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11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11주일






         15. 김수환 추기경(다)/26             16. 윤임규 신부(다)/27


         17. 조순창 신부(다)/28               18. 김몽은 신부(다)/30


15    연중 제11주일  루가 7,36-8,3 (다) 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한 것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여성연합회 여러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후 선교 3세기를 맞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원과 그 역할을 새롭게 점검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 고유의 소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발 맞추어 여성 연합회가 활성화를 위해 본당 중심으로 기구를 개편하는 한편 여성의 평신도 사도직을 모색, 정립하며 향방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여성 연합회의 회보를 발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류 역사상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여성의 역학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신약 초기에는 깊은 사랑과 믿음과 용기로써 언제나 주님 가까이 머물면서 사도들이 다 도망간 십자가 밑에까지 남아 주님의 고통을 함께 한 사람들도 대부분이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박해시대에 여성들이 보여준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은 이 땅의 복음화에 귀한 밀알(요한 12,24)이 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뿐더러 지난 해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여성들의 희생과 봉사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성들은 교회 안팎에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며 견고한 신앙으로 평화가 깃든 새 땅(베드 3,13)이 오도록 거들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이바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와 교회의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는 갖가지 비인간화 현상이 만연해 있어 사랑이 더욱 메말라 가는 듯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진정한 인격체로 존중받기보다는 한낱 도구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근로자들, 안내양들, 가정부들, 그밖에도 많은 여성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인간화를 위해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필립 2,5)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야고 2,17)을 형제들에게 잘 보여 줄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고 소외 받고 고통받는 형제들 안에서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함께 고통을 나눔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속에 하나 되어 여러분이 받은 능력과 은총을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새롭게 변화되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여러분의 사랑과 봉사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꽃 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의 원천과 향방을 찾고 그에 따라 살므로써 여성 연합회가 평신도 사도직을 원만히 수행하고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이웃에게 주님을 보여주고 주님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6             연중 제11주일  루가 7,36-8,3 (다) 참회


                                                     윤임규 신부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과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장성하여 돈벌이하러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나중에 유명한 도둑의 부하가 되려고 소굴에 찾아갔습니다. 도둑의 두목은 부하가 될 그 청년의 심정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문제를 하나 던집니다. “너 정말 의리 있게 우리와 동업할 생각이 있거든 지금 가서 네 어머니의 심장을 도려와라. 그러면 입당시켜 주마”하였습니다.




도둑으로서의 출세에 눈이 어두운 청년은 즉시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언덕 위에 날마다 올라가서 아들이 언제 돌아오나 기다리던 그 어머니는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을 보고 아주 반갑게 신발이 벗겨지고 치마가 끌리는 것도 모르도록 달려가서 안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와 마주선 아들은 다짜고짜 아무 말도 없이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꽂아 붉은 심장을 도려내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선 피가 흐르는 심장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두목에게로 갖다바칠 생각으로 냅다 달음질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서두르는 바람에, 그리고 어머니를 죽였다는 두려움 때문에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머니에 넣었던 어머니의 심장이 떨어져 굴러갔습니다. 그때 “얘야 어디 다친 데 없냐?”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죽어서까지 베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비로소 자기가 저지른 잘못과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러웠는가를 알게 됩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심장을 도려내는 이야기는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바로 우리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용돈을 충분하게 주지 않는다고 때려 숨지게 하는 사건이나, 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한다고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버리는 사건들이 신문에 자주 나타납니다. 비록 서정쇄신이라는 말로써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보려는 노력이 있지만 만성화, 체질화되다시피 한 부정부패는 고사하고라도 우리네 주변에는 죄를 짓고도 버젓이 낯두껍게 고급 승용차를 모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선 억대나 되는 고급 응접 세트를 들여야 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폐유도 수입하는 따위는 그 모두가 죄짓고도 태연한 우리네 현실을 드러내는 표본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만을 위해선 어떤 일이라도 해치우겠다는 생각이 우리마음에 도사리게 될 때 죄는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 모두 떳떳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그 죄는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성서에서 아주 소박한 참회의 장면을 봅니다. 동네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여인이 염치불구 남의 집 잔치에 불청객으로 찾아와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떨구고 긴 머리털로 씻으며 입을 맞추고 옥합을 깨뜨립니다. 정말로 우리네 사회는 이처럼 가장 죄없는 분 앞에 엎으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칠 때, 그분은 무한한 자비로 용서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17      연중 제11주일  루가 7,36-8,3 (다) 인생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다윗처럼 회개하고, 죄녀 같이 고백하며 살아가자


                                                                조순창 신부




인생이 연극이라면, 희극인가 비극인가? 각박하고 메마른 인생보다는, 부드럽고 따사롭고 정 있는 삶이 좋고, 죽고 사는 아귀다툼보다는 여유 있고 아량 있고 양보하는 삶이 좋고, 무관심과 이기적인 사회보다는 보은하고(은혜 갚고) 협동하는 삶이 좋은데, 이상과 현실은 왜 다른가요? 누구의 탓입니까? 마귀의 피가 흘러서일까요?




오늘의 제 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왕조의 전성 시대에 다윗 왕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죄를 지었습니다. 요합 장군 휘하의 장병들이 한창 전쟁 중에 있을 때에, 다윗 왕은 일선에 나가 싸우는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탐하여 정을 통하고, 끝내는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어 죽게 하고 나서는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때에 예언자 나단이, 비유를 들어 다윗 왕을 몹시 꾸짖습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가 품삯으로 얻은 암새끼양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는데, 그 부자는 자기가 기르는 소나 양도 많건마는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집에서 기르는 한 마리뿐인 새끼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 손님 대접을 했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난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나단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에게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왕으로 갖출 것을 모두 넉넉하게 주셨으나, 욕심이 한이 없어, 남의 아내를 탐하여 죄를 지었으니,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을 것입니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하며, 죄를 고백하고, 깊이 참회하여 용서받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것이 옛날의 남의 얘기입니까?


자기는 넉넉한데도 불만하고, 자기 것은 털끝 하나 꼼짝 못하게 하면서도 남의 것은 무시하여 마구 짓밟아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있다’면, 남의 얘기일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중하면 남의 것도 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죄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뭇사람에게 짓밟히고, 웃고 울다 버림받아, 상처투성이가 된 여인! 그것이 그 여인만의 죄입니까? 돈과 쾌락과 폭력의 사회 풍토가 문제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믿었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도 남을 넓으신 아량과 폭넓은 사랑을 믿었으며, 새인생의 길을 열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기 죄를 시인하고 깊이 참회하였으며,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다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새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횡포를 뉘우쳐 봉사 생활을 시작했고, 죄지은 여인은 죄를 뉘우쳐 열심히 예수를 돕는 봉헌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 메시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이사42,1d-3c)고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단의 꾸지람을 듣고 회개한 다윗처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참회하여 구원 얻은 죄인처럼, 내 죄를 인정하고 참회 고백하여 용서받고,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를 낫게 해 주시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여 화합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멋있게 삽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한 행복한 인생입니다.




18                   연중 제11주일   루가 7,36-8,3 (다)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많은 죄의 사함을 받는다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즉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루가 18:3)과, 자기 도취에 빠져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이룩한 공로(?)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환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구차한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열심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업신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죄를 짓고 저주받을 행동 속에서 살아온 여자는, 참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세상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므로써, 그녀는 주님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향유를 샀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죄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뜻에서 그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발라드릴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깊은 죄에 빠져 타락적인 생활을 해 오던 이 여인에게 주님의 음성은 생명에 찬 재생의 길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녀의 텅빈 마음을 주님의 진리가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어 그녀의 영혼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 여인은 부끄러움도 체념도 없이, 초대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에 서슴없이 들어가 주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지난 죄를 뉘우치는 한없는 눈물과, 새롭게 솟아나는 사랑의 생명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찾았으며, 주님과 더불어 영생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얼마나 교만하고 편협하고 옹졸한가?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기는 했으나, 사랑과 존경심이나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시험하는 태도에서였다. 그러기에 그는 초대한 손님에게 응당 예우해 드렸어야할 존경이나 환영의 표시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즉 발도 씻겨 드리지 않았으며 우정의 입맞춤도 없었고 잔칫상에 나가기 전에 예의 표시로서 발라 드렸어야할 향유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믿음에 익숙한 자들이 주님께 응당히 받쳐야할 예의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절하는 태도와도 같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알았으며, 예수님은 그러한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았기에, 부끄러움도 잊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눈물로써 주님의 발을 적셨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과거의 생활을 청산한다는 의미에서도 그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것마저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닫혀진 마음에 대해, 많이 빚진 자와 적게 빚진 자의 돈을 탕감해 준 인자한 주인의 예화를 들려주신다.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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