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 20 주일




        17. 김신호 신부(다)/ 26       18. 강길웅 신부(다)/ 27


        19. 강영구 신부(다)/ 29       20. 세상에 속하지 않은(다)/ 33


        21. 나는 이세상에 불을(다)/ 34 22. 나는 이세상에 불을(다)/ 35


        23. 나는 이세상에 불을(다)/ 36 24. 나는 이세상에 불을(다)/ 37




17.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갈등 사회에서도 길은 있다


                                                           김신호 신부




 사회의 질서에 대한 이론 중에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조화이론과 갈등을 기본으로 하는 갈등이론이 있다. 조화이론에 의하면 사회라는 거대 조직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네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네 가지 구조는 각각 자신의 목적과 기능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간의 영역을 침범을 하지 않고, 각 자의 영역 안에서 서로 협력함으로써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조화론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지만, 이 조화론에 입각하여 사회를 분석적으로 살펴볼 때, 얼마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나 또는 다른 나라에 구성된 사회가 반드시 이러한 기능적인 조화에 의해 질서가 생겨난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조화론은 독일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합리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의 행위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어있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중심적인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목적성을 생각하고, 목적성에 맞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상식적인 선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상식적인 영역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이렇게 조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상대방이 예견할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마련이므로, 이를 통하여 상호간의 갈등을 배제시킬 수 있고, 이로 인해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러한 조화이론과 표면상으로 정반대의 형태를 띠고 사회의 질서에 대한 원인이나 구성요소를 분석하는 것이, 바로 갈등에 기초를 둔 갈등이론이다. 갈등이론은 인간을 서로간에 욕심에 의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인간 자체를 부정적인 면으로 보아 욕심에 의한 상호간의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 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늑대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인간은 조건이 나빠지거나 또는 공통된 욕심의 대상이 있을 때, 서로간에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목적성 생각하는 인간




 이러한 갈등이론도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면으로만 분석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정서적인 면이나 또는 인간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만드는 이성의 작용 등을 생각할 때, 인간이 반드시 동물적인 욕심에만 끌려서 행동을 하는 존재로만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악한 면만을 분석할 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은 인간이 이렇게 욕심에 찬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이러한 이기적인 존재는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고, 이러한 갈등은 인간존재를 말살시킬 수 있으므로, 스스로 갈등을 서로간의 합의를 통하여 통제하고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천국 기회는 마찬가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조화론에 입각한 평화를 강조하시는 평소 때의 예수님과는 아주 다르게,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물론 오늘의 복음은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해야 된다느니, 또는 이러한 현상은 루가가 살던 시대에 이미 시작된, 신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오늘의 복음은 안락한 현실의 삶을 생의 목표로 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퉁잇돌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선택했을 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현실은, 그렇게 큰 중요성의 비중을 삭감 당하게 된다. 갈등이 있는 사회나 조화가 계속되는 사회나 나에게 천국 가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조건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8.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38,4~6.8~10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싸움을 걸어옵니다)


제2독서 에페 5,15~20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복 음 루가 12,49~53 (나는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기원 전 586년경에 유다왕 시드키야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포위를 받고 있었는데 에집트의 파라오 왕이 이에 맞서서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자 바빌론군이 일시 포위를 풀고 후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의 왕과 대신들이 손뼉을 치며 상황은 이제 끝났다고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부패와 부정이 판을 쳤으며 정치와 사회는 물론 종교까지도 속속들이 썩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대국들의 침공은 이를테면 하느님의 경고요 회초리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왕에게, 절대로 형세를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차라리 바빌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충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빌론의 위험에서 풀렸는데 퇴각한 바빌론을 쫓아가서 항복을 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그것은 바보요 미친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과 대신들이 볼 때 예레미야는 국가 반역자요 또는 국가 전복의 기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왕을 설득하여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해 깊은 구덩이에 내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끝까지 거부하던 유다는 크게 망했으며 왕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왕도 눈알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가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썩으면 스스로 망하게 되어 있고 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예언자는 실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말하자면, 독재 국가에서는 양심 있는 목소리를 싫어하며 썩은 사회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간주됩니다. 그놈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그놈들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복음과도 연결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평화를 위해 오셨으며 또 평화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평화를 뒤집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대단히 거북하고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아주 달콤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너무 쉽고 또 편안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결국 인생과 세상을 파괴시키는 거짓되고 환상적인 평화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을 구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비롯하여 자유당 독재, 군사 독재 정권시대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가 썩거나 말거나, 망하거나 말거나 자기 몸만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처신을 합니다. 아부도 하고 굴욕적인 삶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거짓 평화입니다. 언젠가 신문 보도를 보니까 깡패 두 명이 대로상에서 대낮에 흉기를 휘두르며 여인의 가방을 강탈해 가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건히 쳐다만 보고 아무도 손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남자만도 수십 명이 있었다는데, 여차하면 자기들도 다칠지 모르니까 모두가 외면하는 바람에 강도들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평화입니다.




우리가 비록 손해를 본다 해도 그가 진정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을 했으며 악과 싸우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했다면 그는 평생 떳떳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 어려운 때에 자신만의 이익과 신변의 안전만을 위해서 불의에 눈감고 악과 타협하려 했다면 그는 평생 비굴하고 떳떳지 못한 인생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평화를 알아야 하며 참 평화를 위해서 거짓 평화를 과감하게 깨뜨릴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거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셔야 했듯이 우리도 부서지고 깨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걸어간 길은 가시밭길이지만 그러나 그가 걸어간 길은 꽃길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거짓 평화를 부수고 깨뜨려서 불질러 버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참 평화를 위해 노력합시다. 썩은 평화는 모두 끄집어내어 불살라 버리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비가 쏟아져도 떠내려가지 않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참 평화를 구하도록 합시다.












19.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예언자의 소리를 들어라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0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언자 예레미야가 박해받는 이야기를 제1독서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에 활약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4킬로 정도 떨어진 아노돗에서 한 제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원전 627년경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십자가의 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 활약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풍전 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아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바빌론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이집트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고, 북쪽에는 아시리아 그리고 아시리아, 뒤에는 바빌론이 그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던 유다 왕국은 늘 나라의 운명을 염려해야 하는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다윗의 정통 왕조를 이어받고 있던 유다 왕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잃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때로는 이쪽으로 붙고, 때로는 저쪽 편이 되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의 강대국들이 섬기는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윤리 도덕의 타락과 인권 유린이 곳곳에서 자행되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런 현상은 그 사회의 말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난세에 나라를 구출하고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대변자로 소명을 받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신랄하게 현실을 비판하면서, 유다 왕실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소리에 귀를 가장 기울여야 할 제관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박해했습니다. 제관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신성 불가침한 장소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유다가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예루살렘 도성은 물론이고 성전까지도 무참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제관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하느님과 성소를 거슬러 예언을 하고, 백성들을 더욱 의기 소침하게 만든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소리는 허공의 메아리처럼 떠돌 뿐, 그 누구도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는 채찍과 같은 박해만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대변자이기에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도 그런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예레미야는 난세에서 살아 남는 길은 오직 한 가지,하느님 야훼께로 돌아가는 일과 도덕성을 회복함으로써, 나라를 정화시키는 일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눈이 먼 유다 사람들은 향락에 취해서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키야는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한답시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바빌론 왕국과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채찍이 되어서 남쪽으로 쳐 내려오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성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도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화려하게 지었던 왕궁도 파괴되었습니다. 시드키야는 도망을 치다가 사로잡혀서 두 눈알이 뽑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 왕국이 처한 위기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쩌면 그리도 흡사한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이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분단된 것처럼, 우리 나라도 북한과 남한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가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위협을 받았듯이, 우리 남북한도 남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의 사이에 끼여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가 마르둑과 바알 등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듯이, 북한은 김일성을 아버지로 섬기는 유일 사상이라는 우상 숭배에 빠져 있고, 남한은 돈과 재물과 향락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마몬 우상 숭배에 빠져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온갖 범죄와 인권 유린과 부패와 타락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유다 왕국이 그렇듯이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서 양진영이 이데올로기에 묶여서 이념 분쟁을 일삼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동구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중에 살아 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방 외교라 해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 손을 잡기 위해서 애를 쓰는 한편,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경제 대국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외교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외교 군사력과 경제력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 긴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국민들이 지금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회개하여서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위 두 金씨라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욕을 앞세워서 나라 살림살이는 뒷전에 두고, 서로 힘겨루기만 하고 있습니다.


  


정권 말기에 들어선 盧 정권은 앞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YS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치 단체장 선거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스스로 법을 어긴 것입니다. 대통령이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서 법을 어긴 것입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법을 지키지 않는데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통령이 통치권적인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므로,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웃기는 일이지요, 대통령이 법 위에 있다면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은 대통령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 국민들은 그 어떤 법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렇게 무법 천지입니다.


  


법도 없고 원칙도 없고 돈과 힘만이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 곳곳이 썩어서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지난번 정보사 땅 사기 사건을 단순한 사기 사건으로 결론지었지만, 그 사건은 우리 사회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만큼 철저히 썩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입니다. 남해 장천교가 건설된지 10년 정도인데 무너졌고, 건설 중에 있던 행주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다리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이 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한 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사건들이지요!


  


온 나라가 부정, 부패, 타락, 범죄로 가득한데 정치꾼들은 모여 앉아서,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모사(謀事)를 다 꾸미고 있습니다. 더구나 YS니 DJ니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교인들입니다. 한사람은 개신교 장로고, 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이런 꼴로 서로 싸우고 있는 가운데, 나라 살림은 더욱 엉망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일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늘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한 군사력을 가져도, 아무리 거대한 경제력을 가져도,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면,  그 강한 군사력도 경제력도 모두 물거품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내부적으로 다 썩었는데 , 그 썩고 부패한 기초 위에 서있는 군사력이 무슨 힘이 될 것이며, 그 경제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이 위기의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하늘 두려운 줄 알고 회개해야 하며, 동시에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채찍이 우리 위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이 세상을 편가름 하러오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악마의 편에 서 있는 사람, 선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악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을 분명히 편가름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언자의 외침은 여전합니다. 우리는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편에 서든지, 무시하고 악의 편에 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바로 그 선택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20.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이벽 성조의 신앙적 고뇌



  우리나라의 신앙의 전래는, 외국 선교사가 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던 중에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를 하는 등, 학문을 연구하던 선비들 중에는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어 세례를 받고 오도록 하였다.




  이들 중 ‘광암’ 이벽은 ‘죽하공’ 이부만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 가문에, 서양 오랑캐 학문을 이단아(異端兒)가 생겼다고 하여, 이들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이 누구를 만나거나 문밖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 아들이 방에서 단식하며 결심을 꺽지 않자,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벽은 할 수 없이 하느님께 대한 스스로의 믿음은 어쩔 수 없으나, 다른 사람에게 천주교를 선전하지는 않겠다고 아버지께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며 괴로워한 나머지, 결국 건강을 잃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가 바로 천주님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으신 임금님을 모른다고 배신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바꾸는 종교이다




  일찍이 ‘제3의 물결’이란 책을 쓴 앨빈 토플러는 ‘문명충돌 이론’을 말한 바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의 이 혼란은 세상종말의 징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문명이 퇴조하고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들어옴으로써 일어나는 과도기적인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교가 어떤 나라에 들어가면 항상 그 나라의 기존 문화와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을 빚었고, 그것은 곧 박해로 나타났다. 




  ‘짐(朕)이 국가다’라는 말이 있듯이, 황제나 왕이 절대권을 휘두르던 봉건체제 하에서 ‘황제나 왕도 하느님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믿는 신자들은, 임금을 우습게 보는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기 집 하인을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여 노비 신분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일 등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가 뚜렷하던 그 당시로서는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뛰어드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빛 아래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세상의 질서를 개편하는 종교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항상 박해를 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얼룩진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하고 어머니가 딸을, 딸이 어머니를 반대하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 말씀을 흔히


‘칼의 복음’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면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안주하였다면 결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 참으로 세상에 속한, 세상에 안주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가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 낳고, 직장생활하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모든 희망을 세상 것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된 의미의 옳은 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과 똑같아졌기에 세상에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며,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일상의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내가 겪는 어려움과 희생이 없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안주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21.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평화를 거부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인간들의 헛된 평화를 배척하고 교란시키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정결 예식을 치를 때 시므온이 예언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셨으며 당신 때문에 여러 가정들이 분열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을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치뤄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를 한데 모으고 미움을 없애고 사람들 사이에 가로막힌 담벽을 허물어 한 백성으로 묶으시려는 데에 있었으며 성령께서 머무시는 교회의 몸체로 삼아 인류 사이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 분쟁을 야기시킨 것은 유다인들만의 평화를 전 인류적인 평화로 전환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평화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이룩하신 평화로 보았고, 루가 복음사가도 예수님께서 구원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시려고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으신 것이며 주님의 수난과 부활로 예수님의 평화가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희생의 결실이며 세상을 이기신 당신의 승리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또한 이 평화는 성령께서 오시어 불의 세례로 교회 공동체를 단합시키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갈등과 분쟁을 통해 이룩된 평화이며,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확립된 평화입니다. 승리자이신 주님의 부활로 인간의 평화는 주님의 평화 안에 흡수된 것입니다.












22.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은 구원을 가져오는 진리의 불빛이요 사랑의 빛이며 자비의 불빛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하느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서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짓과 죄악 속에 빠져 사리사욕을 일삼는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악한 행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진리의 빛을 피하려고 하며 때로는 사랑과 자비의 빛을 무조건 싫어하면서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불꽂을 놓으시기 위해 오셨고 끝없이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그 희생의 참뜻을 우리는 받아들여 아직 진리의 불빛을 모르는 사람이나 알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불빛을 건네주어야 합니다. 이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리스도께서 지르신 진리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빛은 세상 모든 사람이 열망하는 구원의 불빛이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목적은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구원에 방해가 되는 불순물은 불에 태워서 순수한 진리의 불안에 하나되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당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십자가상에서 처참히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아니했다면 우리의 믿음도 교회의 가르침도 헛된 것이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부활로써 온 세상에 지르신 불이 구원과 사랑과 평화와 기쁨의 불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르신 이 사랑의 불을 우리 이웃에 건네 줌으로써 죄악과 어두움과 죽음의 생활에서 깨어 은총과 광명의 새 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23.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우리는 흔히 평화의 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의 자비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우리에게 분열을 일으키기 위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이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님 우리도 당신처럼 일치가 있는 곳에 분열을 주는 자 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잠잠한 곳에 풍파를 일으키는 자세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아직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 쉽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회사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와 한 마을에 모여서 오손도손 살아가던 어느날 갑자기 눈이 열리고 참 천주, 참 진리를 깨달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루아침에 정든 마을을 떠나고 죽음의 포승을 피해서 이 산골 저 산골로 치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는 분열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바로 새로운 일치를 향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성서 한 권을 달랑 지게 다리에 묶어 가지고 정든 가족들과 헤어진 선조들은 바로 그 분열의 아픔을 딛고 이제 200여년이 지난 이 시간에 이러한 일치의 공동체를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분열의 아픔을 겪은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이렇게 이야기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리라고 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런 주저도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난 그 사건과 비유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응답은 바로 다른 이들에게 반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도, 명예도, 부도, 그리고 자기의 갈 길에 반대하는 가족들까지도 떠나서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세계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굶주림과 추위가 닥칠 때 아마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로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은 우리의 나태와 무관심을 태워주는 불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이제 영원히 꺼지지 않고 영원하게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 불은 여기 성체등에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우리의 열정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에게 닥치는 직접적인 분열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자칫 그 분열이 생길지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질러주신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매사를 그분께 향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될 때 예수님이 일으키신 평지풍파는 여러 곳으로 퍼져서 새로운 일치를 만들며 그 일치가 이 땅에 완성될 때 하느님의 나라가 구현될 것입니다.  아멘.












24.     연중   제20주일   루가 12,49-53 (다)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믿음의 실천이 곧 역설의 진리이며, 모순과 반대의 징표임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예언자의 삶이 그러했듯이 예레미아와 그리스도의 생애는 진실을 외쳤기 때문에 고난의 외길을 걸어야 했고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반대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과 같이 예언자의 외침과 예수의 말씀은 귀에 달갑지 않고 어떤 때는 거부감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과 완성을 위한 필연적 과정입니다.




그래서 먼저 제2독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 예언자, 선열들의 모범적인 삶을 상기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든지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살 것을 간곡히 당부하며 꾸준한 노력과 끊임없는 반복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예수는 참으로 믿음의 근원이며 모범, 그리고 길잡이인 것을 상기시킵니다. 철저한 신념과 투신의 자세를 지닌 예수는 크리스천 실존의 근거이며 기초가 됩니다. 그 또한 인간적 고뇌와 한계 속에서, 십자가의 형틀 앞에서 아픔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꼈지만 더 큰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신 예수의 삶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안겨줍니다. 억울한 죽음,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있습니까? 예수는 이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서간의 저자는 예수의 인간적 고통을 상기하면서 우리 각자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지금 숨쉬고 살고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 말했듯이 살아있는 자체가 은총이며 희망의 구체적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루가복음은 예수의 거북한 가르침입니다. 분명 기쁨과 일치,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이시나, 그분을 불을 지르러 오셨고 우리를 분열시키러 오셨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의 모순된 가르침입니다.




불은 심판의 상징이며 벌과 정화를 가르킵니다. 그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결정적 과업을 암시한 표현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웁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구원의 정열, 정의의 실천을 다짐한 예수의 투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그 불은 곧 예수가 당할 죽음,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가치의 실현을 뜻합니다.




그 불은 고난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승리, 곧 세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세례란 과거와 미래, 악과 선, 죽음과 삶, 현재와 영원을 판가름하는 분명한 구분의 기준이며 척도입니다. 세례의 주인공인 예수는 시므온 예언자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 있어서 걸려 넘어지는 징표입니다. 당시 로마의 정치권에서, 그리스의 문화권에서, 유다의 종교권에서, 예수와 그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죽음이며, 분열이고 걸려 넘어지는 징표였습니다. 예수를 택한다는 것은참으로 모험이며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를 선택할 때 전통사회로 부터 결별되어야 하며 때로는 부모와 형제, 자녀들간에도 마찰과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회적 가정적인 마찰과 분열이 생긴다 하더라고 예수의 가치만을 선택하며 그것을 기초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예수에 대한 철저한 추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시대의 뜻을 깨달으라 강조하십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토 중에 하나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 그것은 혼미한 현실 속에서 분명히 하나의 옳은 가치를 목숨을 걸면서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요사이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사회적인 여러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표징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 모두는 모두 복음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진실한 결단과 선책을 내리고 있는지 우리는 자못 의심스럽고 그래서 같은 교우로서 우리는 부끄럽고 시대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나름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의 탈이 올바른 실천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온갖 허위, 부정, 기만, 추함, 비겁, 거짓을 말끔히 예수의 불로 태워버립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옳고 진실된 것을 세웁시다.




하느님, 진리를 위한 시대의 표적이 과연 무슨 뜻인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십자가가 어째서 걸려 넘어지는 징표인지 알아듣게 하여주십시오.


거짓 일치와 화평을 거부하고 진실과 양심의 기초 위에 새 삶을 이룩하고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이 글은 카테고리: 복음 나눔 8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