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부활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부활 제 2주일


        22. 김정진 신부(다)/42


        23. 함세웅 신부(다)/44           25. 김몽은 신부(다)/46


        24. 강길웅 신부(다)/48           27. 김신호 신부(다)/50


        28. 신은근 신부(다)/51           27. 김동춘 신부(다)52/


        29. 함세웅 신부/55                 30. 이규철 신부/57


        33. 유영봉 신부/59                 34. 김영남 신부/61


        35. 강영구 신부/63                 37. 정말 주님이십니까/66


        38. 공동체 정신/68                 39. 사도들의 부활선포/70




2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부활과 신앙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의 부활로 제자들의 신앙심을 굳게 하시려고 노력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요, 중심이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속에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므로 우리의 신앙의 시대는 시작되며 새 생명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믿음으로써 죄악과 죽음을 이기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에서 부활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하며 인사하시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을 믿게끔 배려하셨음이 역력합니다. 그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하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이제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고(요한 20,9) 믿게 되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열두 제자 중 토마스라는 사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적에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여도 좀체로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제자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을 만져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고 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하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신하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믿는 사람이 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토마스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을 굳이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신앙이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부정적 도전을 받아 왔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처음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고 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는 실증주의자(實證主義者)들이나 실험과 논리만을 믿으려는 과학 만능주의자들은 토마스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계속 믿지 않고 있습니다.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하여 가고 계획적으로 퍼뜨린 헛소문이 바로 부활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마태 28,13).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혹은 자기 스승의 부활을 열망하는 제자들에게 심리적 환상으로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부활을 신앙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부활 사건은 조금도 와전되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요, 객관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확실한 체험이 이를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외교인이나 비신자들은 물론이려니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을 그릇되이 알고 있으며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부활의 신앙이 다시 살아나도록 온갖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음은 죄악의 세력이 생명을 삼킨 것으로 일시적이나마 죽음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한 인간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믿음도 그의 죽음과 함께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보통사람들만도 훨씬 못하게 십자가 형틀 위에서 끝내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죽으셨고 무덤에 깊이 장사 지내게 되자 절망과 허무만이 남았을 뿐이며 예수님을 죽이고 만 이 세상이 갑자기 무서워지게 되어 그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도 크게 못 쉬면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망, 그들의 신앙, 그들의 용기는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 아침은 밝았습니다. 새벽이 마치 어둠을 꿰뚫고 나타난 빛의 세계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죽음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극복해 낼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쳐 이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허무함에서 그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해 주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라고 하시며 우리의 신앙심을 북돋우어 주시며 당신의 부활로 인하여 죄인인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심을 명심하고 뜨거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멘.












2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예수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공존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은 옛부터 8부 축일이라 하여 성대하게 기념하였고 특히 새 영세자들에게 기쁨과 믿음을 다시 확인시켰던 날입니다. 부활 축일은 단순히 지나가는 어떤 날의 기념이 아니고 매일 반복되는 사건, 그리고 언제나 연장되어야 할 새로운 의미를 주는 사건이기에 참으로 되새겨야 할 그러한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부활의 사건과 삶이 지니는 반복과 연장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는 사도행전 5장의 말씀으로 초기 교회의 특징을 말해주는 세 번째의 요약입니다. 첫 요약(사도 2,42-47)과 둘째 요약(사도 4,32-37) 그리고 오늘의 제 1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초기 교회의 생생한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바로 그리스도의 반복이며 연장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곧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묻혀야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과 그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가르침은 모두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 때문에 사도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하느님이 이끄시는 것이기에 이 모임의 일원이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 초반부의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이야기로, 신앙인이 지녀야 할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느님과 교회에 바치기로 했는데 그 중 일부를 빼돌리고 바쳤기에 베드로에 의해 벌을 받고 죽습니다. 그의 부인인 삽피라도 이 사실을 계속 속였기에 뒤이어 죽게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이 일화에서 우리는 신앙인이 지녀야 할 솔직성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닌 이러한 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탄을 안겨줍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그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로부터 소명을 받았기에 병자들과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치유해주며 교회를 번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도들은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어려움을 당하며 피를 흘리는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 2독서 묵시록의 말씀도 같은 맥으로 이어집니다. 묵시록은 사도 요한이 환시를 통하여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자신이 받은 소명을 확인해주며 상징적 표현이 가득한 책입니다. 요한은 공동체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며 사도로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함께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 때문에 사실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능력과 기적의 사도로서가 아니라, 환난 중에 외롭게 갇혀 있는 유배자 사도 요한을 만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역시 예수의 십자가 삶의 반복이 아닙니까? 그러나 요한은 긍지와 보람을 지니며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은 확실히 시공을 뛰어 넘습니다. 당시 법정을 갖고 있는 일곱 도시의 교회에 준 메시지는 바로 온 인류에게 준 보편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경우에 받아야 할 벌을 상기시킵니다.




요한은 메시지를 주는 사람,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두려워 쓰러졌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뵈올 수 없다는 구약의 장엄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현, 확인되고 있습니다. 야훼가 항상 계시며 전능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도 바로 존재 자체이십니다. 과거와 현재, 죽음과 부활을 함께 수용한 그리스도, 이분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긴 옷과 금띠는 예수의 사제직과 신앙인의 품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생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재음미할 때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내며 이 교훈을 또한 사랑하는 이웃에게 전해야 할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예언자, 사도, 신앙인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소명, 사도들의 소명, 신앙인의 소명은 자신의 삶, 아니 체험을 이웃에게 전승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삶을 이어받는 과정이며 집약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불신의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명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은 장벽을 뛰어 넘습니다. 닫혀진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도록 예수는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아직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시며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케 하십니다. 열 사도의 모임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토마스의 자세입니다. 자기 중심의 토마스는 공동체의 체험은 인정치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마스는 물론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었지만 곧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예수의 발현을 체험하자 토마스는 더 큰 신앙인으로 급변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신앙, 공동체의 체험을 함께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예수와의 불가분의 관계, 그 연속성을 우리는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복음을 기술한 목적이 바로 예수를 통하여 모두가 생명을 얻기 위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란, 믿음이란 모두 서로의 존재, 서로의 가치, 서로의 생명을 확인해주고 공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공존입니다. 부활은 이 공존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주는 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당신의 삶을 우리가 이곳에서 재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새 삶을 허락하소서. 아멘.












2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김몽은 신부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현실주의적으로 감각적인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았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러한 자들에 대한, 신앙의 진미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말씀을, 토마스의 불신(不信)을 통해서 일깨워 주신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한 자리에 모여서 문을 잠그고 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동족인 유다인들의 박해의 손이 두려웠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사실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그 밖의 유다 권력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슨 트집만 있으면,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 갑자기 예수께서는 문이 잠겨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자비에 넘치는 평화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 속은 의혹과 두려움이 뒤섞여 부활하신 예수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못박힌 손과,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결정적인 주님에 대한 불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열 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모든 일에 있어서 충실하고 고지식한 토마스는, 너무나도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 채 사물을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끝내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직접 주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본 후에야만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막달레나의 증거도, 열 제자의 보증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실로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한 집에 모였을 때, 그때는 토마스도 함께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문이 잠겼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결코 토마스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정을 가지고 그의 불신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기 위한 자비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신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신앙을 얻어 구원될 수 있나 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계신다. 그리고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당신의 부활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증거하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진정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신자 생활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종말의 그날까지 증거하면서, 희망과 기쁨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러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쓰여진 믿음의 기초인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활에 대한 확증을 심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나 이때나 부활을 믿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 같다. 특히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될 수밖에는 없다(1고린 15,14 참조).




우리의 신앙이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 부활 신앙이다. 우리는 부활하시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도 믿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시어, 힘차게 활동하신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힘까지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마르 15,16-17 참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같으신 분”(히브 13,8)이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옆에서 우리를 타이르고 계시며, 이 세속의 법칙(이기심)대로 살며는 불행하다고 일러주신다. 오직 주님과 함께 주님 뜻대로 부활하신 주님 따라 살 때 참 행복이 온다.












2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부활은 믿음의 완성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제2독서 묵시 1,9-11a.12-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초등학교 교리반에서의 일입니다. 5학년 남자 아이가 혼자서 키들키들 웃더니만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수녀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때 천당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하여 교리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꼬마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천당은 양로원과 똑같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수녀님이 “왜?”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천당은 늙고 병들어 죽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빨 빠진 할머니, 대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들만 사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아요.”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막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고 수녀님의 교리지도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실 안이 한참 어수선할 때 조그만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하면서 나무라더니 천당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한 분도 계시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네가 어떻게 아니?”하고 대들었습니다. 이때 소녀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파띠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이나 루르드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은 다같이 젊고 예쁜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성모님은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천당에서는 살아 계실 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신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분들 생애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당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거기서 탄복을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발현하셨을 때의 성모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분명히 아주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그렇게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대전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잃었던 부분은 거기서 다 찾을 것이며 미완성이었던 모든 것은 거기서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세상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구자, 가난한 병자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산다 해도 그는 분명히 하느님 나라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 서의 삶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어떤 소년이 있는데 그는 신체적인 불구뿐만 아니라 부모가 그를 버렸다는 아픔의 상처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행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했으며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종일 엎드려 지내는 세월이지만 입으로 책장을 넘기며 성서를 보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 엉망이 됩니다. 막말로 개판이요 요지경이 됩니다. 세상은 그리고 세상 끝까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완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그러나 완성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고 미래를 닫아 놓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래서 불행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는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마만 빠진 것을 보면 그는 아마 믿음의 일을 제치고 다른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쏘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허탕을 치고 우연히 제자들에게 왔을 때 그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고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하고 자기 손을 주님의 상처에 넣어 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토마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거부감 은 오히려 그가 강하게 믿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다시 사시기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토마는 소원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소원도 성취시켜 주었습니다. 강하게 믿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우리의 갈증 을 채워 주었으며 우리의 불안을 제거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 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행복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부조리의 세상에 대한 해답이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두근거리게 기쁜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한다 해도 그 나라에서 다 보상받을 일을 생각하면 세상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따라서 정말 복되게 살도록 합시다.












2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불신의 벽을 허물자


김신호 신부




신임을 주지 못한 동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시작된 부활시기의 두 번째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부활의 벅찬 감격을 나누게 됩니다. 지금은 이름이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활주일 후 첫 번째 맞는 주일을 사백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백주일이란 흰옷을 벗는 주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부활축일에 영세한 새 영세자들이 영세 때 입었던 흰옷을 일주일간 입고 있다가 이날 벗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토마 사도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토마 사도는 여러가지 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토마 사도는 동료들이 경험한 사실이나 또는 전해주는 말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평소에 토마 사도가 동료들과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토마 사도의 태도에서 볼 때에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사도들이 토마 사도에게 그렇게 보지 않고 믿게 할 정도로 신임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건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확인시키는 효과를 오늘 복음은 내용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토마 사도가 처음부터 믿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을 그렇게 써 좋게 만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마 사도는 이러한 불신의 벽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즉시 허물어뜨렸고 거기에다 자신의 신앙고백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삶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경험 중에는 좋은 경험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을 형성시켜 나가게 됩니다.




토마 사도의 신앙고백


배움의 이론에 있어서 환경이나 조건을 유난히 강조하여 사람이 전적으로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의 방향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이 전적으로 틀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적으로 볼 때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다거나 그분을 믿는 행위 등은 이러한 현상에 머무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 없이는 부활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29.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다)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


신은근 신부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미루어 보건대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나돌아 다녔던 것 같다.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토마스는 숨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를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유대사회의 인사라고 하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겐 더 할 수 없는 위안의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비로소 잃었던 기쁨을 되찾는다.




환희에 차 있던 그들 앞에 토마스가 등장했다. 스승을 만난 제자들은 토마스를 힐책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는데 너는 어디 있었느냐. 가만히 있지 왜 그렇게 싸돌아 다니느냐는 불만이다. 그러자 토마스는 반발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나는 밖에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진정 부활하셨다면 손과 발에 난 상처를 본 뒤에야 믿겠다. 토마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너무 똑똑해서 그랬을까. 제자들은 더 이상 토마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돌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한번 더 제자들에게 발현하셨던 것이다. 토마스야,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보지 않고 믿다니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세상인데 어찌 보지 않고 믿어라 하시는가. 토마스는 스승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이다. 보지 않고 믿으라고.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스승의 말씀으로 토마스는 비로소 눈을 뜬다. 부활을 받아들이고 은총을 받아들인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 속에는 토마스의 회심이 들어 있다. 내 모든 지식과 이론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해서 토마스는 믿음의 제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가장 확실한 은총의 축일이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토마스가 말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속에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며 우리는 관리자다. 무엇보다 금년 부활절엔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란 이 믿음이 부활해야 한다. 부활은 깨달음이다. 하느님께서 내 운명과 소유와 모든 것의 주인님(주님)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이 믿음을 금년 부활절엔 토마스의 심정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의심 많은 토마스는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바꾼 것이다. 단순히 손과 발의 상처를 확인했기에 바뀐 것은 아니다. 그 정도 사건으로 사람이 달라질 토마스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가 토마스를 변화시킨 것이다. 사랑은 이론을 앞선다. 사랑 없는 교리가 냉담자를 양산하고 애정 없는 선교가 신자들의 기를 꺾는다.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다. 그런 사랑이 되살아나는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 토마스를 바꾼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라는 것이 부활 후 첫 주일의 교훈이다. 웃기지 마라. 나는 안 믿어. 그렇게 말했던 토마스였지만 스승의 발현 앞에서는 솔직하게 승복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부활의 언저리를 서성대고 있는 수많은 토마스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3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다) 이제는 기뻐하며 따를 십자가의 길


김동춘 신부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노래한다. 교회의 십자가가 세워진 뒤로 세상은 십자가만을 보지 않고, 십자가 너머 부활을 노래할 줄 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부활을 노래한다. 아니 부활을 기대하고 부활을 갈망한다. 부활을 이해하는 데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지는 세상의 질곡으로부터의 부활은, 기쁨이고 승리이고 영광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믿게 되는가? 오늘 전례를 통해 듣게 되는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사도들을 통해 만나게 된 예수


“집 짓는 자들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주께서 이루신 일이옵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나이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오늘 제1독서 후에 노래한 시편의 한 구절이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는 집 짓는 데 필요 없다고 내버려진 많은 돌, 그래서 발에 채이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돌을 기억한다. 그 돌을 모아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시는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고 싶어진다.


 


사도들이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고 제1독서인 사도행전은 전해준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악령이 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들을 머릿돌이 되게 하는 사도들에게서 놀라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아, 당신들 사도들을 보면, 참으로 당신들이 따랐던 생전의 예수를 보는 것 같구려. 마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당신들 안에서 활동하는 것 같구려.”




이제 사람들은 사도들을 보고 예수를 만난다. 사도들 가운데 꿈틀대는 치유의 능력을 보고, 예수를 기억하게 된다. 그 치유의 능력이 세상에서 버려진 돌들을 모아 머릿돌이 되게 하는 것임을, 그 능력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대로 사람들은 사도들에게서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불신자들이 어떻게 열렬하게 스승이 살아 있다고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신다. 평화를 빌며 오신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너무나 잘 이해하시기에,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손으로 만져보라 하신다.




봄은 겨울을 잊게 한다. 때로 나의 풍족한 삶은 이웃의 고통과 가난을 잊게 한다. 개구리는 자기가 올챙이였다는 것을 망각한다. 부활의 영광은 수난의 고통에 대한 보상인가? 부활은 십자가의 상처를 깜쪽 같이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인가?




부활로써 면제되지 않는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를 기억하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부활은 십자가의 길이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보낸다.” 부활은 승리이다. 부활은 거짓과 속임수와 욕심 많은 권력과 불신에 대한 승리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의 스승이 살아났다고, 우리의 스승이 이겼다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의 팔을 높이 들어 올리셨다고, 우리를 내치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예수님의 상처는 왜 그대로 남아 있는가? 부활은 십자가의 길이 승리의 길임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걷게 할 용기를 주지,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를 면제하지 않는다. 봄이 지나면 겨울이 또 올 것이다. 그때 두려움 없이 기뻐하며 스승의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한 제자들이, 그리고 그 제자들의 공동체가 기쁘게 스승의 길을 따랐다.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들이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미리 맛보고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부활의 기쁨이 없다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십자가의 길은 얼마나 고된 길인가? 너무나 무거운 짐일 뿐이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가난하지만 공동체를 꾸려가는 사람들, 아프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 쉽게 번돈 쉽게 쓰며 이웃을 기죽이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땀 홀려 일하며, 건강한 웃음으로 내일을 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런가 하면, 부활의 영광에 눈이 먼 사람들도 있을 만하다. 이제 십자가의 길을 끝장났다고, 겨울은 끝났다고, 십자가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고, 부활의 영광을 높이 쌓아가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나 바울로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까맣게 잊고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되뇌인다




안 믿는 자에게 보여 줄 십자가 상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얘기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토마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의 고집은 오히려 솔직하게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토마의 불신은 십자가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뼈저리게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대답하는 토마의 고백은 더욱 가슴을 울린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토마를 용서하시고, 또 토마처럼 불신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에 기뻐하게 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불신의 유혹에 시달린다. 믿음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면, 그 길을 먼저 걸으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무조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예수님처럼 손과 옆구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한다.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셨고, 그 다음엔 제자들이, 그 다음엔 또 다른 제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누군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예기할 수 있다. 믿으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제2독서인 묵시록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 무궁토록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계십니다.” “어떻게요?” “이렇게요!”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상처, 사도들이 베풀었던 치유의 기적, 세상이 놀라는 새로운 공동체,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만 실천하기 힘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 드러난다.




버려진 돌들이 머릿돌로 쓰이는 공동체를, 십자가의 길을 담담하게 기쁘게 걷는 교회 공동체를 보고,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날 것이다(사도 5,14).


  “집 짓는 자들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3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토마사도의 불신앙과  신앙


함세웅 신부




오늘날에도 또 다른 성 토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토마의 언행은, 우리에게 격언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의 말을 전혀 믿지도 신용하지도 않고 자신의 경험, 옹고집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토마와 같은 개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에 대하여 예수


님은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어느 때이고 시간이 되면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일이 지나서 모든 환경이 변한 다음에, 토마도 혼자 곰곰이 생각을 했고, 그 다음 또 다른 사건을 당했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발현을 직접 보고서는 옹고집을 부리지 않고 “내 주시여, 내 천주시여” 하면서 겸손되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신앙의 위기란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서에 정통하고 이론이 밝은 사람들입니다. 허무맹랑한 것을 가지고 왜 야단들이냐느니, 경험만이 논증의 근거가 된다느니, 그야말로 실증론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는 예수는, 만민의 평등을 주장한 박애주의자, 사회 정의의 구현자, 체제보다는 근본적 원리를 주장한 진리의 증언자, 결국 양심대로만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의 무교회주의의 선봉자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성서란 결국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며, 스스로 요약까지도 합니다.


 


참으로 훌륭하게 보이는 이론 전개이지만, 거기에는 바로 불신앙의 토마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유아독존 식의, 자아 집착에 빠진 노예 근성의 사고 방식이 있기에, 가엾기만 한 생각들입니다. ‘장님들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체험을 모두인 양, 악을 쓰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기에 말입니다.


 


만민의 평등, 박애를 부르짖다 죽어간 위인들이 우리 역사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훌륭한 사람들을 우리는 또 역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진리의 증언을 위하여 순교한 분을 우리는 또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착하게 양심대로 살다가 죽어간 올바른 선현들의 발자취를 우리는 또한 눈여겨 살펴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무리 중의 한 사람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예수는 그보다는 질적으로 다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까지 단정적으로 자신을 정의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구원될 것이며, 나를 믿지 않는 자는 버림을 당하리라”라고 따라올 결과까지도 단호히 언급하셨습니다. 그보다는 “나는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임무와 출신을 명백히 하셨고, 더구나 “나는 죽은 후에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다” 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더더욱 “나를 믿는 이는 죽었을지라도 부활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 보증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허무맹랑한 존재이고 성서가 우스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가르침의 일관성과 논리성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인간 중 그 누가 이렇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사람이 있었고 실천했던 사람이 있었겠느냐 하며, 우리는 역설적으로 예수를 증명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토마의 불신앙!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입니다. 그에게는 생각할 자유가 있고, 행동할 자유가 있고, 더구나 판단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불신앙의 자유까지도 존중하십니다. 절대로 신앙을 강요하거나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신앙의 토마가 신앙의 토마, 고백하는 토마로 변한 과정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다른 10명의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그 토마가, 옆자리의 제자에게 동의나 확인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 스스로 깨달았고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토마의 거부, 불신앙을 쉽게 인정하며 수긍하면서도, 토마의 신앙과 고백은 또 비웃으며 거부하는 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우스운 주인공인 나입니다. 그러나 거부하고 비웃는 나를 하느님은 역시 나의 자유를 존중하시며 나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 스스로 예수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또 다른 토마가 곧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토마를 진정 수긍한다면, 신앙의 토마도 수긍해야만 합니다. 진리의 증언자, 박애주의자 예수, 사회 정의 구현자의 예수를 인정한다면, 나는 죽고 부활하신 사람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를 동시에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3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성체를 모시지 않았으니 밥도 굶어야


이규철 신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굳게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0,26~29참조). .




「요셉이는 당당에 다녀왔으니 밥 먹을 자격이 있고‥‥」‥‥새벽 첫 닭이 울면 마을 어귀 바오로의 집 마당에는 호롱불을 든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 큰기침으로 출발 신호를 알리곤 하였습니다. (성당에 갈 때에는 항상 묵주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안성 읍내에 있는 성당 새벽 6시 미사 참례를 위한 행렬 아닌 행렬이 시작되곤 하였습니다. 호롱불(손전등<후레쉬>이 별로 없었음)을 든 어른들이 부지런히 걸어가면, 초등학생인 저는 언제나 왕복 22km(성당까지 11km)를 마라톤 선수처럼 뛰어야 어른들을 놓치지 않고 캄캄한 새벽 어두움의 무서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당 가는 길 중간에 공동묘지가 두 곳 있었음).


  비가 오는 날이나 특히 한겨울 눈이 쌓인 새벽에는 성당 가기가 싫어 억지로 눈을 감고 자는척 하면,「요.셉이는 비가 오고 눈이 쌓였다고 천당 안 갈꺼야?‥‥」 두번도 아닌 딱한 번만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경고!「성체를 모시지 않았으니 밥도 굶어야지‥‥ 」하시며, 꾀병을 부리고 새벽 미사를 궐한 동생에게 아침을 굶겨 학교에 보내시던 어머님! (점심까지 굶으라고 하셨습니다). 야속하기도 하였지만 영혼이 굶었으니 육신도 굶어야지!‥‥ 하시는 어머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옳은 말씀이니까‥‥


  「어려서부터 따라서 해 봐야 커서도 잘 할 수 있는거야?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왜 그렇게 일주일이 빨리 다가오는지,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농사일을 마치고 모이는 시간은 으례히 밤 10시가 되어야 모임) 공소 강당이나 할아버지 회장님댁에서 레지오 쁘레시디움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꼭 저와 동생을 양 옆에 앉혀 놓고, 밥이 깊어 가는 줄을 모르시고,「무슨 일이든지 자주 해 보아야 된다」고 하시며, 믿음이 아닌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 다음에 꼭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하시면서 ‥‥


  「요셉아! 일기장 가져오렴」 ‥‥ 그 바쁜 농촌 생활 속에서도, 매일 저녁숙제 검사는 안 하셔도 일기장 검사는 빠짐없이 확인하시던 어머님이, 한편으로는 야속하고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학교 일기장은 띄어쓰기와 맞춤법 정도로 끝나지만, 성당 일기장만은 꼼꼼이 확인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①「예수님 이름으로 집에서 한번, 학교에서 한 번 이상 착한 일을 만들어서라도 실천할 것과, 아침, 점심, 저력기도를 했는지‥‥ 」 어머님만의 주문 내용과 ② 「적어도 한가지이상 감사할 일은 무엇인가?」의 확인이, 40년이 지난 오늘의 사제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깊은 뜻을‥‥「아버님이 아직 안 들어오셨는데‥‥」‥‥농사일로 늘 바쁘신 아버님은 여름철에는 논농사와 밭농사, 과수원 일로 바쁘시고, 겨울철에는 사랑채에서 새끼 꼬는 일과 가마니 짜는 일로 밤늦게까지 바쁘신 아버님이, 일을 끝내시고 들어오신 후(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안 들어왔으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음)에야 온 가족이 모여 저녁기도(옛날에는 만과라고 하였는데 기도시간이 30분이상 걸렸음)와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친 후, 잠을 잘 수 있었던 어린시절의 어머님의 신앙교육과 어머님만의 믿음생활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어머님만의 신앙교육 ,어머님만의 믿음생활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나를 높이 받드는 사람이니, 올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시편 50, 23)하신 말씀대로, 구차한 농촌생활 속에서 8남매를 키우시던 부모님은「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유딧 8,25)하신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생활로 보여 주시며, 언제나 당신 자신을 등불로 태우시면서 감사하는 생활과 빈 틈 없는 믿음 생활을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마태 25,21)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늘 감사하는 생활과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토마가「의심을 버리고 나를 믿어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왜들어야 했습니까?


무슨 일이든 캐묻고 따지고 계산에 맞추는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숨죽이며 숨어있을 때, 왜 토마는 그 자리에 없었겠습니까?) 의심이 많던 토마는 슬그머니 다락방을 빠져나와, 세상 판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심 없이 어떻게 사흘을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나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고. 눈과 손으로 확인해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토마는 예수님을 또 한번 십자가에 못을 박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땀 흘리며 한 여름을 논밭에서 허우적거리듯 헤어나지 못했을지라도, 인내를 갖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여, 영글기도 전에 낫을 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야훼께 맡기면 다 이루어지리라」(잠언 16,3)하신 말씀대로 다락방 안에서 좀이 쑤시더라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얼마나 벅찬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를 드리기 위해 해 뜨기 전에 일어나 기도한다면」(지혜 16,28)하느님께서 책임지어 주실텐데, 우리는 토마처럼 너무 따지지 않았습니까? 약은 체 하지는 않았습니까? 감사하기보다는 무엇이든 더 얻으려고 애태우지는 않았습니까?「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하신 주님께 모든 것 맡겨드리며 감사의 노래(이사 12,1~6:시편 63,1~11)를 부르며 부활시기를 지내지 않으시렵니까? 12사도로 뽑아주셨는데, 하느님 자녀로 간택하여 주셨는데, 감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이만큼에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의심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3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부활 신앙을 사는 공동체


유영봉 신부




묵상 : 부활장면을 찍어둔 비디오라도 있다면, 부활을 믿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들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부활장면 찍어둔 비디오는 없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부활교리를 가르치던 중이었다. 신부님의 교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중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부활 장면 찍어둔 비디오 같은 것은 없습니까?”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찍어둔 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임마, 그때 비디오가 어디 있었겠어!”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점잖게 나무란다. 




오늘 복음의 토마사도 뿐만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은 ‘예수님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부활교리를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장면을 찍어둔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면 누구나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참으로 죽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 없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고 예수님을 완전히 ’죽어버린 자’로 여긴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자만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활을 증거하는 삶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지적(知的)인 동의인가?


이것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나는 시작이요 마침이며, 살아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지만 이렇게 살아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묵시 1,18)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부활신앙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산다”(요한 11,25)고 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때,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부활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은 현실의 욕심을 뛰어넘어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사도 2,44-45) 사도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철저한 나눔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설익은 신앙인


우리 주변엔 “나는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생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세상에 살면서 좀더 인간답게, 멋있게 살려는 것뿐이지!”하며, 신(新)세대다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무신론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사춘기적인 순수함이고,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멋있어 보이려고 진한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확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부활한 예수님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만날 수 있다


복음은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토마 사도가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토마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 발현했을 때, ‘사도들의 무리’ 안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이 두터운 형제들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교회를 떠날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 당신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3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토마 사도의 불신


김영남 신부




해마다 오늘과 같이 부활 다음 주일이 되면 으레 우리는 미사 때에 부활하신 주님과 토마 사도의 만남에 관한 대목을 복음으로 듣는다. 이 대목이 오늘 읽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 말씀 가운데 나오는「(부활하신지)」 여드레 후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오늘 주일 복음의 대목이 들어있는 요한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 의하면 토마는 한 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7)라고 용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께 대하여 굳은 확신을 갖고 있던 제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을 보면 이토록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토마가 「철저한 냉담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동료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다로 분명히 증언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상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그토록 컸던 만큼, 참혹한 그분의 죽음이 주는 충격도 그만큼 그에게 컸던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열렬했던 그의 믿음과 희망이 어이없게도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토마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 때, 즉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좌절과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부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를 찾아오시어 당신의「십자가 상처」를 만져보도록 하신다. 못 믿겠다며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는 토마에게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의 스승 예수님이 다가가시어「평화」를 선사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다가오심 자체가 이미 토마에게는「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 오셨을 때, 토마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희망을 거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승을 배반한 제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무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던 상태였다. 사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분이 고통스럽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체포했던 「유다인들이 무서워」 도망갔던 것 아닌가? 이런 토마의 비겁함, 불충실함 그리고 불신에도 불구라고 부하신 예수님은 토마에게 다가오시어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하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도 질책의 말씀이라기보다는「십자가의 충격」 때문에 잘 믿지 못하는 토마를 안타까워하며 하시는 격려의 말씀이요,「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으로 부르시는 초대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의 이런 사랑을 접하게 되자, 그 동안 얼음같이 차가웠던 토마의 불신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토마가 드디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한다. 사실, 이 고백이 뜻하는 엄청난 내용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해서 파악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할 때 토마는 이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앓고는 믿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차원으로 넘어서 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토마는 보고 만짐으로써 다시 믿게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믿게 된 것이라고 블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의 부활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죽었던 토마의 믿음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도 두려움도 의심도 절망도 넘어서서 토마에게 다가가 그를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가 많은 분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또는 주변 사람들이 토마처럼 깊은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 아프게도 우리 주변에는 한 때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분들이,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겪은 후에 예수님께 대한믿음마저도 잃고 완전「냉담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그런 분들에게 선포되는「기쁜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쁜 소식」의 출처와 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사랑에 있다. 그분들이 토마가 스스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던 처지에 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시어 그를 그 불신과 좌절의 늪에서 건져내셨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도, 무덤도, 굳게 닫힌 문도 주님의 사랑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한편 토마 사도 이야기는 토마와 같이 믿음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사람들을 신앙공동체가 관용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준다. 그리고 토마와 같이 신앙의 여정에서 「좌절하거나 냉담한 사람들」이 신앙을 되찾는데 있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라는 것도 말해준다. 신앙공동체(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현존을 깊게 체험하며, 서로 사랑하고, 특히 「좌절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한다.












35.      부활 제2 주일   요한 20, 19-31 (공통)  성령을 통한 믿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부활 제2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의 주인공은 당연히 의심 많은 토마 사도입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 사도는 감각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던 의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만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제자들조차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의심 많던 토마 사도에게는 그토록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인 증거를 요구하게 된 것이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의 불신을 씻어 주시기라도 할 양으로 여드레 후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습니다. 토마는 그 때 비로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쉽게 믿지도 않지만, 한번 믿으면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토마 사도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토마 사도의 이런 태도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 즉 오관(五官) 혹은 오감(五感)이라는 것 자체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혹은 기분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똑같은 사물을 놓고도, 사람에 따라서 흑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사람은 맛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맛이 없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좀 맛이 없는 음식도 맛이 있게 느껴질 것이고,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별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얇은 옷도 몹시 덥게 느껴지지만, 겨울에는 두터운 옷도 별로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불확실할 뿐 아니라, 잘 변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우리의 감각기능이 확실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속는 사람이나 사기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속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그리고 다짐을 받고도 속기도 하고, 사기당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지닌 감각 기능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또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감각 기능을 통하여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감각 기능은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줄지는 몰라도, 감각 기능으로 믿음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믿음은 자신의 운명과 삶의 모든 것을 바치는 행위인데,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함으로써 그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고 또 우리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해서 그런지, 흑은 하도 속으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무엇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곳곳에서 성모님이 나타났다느니,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일들을 비디오로 촬영해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이상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충격을 주어서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믿음을 가졌다면,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각 기능을 바탕으로 해서 얻게 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감각 기능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확인한 후에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순간을 불안과 근심 걱정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확실히 처리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이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사를 불신하기에 의심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하느님의 영(靈), 곧 성령(聖靈)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을 닫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믿음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하는 마음을 지니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 해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불신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아무리 눈으로 흑은 손으로 확인을 시켜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에 웅답할 때 비로소 믿음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증언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란 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은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의 사도 행전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 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효가 늘어났던 것은, 바로 신도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그 평화스럽고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힘있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의 부활 사건은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2천 년 전에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분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불신 속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증거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불신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토마 사도와 같이 주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이 주는 평화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마저도 극복하고 사는 우리의 그 삶의 모습,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서 살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3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정말 주님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살롬!」하시며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유다인들이 그 제자인 자기들에게도 어떤 해를 입히지는 많을까 두려워한고 있던 터였고, 또한 자신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의식으로 마음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제자들의 걱정과 어두움을 깨끗이 씻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잘못하고 부족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동료들의 말에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예수


님의 부활을 인정하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 후 예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이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며,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며 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긴 연(鳶)줄에 달려 하늘을 나는 연이 높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구경꾼들은 더 이상 그 연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을 날리는 사람은 그 보이지 않는 연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팽팽하게 느껴져 오는 연줄의 긴장감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 팽팽한 연(鳶)줄이 바로「믿음」인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고백을 우리도 자주 바칩니다. 미사성제 거양성체 때 우리는「내 주(主)시요, 내 천주시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뵙고 마음에 모시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줄이 생명력으로 팽팽하지 못할 때, 우리의 이 고백은 별 의미가 없는 요식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작은 도시에 별로 좋지 않은 술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를 걱정한 신자들이 모여,「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 술집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 도시를 타락에서 보호해 주십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그 술집이 불에 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술빚이 불 타 없어지도록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안 술집주인은 법원에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화재의 책임에 대해 부인을 했다고 합니다. 술집주인은 기도의 힘을 믿었는데 신자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한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 한번 더 그 실상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참으로 열심히 산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을 보면,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사도 5,13-14)고 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화된 삶, 참 생명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신앙에 대해,「먼저 보고 만져봐야만 되겠다」는 조건을 달았던 토마스처럼, 니이체가 한번은 신앙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여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래서 당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제 행동으로 내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무신론자인 나도 혹시 !?—」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수도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경종의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생명력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부활의 증인들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공동체 정신




한국인의 개별정신을 빗대어, 한국사람은 둘이 모이면 당을 셋 만든다는 말이 있다. 둘이서 하나씩 만들고 둘이 합쳐서 하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 사람들은 개인은 약한 듯 보이나 공동체로 뭉치는 것을 잘하고, 뭉쳤다 하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우린 개개인은 똑똑하고 강하나, 일단 공동체로 뭉쳤다 하면 서로 치고 받고 비난하고 결국은 서로 상처를 안은 처 헤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공동체 정신


왜 그럴까? 왜 우린 공동체정신이 부족할까? 오랜 세월 남에게 짓눌려 살다보니 솟구치는 울분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서 너나 할 것 없이 높아지려는 심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럴는지도 모른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그래서 비방과 모략이 난무하고,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어려운지 모른다.



개인의 집은 깨끗이 정리하고 살지만, 공공건물에서는 아무렇게나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이유는 공동체정신의 결여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동업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잘들 한다는데, 우린 동업은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심사숙고해서 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 또한 우리가 얼마나 공동체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 외쳤다. 그 때나 이때나 뭉치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크리스천의 공동체 정신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천은 천주교 신자를 일컫는다. 누군가가 천국 문에는 ‘단체 입장 환영’이라는 문패가 달려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신자들 중, 혹자는 혼자서만 열심히 기도하고, 혼자서만 좋은 말을 많이 하다가 하늘나라로 쑥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만 열심히 살다가 천국에 가면 그만이지 가족이고, 이웃이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천국은 개인주의자들이 가는 곳이기 보다는 함께 가는 곳이다. 주님은 함께 오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대부분은 공동체 앞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둘씩 파견하셨다.(루가 10,1) 둘이나 셋이 모여서 기도하면, 항상 거기에 내가 있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마태 18,20)




오늘 복음은 안식일 다음날 예수께서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벌벌 떨고 있는 곳에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공동체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승 다음으로, 자기들이 잡혀 갈 것이는 생각을 했었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 자리엔 토마가 없었다. 고독을 씹으며 홀로 있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설사가 심해서 집에서 쉬었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어쩠거나 그는 공동체와 함께 있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기가 차서 고지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 본 다음에 믿겠다고 말했다, 고집은 세었던가 보다.


8일 뒤 토마와 함께 제자들이 한방에 모여있을 때 예수께서 또 나타나셨다. 토마는 무안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네 손으로 만져보고 믿어라” 말씀하셨다,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며 신앙을 고백하였다. 토마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였다. 예수님은 토마의 집에 찾아가셔서 만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기를 바라셨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면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고 활동해야 한다. 즉 신자로서 단체에 가입하여 공동체로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따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우리 사회는 날로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의 발달로 암으로의 세계는 작은 나만의 공간을 즐기려는 경향이 더욱 팽배하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서 가족 공동체는 파괴되고, 교회 공동체 역시 와해될 수 있는 공산이 크다.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한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살게 마련이다. 청소하시는 분이 있어야 살 수 있고, 버스 기사님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욱이 크리스천들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천하에 모범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름답게 보존되기 위해서는 대접받기보다는 대접하려는 마음을 서로 가져야 한다. 특히 본당공동체 안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화장실 청소를 마다하지 않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손가락 끝을 튕기면서 남에게 명령하기만 좋아하고, 남에게 박수 받기만 좋아할 때, 그 공동체의 앞날은 밝지 않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께서 하나의 몸을 이루신 하느님은 공동체의 표본이시다. 사랑자체이시기에 하나의 몸이 되신 하느님을 우리 본당이, 혹은 우리 가정이 본받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계셔주실 것이다.












38.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공통)  사도들의 부활 선포와 성령 체험




부활절이 되면 생각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전에 사목했던 성당에서 늘 봉성체를 모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부활절을 몇 일 앞둔 날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처럼 부활을 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나요?」 그때 나는 십년 넘게 허리병을 앓으신 그 할머니를 바라보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고통 중에서도 마치 어린이처럼 환히 웃으셨다. 그분은 그 날 내가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부활절이 되면 어린이같이 순수한 믿음을 지니셨던 그 할머니의 미소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은 바로 그 할머니의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문을 닫고 모여있었다. 유다인들의 박해가 두려워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시면서 인사를 하셨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몸이 더 이상 물질 세계의 속박에 있지 않은 영적인 몸이라는 것이다(필립 15,44). 예수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혹시 유령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님은 당신의 옆구리와 손을 보여주신다. 양손과 옆구리에는 구멍의 흔적이 있었다. 얼마 전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 받으신 상처자국인 것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유령이나 환시가 아닌 실제적인 몸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죽으셨던 스승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의 기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의 강력한 체험은 당연히 기쁜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전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의 삶이었다. 이제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부활 사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증언은 참되고 믿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으로 전 생애를 통해 주님의 부활, 즉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엔 토마스 사도가 없었다. 후에 이 소식을 접한 토마스는 부활을 부인하며 펄쩍 쥐었다.「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 내 손으로 못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며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때 비로소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알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결코 토마스를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의 불신앙을 애태우시면서 의혹을 풀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부모님이 아직 철이 덜 든 자녀를 대하는 마음과도 같이 사랑과 자비가 듬뿍 담겨있었다.


 


우리는 보통 보고, 듣고, 만지는 등 감각을 통해 사건과 사물을 접하게 된다. 특히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보는 것을 가장 확실한 증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부정확한 때가 많다. 보는 시각 능력만 하더라도 인간의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우리는 세상의 것을 다 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부활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사실이다. 부활을 증언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을 증언했다. 물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그 성령이다. 성령께서 부활을 선포하게 하고 부활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役事)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도 쉽게 믿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겸손되이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도 그 옛날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성령을 다시 내려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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