2분 차이입니다. 설마 저 사람이 그것을 빼겠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던 중에 그 수류탄은 뺑! 하고 터질 수도 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 등의 뜻은, 모두 이 세상의 삶이 불과 1~2분 차이라는 것, 자신만만하던 중 불시의 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시의 당함을 늘 생각하고, 그래서 ‘회개’하는 생활과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신앙인을 바로 종말론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10년 후다, 15년 후다 하는 그런 식이 아니고, 내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면서 미래를 향하여, 영원을 향하여 현세에 집착된 마음가짐이나 생활을 초월하는 자세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꼭 가야 할 목적지는 구원의 길을 거친 하느님의 품속입니다. 이렇게 꼭 걸어야 할 길에 누가 만일 길을 바꾼다면, 그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틀림없는 멸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길로 오너라!”라는 부드러운 초청에 불응이 있기에, “좋아, 이 길로 오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들면 너는 결국 죽음의 길을 갈 뿐이야!”하는 경고와 함께, 선택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사순절, 회개해야겠다는 마음 속의 강한 명령이 있지만, 실천이 안되는 맹숭맹숭한 신앙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맹숭맹숭한 신앙인들에게 내리시는 예수님의 엄하신 말씀, 이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자신, 가정, 직장, 사회, 임무 등을 생각하면서 ‘신앙인인 나’는 과연 신앙인답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편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베어서 없애리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아무리 가꾸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그것은 가꿀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비유가 있기 전에 우리는 모두는 이러한 식으로 농사를, 과수 재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가꾸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그것은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초청해도,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돌아오지 않는, 자아 집착에 빠진 비신앙 내지 불신앙, 반신앙인의 옹고집,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을 더 두기로 하였습니다. 혹시? 하는 희망과 함께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1년의 시간을 더 주십니다. 그 1년이 누구에게는 10년 일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하루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 이것은 틀림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주어진 시간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로 되돌아오는 일입니다. 뉘우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심하며 외워 봅니. “주님, 회개해서 열매를 맺겠습니다”
35.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부적 같은 믿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징표를 읽을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들은 한결같이 그 날 일어난 사건 사고들, 그것도 우리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뿐 아니라 저 먼 나라에서 일어난사건 사고들까지도 보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느 집에 불이 나서 한 가족 다섯 명이 타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관광 버스가 트럭을 피하려다가 굴러 떨어져서 한꺼번에 13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과 사고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태국에서 순례를 가는 사람들이 탄 배가 뒤집혀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후에 또 똑같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터키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이 무너진 집더미에 깔려서 죽었고 터키 정부는 이 지진 때문에 비상 사태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전파 매체가 발달했기 때문에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와 똑같이 그 소식을 듣게됩니다. 이렇게 너무나 많은 사건 사고의 소식을 듣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그런 사건 사고들이 마치 일상사인 양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들이 지금 나에게 닥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 우리가 그런 사고와 재난을 당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빨리 움직이고 빨리 변하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일찍이 1777년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정의하면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갤브레이스라는 사람은 경제학자로서 우리의 경제가 어떤 경제 원리나 원칙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기 계시는 여러분 중에 한 시간 이후에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한 시간이 아니라 단 십분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습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자기 운명의 한 시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 시대는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재난들, 그 가운데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재난과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보다 죄를 더 많이 지은 사람이고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일 거야. 그래서 벌을 받은 것이겠지,”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더럽게도 재수가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도 나는 아직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니 지극히 재수가 좋은 사람이지,”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기도를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하느님이 지켜 주시지 않았기에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겠지. 나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에게는 그런 운명이 닥치지는 않을 것인 양 태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장담할 수 있고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자신 있게 그리고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은 단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밖의 것은 단 한 가지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말고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남이 당하는 재난과 불행한 사고가 자기만은 비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운명이 바뀌게 될지, 흑은 우리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을 믿는 사람,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이런 사고와 재난이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의 기억에도 생생한 KAL 077기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련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폭파된 그 여객기에는 천주교 신자, 개신교 신자, 불교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신앙이 그 사고를 막아 주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예수, 부처님이 힘을 합하면 그런 불행한 사건쯤이야 막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별수 없고 부처님을 믿는 것도 별수 없구나.” 그렇습니다. 불행한 사고와 재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런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신앙이라면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符籍) 정도의 신앙밖에는 안 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적 한 장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된다면 그 신앙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언제든지 내어버릴 수 있는 신앙일 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신앙입니다. 부적은 언제든지 내어버릴 수도 있고 불에 태워서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적 같은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신앙을 부적을 버리듯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부적 한 장 차원의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하며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사고와 재난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줄 아느냐? 아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재난과 사고 등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재수가 나빠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흑은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고, 우리도 그와 똑같은 운명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가장 확실히 우리의 운명 모두를 내어 맡길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우리가 안심하고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피난처가 어디입니까? 아버지이신 하느님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며, 우리의 운명 모두를 맡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안식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의 안식처이며 피난처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회개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모습을 바꾸어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이 땅 위에서 나그네살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우리 운명의 10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건강과 젊음, 재산과 재물, 재능과 재주를 믿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닥치지 않으려니 하고 자만하면서 산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재난을 당한다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원을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하느님 안에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망각하고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삶은 지속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계절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요 안식처인 하느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그 어떤 운명이 우리 앞에 닥치더라도 흔들림이 없이 꿋꿋이 서 있도록 합시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36.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포도원지기가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3,1-8ac.13-15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제2독서 Ⅰ고린 10,1-6.10-12 (모세와 함께 한 백성의 광야생활은 우 리를 교훈하기 위하여)
복 음 루가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중개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로커라고도 하는데 부동산이나 어떤 상품매매에 있어서 중간에 소개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재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화해자, 조정자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중개인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을 말합니다. 중개인이 어떤 보수를 목적으로 중간에서 그 일을 한다면 중재자는 아무런 보수 없이 오히려 얻어맞는 손해를 부여안고 중간에서 화해의 일을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재자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여기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의 노여움 을 푸셨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중재자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주님과 비슷한 중재자를 봅니다. SOS마을에 가 보면 부모가 버린 아이들, 사회가 외면한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맡아 키우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시집도 안 간 분들이 아빠(?)도 없는 엄마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회가 지었는데 그 죄를 중간에서 부여안고 있습니다. 일종의 중재자들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혼자 방에서 놀다가 괜히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빨래를 하던 어머니가 아무리 말로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때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때리면서 야단을 칩니다. “이놈, 왜 우리 애기를 넘어뜨렸니?”하고 마구 때립니다. 이때 아이가 그것을 보고 울음을 그칩니다. 이때 죄 없이 애매하게 얻어맞는 문지방이 이를테면 중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했으며 또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하느님께 빌고 간청했습니다. 모세는 에집트 왕궁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고 장래가 보장될 수 있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나라 왕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자신의 동족을 위하여 몸바치고 고생하는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노예였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일어설 힘도 없었지만 어떤 민족의식이나 꿈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눈을 올바르게 뜬 자가 모세였으며 그는 자기 동족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섭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꺾이고 시나이 반도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드디어 피눈물나는 중재자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구원에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결코 자기 발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듯이 또한 착한 중재인의 이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포도원지기가 아름다운 중재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3 년 동안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그는 주인에게 1년만 더 참아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3년 동안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3년이 아니라 벌써 수십 년 동안 올해는 열매를 맺겠지 하고 기대하셨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실망시켜 드린 무화과나무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가 벌받지 않고 뿌리째 뽑히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포도원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위한 어떤 중재자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많이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존파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범죄들이 선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남부 지방의 가뭄도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믿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와 보속을 목마르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파티마에 발현하셨던 성모님께서는 당시의 세 어린이에게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희생과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즉 믿는 이들의 중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없는 자들의 기도와 희생과 보속 자체가 이 시대의 아름다운 중재자입니다.
사순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자신도 아름다운 중재인으로 소명 받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힘들고 외롭습니다. 끝이 없는 머나먼 길입니다. 그러나 착한 포도원지기가 되는 것은 은혜로운 길입니다. 따라서 용기 있게 걸어갑시다. 그것이 또 참 회개의 길입니다.
37.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회개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마음
서경윤 신부
연일 바람이 불고 비가 뿌렸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봄을 재촉하는 촉촉한 봄비가 귓전을 달콤하게 속삭인다”고 해설했지만, 나는 전연 그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몸이 찌뿌드드하고, 머리도 개운치 못하며,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생각이 가닥을 잡지 못하고, 마음은 웬지 뒤숭숭해서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짜증이 났습니다. 전화만해도 그렇습니다. 비바람이 쳐서 그런지 왜 엉터리 전화는 그리도 자꾸 오며, 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본당신부와 상의해야 할 혼사 일을 내게 문의하는지, 내게 어떤 성인의 축일이 언제인지, 어떤 성당의 전화번호는 몇 번인지 별별 걸 다 물어왔습니다.
어쩌다 아는 사람한테서 온 전화는 무슨 부탁하는 전화 뿐 입니다. 어떤 분은 독일에서 자기한테 손님이 오는데, 며칠 여기서 묵을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얄미운 생각이 드는 말은, 호텔은 비싸고 여관은 지저분해서 맘이 내키지 않으니, 여기서 숙식하게 해주면 숙식비는 계산해 주겠다고 합니다. 나는 왜 이런 일에 짜증이 나고, 또 짜증스런 일은 한꺼번에 닥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신자라는 분은, 왜 꼭 주일미사를 주일에만 해야하는지, 그리고 바빠서 못해도 죄가 되는지? 물었습니다. 거기까진 나도 성의껏 대답은 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토요일 특전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줄곧 짜증스럽던 마음이 여기서 터졌습니다. 「시내 어느 성당에서 몇 시에 특전미사가 있느냐」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내가 어찌 시내 모든 성당의 특전미사시간을 다 알겠습니까? 그것은 직접 성당에 확인해서 알아보십시오! 라고 대답한 내 어투는 친절했을리가 없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미안합니다」하면서 전화를 끊는 느낌이 나한테까지 기분 나쁘게 전달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도 더욱 화도 나고 허탈했습니다?
요즘 잘 되 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으며, 자다가 자꾸 잠을 깨고, 또 한번 깨고나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습니다. 특별한 고민이나 깊이 생각해야 할 무슨 확실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연히 허전하고 맘속이 냉냉해져 갔습니다. 나는 나를 을씨년스럽게 만든 것은 날씨 탓이려니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비바람이 그치고 창을 통해 따스한 봄볕이 찾아와 주기를 단지 기다릴 뿐입니다.
나를 또 속상하게 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비를 그치게도 바람을 멈추게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속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도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속도 잘 상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그게 맘대로 잘 안됩니다.
사순절에 들어서면서부터 답답한 일이 한가지 더 생겼다면, 사순절을 잘 보내려면 회개를 해야 한다는데, 내겐 특별히 무슨 회개해야 할 거리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특별히 미워한 사람도 없고 원수진 사람도 없으며, 누구 재산을 탐내거나 훔친 적도 없고, 누구의 명예를 훼손시킨 적도 없습니다. 그저 나 혼자 속상하고 화내다가 제풀에 풀리는 것 외에 특별히 회개해야 할 만큼 잘못한 일도 없고, 생각나는 일도 없는데,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지 답답합니다. 교회는 왜 일률적으로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면서 멀쩡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지 불만스럽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뚜렷한 잘못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순절에 회개함으로 잘 보내기 위해서는 평소에「회개가 필요할만한 죄를 지으며 살아야 할까보다」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회개의 시기에 회개할 일이 없는 것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오늘 복음성서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리라”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또 전화벨이 울립니다. 친절하기로 결심하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원장 신부님이십니까?”“네,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십니까? 한가지 물어 볼려고 하는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냥 신잔데요, 정관수술한 것도 죄가 됩니까? 아하! 그럼요, 그냥 신자도 정관수술은 죄가 됩니다” “아, 제가 그냥 신자라고 한 것은 아는 신부님께 물어보기가 쑥스러워서 신부님께 전화드렸는데 신부님께서 누구냐고 묻는 순간 이름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름을 대도 신부님은 모르실 것 같습니다. 나는 00본당 박 00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어떻게 합니까? 성사를 보셔야죠,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님은 절대 거절하지 않습니다. 들림없이 첫번째 손님도 아닐테고요. 오히려 잘 아는 신부님이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감사합니다. 신부님. 안녕히 게십시오!” 수화기들 놓는 손이 사뿐했습니다
어느새 바람은 불지만 비는 그치고 정원에 꽉 찬 햇빛이 눈부십니다. 창문을 활짝 힘차게 열었습니다. 참으로 봄비였나 봅니다.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고, 산수유도 노오랗게 이미 피었습니다. 내가 내 속으로 들어 그 있는 동안은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연도 내 맘을 열 때에만 자신의 아름다음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자기에게로 숨어드는 마음을 이웃에게로 열어나가려는 계속적인 노력입니다. 마음이 내게로 향했을 때는 지옥갈이 짜증스런 찌꺼기가 남지만, 짜증스런 느낌이 들 때마다 이를 극복하고 이좋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함으로 자신을 개방할 때! 이웃도 자신의 아름다음을 내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얻게될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부터 이웃에게로 향하게 하는 마음이「회심」이요 곧「회개」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일회적이 아니고 매 순간 새롭게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짜증스런 일이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닫고 있는 동안 매사가 짜증스럽게 느껴짐을 깨달았습니다.
성서 말씀대로 이러한 회개를 하지 않고 항상 짜증스런 마음으로 실아 간다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나는 회개를 해도 한참 더 찐한 회개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38.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밑빠진 독에 부어진 끝없는 자비
이재경 신부
여러분 숨바꼭질 해보셨습니까?
유대인 랍비 바룩의 손자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숨기고는 친구가 자기를 찾을 것으로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자리에 숨어 있었습니다. 한참만에 그는 밖으로 나와서 친구가 자기를 찾는 대신, 집으로 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헛되이 숨어 있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는 서재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울면서 자기 친구를 비난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랍비 바룩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 하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1907-1972)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기를 바라고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매여서, 우리의 욕심에 매여서 하느님 찾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재앙은 그들의 죄 때문인가?
우리는 오늘 사순 제3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와서 예수에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그저 예수님께 정보만을 전달하는 것 같으나, 그 뒤에는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있을 때,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하느님은 왜 이처럼 죄 없는 사람들이 무참히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계시는가?” 하고,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똑같은 재난을 보면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 하느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가? 하고, 하느님의 태도나 모습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왜 벌을 받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즉 그들은 “죄가 없이는, 벌도 없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죄가 없는 의인에게는 절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재난은 엄청난 죄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어떤 죄 때문에 벌을 받았는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더 깊은 이유는 “우리는 살아났다. 우리는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의 의로움을 확인해 달라”는 무서운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재난을 당한 그들은 죄인이고, 우리는 의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고, 나는 선하고, 나는 가난한 자고, 너희는 불의하고 악하고, 부유한 자들이라는 생각과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기 때문에 살아 남았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 마음을 그들의 무서운 의도를 알아채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너희들도 죄인이다. 너희들도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들어서, 지금 너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커다란 독에 물을 부어서 채우고자 하는데 밑이
빠졌으니, 힘은 힘대로 들고 물은 물대로 빠지고 독은 독대로 비는 모양입니다. 우스개 소리 가운데, 신자들은 귀만 천당에 가고, 신부들은 입만 천당에 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단순한 우스개 소리를 넘어서서, 우리의 살아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이야기는 많이 듣는데 그것이 듣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일 때, 우리의 삶은 갈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에서는 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하시고자 합니다. 삼 년째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뽑아버려야겠다는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원 지기는 “금년 한 해만 더 두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한 해만 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지혜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왜 이같은 유예를 주시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큰 힘을 발휘하실 수 있다‥‥ 주님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만인에게 자비로우시며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죄를 살피시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두 살피시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그분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지혜 11,21-26).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회개를 위한 유예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서 있는지를 알 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고 나는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셨던 예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똑같은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의인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줄 아느냐? 너희가 행실이 바르고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기 때문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항상 좋은 이야기만 들어서 너희가 이미 좋은 사람이 된 줄 아느냐?”
나보다 못한 죄인이 없다는 자각
눈이 올 때 하늘을 본 적이 있습니까? 눈이 올 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자기의 몸이 하늘로 붕 하고 올라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착각이라고 하지요.
늘 미사에 참례해서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무조건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몸으로 살지 못할 때, 아주 작더라도 삶의 작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시는 예수를 만납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회개는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신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 자신이 밑 빠진 독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 역시, 우리 모두가 지금 하느님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이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자기만을 생각할 때, 숨어 계신 하느님은 얼마나 황당함을 느끼시겠습니까? 우리 하느님과 함께 시작했던 숨바꼭질을 계속 합시다.
39.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죄와 회개
홍금표 신부
소신학생 때 읽은 글이 생각난다. 정확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것에 비유 할 수 있는데, 그 관계라는 끈은 죄를 지으면 끊어지게 되고, 그 끊어진 끈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로 다시 연결된 끈의 길이는 이전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묶여진 부분만큼 짧아지듯이, 회개도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회개에 시선을 두라는 이야기였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이다.
빌라도가 갈릴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보면서,「죄와 현재의 불행은 관계가 없다」는 점과,「그들과 우리는 똑같은 죄인」으로서 회개해야 된다는 것, 그들의 죄와 불행을 따지기에 앞서,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3」이라는 숫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하여 주셨던 시기를 뜻한다. 그리고 금년 한해는,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마지막 회개의 시기를 상징한다.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 회개의 기회는 한번 더 주어질 수 있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회개의 삶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사실「회개」라는 주제는,「사랑」과 더불어 예수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사목 현장에서는 「회개」라는 주제보다는「죄」라는 주제에 더 많은 강조 점을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죄」와「회개」의 중요성을 따지는 것이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일수도 있으나, 어느 것에 강조 점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기에, 이것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죄」에 강조 점을 두는 사람의 태도는 이러하리라. 죄를 지었을 때, 이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실망과 부끄러움이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데 죄를 지었구나.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용서」보다는 죄 지은 자신과 타인을 책망하게 된다.
그러나「회개」에 강조점을 두는 사람의 태도는 이와는 다르다. 이들은 회개란 죄를 전제로 함을 알고 있기에, 이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인정과 수용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지게 되고, 죄를 인정하기에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태도의 차이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성서의 인물들이 유다와 베드로가 아닐까 여겨진다. 유다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제자단의 돈주머니를 맡아볼 정도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는 단순한 돈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독립 투사였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인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는 독립투사로서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유다는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그분이 메시아라면, 혹시 죽음 앞에서만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의심이,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였으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내시지 않고 돌아가신다. 유다는 실망한다.「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 스승을 배반하다니」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신의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결국 자살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 비해 베드로는, 어부 출신으로 실질적으로 제자단의 으뜸이었던 분, 이분도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동은 유다와는 차이가 난다. 그가 한 행동을 성서에서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라고 짧게 기술하고 있다. 왜 울었을까?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스승을 배반한 자신의 알량함에, 그리고 잘못에 대해 울음으로 밖에 용서를 청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그 울음의 의미였으리라.
사소할 것 같은 이 두 가지 태도의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의 행위가 훨씬 더 인간적이고 호감도 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 태어나지만, 유다는 성서에서 가장 버림받은 이로 남게된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와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의 삶의 한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결연히 죄와 단절하는 삶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베드로의 태도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사순절 회개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40. 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3년전, 오늘 복음 즉 「열매를 맺지 못해 잘릴 위기에 처해졌던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을 주제로 강론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꾸며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방금 뉴스속보를 들었습니다. 지금 휴전선 부근의 상황이 좀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미사가 어쩌면 ‘편한 마음’으로 봉헌하는 마지막 미사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 미사 중에 진심으로 통회하며, 특별히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강론시간이 되어 강론을 시작하며 먼저, 그 뉴스속보가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였음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성호를 그으셨고, 또 환히 웃으시며, 박수를 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모두 다 안도의 숨을 내쉬시며 감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개중에는 그 사이에 벌써 집에 확인 전화를 하고 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특히 아들을 군대에 보내신 어머니들의 걱정과 놀람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훨씬 더 컸습니다. 「우리들은 살만큼 살았으니까 지금 죽어도 별 한이 없지만, 우리 아이들은‥‥ 」하시며 걱정들을 많이 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심한(?)」강론에 놀라신 분들께 죄송스런 감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은 「쇼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시금, 만약 위의 전쟁이야기가 지금 실제상황이라면,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못살겠다! 힘들어 죽겠다! 내 신세는 왜 이 모양인고!」 하던 것들이, 아마 다「배부른 소리」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며 후회를 할 것입니다. 많은 것이 지금과는 영 딴판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고,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갈 것이고, 터지는 폭탄과 불바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고, 전기도 물도 끊긴 상태에서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이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비규환을 이룰 것이고, 붙잡혀가 고문 받아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여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그런 혼란과 공포, 고통과 죽음의 세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겪게 될 수도 있는 전쟁의 그 아수라장에 비하면 분명 천국일 것입니다. 아무리 사는 것이 고달프고 걱정거리가 많고, 그래서 죽을 맛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해 베어 버려질 뻔했던 무화과나무는 우리 인간들이고, 그리고 거름을 주고 돌보아 주면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며 1년의 유예기간을 청하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 그러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집행유예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간들은, 이미 죽어있어야 할 인간에게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유보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회심과 기도, 사랑의 나눔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 유보된 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채워나갈 때 우리는 분명 많은 열매를 맺어 영원히 사는 무화과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설마설마 하면서 그냥 그렇게 별 회심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는, 분명 심판의 그 날에 ‘잘려나갈 무화과나무’의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된다면, 아니 오늘이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된다면,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만약 전쟁이 나서 세상이 불바다-아비규환의 세상이 된다면, 오늘 내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물로서 주어진 이 집행유예 된 시간을,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은총과 구원, 회개의 때로 감사로이 받아들여 기쁜 마음으로 성실히 채워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